소설리스트

66화 (66/90)

‘세양 그룹’ 회장실 안.

‘삐-’

-회장님, 강태준 대표님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곧이어 태준이 회장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바빠도 시간을 내서 잠깐 들르라는 문규의 말에 오후 일정을 끝내고 찾아온 태준이었다.

“앉아라.”

어딘가 다른 문규의 모습을 눈치챈 태준이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얼마 뒤, 소파 테이블 위에 두 잔의 차를 내려놓은 비서가 꾸벅 인사를 하고 회장실을 나갔다.

잠시 말없이 차를 마시던 문규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요즘 몸은 좀 어떠냐.”

“괜찮습니다.”

태준이 과로로 쓰러지고 난 후 문규는 엄청난 양의 한약을 태준의 집으로 보냈다.

그 뒤로도 몸에 좋다는 온갖 것들을 가사도우미 편에 챙겨 태준의 냉장고에 가득 채워 두었다.

문규가 하도 성화를 해 종합검진까지 받았던 태준이었다.

“태준아.”

“예.”

문규가 한껏 가라앉은 분위기를 풍기며 태준을 바라보았다.

“할애비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나한테 너는 정열이만큼이나 아픈 손가락이다.”

무슨 얘기를 꺼내려고 이러나 싶어 태준이 가늘어진 눈으로 문규를 쳐다보았다.

“네가 어린 나이에 어미를 잃게 만든 것도, 내 욕심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거, 잘 안다.”

“…….”

“그때 내가 두 사람을 반대하지만 않았어도…….”

잠시 말을 멈췄던 문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난, 태준이 네가 어떤 여자를 데려와도 찬성할 생각이었다.”

과거형으로 얘기하는 문규의 말에 태준의 눈썹이 휘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문규가 걱정이 가득 묻어난 표정으로 태준을 응시했다.

“그 여자, 그만 포기하거라.”

“……!”

반대할 생각이 없다던 문규가 갑자기 가을을 포기하라고 하자 태준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대하지 않는다고 하셨잖습니까.”

“그 여자만 아니면 반대하지 않으마.”

“할아버지.”

“일전에 한 약속대로 네가 언제 결혼을 할지는 상관하지 않으마.”

몇 달 전 1년 안에 결혼을 하라며 태준을 찾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태준이 회장실로 찾아왔었다.

자신에게 한 약속을 문서화해 달라는 태준의 말에 결혼 시기와 상관없이 약속한 대로 ‘STN’ 주가를 성공궤도에 올리면 후계를 물려준다는 문서를 작성했었다.

추후 이 사안을 번복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는 조항까지 넣은 문서였다.

문규가 소파 테이블 위에 있는 인터폰을 눌렀다.

“김 변호사 들어오라고 하지.”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바로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김 변호사가 인사를 건넨 후 소파 테이블 위에 밀봉된 서류 봉투를 내려놓았다.

“새로 작성한 유언장이다.”

“……!!”

“내가 번복하지 않겠다고 한 건 네 결혼 시기에 관련해서였을 뿐이야.”

“할아버지!”

“네가 가을 양을 포기해야 후계를 물려줄 생각이다.”

태준이 유언장을 보던 시선을 올려 문규를 빤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마음에 들진 않아도 가을을 반대할 생각은 없다는 뜻을 비치던 문규가 갑자기 이런 식으로 반대를 하고 나오자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전에 얘기했듯 그 여자 가정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가을과 엮이면 혹시라도 태준이 잃었던 기억을 찾을까 봐 우려된다는 얘기를 꺼낼 수는 없어 문규가 가장 그럴 법한 이유를 댔다.

“정말, 그 이유 때문이라고요.”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가을의 가정사를 알게 된 후 바로 반대를 했어야 했다.

정열과 애란의 사이를 반대한 걸 후회하면서도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이유가 석연치 않았다.

“지금이야 그 여자한테 빠져서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할애비가 왜 그랬는지 알게 될 게다.”

“…….”

“세상에 여자는 많아.”

“…….”

“허나 ‘세양 그룹’ 후계 자리는 하나뿐이다.”

태준이 아무런 말 없이 유언장을 바라보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자신의 삶에는 ‘세양 그룹’ 후계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가을과 후계를 동일 선상에 놓고 있었다.

아니, 이미 마음은 가을을 원했다.

“포기하겠습니다.”

태준의 말에 문규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 잘 생각,”

“후계는. 할아버지 뜻대로 하세요.”

“태준아!”

“전, 가을 씨면 충분합니다.”

한 치의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는 태준의 목소리에 문규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졌다.

“널 ‘STN’ 대표 자리에서 해임해도 말이냐.”

문규와 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얽혀들었다.

가을과 진짜 연애를 하는 지금, 문규에게 가을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를 얘기해도 되었다.

대를 중요시하는 문규니 가을 외에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렇게 반대할 리가 없었다.

자신의 증상을 얘기했는데도 문규가 가을을 반대한다면 모든 걸 내려놓을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결혼을 반대할 생각이 없던 문규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대체 뭔지.

왜 갑자기 가을을 반대하는 건지, 의문이 생겼다.

“할아버지 뜻에 따르겠습니다.”

“태준아!”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대체 그 여자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

“그 여자 때문에, 제가 웃어요.”

“…….”

“살아가는 게 행복해요, 할아버지.”

한 번도 제대로 된 웃음을 짓지 않던 태준이 가을 앞에서는 어떤 표정을 하는지 알고 있는 문규였다.

하지만 그런 가을 때문에 태준의 기억이 되살아날까 봐 불안했다.

이 정도로 밀어붙이면 야망이 있는 태준이 가을을 포기할 거라 생각했다.

“후우…….”

문규의 입에서 진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한번 결정하면 번복하지 않는 태준의 성격상, 빈손이 되어도 가을을 포기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행여 이럴 경우를 대비해 문규가 생각해 둔 얘기를 꺼내려 할 때였다.

“혹시라도 가을 씨에게 어떤 해를 가하실 생각이라면, 하지 마세요.”

태준이 문규의 속을 꿰뚫었다.

태준이 모든 걸 포기하겠다고 할 경우, 가을이 다시는 일을 할 수 없게 만들겠다는 협박을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까지 하시면.”

태준이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 절 보지 못하실 겁니다.”

“……!”

문규의 눈빛이 형형해졌다.

“집안과, 인연을 끊겠단 말이냐.”

어떤 일이 있어도 가을을 포기할 의사가 없음을 밝힌 태준이 문규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그만 가 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한 태준이 대표실을 나갔다.

문규가 큰 한숨을 내쉬며 소파 등받이에 털썩 몸을 기댔다.

“후우…….”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보던 문규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얼마 전 김 변호사를 불러 거짓으로 만들어 둔 유언장이었다.

태준을 회유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었을 뿐 후계는 그대로 태준에게 물려줄 생각이었다.

후계 자리를 향한 야망이 넘쳤던 태준을 이렇게까지 만든 가을이 어떤 면에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10년 동안 태준은 기억을 찾지 못했다.

가을을 만난다고 해도 그때의 기억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문규는 자꾸만 불안감이 몰려왔다.

그날 저녁.

‘STN’에 볼일이 있어 한참이나 방송국에 머물렀던 가을은 주차장에서 남모르게 기다리고 있던 태준과 함께 차를 타고 산장 빌라에 도착했다.

가을은 차를 타고 오는 내내 곧 시작될 첫 촬영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떠 한참이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기대만큼이나 부담감도 커 며칠째 잠을 설쳤던 터라, 이내 저도 모르게 잠에 들었다.

‘탈칵.’

안전벨트를 풀어낸 태준이 곤하게 잠든 가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을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라면 문규가 자신의 이상 증상을 알게 되더라도 후계 자리는 보장할 수 없었다.

얼마 전 명석이 자신이 농사를 지어도 곁을 지키겠다고 하던 말이 떠올라 태준이 슬쩍 미소 지었다.

가을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하는 건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세양 그룹’을 차지하려 했던 자신의 목적은 이뤄야 했다.

이제야 슬슬 안정을 찾아가는 ‘STN’이었다.

후계 자리는 몰라도 문규가 당장 ‘STN’ 대표 자리에서 해임시키지 못할 것이란 사실은 확실했다.

그 안에 어떻게든 미연과 찬영을 확실히 처리해야 했다.

“으응.”

뒤척이던 가을이 눈을 떠 한껏 잠긴 목소리를 냈다.

“다 왔어요?”

태준이 미소 지으며 가을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졸리면 더 자요. 내가 가을 씨 안고 집 안까지 데려다줄게요.”

눈을 뜨자마자 속살거리는 태준의 목소리에 부끄러움이 몰려와 가을이 괜히 제 눈을 비볐다.

“비밀번호 바꿨는데…….”

“괜찮아요. 우리 집으로 갈 거니까.”

가볍게 눈을 흘기며 안전벨트를 푸는 모습을 바라보던 태준이 가을의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두 사람의 마음이 같다면 말이다. 힘들 땐 손을 놓는 게 아니라 더 꽉 잡아 주는 거다.]

“우리 이 손…….”

“…….”

“놓지 말아요.”

가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놓지 않을게요.”

가을의 손을 좀 더 힘껏 잡던 태준이 그대로 가을을 품에 안았다.

“알죠.”

태준이 가을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내가 가을 씨, 많이 좋아하는 거.”

터질 것 같은 마음을 누르며 가을이 작은 목소리를 냈다.

“네…….”

평소와 다른 태준의 분위기에 힘든 일이 많았나 싶어 가을이 태준의 품에 한껏 밀착한 채 얼굴을 비볐다.

그 탓에 가을의 목덜미에 닿아 있던 태준의 숨소리가 멈췄다.

“…….”

숨을 몰아쉬듯 더운 숨이 가을의 목덜미에 길게 닿았다.

들썩이는 숨소리와 함께 고개를 올린 태준이 가을의 귓불을 느리게 핥았다.

“읏.”

귓불을 얕게 베어 물고 핥으며 지분거리다 태준이 가을의 목선을 따라 천천히 입을 맞추며 내려갔다.

뜨거운 태준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자꾸만 아랫배에 뻐근한 열기가 올라 가을의 몸이 파르르 떨려 왔다.

쇄골에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뜨거워진 태준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다.

“하…….”

태준의 목소리가 탁해졌다.

“……미치겠네.”

틈이 날 때마다 가을을 안고 싶은 욕망이 차올라 태준이 불규칙한 숨소리를 냈다.

고개를 올려 열기에 붉어진 가을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보던 태준이 다시 가을을 품에 안았다.

“……우리 집에 갈까요.”

들끓는 마음을 눌러 낸 듯한 태준의 목소리에 가을의 심장이 더 요란해졌다.

“……대표님…… 집이요?”

“가을 씨 집도 좋고.”

태준의 목소리가 더 깊게 갈라졌다.

“같이 있고 싶어서.”

“…….”

“이렇게 안고만 있을게요.”

믿어지지 않는 얘기였지만 가을이 속는 척 한껏 작은 목소리를 냈다.

“……그, 그럼 일단 집에 갔다가 제가…… 대표님 집으로…… 갈게요.”

가을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자신의 집에 태준과 함께 있다는 생각만 해도 심장이 폭발할 것 같아 고른 선택지였다.

가뜩이나 눈만 뜨면 태준이 떠올라 일상에 무리가 있을 지경이었다.

지금도 그런 상태인데 자신의 집에 태준과 함께 있다간 집에서 보는 모든 것들이 그의 생각으로 뒤덮일 게 뻔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두 사람의 심장 소리가 좁은 차 안을 울렸다.

“얼른…… 올라갈까요?”

얼마 뒤.

잠든 가을을 품에 안은 태준이 깊은 한숨을 흘렸다.

“후우…….”

잠시 급한 업무를 처리하는 사이 샤워를 마치고 502호로 온 가을이 태준을 기다리다 소파에 앉은 채 잠이 들었다.

너무 곤하게 잠이 들어 가을을 안아 침대에 눕힌 후 품에 안고만 있는 상태였다.

차 안에서 한 말이 그대로 실현되자 태준의 입에서 한숨만 나왔다.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가을이 자꾸만 품을 파고들 때마다 몸 어딘가가 끊임없이 반응하며 저릿해졌지만 잠든 가을을 깨우면 안 된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그렇게 쉽게 잠이 들지 못하고 무드등 아래 음영이 진 가을의 얼굴만 바라보던 태준이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사방이 막힌 넓은 공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는 소름 끼치는 느낌.

지난밤에 꾼 악몽이 되풀이되었다.

‘철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으으…….”

그 느낌이 너무 소름이 끼쳐 태준이 신음 소리를 내며 몸부림쳤다.

눈을 감고 있는 태준의 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태준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대표님! 대표님!”

가을의 목소리에 태준이 번쩍 눈을 떴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쉬던 태준이 침대에 앉아 자신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는 가을을 당겨 안았다.

쉽게 진정이 되지 않는지 태준이 한참이나 가을을 품에 안은 후 놓아주었다.

“괜찮으세요……?”

태준의 목소리가 깊게 잠겨 탁해졌다.

“괜찮아요.”

가을이 태준의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새벽에 잠에서 깬 가을이 몸을 움찔거리며 식은땀을 흘리는 태준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해 몸을 흔들어 깨운 참이었다.

“안 좋은 꿈…… 꾸셨어요?”

똑같이 되풀이된 꿈. 단순히 꿈이라고 하기엔 똑같은 패턴으로 되풀이되는 꿈이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그 목소리.

정전이 됐던 날 들었던 소름 끼쳤던 여자의 목소리와 같았다.

가을에게 괜찮다고 미소 지어 주었지만 태준은 어딘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 * *

태준의 차가 도담 경찰서로 향했다.

가을과 사귀기 시작하고 시작된 알 수 없는 꿈. 꿈이라기엔 어딘가 선명한 느낌이었다.

교통사고에 관한 내용을 출력해 놓은 진료기록과 보험사 기록을 다시 읽어 봐도 꿈과 연결될 만한 부분은 없었다.

당시 교통사고가 경찰서에는 접수되지 않아 사고 경위는 보험사를 통해 알아보았었다.

운전자는 남자였고, 동승자는 없었다. 처음 알아봤을 때 이상한 점이 없던 부분이 갑자기 생겼을 리가 없었다.

혹시 싶어 MRI와 뇌전도 검사까지 해 보았지만 아무런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

검사를 마치고 병원에서 나오다가 문득 자신을 알아보는 듯했던 박 형사의 눈빛이 다시 떠올랐다.

그렇게 실종자를 찾는 특별 기획에 대한 자문을 구한다는 이유로 박 형사와 약속을 잡고 도담 경찰서로 향하는 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담 경찰서 강력 3반 앞에 도착한 태준이 문손잡이를 잡자 누군가 태준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박건영 형사님, 안에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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