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을 물끄러미 보던 가을이 뭐라고 대답하려 할 때였다.
“잠깐, 얘기하지 말아요.”
“아니, 할게.”
조금 전 태준과 사귀는 얘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가을이 결정을 내린 후 단호하게 서준을 바라보았다.
“네 말대로 난, 강태준 대표님 좋아해.”
“……!”
자신에게는 철벽인 가을이 태준에게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아 서준은 혹시 싶었다.
거기다 워크숍에서 태준을 보던 가을이 시선을 되돌리는 걸 몇 번이나 목격했다.
도식에게 잡히기 전 내내 가을만 바라보고 있던 서준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설마, 두 사람 사귀는 거예요?”
“…….”
“……아무도 사귀고 싶지 않다더니.”
“……미안.”
서준이 몸을 숙여 얼굴을 감싸 쥐었다.
“후우…… 술 오르네.”
가을이 미안함이 잔뜩 밴 얼굴로 말없이 서준을 바라보았다.
서준이 얼굴을 감싼 채 작은 목소리를 냈다.
“어쩐지 내내 초조하다 했어.”
“…….”
“원래는 촬영 다 끝내고 고백할 생각이었어요.”
서준이 상체를 일으켜 가을을 돌아보았다.
“촬영 전에 내가 이러면 선배가 곤란할 테니까. 촬영할 때도 껄끄러울 거고. 당연히 그런 부분들이 드라마에 영향을 미칠 거고. 나도 이 일엔 진심이니까.”
“…….”
“근데 기다릴 여유가 없더라고. 강태준 대표 때문에.”
차가운 바람에 머리를 쓸어넘긴 서준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조바심이 났는데. 역시 이렇게 되네.”
“……미안해.”
“선배가 미안할 일은 아니죠. 걱정 말아요. 내 마음, 내가 꺼트릴 테니까.”
가을이 미안함이 잔뜩 묻어난 표정으로 서준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포기한다는데 고맙다는 얘기 듣는 거, 기분 별로네.”
서준이 피식 웃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거 같던데 비밀 연애예요?”
“응.”
거절한 것도 미안한데 비밀을 지켜 달라는 말을 하는 게 어려워 망설이고 있던 가을이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게 된 후 포기하는 마음이 얼마나 힘든 건지 알게 돼 전과 달리 서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알겠어요. 비밀 지켜 줄게요.”
서준이 애써 미소 지었다.
가을을 향한 마음은 활활 타오르다 못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릿할 정도로 제어가 힘든 상태였다.
꺼트린다고 쉽게 꺼질 불이 아니었다.
그렇게 쉽게 될 일이었으면 가을에게 한눈에 반했던 그 시절, 1년이나 가을을 쫓아다니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때보다 가을을 향한 마음이 더 커진 지금, 타오르는 마음이 자신을 얼마만큼 괴롭히다 꺼질지 알 수 없었다.
“쌀쌀하네.”
아픈 마음을 감춘 서준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을을 내려다보았다.
“먼저 들어갑니다.”
“잠깐만, 옷은.”
서준이 고깃집으로 향하며 목소리를 냈다.
“이따 줘요.”
그대로 고깃집 안으로 들어가는 서준을 보던 가을이 얕게 고개를 털어 냈다.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서준이 자신에 대한 마음을 접지 않은 이상 괜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보다 사실을 얘기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한동안 찬 바람에 머리를 식힌 가을이 서준의 카디건을 벗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세양 그룹’ 회장실 안.
문규가 책상에 앉아 권 집사의 보고를 전해 들었다.
“누구라고?”
“10년 전, 실종되었던 박선호라는 사람입니다.”
얼마 전 태준이 가을과 함께 ‘도담 경찰서’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문규가 가을이 종종 경찰서를 간다는 보고를 기억하고 권 집사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더 자세히 조사를 해 오라고 시켜 두었다.
“동네에서 친하게 알고 자라 아직까지 박선호를 기다리면서 지낸다고 합니다.”
“으음.”
권 집사가 한층 낮은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평소답지 않게 권 집사가 문규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얘긴데 그러는 게야.”
“박선호가 도련님 사건이 있던 시기에 실종되었던 학생입니다.”
“……뭐?”
확실하게 입막음을 했지만 혹시라도 태준의 사건이 수면 위로 오를까 걱정됐던 문규는 당시 실종사건으로 수사 중이던 선호의 사건을 크게 다루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 결과 ‘촉망받는 미래의 경찰 실종’, ‘용감한 시민상을 받던 영웅의 실종.’ 등등의 헤드라인을 단 뉴스가 연일 보도되며 선호의 사건이 큰 이슈가 되었다.
태준의 사건이 있던 곳과 선호가 실종된 곳은 같은 동네였다.
당시의 기억을 하지 못하는 태준이 혹시라도 가을 때문에 기억을 찾을까 싶어 문규가 불안감에 주먹을 그러쥐었다.
얼마 전, 가을을 위해 가진 걸 모두 버릴 수 있냐는 질문을 했을 때.
[그런 상황이 오면, 기꺼이 버리겠습니다.]
단호한 말투로 대답을 하고 나갔던 태준이었다.
하지만 문규는 태준이 정열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태준에게는 야망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점 역시 문규의 마음에 들었었다.
“권 집사.”
“예, 회장님.”
“김 변호사 좀 오라고 해.”
“예.”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문규가 천천히 턱을 쓸었다.
후계 자리를 찬영에게 물려 줄 리 없다고 생각한 태준이, 버리겠다는 대답을 쉽게 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후계 자리를 두고 협박을 해서라도, 태준이 가을을 포기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 시각.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STN’ 대표실에서 간단한 업무를 본 태준이 일을 끝낸 후 도서관 주차장에서 가을을 기다렸다.
오늘 입국해 회사에 들러야 한다는 태준의 말에 가을은 ‘STN’ 근처 도서관에서 그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렇게 주차장으로 오라는 태준의 문자를 받자마자 그녀는 단걸음에 밑으로 내려왔다.
가을이 오는 걸 발견한 태준이 차 창문을 열어 팔을 올린 채 살짝 얼굴을 내밀었다.
그 모습에 심장이 두근거리면서도 어쩐지 귀여워 가을이 환하게 웃어 주곤 보조석에 올랐다.
가을이 보조석에 앉자마자 태준이 그녀를 당겨 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태준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맞닿은 가슴에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저도요.”
태준이 가을을 안은 채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별일 없었어요?”
“네. 대표님은요?”
“가을 씨 보고 싶었던 것만 빼곤, 괜찮았어요.”
태준의 체취가 좋아서 가을이 그의 품에 좀 더 얼굴을 묻었다.
“대표님한테는 항상 좋은 향기가 나요.”
“음? 어떤 향기?”
“그냥…… 좋은 향기.”
가을이 얼굴을 묻은 채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을 씨한테도 나요.”
“어? 어떤 거요??”
“잘은 모르지만 아기 파우더 같은?”
“아아, 그거 마트에서 파는 오천 원짜리 베이비로션이에요.”
“하하. 가을 씨다워서 좋네.”
가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흩트린 태준이 품에서 가을을 놓아주었다.
“저녁 먹긴 좀 이르고. 뭐 할까요, 우리.”
“피곤하지 않으세요?”
“전혀.”
“그러다가 또 쓰러지시면 어떻게 해요.”
“비행기에서 많이 쉬었어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안전벨트를 맨 태준이 가을의 작은 크로스 백을 바라보았다.
“도서관에서 자료 찾는다더니 못 찾았나?”
가방에 들어갈 리는 없고, 손에 든 것도 없었다.
“그게 찾기가 꽤 어렵더라고요. 오래전에 절판된 책이거든요.”
“제목이 뭔데요.”
“‘우리들의 낙원으로’라는 꽤 오래된 독립영환데 그 영화 대본집이 소량으로 판매됐었거든요.”
“우리들의 낙원으로? 박옥현 감독님 작품?”
“어? 아세요?”
태준이 핸들에 느슨히 팔을 올리고 가을을 바라보았다.
“구해 주면, 뭐 해 줄래요.”
“구할 수 있어요??”
“그럴 것 같은데.”
“그럼 오늘 저녁 사 드릴게요!”
태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음…….”
가을이 태준에게 필요한 게 뭐가 있나 열심히 생각했다.
그런 가을을 미소를 띤 채 보던 태준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톡톡 쳤다.
무슨 뜻인가 싶어 잠시 멍하니 태준을 보던 가을이 이내 의미를 알아차리고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아니 그, 그건 좀…….”
가을이 귀까지 빨개져 눈을 깜빡이자 태준이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 제 볼을 가을이 있는 쪽으로 더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얼른.”
태준이 다시 자신의 볼을 톡톡 쳤다.
살짝 고개를 기울여 한쪽 뺨을 내밀고 있는 태준의 모습을 가을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잡티 하나 없는 뽀얀 피부에 긴 속눈썹, 그 아래로 오뚝한 콧대, 남들보다 짙은 붉은빛이 도는 매력적인 입술.
손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달싹이던 가을이 조심스럽게 태준의 볼을 향해 입술을 가져갔다.
그저 볼에 입을 맞추려는 것뿐인데 온몸의 감각이 아찔해졌다.
가을의 입술이 태준의 볼에 닿으려는 순간, 태준이 그대로 얼굴을 돌렸다.
그 탓에 가을의 입술은 태준의 볼이 아닌 입술에 닿았다.
‘쪽-’
가볍게 뽀뽀를 한 태준이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짓자 가뜩이나 긴장했던 가을의 얼굴이 더 홧홧해졌다.
“미안. 달콤한 냄새가 나서요.”
가을이 바른 ‘복숭아에 빠진 딸기’ 립글로스가 태준의 입술에 묻어났다.
“그, 저기, 대표님 입술에…….”
“음?”
가을이 입술에 묻어난 립글로스를 닦으라는 시늉을 하자 태준이 오히려 입술을 우물거렸다.
“덕분에 나도 좋은 냄새가 나겠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태준의 행동에 가을의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그러고 보면 대표님 진짜…….”
“진짜 뭐요?”
“진짜…… 애정 표현 같은 거…… 좋아하시는 줄 몰랐어요.”
“그러게. 나도 몰랐네.”
매력적인 미소를 짓던 태준이 이내 시동을 걸었다.
“책은 진짜 구할 수 있는 거예요?”
“당장 구해 줄게요.”
“당장이요??”
‘삐빅-’
태준이 한남동 빌라 현관문을 열었다.
가을이 찾는 대본집을 투자 문제로 만났던 제작사 대표에게 선물 받아 한남동 서재에 보관해 둔 상태였다.
태준이 대본집만 가지고 나올까 하다 다른 것도 필요하면 빌려줄 생각으로 가을과 함께 빌라로 올라왔다.
“들어와요.”
입구부터 산장 빌라와는 다른 위압감에 가을이 잔뜩 기가 죽었다.
이런 데서 사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막상 맞닥뜨리자 어딘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현관에서부터 거실로 이어지는 공간만 해도 자신의 집 반은 될 것 같았다.
거실에서 한눈에 보이는 한강 야경에 압도된 가을이 멍하니 거실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런 데서 사는 사람이 툭하면 전기가 나가고, 전등이 나가고, 발소리, 물소리, 온갖 잔 고장과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살았다는 게 실감이 되지 않았다.
‘세양 그룹’의 손자에 ‘STN’ 방송국 대표. 좋은 차에, 좋은 가구.
하지만 태준과 함께 502호에 있던 적이 많아 어찌 보면 그런 현실적인 부분을 잊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왜요?”
태준이 멍하니 서 있는 가을에게 다가왔다.
“그냥, 뭐랄까. 현실감이 없어서요.”
“어떤 부분이?”
“502호와 너무 달라서. 대표님이 재벌이었구나. 새삼 깨닫네요.”
“다를 거 없어요.”
태준이 가을의 손을 잡았다.
“나한테 다른 건, 가을 씨가 곁에 있나, 없나. 그것뿐이니까.”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낸 태준이 가을의 손을 끌었다.
“이쪽으로 와요.”
가을이 태준과 함께 서재에 들어섰다.
“와-.”
웅장한 서재의 모습에 가을의 입에서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웬만한 도서관이라고 해도 될 만큼 깔끔하게 정리된 엄청난 양의 책들이 커다란 공간에 가득 차 있었다.
어릴 때부터 공부와 책밖에 모르던 태준다운 서재였다.
“엄청나네요.”
태준이 가을이 말한 대본집을 꺼내 건넸다.
“천천히 둘러봐요.”
“여기서 며칠 책만 읽어도 되겠어요.”
“그럴래요?”
가을이 슬며시 미소 짓고 책들을 둘러보았다.
“저녁은 나가서 먹을래요? 아니면 여기서 간단히 먹을까요.”
“대표님 편하신 대로요.”
책에 홀린 듯 가을이 깊게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잠깐 보고 있어요.”
가을이 정신없이 책을 둘러보는 사이, 가볍게 샤워를 끝내고 옷을 갈아입은 태준이 젖은 머리를 털며 서재로 돌아왔다.
나가서 먹는다고 하면 그 상태로 소파에서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오랜 비행시간 탓에 답답해 빠르게 샤워를 하고 나온 태준이었다.
“마음에 드는 거 좀 있어요?”
가을은 아예 바닥에 앉아 책을 읽는 중이었다.
“엄청이요.”
“하나씩 빌려 가요.”
“그래도 돼요?”
화색을 띠며 고개를 들었던 가을이 내추럴한 차림에 젖은 머리를 한 태준을 보고 냉큼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든지 빌려 가도 되니까 일단 뭐라도 좀 먹죠.”
“그럴까요?”
막 샤워를 끝낸 태준의 모습이 어딘가 선정적으로 보여 가을이 시선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기가 묻은 태준이 아찔할 만큼 유혹적이라 가을은 태준의 집을 벗어나기 위해 나가는 쪽을 택했다.
“이, 일단 어디 나가서,”
“나가서 먹을래요? 그럼 옷을 좀 갈아입고 올게요.”
그제야 가을은 태준이 집에서 먹으려고 샤워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편한 대로 하라고 해 놓고 태준이 또 옷을 갈아입게 할 수 없어 가을이 다시 말을 바꿨다.
“그냥 여기서 간단히 피자 같은 거 어때요?”
“피자? 그럼 명석이가 좋아하는 데서 시킬까요?”
얼마 뒤.
야경이 보이는 소파에 앉아 가을이 한 손에 든 피자를 맛있게 먹었다.
“이렇게 먹으니까 호텔 레스토랑 부럽지 않네요.”
“다음엔 더 맛있는 거 준비해 놓을게요.”
“피자면 엄청 훌륭합니다.”
가을이 웃으며 한입 베어 물었다.
“임 비서님이 좋아하실 만하네요. 진짜 맛있어요.”
“다행이네.”
“임 비서님은 자주 놀러 오시나 봐요?”
“근처 살아요.”
“아…….”
대화가 끊기자 어색해진 가을이 연신 피자를 입에 넣었다.
“요즘은 치맥이 아니라, 피맥인데.”
“피맥?”
“피자에 맥주요.”
“캔맥주 하나 있는데, 마실래요?”
“완전 좋죠~!”
태준이 냉장고에서 캔맥주 하나를 가져와 가을에게 건넸다.
“대표님은요?”
“난 가을 씨 바래다줘야죠.”
“아니에요! 버스 타도 되고, 지하철도 있고요.”
“바래다줄게요.”
피자를 기다리는 동안 태준과 함께 집 안을 둘러봤던 가을이 대수롭지 않은 농담처럼 말을 뱉었다.
“저 진짜 괜찮아요. 여차하면 게스트룸에서 자고 가면 되죠. 엄청 넓고 좋던데요.”
“그건 안 돼요.”
“아참, 누가 오면 곤란하겠구나.”
“그게 아니라.”
태준이 몸을 돌려 지그시 가을을 바라보았다.
“내가 위험해요.”
단번에 뜻을 파악하지 못하던 가을이 뒤늦게 태준이 말한 뜻을 깨닫고 어색함에 장난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왜요, 저 있어도 아무 짓도 안 한다면서요.”
“…….”
가을을 바라보는 태준의 눈빛이 단번에 바뀌었다.
“이번에는 내가.”
태준의 목소리가 깊게 내려앉았다.
“무슨 짓을 할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