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90)

의찬이 아무런 동요 없이 노트만 쳐다보았다.

“언제 적 얘길 하고 있어.”

의찬의 대답에 가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진짜? 나 그냥 떠본 건데? 언니 좋아했어요?”

“좋아했지.”

“언제요?”

“알아서 뭐 하게.”

“언젠데요.”

의찬이 묵묵히 노트만 보자 가영이 휙- 노트를 빼앗아 들었다.

“좋은 말 할 때 가져와라.”

“말하면 주지~”

“고등학교 때. 됐지?”

머리를 쓸어넘긴 의찬이 가영의 손에 든 노트를 다시 빼앗아 왔다.

가영이 전혀 동요하지 않는 의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언니한테 고백 안 했어요?”

“해야 해?”

“좋아했다면서요.”

“남녀 사이는 그런 관계만 있는 게 아니야.”

의찬이 노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그때 가을이한테 필요한 건 친구였지, 남자가 아니었거든.”

“…….”

“그래서 난, 친구가 되어 주는 걸 선택한 거고.”

“좋아하는데 그게 돼요?”

“내 마음보다 상대가 필요한 걸 해 주는 게, 내 방식이야.”

열아홉 살에 전학을 온 가을은 쉽게 다가가기 힘든 스타일이었다. 늘 웃고 밝은 모습이었지만 절대 곁을 주지 않았다.

예쁜 얼굴 탓에 전학 오자마자 남학생들에게 고백을 받았지만 모두 단칼에 거절했다.

웃고 있지만 어딘가 슬퍼 보이는 아이.

길을 가던 강아지를 보며 너무도 예쁘게 웃는 가을의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의찬은 그날부터 가을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날 본 가을의 미소는 학교에서 보던 미소가 아니었다.

곁을 내주지 않는 가을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숨긴 채 끊임없이 노력해 친구가 되었다.

이성적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가을의 곁에서, 가을이 기댈 수 있는 친구가 된 것만으로 의찬은 행복했다.

그렇게 이성의 마음에서 진정한 친구로. 지금은 진심으로 가을의 행복을 바라는 친구였다.

가영이 아무런 말이 없자 의찬이 그제야 노트에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올렸다.

“왜 그렇게 봐.”

“사장님 좀 멋져서.”

“반하면 자를 거야.”

“언니한텐 특별히 비밀로 해 줄게요.”

“다 지난 얘기 비밀일 것도 없다.”

가영이 또다시 의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또.”

“나도 사장님 같은 남사친 있으면 좋겠어서요.”

“이번 생에 덕 많이 쌓고, 다음 생을 노려 봐.”

“언니한테는 그렇게~ 잘하면서. 나한텐 왜 이렇게 못되게 군대?”

“가을이한테는 친구고, 너한텐 사장이니까. 사탕 그만 좀 먹고, 심심하면 테이블이나 한 번 더 닦아.”

카운터에서 또 막대사탕을 집던 가영이 입술을 쭉 내밀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뒤.

가을과 태준이 함께 차에서 내려 산장 빌라로 향했다.

명석이 돌아가고 태준은 가을과 함께 밖에서 점심을 먹고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왔다.

그사이 비가 그쳐 근교로 드라이브를 갔다가 저녁까지 먹고 돌아온 참이었다.

빌라 계단이 좁아 한 사람씩 올라가는 게 편한데도 태준이 가을의 옆에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 손을 잡자고요?”

“아까는 사람들 있어서 안 된다면서요.”

드라이브를 간 공원에서 손을 잡으려는 태준에게 가을은 누가 보면 어떻게 하냐고 한사코 거절했다.

아직 사귄다고 알린 것도 아닌데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까 싶어 한 행동이었다.

“여기는 괜찮으니까.”

태준이 어서 달라는 듯 손을 흔들자 움켜쥔 손을 꼼지락거리던 가을이 슬며시 태준의 손을 잡았다.

입술을 올린 태준이 가을의 손을 바짝 당겨 잡고 계단을 올랐다.

한 층씩 켜지던 센서 등이 5층에 켜졌다.

문 앞까지 와서도 태준은 헤어지기 싫은지 가을의 손을 놓지 않았다.

“오늘 즐거웠어요.”

“저도요.”

어색한 정적이 흐르자 가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출장 잘 다녀오세요.”

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태준은 미국으로 출장을 가야 했다.

“가지 말까요?”

“네??”

“나랑 놀아 줄래요?”

가을이 당황하자 태준이 슬며시 미소지었다.

“농담이에요.”

가을밖에 눈에 보이지 않는 태준이었지만 중요한 해외 일정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연락 자주 할게요.”

“저도요.”

가을이 슬쩍 손을 빼려 했지만 태준은 여전히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그래야죠.”

말과 달리 미동도 없이 서 있던 태준이 가을과의 거리를 좁혀 왔다.

태준의 시선이 가을의 입술로 향하자 그 시선을 눈치챈 가을의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저, 저기. 대표님.”

태준이 가을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말해요.”

“그러니까 그게…… 제가 스테이크를 먹어서…….”

“같이 먹었잖아요.”

“그죠. 그렇긴 한데, 제가 대표님보다 더 먹었달까.”

태준에게 손을 잡힌 채로 가을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태준이 한 걸음 다가섰다.

가을이 물러서면 태준이 다가서길 몇 번. 결국 가을의 몸이 ‘쿵’ 문에 닿았다.

“…….”

“30초 줄 테니까, 다른 이유 대 봐요.”

“3, 30초요??”

“25초.”

“잠, 잠깐만요. 그러니까 여기가 집이고 사람이 올라올 수도 있는데 그러다가,”

“끝.”

30초가 지나기도 전에 끝을 알린 태준이 말과 동시에 가을의 입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맞닿은 태준의 입술이 뜨거웠다.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한 손은 가을의 허리에, 한 손은 부드럽게 가을의 목덜미를 잡았다.

며칠이나 보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담아 태준이 한참이나 감미로운 키스를 가을에게 퍼부었다.

* * *

가을이 ‘STN’ 드라마국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드디어 오늘이 ‘거기에 네가’ 대본 리딩을 하는 날이었다.

얼마 전 김 감독과 고은에게 태준이 압력을 준 걸 알게 된 가을은 이번 작품은 절대 그러지 말라고 더욱더 강조했다.

그래서 태준은 가을에게 특별 혜택을 준다는 오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4부작 세 작품에 아예 관여를 하지 않았다.

가을이 크로스 백에 넣어 둔 1화 대본 책자를 꺼내 들었다.

연출 정가을.

대본 표지에 적혀 있는 자신의 이름을 본 순간부터 ‘연출 정가을’이라는 글자를 볼 때마다 가을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잠시 서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대본을 보던 가을이 다시 가방에 대본을 넣고 걸음을 옮겼다.

신인에게 기회를 준다는 의도와 달리 이 작품을 제외하면 두 작품은 결국 경력 연출자로 결정되었다.

거기다 작가까지 인기 작가로 이뤄졌다.

그런 이유로 가을이 맡은 작품에 대한 관계자들의 기대치는 한참 낮은 상태였다.

관계자들뿐만 아니라 방송가 분위기 역시 기대감은커녕 경력이 없는 가을을 무시했다.

무시와 차별 정도는 신경 쓰지 않는 가을은 평소처럼 씩씩하게 대본 리딩 현장에 도착했다.

빠르게 잡힌 편성 날짜 때문에 스케줄이 촉박해 얼마 뒤 고사를 지낸 후 바로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디링-

복도를 걷던 가을이 메시지음에 휴대폰을 확인했다.

[대본 리딩 잘해요.]

태준의 응원 메시지에 가을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가을이 막 답장을 보내려 할 때 누군가 가을의 등을 툭 쳤다.

“뭘 보고 그렇게 웃고 있어?”

다가온 사람은 도식과 혁진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을이 서둘러 휴대폰을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가을은 태준에게 4부작 촬영이 무사히 끝날 때까지만 사귀는 걸 비밀로 하자고 했다.

온전히 드라마에 몰입해야 하는데 그 사실이 퍼지면 신경 써야 할 일이 늘어나 촬영을 방해할 게 뻔했다.

문규를 비롯해 다른 식구들이 가을과 사귀는 걸 알게 되면 어떤 관여를 할지 몰라 태준 역시 그 뜻에 동의했다.

적어도 미연에 대한 일을 좀 더 확실히 조사한 후에 밝히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오늘 강 대표는 안 오나?”

도식의 말에 혁진이 대답했다.

“그러고 보면 감독님 강태준 대표님 엄청 좋아하시는 거 같아요.”

“정 감독이 꿈쩍도 안 하는데 포기도 안 하고 기특하잖아. 내가 괜히 내적 친분이 생겨서 응원해 주고 싶고, 다독여 주고 싶어서 그래.”

“많이 얻어 드셔서 좋은 건 아니고요?”

“그건 당연하지 인마.”

두 사람을 보며 미소 짓던 가을이 목소리를 냈다.

“대표님 바쁘신가 봐요.”

“근데 정 감독, 은서준하고 뭐 있는 건 아니지?”

“뭐 있긴요. 걘 그냥 학교 후배예요.”

“쭉 그랬으면 좋겠네.”

워크숍에서도 서준을 방해하던 도식을 알고 있는 혁진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감독님은 은서준 배우가 싫으세요??”

“싫은 게 아니라, 남편감으로는 강 대표가 낫지. 듬직하고, 우직하고. 능력 있고. 그렇게 잘생겼는데 다른 여자 일절 쳐다보지도 않고 말이야.”

이어지는 태준의 칭찬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올리던 가을이 냉큼 표정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늦겠어요. 얼른 가요.”

몇 시간 뒤.

무사히 대본 리딩이 끝나고 고깃집에서 회식 자리가 이어졌다.

다른 작품과 달리 유명한 배우가 캐스팅되진 않았지만 서준 못지않게 보라도 연기를 잘해 현장 분위기는 더욱 좋았다.

신인 감독, 신인 작가, 신인 배우.

현장에선 그 덕분에 ‘삼신’ 드라마라고 불러 댔다.

디링-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아요.]

태준의 메시지에 가을이 답변을 보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많이 안 마실 거예요.]

[출발할 때 연락해요.]

가을이 사람들 시선을 피해 태준과의 메시지를 이어 갔다.

워크숍 때처럼 도식에게 잡히지 않고 가을의 옆자리를 사수한 서준이 계속해서 메시지를 주고받는 가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랑 그렇게 연락을 해요?”

“응? 친구.”

“나는 선배 연락 한번 받기 힘든데. 어떤 친군지 부럽네.”

서준의 볼멘 목소리에 가을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태준과 사귀는 걸 비밀로 하자고 했는데.

서준이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그 사실을 그에게 숨기기는 건 맞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몇 달은 함께 촬영을 해야 했다.

태준과 가을의 연애를 알게 됐을 때 서준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만약 서준이 사실을 알고 촬영에 몰입하지 못하게 된다면, 분명 드라마에 영향을 미칠 게 뻔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데뷔하는 작품을 사적인 문제로 망치고 싶진 않았다.

비밀로 해야 할지, 사실을 얘기해야 할지, 가을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사이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어 사람들이 저마다 웃음소리를 내며 술자리를 이어 갔다.

사람들에게 분위기를 맞춰 주던 가을이 잠시 바람을 쐬고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고깃집을 나왔다.

커다란 나무를 둘러싼 형태로 만들어진 나무 의자에 잠시 앉아 바람을 쐬었다.

막상 촬영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걱정되는 마음 반, 설레는 마음 반이었다.

가을이 잠시 눈을 감고 바람을 쐴 때,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나와 있어요?”

살짝 취해 보이는 서준이 가을의 앞으로 다가왔다.

“너는?”

“난 술 좀 깨려고요.”

가을을 따라 나와 놓고 괜히 술 핑계를 댄 서준이 입고 있던 두툼한 카디건을 가을에게 걸쳐 주었다.

“술 마시고 바람 쐬면 감기 걸려요.”

“괜찮아.”

가을이 벗으려 하자 서준이 다시 카디건을 덮어 주며 그 옆에 앉았다.

“금방 일어날 거예요. 그때까지만 덮고 있어요.”

금방 일어난다는 말에 가을이 더 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서준에게서 나던 청량한 체취가 카디건에서 은은하게 풍겨 왔다.

서준이 불그스름한 얼굴로 목덜미를 꾹꾹 누르자 가을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술도 별로 못 하는 것 같던데, 왜 그렇게 많이 마셨어.”

“그러게요. 오늘은 술이 좀 받네.”

“그런 날 조심해야 해. 아차 하면 사고 친다.”

가을의 말에 피식 웃은 서준이 이내 말없이 바람을 쐬었다.

그렇게 정적이 흐르다 가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 김은봉 감독님 작품 거절했다며?”

“어떻게 알았어요?”

“감독님한테 들었어.”

“아, 뭐 시나리오가 썩 끌리지 않아서요.”

“천만 감독 작품인데, 욕심 안 났어?”

“난 그런 것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는 게 더 좋아요.”

길을 지나가던 여자들이 서준을 힐끔거리는 모습을 본 가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있는 서준에게 바람이 불 때마다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살포시 흩날렸다.

누구나 뒤돌아볼 만한 외모에 모델답게 묘한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그걸 증명하듯 검색창에 서준의 이름을 치면, 서준의 외모와 피지컬, 분위기에 관한 글이 넘쳐났다.

“넌, 여자 친구 없어?”

“없어요.”

“너 좋다는 여자들 많다며.”

가을의 말에 서준이 눈을 떠 고개를 돌렸다.

“그때 내가 한 말 어디로 들었어요.”

서준이 빤히 가을을 응시했다.

“난, 선배한테 떨리고 설렌다니까.”

진지한 서준의 눈빛을 마주하던 가을이 입을 열었다.

“은서준. 확실히 얘기하는데 나는,”

“알아요. 선배 나한테 이만큼도 관심 없는 거.”

“…….”

“근데 사람 마음이 그렇잖아요. 나는 왜 또 가망이 없는 여자를 다시 좋아하게 됐을까. 싶은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되나.”

“서준아.”

가을이 한껏 낮은 목소리로 서준을 바라보았다.

“난 너한테 다른 마음 전혀 없어.”

“강태준 대표는요.”

“…….”

“그 사람, 좋아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