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90)

정곡을 찔린 가을이 맹렬히 먹던 기세를 늦췄다.

“그, 그게 아니라 진짜로 배가 고파서…….”

양 볼을 잔뜩 늘인 채 변명하는 모습이 귀여워 태준의 눈매가 매력적으로 휘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천천히 먹어요.”

“오늘은……이요?”

“내일은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고.”

“큼.”

잔뜩 들었던 자장면을 조금 덜어내고 먹는 가을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준이 자장면 몇 가닥을 집어 들었다.

“소풍은 내일 갈까요?”

“내일 비 올지도 모른다던데. 다시 확인해 볼게요.”

가을이 식탁에 올려놓은 휴대폰을 들어 날씨를 확인했다.

“내일 비 올 확률이 80% 예요.”

“비 오면 더 좋고.”

태준이 가을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여기서 영화도 보고. 이렇게 음식도 먹고. 다른 것도 하고.”

가을의 마음을 확인한 태준이 브레이크 없이 달릴 기미를 보였다.

괜히 얼굴이 빨개진 가을이 당황스러움에 자장면 면발을 빙글빙글 돌렸다.

“다, 다른 건 좀…… 아직 사귄 지 하루도 안 됐는데요…… 자꾸 그러시면…….”

“음? 뭘 상상했는데 얼굴이 그렇게 빨개지지?”

태준이 짓궂은 표정을 감추며 태연한 목소리를 냈다.

“……아니에요?”

“뭐가요?”

“……아까…… 그거.”

“키스?”

가을이 얼굴이 터질 듯 빨개져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입술을 한번 꽉 깨문 태준이 나직한 목소리를 냈다.

“하고 싶으면 말하고.”

“아뇨! 그게 아니라…… 다른 거라고 하시니까.”

“가을 씨랑 하는 건 뭐든 다 좋으니까 하고 싶은 거 말만 해요.”

가을이 자꾸만 심장이 말랑거려 빙글빙글 돌리던 자장면을 들어 입에 넣었다.

빠르게 도착하는 음식을 시켜, 최대한 빠르게 먹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계획은 맞은편에 앉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태준 때문에 무산되었다.

“저…… 그만 좀 보시면 안 될까요.”

“아, 미안해요. 먹는 모습이 귀여워서.”

“…….”

입으로 들어가던 음식이 요동치는 심장에 밀려 입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고개도 들지 않고 먹는 데만 열중하던 가을이 이내 자장면을 싹싹 비우고 옆에 놓인 냅킨을 꺼내 입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그럼 쉬세요.”

“벌써 가려고요?”

“과로로 쓰러지기까지 하셨는데 푹 쉬셔야죠.”

“혼자?”

“네??”

“여기서 같이 쉬면 좋잖아요.”

“아…… 저는 할 일이 많아서요. 청소도 해야 하고, 공부도 좀 해야 하고. 와, 진짜 할 게 너무 많네. 그럼 푹 쉬세요!”

가을이 90도에 가까운 인사를 하고 빠르게 현관으로 몸을 돌리자 태준이 따라서 일어났다.

“내일 비가 오든, 안 오든, 9시에 여기로 와요.”

“9, 9시요?”

“너무 일러요?”

“아뇨, 그건 아닌데…… 비 오면 9시부터 뭐를 해야 하나 싶달까.”

“얼굴 보고 있으면 되죠.”

“아…… 아하하하…… 하하. 쉬세요.”

가을이 잽싸게 현관문을 열고 나와 자신의 집 비밀번호를 빠르게 누른 후 안으로 들어왔다.

곧장 큰 방으로 직진한 가을이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태준이 잘못됐을까 봐 요동치던 심장이 이젠 설렘이 묻은 긴장감으로 날뛰었다.

태준의 마음이 떠날까 봐 불안하거나 갑자기 사라질까 봐 두려운 마음보다, 태준을 향해 흘러넘치는 마음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었다.

여자와 몸이 닿으면 공황장애가 생긴다니.

……진짜 힘들었겠다.

그래서 여자들한테 그렇게 매몰차게 군건가.

“……왜 나하고는 괜찮을까.”

침대에 파묻었던 얼굴을 옆으로 돌린 가을이 제 입술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태준과 키스를 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꿈만 같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도망치지 않고 부딪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습관처럼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 함을 보던 가을이 태준에게 휴대폰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 하기로 계획했던 일들을 끝내고 샤워를 한 후 빠르게 잠을 잘 생각이었다.

내일이 오는 가장 빠른 방법은 일찍 자는 것뿐이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이 설레었다.

“비가 와야 하는 거야, 안 와야 하는 거야.”

잠시 고민하던 가을이 괜스레 빨개진 얼굴을 톡톡 치며 걸음을 옮겼다.

* * *

성북동에 가기 위해 6시에 일어나 지하철을 탄 태준이 문규에게 한참이나 잔소리를 들은 후에야 지갑과, 차 키, 휴대폰을 찾아 다시 산장 빌라로 돌아왔다.

쏴아아아-

태준이 빗소리에 베란다로 향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맹렬한 비가 쏟아져 내렸다.

태준이 베란다 창문에 서서 내리는 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젯밤 설레는 마음에 태준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휴대폰이 없으니 가을에게 연락을 할 수도 없고, 할 수 있는 건 일찍 잠이 드는 것밖에 없어 평소보다 한참이나 이르게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누워 아무리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아 몇 시간이나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든 태준이었다.

이동하는 데 성가시기만 했던 빗소리가 이렇게 기분 좋게 들리다니.

그렇게 한참이나 서서 비를 구경하던 태준이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소풍을 가긴 힘들 것 같으니 가볍게 아침을 먹고 함께 영화를 본 후에 차를 타고 제대로 된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다.

가을과 함께할 생각만으로도 오늘 하루가 즐거웠다.

그 시각.

가을이 태준의 현관문 앞에 섰다.

비가 와서 소풍을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최대한 편안한 복장으로 갖춰 입었다.

샤워 후 평소엔 바르지 않던 헤어 에센스를 머리카락에 듬뿍 발라 가을의 몸에서 은은한 꽃향기가 퍼졌다.

얼마 전 가영의 집에 갔을 때 향기가 좋다고 하자 가영이 쓰라며 준 것이었다.

“후우.”

가을이 깊게 숨을 내쉰 후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기다리고 있었는지 현관문이 바로 열리며 태준이 환한 미소로 가을을 반겼다.

“잘 잤어요?”

“대표님도 잘 주무셨어요?”

고개를 끄덕인 태준이 슬쩍 몸을 돌렸다.

“들어와요.”

괜히 목덜미를 한번 쓴 가을이 현관에 서 있는 태준을 지나쳐 거실로 들어섰다.

“비가 와서 소풍은…….”

가을이 슬쩍 몸을 돌릴 때 어느새 바짝 다가와 선 태준이 가을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좋은 냄새 나는데. 뭐 발랐어요?”

“아…… 동생이 준 건데 아침에 머리가 부스스해서…….”

가을이 머쓱해서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슬쩍 뒤로 물러섰다.

“왜 도망가요?”

“네? 도망간 거 아닌데요.”

슬며시 미소 지은 태준이 가을에게 가까이 다가가 와락 끌어안았다.

“음, 좋다.”

“……뭐가요?”

“그냥 다요.”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 억지로 내린 가을이 태준의 등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거실 안에 퍼붓는 빗소리와 두 사람의 심장 소리만 들렸다.

“어젯밤에 내 생각 하고 잤어요?”

“……대표님은요?”

“난 가을 씨 생각하느라 잠을 설쳤어요.”

“……저도요.”

가을의 말에 태준이 더 힘껏 가을을 안았다가 놓아주었다.

짐승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그새 눈빛이 바뀐 태준이 가을의 뺨을 어루만지다 가까이 다가갈 때였다.

‘딩동’

느닷없는 초인종 소리에 놀란 가을이 몸을 빼냈다.

“어떻게 해요, 누가 왔나 봐요.”

아무리 옆집에 산다고 해도 이 시간에 함께 있는 건 무척 수상한 일이었다.

태준이 누군지 확인하려고 인터폰으로 향했다.

화면에 보이는 사람은 명석이었다.

“누구예요?”

“명석이요.”

“임 비서님이요? 어떻게 해. 어쩌지? 어떻게 해요?”

당황한 가을이 숨을 곳을 찾아 부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요. 명석이는.”

안심하라는 표정을 지은 태준이 현관문을 열었다.

편안한 복장에 머리를 단정히 내린 명석이 태준을 보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형.”

“어쩐 일이야?”

“그냥 별일 없는 건가 궁금해서 와 봤…….”

슬쩍 안을 보던 명석이 어색하게 서 있던 가을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당황스러움에 저도 모르게 목청껏 소리 지른 가을의 목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그런 가을을 향해 꾸벅 인사한 명석이 태준을 돌아보았다.

“괜찮은 것 같으니까. 가 볼게요.”

태준이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상황 파악을 끝낸 명석이 빠르게 몸을 돌렸다.

비가 퍼붓는 주말 아침에 자신이 걱정돼 단걸음에 왔을 명석을 그냥 돌려보내기 뭐해 태준이 명석을 불러세웠다.

“괜찮으니까 들어와.”

“아니에요. 그냥 들른 거니까,”

“들어와.”

태준의 목소리와 동시에 가을이 현관에서 총알같이 튀어나왔다.

“저는 이제 막 가려고 했거든요. 볼일 보셔도 돼요.”

가을이 빠르게 자신의 집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자 태준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이따 전화할게요.”

“네.”

정신없는 모습으로 대답한 가을이 휙- 안으로 들어갔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복도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휴대폰이 없다길래 와 본 건데.”

“찾아왔어.”

한쪽 입술을 느슨히 홀린 태준이 들어오라는 듯 고개를 까닥이자 명석이 502호 안으로 들어왔다.

“휴대폰을 어디서 찾아와요?”

“성북동에서.”

“성북동이요?”

전에 몇 번 와 본 적이 있는 명석이 자연스럽게 식탁 의자에 앉았다.

“커피 줄까.”

“제가 할게요.”

“앉아 있어.”

태준이 커피 두 잔을 내려 식탁에 올려놓고 어젯밤 성북동에서 있었던 얘기를 명석에게 꺼냈다.

“하필 성북동에서 쓰러지셨어요.”

“그러게.”

“제가 요즘 너무 무리한다고 했잖아요.”

“너 먹는 홍삼 좀 나눠 주든지.”

“드려요?”

진지한 명석의 표정에 태준이 피식 웃으며 커피잔을 들었다.

“새어머니 쪽은.”

얼마 전 미연의 오빠인 진성에게 거액이 흘러 들어간 사실을 알게 된 태준이 명석과 함께 자금의 출처 및, 불법 여부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 일에 미연이 연루되어 있는지도 은밀하게 조사를 하는 중이었다.

문규나 정열의 귀에 먼저 들어간다면 사건을 밝히는 게 아니라 은폐할 가능성이 있어 태준은 명석과 함께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었다.

문규에겐 미연의 잘잘못보다 ‘세양 그룹’의 이미지가 더 중요했고, 정열은 천성적으로 마음이 약한지라 미연이 이런 일로 잘못을 빌면 눈감아 줄 게 분명했다.

“사모님 쪽은 아직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태준이 눈을 빛냈다.

“그리고, 박선호라는 사람 사건 좀 알아봐.”

“박선호요?”

태준이 뒤이어 박 형사에 대해서도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아무래도 그때 봤던 박 형사의 눈빛이 뭔가 석연치 않았다.

몇 시간 후.

분위기 있는 재즈가 흐르는 의찬의 BAR에서 칵테일을 마시던 손님이 계산을 하고 나가자 가영이 막대사탕을 입에 넣으며 창문으로 향했다.

“빗소리 듣기 좋았는데 이제 그쳤네.”

바 테이블 안에서 칵테일 레시피를 공부하던 의찬이 슬쩍 가영을 쳐다보았다.

“그쳤어?”

“네.”

가영이 창문 아래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감상했다.

“확실히 가을비가 뭔가 운치 있어요. 괜히 심장이 두근거린달까. 떨린달까.”

사람들을 보던 가영이 이내 긴 한숨을 흘렸다.

아직 명석과는 첫 번째 약속을 잡지 못한 상태였다.

업무가 많아 시간이 날 때 연락을 한다는 명석의 말에 저답지 않게 진득이 기다리고 있었다.

괜히 메시지를 보냈다가 마음이 변할까 봐 무서웠다.

“……보고 싶다.”

낮게 혼잣말을 한 가영이 이내 표정을 바꾸고 막대사탕을 맛있게 쪽쪽 거리며 의찬의 앞으로 다가왔다.

손님들 먹으라고 카운터 옆에 둔 작은 막대 사탕을 가영이 열심히 먹어 치우는 중이었다.

입속에서 막대사탕을 여기저기 혀로 굴릴 때마다 이에 부딪혀서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냈다.

“빨아 먹든지, 깨물어 먹든지, 정신 사납게.”

“막대사탕은 원래 이렇게 먹는 거예요.”

“누가 애 아니랄까 봐.”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면서. 왜? 아주 틀니를 낀다 그러지?”

“아. 임플란트 해야 되는데.”

“진짜요??”

의찬이 피식 웃으며 레시피가 적힌 노트를 넘겼다.

가게에 나와서도 열심히 공부하는 의찬이 신기한지 가영이 노트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레시피 훔쳐 가려고?”

“훔쳐서 뭐 해요. 근데, 칵테일 만드는 게 공부할 만큼 좋아요?”

“좋지.”

“뭐가 좋은데요?”

“매력적이잖아.”

가영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막대사탕만 연신 혀로 굴렸다.

“칵테일은 말이야. 뭘 어떻게, 얼마나 섞느냐에 따라서 맛이 달라지거든. 비율이 달라질 때마다 오묘하게 달라지는 색이나 달콤하면서도 아찔한 맛이, 환상적이잖아.”

의찬이 정말 좋아하는 표정으로 설명하자 가영이 존중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근데 사장님.”

“응.”

“언니 좀 이상하지 않아요?”

“가을이가 왜.”

“우리 집에 있을 때 계속 휴대폰만 보고, 한숨 쉬고,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있다가 메시지 소리 나면 화들짝 놀라고.”

“…….”

“그거 딱 누구 좋아할 때 하는 행동인데.”

“걔가 그랬어?”

“사장님은 뭐 아는 거 없어요?”

“없는데.”

“남친 생겼나?”

의찬이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노트를 넘겼다.

가을이 직접 얘기하기 전엔 태준의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사장님은 괜찮아요?”

“뭐가.”

“우리 언니 좋아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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