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90)

남자가 뒤돌아보기까지의 시간이 가을에겐 몇 년의 시간 같았다.

제발 선호가 맞기를 간절히 바랄 때,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가을이 긴장감이 풀어진 듯 온몸에 힘이 탁- 풀렸다.

남자는 선호가 아니었다.

비슷한 체격과 뒷모습, 헤어스타일까지 비슷했지만 얼굴은 전혀 선호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착각했습니다.”

몸에 힘이 풀려 숨을 고르는 가을 대신 태준이 목소리를 내자 뭔가 싶어 갸웃하던 남자가 검은색 쪽문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던 태준이 가을의 등을 부드럽게 도닥였다.

“선호 오빠인 줄…… 알았어요.”

억지로 웃어 보인 가을이 주먹을 꽉 쥐려 하자 태준이 살며시 가을을 당겨 안았다.

등을 도닥이는 손길과 따듯한 온기에 하염없이 떨리던 가을의 마음이 점차 진정되어 갔다.

‘탁-’

가을을 태우고 보조석 문을 닫은 태준이 운전석에 올랐다.

“괜찮아요?”

태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가을이 아무렇지 않은 척 밝은 표정을 지었다.

“바쁘실 텐데 같이 와 주셔서 고마워요.”

“당연히 같이 와야죠.”

가을이 괜히 고은의 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최고은 문제는 해결하셨어요?”

“예.”

‘시간을 지나서’ 제작사 대표와, 관련 관계자들을 만나 한참이나 회의를 한 후 앞으로의 사업 진행과 최고은에 대한 손해배상 등을 논의하고 나와 가을에게 전화를 했던 태준이었다.

“퇴근하고 오신 거예요? 아니면 다시 들어가야 하나?”

저녁에 다른 업무가 있었지만 가을을 혼자 둘 수 없어 태준이 거짓말을 했다.

“퇴근하고 온 거예요.”

“그럼 저녁 먹고 들어가실래요? 식사도 못 하셨을 텐데.”

“뭐 먹고 싶어요?”

“음, 뜨끈한 국물 있는 거? 집 근처에 우동 잘하는 가게 있는데 거기 가실래요?”

“차 막히면 9시쯤 될 텐데. 괜찮겠어요?”

“전 괜찮은데 대표님은요?”

“나도 괜찮아요.”

가을이 연하게 웃으며 안전벨트를 하는 모습을 태준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태준 역시 그 사람이 선호일까 봐 가을만큼이나 긴장하고 있었다.

그때는 이성이 아니었어도, 지금 나타난다면 이성이 될 수 있었다.

가을이 더 이상 마음고생 하지 않게 박선호가 맞길 바라는 마음 한편에 박선호를 경쟁자로 생각을 한 자신이 한심해 태준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눈썰미가 죽인다더니, 선호 오빠랑 하나도 안 닮은 거 있죠.”

“그래요?”

“사진 보실래요?”

태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가을이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스무 살의 선호 사진을 태준에게 보여 주었다.

남자답게 생긴 얼굴에 밝고 선한 미소. 햇살 같은 사람이라던 가을의 말이 저절로 떠오르는 모습을 한 사람이었다.

“하나도 안 닮았죠?”

“그러네요.”

자신이 모르던 시절의 가을을 지켜 주고 함께했던 남자가 이 사람이구나 싶어 태준이 휴대폰 속 선호의 사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순간, 머리에 전기가 통한 듯 저릿한 통증이 느껴져 태준이 인상을 쓰며 다급히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왜 그러세요?”

“그냥 갑자기 머리가 좀 아파서.”

가을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태준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으세요?”

태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들어 잠을 줄이면서 업무를 보고 있어 몸이 피로한 상태라고 생각한 태준이 가을을 돌아보았다.

“박 형사님께 전화드려요.”

고개를 끄덕한 가을이 박 형사에게 결과를 알려 주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몇 번의 신호가 가고 박 형사의 목소리가 수화음을 타고 흘러나왔다.

-어떻게 됐어?

“선호 오빠 아니에요.”

-그래. 그런 제보 다 그렇지. 내가 간다니까 괜히 두 사람만 고생했네.

“박 형사님이 오시면 고생 아닌가요, 뭐.”

잠시 머뭇거리듯 말이 없던 박 형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런데 말이야. 그 대표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가을이 운전을 하고 있는 태준의 모습을 힐끔 보다가 목소리를 냈다.

“제가 지금 ‘STN’에서 4부작 연출 맡았잖아요. 그거 회의도 하고, 워크숍도 하고 하다 보니까 그냥 알게 됐어요.”

-그래? 뭐 특별한 사이는 아니고?

“그런 거 아니에요.”

-알았다. 조심해서 올라와.

“네.”

가을이 전화를 끊었다.

“나랑 무슨 사이냐고 물어요?”

“네? 아, 네. 제가 대표님하고 나타나서 엄청 놀라셨나 봐요.”

태준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어 태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 *

태준과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든 순간부터 계속된 꿈에 선잠을 잔 가을이 컨디션이 좋지 않은 듯 인상을 쓰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제 일 때문인지 오늘따라 선호가 실종되던 날의 꿈을 되풀이해서 꾸었다.

선호는 꿈에서조차 제대로 나온 적이 없었다.

늘 그렇듯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은 채 그저 누군가 아련한 느낌으로 다가와 가슴이 미어지게 아픈 모습으로 떠나는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는 걸 증명하듯 가을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계속 그때의 꿈만 꿔서 그런지 뭔가 심장이 두근거리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후우…….”

깊이 숨을 내쉰 가을이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 한잔을 꺼내 단숨에 들이켠 후 정신을 차리려는 듯 욕실에 들어가 가볍게 샤워를 하고 나왔다.

언제나 8시쯤 좋은 아침을 보내라고 오던 태준의 메시지가 토요일인 오늘은 잠잠했다.

디링-

태준의 문자임을 직감한 가을이 냉큼 휴대폰을 확인했다.

[일어났어요?]

[네.]

짤막한 답변을 보내자마자 ‘딩동’ 벨이 울렸다.

인터폰 화면에 등산복 차림을 한 태준의 모습이 보이자 가을이 서둘러 자신의 얼굴을 한번 확인한 후 현관문을 열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태준이 손에 든 봉투를 자랑스럽게 흔들어 보였다. 가을이 좋아하는 CG 편의점 명란 볶음 김밥 세 줄이 들어 있었다.

“나랑 소풍 갈래요?”

“소풍이요?”

“날씨도 좋고. 구하기 힘든 김밥도 샀는데.”

어젯밤 돌아오는 내내 밝은 모습을 보였지만 가을이 어떤 마음일지 아는 태준이 아침부터 편의점을 여러 군데 돌아 간신히 사 온 김밥이었다.

“지난번 일도 사과할 겸.”

“무슨 일이요?”

“김 감독이랑 최고은이요.”

김 감독에 이어 최고은에게도 압력을 가했다는 것에 대한 사과였다.

고은과 헤어지고 나서 가을은 그날 오후에 태준과 통화를 했었다.

그때 태준은 고은의 얘기를 꺼내며 예상대로 고은에게 압력을 주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김 감독과 마찬가지로 고은의 평소 행실이 드라마나 회사 광고에 영향을 미칠 것 같아 주의를 준 것이라며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김 감독이나 최고은에 관해서 진작 얘기하지 않은 부분은 화가 났지만, 태준이 그렇게 한 이유를 알고 있어 가을의 화는 곧 수그러들었다.

“이제 괜찮다고 했는데…… 둘 다 절 위해서 하신 일인데요, 뭐.”

“그럼…… 소풍 안 가 줄 거예요?”

잠시 망설이던 가을이 슬쩍 태준을 바라보았다.

“안 가면…… 불이익당하나요?”

태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입술을 우물거리며 여기저기 눈동자를 굴리던 가을이 마지못한 척 대답했다.

“어쩔 수 없죠.”

가을의 허락을 받자 태준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래에서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준비하고 나와요.”

현관문이 닫히자 표정이 바뀐 가을이 서둘러 등산복을 꺼냈다.

꿈자리가 좋지 않아 오늘 하루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것과 달리 생각지도 못한 태준과의 소풍에 가을의 기분이 한껏 들떴다.

빠르게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가방에 필수용품과 군것질, 사발면 두 개, 뜨거운 물을 담은 보온병을 가방에 넣었다.

준비하는 시간이 곧 제작 비용과 연결이 되는 현장에서 사는 가을이 15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모든 걸 준비하고 빌라 아래로 내려갔다.

예상보다 가을이 빨리 내려오자 태준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벌써 다 한 거예요?”

“이런 게 직업병이죠.”

가을이 상쾌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셨다.

Rrrr-

발신자를 확인한 태준이 휴대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할아버지.”

-성북동으로 와라.

“지금이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아는 게지?

“아버지 생신이라는 건 압니다.”

-그래서 오라는 게야.

“아버지 생신은 늘 저녁에 챙겼잖아요.”

성대한 파티를 하는 문규의 생일과 달리 파티를 싫어하는 정열은 늘 가족끼리만 간단히 생일 음식을 먹었다.

그래서 태준은 가을과 소풍을 다녀와서 오후에 성북동으로 갈 생각이었다.

-마침 주말이기도 하고, 저녁엔 애미랑 둘이 시간 보내라고 이번엔 아침으로 했다.

“미리 얘기를 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갑자기 일정이 그리 잡혔구나. 왜, 시간이 전혀 안 나는 게야?

태준이 잠시 고민에 잠겼다.

아무리 그래도 정열의 생일 모임을 불참할 순 없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갈게요.”

전화를 끊은 태준이 가을을 돌아보았다.

“어쩌죠. 오늘 아버지 생신이라, 본가에 가야 할 것 같아요.”

“괜찮아요. 얼른 가 보세요.”

태준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돌아오면 12시쯤 될 것 같은데. 기다릴래요?”

“…….”

괜찮다고 얘기해야 하는데, 입에선 다른 말이 나왔다.

“네.”

태준이 환하게 웃어 보이자 가을도 화답하듯 웃어 보였다.

얼마 뒤.

깔끔한 셔츠와 슬랙스를 차려입은 태준이 다이닝룸에 마련된 정열의 생일 자리에 함께했다.

오랜만에 정열과 외출하는 게 그렇게도 좋은지 미연은 연신 웃음소리를 내며 태준과 찬영을 챙겼다.

“태준이 너는 볼 때마다 마르는 것 같아. 아무래도 약을 한 제 먹여야겠죠, 아버님?”

“요새 아범이 먹는 곳이 잘하는 것 같던데. 거기서 태준이도 한 제 지어 먹여라.”

“네~ 아버님.”

“저는요.”

찬영이 불퉁한 목소리를 내자 미연이 티 나지 않게 찬영에게 눈치를 주었다.

“쯧쯧- 너는 한 게 뭐가 있어.”

“저도 열심히,”

‘탁.’

문규가 들고 있던 젓가락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이번 3분기 실적표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게야?”

“…….”

“태준이처럼 죽어 가던 회사 살리라는 것도 아니고. 잘 운영되던 홈쇼핑 자리에 앉혔으면 유지라도 해야 할 게 아니냐 이 말이다.”

한약에 시샘 부리다 본전도 못 찾은 찬영이 얕게 입술을 깨물었다.

“찬영이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너무 그러지 마세요, 아버지.”

묵묵히 음식만 먹던 정열이 찬영의 편을 들었다. 모자라고 부족한 아들이지만 그래도 정열에겐 늘 미안함이 있는 아들이었다.

어른들 일에 끼여 찬영이 겪었을 혼란을 생각하면 정열은 늘 마음이 좋지 않았다.

못마땅한 얼굴로 찬영을 쏘아보던 문규가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가 아닌 살얼음판 같은 시간이 지나고 가벼운 다과까지. 늘 하던 정열의 생일 모임이 끝나 가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던 태준이 현기증에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제대로 쉬지 못해 축적된 피로가 하필 이 타이밍에 온몸에 퍼졌다.

“왜, 몸이 안 좋은 게야?”

“아뇨, 잠시 현기증이 좀…….”

“그러게 일도 몸을 챙기면서 해야지. 네 몸보다 중요한 게 어딨다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던 태준이 문규의 얼굴이 흐릿하다고 느낀 순간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밝은 햇볕이 내리쬐던 창문에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다.

태준의 몸을 살피고 간 주치의가 과로라는 진단을 내렸다.

태준이 쓰러져 속으로 쾌재를 외치던 미연은 이내 쓰러진 태준 때문에 몇 년 만에 정열과 하는 데이트를 망칠까 노심초사했다.

다행히 주치의가 과로라는 진단을 내리자 문규가 예정된 외출을 하라고 했고 미연은 내켜 하지 않는 정열과 외출을 했다.

오후 7시가 넘어서야 눈을 뜬 태준이 제 손등에 꽂혀 있는 링거 주사를 보다 의자에 앉아 있는 권 집사를 돌아보았다.

“지금 몇 시죠?”

“깨셨어요? 오후 7시입니다.”

태준이 인상을 쓰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후우…… 어떻게 된 겁니까.”

“피로가 누적됐다고 주치의가 오늘 하루 정도는 수액 맞으면서 푹 쉬시라고…….”

권 집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준이 손등에 있는 링거 주사를 빼냈다.

“제 휴대폰은요.”

“회장님께서 오늘 하루 여기서 푹 쉬시라고 차 키, 지갑, 휴대폰, 모두 가져가셨습니다.”

“하…….”

태준이 거칠게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자신의 차 키를 가져갔다면 집 안에 있는 모든 차 키를 숨겼을 게 분명했다.

“휴대폰 좀 빌려주세요. 한 통만 쓸게요.”

어차피 차 키와 지갑이 없어 괜찮다고 생각한 권 집사가 자신의 휴대폰을 태준에게 건넸다.

휴대폰을 물끄러미 보던 태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계약 짝사랑’과 동시에 가을의 번호를 단축키 ‘1번’으로 저장한 후에 늘 대수롭지 않게 단축키를 눌렀다.

뭐든 금세 외우는 태준이었지만 단축키로 설정하고 화면엔 ‘정가을’ 만 뜨니 번호를 외울 새가 없었다.

“하, 쓸데없는 건 다 외우면서.”

몇 년이나 지난 시청률, 제작비, 손해액도 외우고 있는 태준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태준이 기가 막힌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가을의 연락처를 묻기 위해 명석의 번호를 누르던 태준이 멈칫했다.

오늘 하루 템플스테이를 하러 가, 밤까지 휴대폰을 꺼 놓겠다고 했던 명석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길게 한숨을 내쉰 태준이 결국 전화를 그대로 권 집사에게 돌려주었다.

그 시각.

산장 빌라 앞에서 몇 시간 동안 태준을 기다린 가을이 다시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지 않으니…….’

지금까지 한 번도 연락이 되지 않은 일이 없던 태준이 약속한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무슨 일인지 걱정이 돼 명석에게 전화를 했지만 명석 역시 통화가 되지 않았다.

벌써 몇 시간째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인기척이나 자동차 소리가 날 때마다 가을은 태준인지 아닌지 확인했다.

선호가 사라졌던 날의 꿈을 되풀이해서 그런지 너무도 불길했다.

‘가을아, 소풍 가자.’

태풍의 영향으로 많은 비와 함께 곳곳의 지역에 낙뢰까지 내려쳤다.

그다음 날, 언제 그랬냐는 듯 날씨가 너무도 쾌청해져 선호가 가까운 공원으로 소풍을 가자고 했다.

출발하기 전, 선호는 인터넷을 설치하고 점검하는 아르바이트를 함께하던 친구에게 전화를 받았다.

갑작스러운 사정이 생겨 출장을 못 간다며, 고장 신고가 들어 온 출장 건을 선호에게 부탁한다는 전화였다.

‘금방 다녀올게. 기다리고 있어.’

한 건의 출장만 다녀오면 되니까 길어야 한두 시간이라며 선호는 가을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이 선호의 마지막이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이유 모를 불안감. 금방 돌아와 소풍을 가자던 태준의 연락 두절.

자꾸만 그날 일이 떠올라 가을의 마음에 터질 듯한 불안이 엄습했다.

이런 상황이 두려웠다.

소중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는 일.

그 두려움을 다신 느끼고 싶지 않았다.

불안함에 어쩔 줄 모르고 빌라 앞을 서성이던 가을의 눈에 멀리서 걸어오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가을…….”

태준이 가을의 이름을 채 부르기도 전에 가을이 정신없이 뛰어 태준의 품에 안겨 들었다.

태준이 당황한 사이 그를 힘껏 안은 가을이 울음이 섞인 목소리를 냈다.

“왜 이제 와요. 기다렸는데. 내가……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밖에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가을의 몸에 온기가 남아 있지 않자 태준이 미안한 마음에 그녀의 등을 슬며시 당겨 안았다.

“미안해요.”

“연락도 안 하고. 연락이라도 줬으면 내가…… 사람을 왜 이렇게 불안하게…….”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 듯, 가을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거칠게 등을 들썩거렸다.

“갑자기 사라졌을까 봐…… 흐윽…… 선호 오빠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봐…… 흐으윽…….”

울음이 터진 가을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제대로 말을 뱉지 못하자 미안함과 안타까운 마음이 섞여 태준이 가을을 좀 더 꼭 안아 주었다.

“얘기했잖아요. 난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고.”

태준의 다독임에도 가을은 쉽게 진정하지 못했다.

태준이 들썩이는 가을의 어깨를 잡아 품에서 살며시 떼어냈다.

“나 봐 봐요.”

가을이 자꾸만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힘겹게 고개를 올렸다.

“연락 못 해서 미안해요.”

“……대표님을 못 보게 될까 봐…… 앞으로 다시…… 못 볼까 봐…….”

어깨를 뜰썩인 채 가을의 큰 눈에서 계속해서 눈물이 흘렀다.

그 모습이 너무도 가슴 아파 태준의 마음이 아렸다.

“울지 말아요.”

진정이 되지 않는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온몸을 바르르 떠는 가을의 얼굴 가까이로 태준이 다가왔다.

“가을 씨.”

가을을 진정시키기 위해 다가왔던 태준이 물기 가득한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눈빛이 뭘 말하는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왜 하염없이 흔들리는지.

알 수 있었다.

태준의 목소리가 가을바람에 묵직이 내려앉았다.

“정가을.”

눈물을 멈추지 않는 가을의 얼굴 앞으로 태준의 얼굴이 겹쳐 왔다.

“눈 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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