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 안에 앉아 있던 고은이 가을을 향해 손짓했다.
“잠깐 얘기 좀 해요.”
워크숍의 피로에 김 감독의 피로함이 겹쳐 얼른 집으로 가 쉬고 싶었던 가을이 슬쩍 인상을 썼다.
“무슨 일인데요.”
“타서 얘기해요.”
가을이 어쩔 수 없이 밴에 오르자 매니저가 조용한 곳에 차를 세우고 스타일리스트와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조감독이 그런 거죠?”
“다짜고짜 또 뭘요.”
고은이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가을을 쏘아보았다.
드라마 포상 휴가를 다녀와 명석에게 대놓고 퇴짜를 맞은 후 고은은 머리를 식히며 차기작을 고른다는 이유로 해외여행을 떠났다.
아무 생각 없이 여유를 즐기고 싶으니 여행을 가 있는 동안엔 어떤 연락도 하지 말라고 매니저에게 강조한 후 SNS에 일상을 올리며 한껏 휴식을 즐기고 돌아왔다.
그렇게 서울로 돌아와 들은 첫 얘기가 ‘세양 그룹’ 측에서 고은이 맡은 광고 세 개를 재계약하지 않겠다고 전달했다는 얘기였다.
드라마도 흥했고, 이미지 관리를 조심하라고 하기에 막판엔 어울리지도 않게 한껏 참고 있었는데.
대체 왜 재계약을 하지 않는 거냐며 소속사 대표에게 길길이 날뛰고 나오다 마침 지나가는 가을을 보고 무언가 떠올라 부른 것이었다.
“조감독이 강태준 대표한테 내 CF 다 자르라고 한 거 아니에요?”
가을이 어이없는 실소를 흘렸다.
“내가 왜요?”
“몰라서 물어요?”
“모르니까 묻죠.”
“하, 그거야, 내가 조감독을 괴롭혔으니까!”
“괴롭힌 건 잘 아나 보네.”
가을의 말에 고은이 더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래서 조감독이 한 게 맞다, 이거죠?”
“아뇨. 잘못 짚었어요.”
“맞는데 뭘. 아니면 거기서 왜 갑자기 날 내쳐?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오히려 개런티 올려서 재계약했으면 했지. 내가 뭘 어쨌다구?”
“그건 스스로 잘 생각해 보고, 난 그만,”
“이미지 조심하라고 해서 막바지 촬영은 얌전했잖아요. 내가 뭐 또 잘못했나?”
“그게 무슨 소리예요?”
“몰라요? 강태준 대표가 드라마 촬영하면서 이미지 조심하라는 둥, 특히 이번 드라마 주시한다는 둥 하면서 조감독한테 밉보이면 재계약 안 한다고 협박한 거?”
김 감독에 이어 고은까지. 자신에게 했던 행동들이 태준이 압력을 가해 일어난 일이라는 걸 안 가을이 기막힌 웃음을 흘렸다.
조금 전 대표님이 최고은에 대해 얘기하려던 게 이거였나.
왜 진작 김 감독과, 최고은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았나 싶어 가을은 태준에게 다시 화가 났다.
그러다 압력을 받아야만 정상인으로 돌아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놀랍도록 닮아 있어 실소가 흘렀다.
“무슨 악감정으로 나한테 이래?”
“그동안 최고은 씨는 나한테, 스태프들한테. 무슨 악감정이었길래 그랬어요?”
가을의 말에 고은이 입술을 깨물었다.
“왜 재계약이 안 됐는지 본인 스스로를 돌아봐야 하지 않나?”
“하, 지금 드라마 끝났다고 막 나가자는 건가? 꼴랑 4부작 연출 좀 맡았다고 자기가 뭐 대단한 연출가가 된 줄 아는 모양이지? 그것도 다 강태준 대표 백이면서!”
김 감독에 이어 고은까지 만나자 극한의 피로감이 몰려온 가을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백이든 아니든 난 내 갈 길 갈 테니까 최고은 씨도 애먼 사람 잡지 말고 갈 길 가요.”
끝까지 화를 참은 가을이 막 문손잡이를 잡고 열 때였다.
“웃기고 있어. 남자 하나 잘 물었다 이거야? 어디서 별 볼 것도 없는 게 진짜.”
혼잣말 같은 고은의 말에 이성이 뚝- 끊긴 가을이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문을 닫았다.
‘쾅-!’
가을이 잡고 있던 문손잡이를 매섭게 닫자 고은이 깜짝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왜, 뭐! 내가 틀린 말 했나?”
“최고은.”
“……왜!”
“그동안 내가 왜 참았을 거 같아?”
“뭐……?”
“드라마를 하고 있었으니까.”
“…….”
“근데 이제 끝났네.”
갑작스럽게 바뀐 가을의 분위기에 고은이 긴장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 그래서 뭐.”
“자꾸 건드리면 재밌어진단 소리야.”
“…….”
“별 볼 일 없는 사람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가을이 매서운 눈빛을 하며 고은의 앞으로 훅 다가왔다.
“개싸움 되는 거야.”
“…….”
“한번 물면 죽어도 안 놓을 거거든. 내가 알고 있는 네 인성, 갑질, 그 외 모든 걸 다 폭로할 거야.”
“즈, 증거 있어?”
“증거야 뭐, 스태프들 증언만 해도. 어우, 차고 넘칠걸?”
가을이 살벌한 눈빛을 하고 웃어 보이자 겁에 질린 고은이 주먹을 쥔 손을 덜덜 떨었다.
“개싸움 하고 싶으면 더 해 보든가.”
더 이상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아 고은이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눈동자를 부산하게 움직였다.
“더 할 말 있어?”
“……아니.”
고은이 시선을 피한 채 대답하자 가을이 차 문을 열고 나왔다.
자리를 피해 있던 매니저가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놀란 얼굴로 밴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던 가을이 관심 없는 표정으로 그대로 자리를 벗어났다.
* * *
어젯밤 집으로 돌아온 후 피곤함에 오후 6시쯤 잠이 들었던 가을은 새벽 무렵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사이 몇 번 태준에게 연락이 와 있었지만 새벽에 답장을 보낼 수는 없어 연락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새벽에 일어난 마당에 등산이나 할까 고민하던 가을은 결국 김 감독과 고은을 만나고 온 피로감이 풀리지 않아 그대로 다시 잠을 청했다.
결국 아침 8시쯤 일어나 태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집안일을 한 뒤 영화와 책을 보며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Rrrr-
지영의 전화에 가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가을 언니! 지금 기사 보셨어요?
지영이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잔뜩 상기된 목소리를 냈다.
“아니? 왜, 무슨 일 났어?”
-얼른 연예란 기사 한번 봐 보세요.
“잠깐만.”
가을이 전화를 끊지 않은 상태로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기원그룹 장남 김대만의 숨겨진 내연녀 최고은으로 밝혀져]
[충격. 새신랑의 숨겨진 내연녀 톱스타 최고은]
[광고계 비상. 최고은을 향한 발 빠른 손절 사태 이어지나]
포털 사이트의 연예란에는 고은의 기사로 도배되어 있었다.
고은이 올해 결혼을 한 모 그룹 회장의 아들과 내연관계라는 사실이 최측근의 폭로로 밝혀져 한바탕 난리가 난 상태였다.
연기력도 좋지 않은 고은이 계속해서 주연을 맡은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된다며 각종 커뮤니티에선 고은의 이야기로 도배 중이었다.
아직 소속사에서 입장 발표를 하지 않았는데도 광고업체에선 발 빠르게 고은을 내치고 예정되어 있던 영화 주인공 자리 역시 하차하게 되었다.
이대로는 스캔들이 터진다며 이미 광고 계약을 하지 않기로 한 태준의 말이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지금 최고은 연락 두절이래요. 어유, 그나마 드라마 끝나고 터져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그러게.”
-연예인들 한순간에 나락 가는 거 많이 봤는데 이번처럼 통쾌한 적은 처음이에요. 유부남 만나면서 여기저기 추파나 던지고 말이야.
“이번 드라마는 어떻게 조용할 날이 없네.”
-우리 대본집이랑 DVD 나온다고 했는데. 괜찮으려나 모르겠어요.
간신히 의영이 친 사고를 극복하고 꽤 높은 성적을 보이며 끝을 냈는데 드라마가 끝난 시점에 주연 여배우가 이런 문제를 일으켰으니 관련 사업이 진행될 리가 없었다.
“아마도 그건 물 건너갔지 싶다.”
-그죠? 아유, 진짜 끝까지 민폐야.
고은의 얘기로 한참이나 얘기를 이어 가던 가을이 슬슬 대화를 마무리했다.
“어쨌든 우리는 우리 일이 있으니까, 오늘 푹 쉬어.”
-언니도 피곤하실 텐데 푹 쉬세요.
“그래, 또 연락하자.”
가을이 전화를 끊었다.
다른 문제도 아니고 유부남과 스캔들이라니. 연기자로서 고은의 생명은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디링-디링
‘시간을 지나서’ 스태프들의 단체 메시지 창에는 고은에 관한 얘기가 쉬지 않고 올라왔다.
고생해서 찍은 드라마가 고은 때문에 망가져 화를 내거나, 추가 사업에 대한 우려를 보이는 대화가 이어졌다.
그러다 이내 워낙 쌓인 게 많았던 스태프들은 모두가 한맘으로 최고은이 이렇게 돼 통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인생 왜 이렇게 살았냐, 최고은.”
가을이 고개를 젓고 책상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Rrrr-
발신자 [박 형사님]에 가을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평소 급한 일이 아니면 소소한 일상 대화들은 메시지로만 나누던 박 형사였다.
“네, 박 형사님.”
-통화 괜찮아?
“네. 괜찮아요.”
-그게 말이야. 파주에서 박선호랑 비슷한 사람을 봤다는 제보가 들어왔어.
“!!!!”
실종자 사이트에 선호의 사진과 인적 사항을 올리고 난 후, 처음엔 선호와 비슷하다는 제보가 한참 들어 왔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제보의 횟수도 1년에 한 번 들어올까 말까 하는 정도로 변해 갔다.
“파주 어디에서요? 아니, 일단 제가 박 형사님 계신 곳으로 갈게요. 서에 계시죠?”
-지금 오려고?
“네.”
-내일 나랑 같이 가든가, 아니면 내가 내일 가서 확인해 보고,
“제가 일단 서로 갈게요.”
가을이 전화를 끊고 빠르게 나갈 준비를 했다.
벽에 걸린 시계가 막 오후 4시를 지나고 있었다. 서에 들렀다가 박 형사에게 얘기를 듣고 바로 파주로 출발할 생각이었다.
Rrrr-
정신없이 허둥지둥 대던 가을이 누군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네, 박 형사님.”
-박 형사?
박 형사가 아닌 태준의 목소리가 수화음을 타고 흘러나왔다.
“아, 대표님.”
-박 형사라면, 박선호 사건 도와준다는 그 형사분 맞죠?
“……네.”
전화를 걸자마자 박 형사를 찾는 가을의 목소리를 듣고 태준이 뭔가를 짐작했다.
-혹시 신원 확인이 안 된 사체가 발견됐어요?
“그게 아니고…….”
솔직하게 얘기해야 하나 싶어 가을이 말끝을 흐렸다.
-얘기했잖아요. 힘들 땐, 내 손을 잡아 달라고.
잠시 망설이던 가을이 선호를 봤다는 제보가 와서 지금 경찰서로 간다는 얘기를 전했다.
몇 시간 뒤.
가을을 태운 태준의 차가 차도를 달렸다.
함께 도담 경찰서에 들러 제보자가 했던 얘기를 박 형사에게 전해 들은 후 가을이 제보자와 통화를 했다.
그렇게 바로 약속을 잡은 후 파주로 향하는 중이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가을을 보던 태준이 이내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 도담 경찰서에서 가을과 함께 강력 3반으로 들어갔을 때, 자신을 보는 박 형사의 눈빛이 일순 흔들리는 걸 느꼈다.
분명 아는 사람을 예기치 못한 곳에서 마주친 듯한 눈빛이었다.
그 후 가을이 자신을 ‘STN’ 대표라고 소개해 박 형사와 통성명을 나누자 흔들렸던 박 형사의 눈빛은 사라져 있었다.
어디서 본 적이 있었나 기억을 떠올려 봤지만 박 형사와의 안면은 없었다.
제보자가 했던 얘기를 전해 들으면서 박 형사를 유심히 살펴봤지만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박 형사에게선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고개를 털어 생각을 떨친 태준이 창밖만 보고 있는 가을을 돌아보았다.
10년이란 세월 동안 몇 번이나 경험했을 일이었다. 혹시나 하는 긴장감으로 향했다가 매번 실망하며 돌아왔을 길.
그 세월을 가을 혼자 버텨 냈을 거라 생각하자 태준의 마음이 아려 왔다.
어떤 말로도 가을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을 알기에 태준은 그저 묵묵히 곁에 있어 주는 쪽을 택했다.
한참을 달려 태준의 차가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자 20대로 보이는 남자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짧은 인사를 끝내고 남자가 군인 말투가 묻어난 목소리로 얘기를 꺼내 들었다.
“제가 오늘 게임을 하다가 실종 사이트 얘기가 나와서 한번 들어가 봤거든요.”
가을이 남자의 얘기를 한껏 긴장한 채 들었다.
“그런데 굉장히 낯이 익은 사람이 있더라고요. 제가 눈썰미가 기가 막히게 좋거든요.”
짧게 자른 스포츠머리에 일교차가 큰데도 반팔에 반바지, 슬리퍼 차림을 하곤 연신 태준을 힐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몇 달 전인가 저쪽 1층에 이사 온 형인데요. 전에 술 마시면서 얘기 들어 보니까 뭐 사고를 당해서 다리를 다쳤대요. 그 형이 다리를 좀 절거든요.”
남자의 말에 가을의 심장이 점점 거칠게 요동쳤다.
늘 ‘비슷한 사람을 봤다’는 정도의 제보만 듣다가 자세한 얘기를 듣자 어쩐지 자꾸만 선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다리까지 흔들렸다.
“자기 꿈이 경찰이었는데 다리를 다쳐서 뭐 집으로 돌아가기도 싫고, 여기저기 전전했다는데. 그 실종된 사람도 경찰대 학생이라 그러길래요.”
“…….”
“이 동네서 보기 힘든 훈남형이기도 하고.”
가을이 손을 맞잡은 채 숨을 고를 때 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사람,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저쪽 골목으로 가면 파란 대문이 나오는데요, 거기서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세 번째 집 대문 옆에 검은색 쪽문 있거든요. 찾기 쉬워요. 혹시 가족이 기다리는 건가 싶어서 연락드린 거니까, 형한테는 제가 제보했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휴대폰을 본 남자가 빠르게 몸을 돌렸다.
“전 지금 약속이 있어서. 혹시 못 찾으면 전화 주세요.”
꾸벅 인사한 남자가 빠르게 어디론가 뛰어갔다.
남자가 말한 골목을 바라보는 가을의 얼굴이 긴장감에 싸여 핏기가 사라졌다.
태준이 괜찮다는 듯 가을의 어깨를 살며시 도닥이자 깊게 심호흡을 한 가을이 남자가 말한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골목으로 들어가 얼마 지나지 않은 곳에 파란색 대문이 보이자 가을과 태준이 왼쪽 골목으로 들어섰다.
눈으로 세 번째 집을 가늠할 때,
‘끼이익.’
세 번째 대문 옆에 검은색 쪽문이 녹이 잔뜩 든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한 손엔 쓰레기봉투를 들고 있는 남자가 그 문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어두운 골목에 모자를 쓴 상태라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절뚝거리며 걷던 남자가 집 근처 쓰레기봉투가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쿵. 쿵. 쿵. 쿵.
체격과 뒷모습이 선호와 닮아 있어 가을의 심장이 점점 빨라졌다.
등을 보이고 서 있는 남자를 향해 가을과 태준이 걸음을 옮겼다.
남자에게 다가갈수록 가을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입술을 파르르 떨던 가을이 이내 주먹을 꽉 쥔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호……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