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90)

그 말에 눈물을 멈춘 가영이 명석의 쪽으로 몸을 확 기울였다.

“귀여워요?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요?”

갑자기 전투적으로 변한 가영의 모습에 명석이 슬쩍 뒤로 몸을 빼냈다.

“다시 얘기해 봐요. 내가 귀여워요?”

“……많이는 아니고. 살짝?”

“어쨌든 귀엽다는 거네? 그죠?”

검은 눈물 자국이 생긴 줄도 모르고 얼굴을 바짝 내민 가영이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느낀 건 내가 한참이나 어려서 그런 건 아니죠? 여자로 귀여운 거잖아요. 그죠? 막 보호 본능 일으키고 그러나 내가?”

“아니, 그 정도는,”

“어쨌든 귀엽다는 거잖아요?”

몰아치는 가영 때문에 명석이 정신이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세 번만 만납시다!!”

얘기가 도로 원점이 되었다.

“어쨌든 오빠도 나한테 아무 감정이 없는 건 아니란 소린데, 나이 차이는 노력으로 안 되는 거잖아요?”

“…….”

“다른 건 내가 노력해 볼 테니까 정말 딱 세 번만…… 덜도 말고 세 번만 만나 주세요.”

“…….”

“세 번만 만나 주면 치료비 이런 거 하나도 안 받을게요. 와, 좋다. 돈도 안 들고.”

가영이 코를 훌쩍이며 뺨을 쓸어 올리자 검은 눈물 자국이 손을 따라 새로운 자국을 만들었다.

그 모습에 명석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 웃었어. 사람 심쿵하게.”

“…….”

“자꾸 이렇게 사람 마음 빼앗아 가는 오빠한테도 책임이 있는 거예요. 9년이나 먼저 태어났으면서 왜 어린 사람 마음을 자꾸 헤집어요? 왜 그렇게 이쁘게 웃는데.”

명석이 습관처럼 안경을 스윽 올렸다.

“어어? 그 모습도 반칙,”

“좋아요.”

이 자리에서 확실히 끝내려고 했던 명석은 그동안 가영의 행동들이 꽤 귀여웠다는 걸 깨닫고 마음을 돌렸다.

첫인상과 달리 언뜻언뜻 순수함이 묻어난 행동들이 가영을 조금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은 만나 보죠.”

“……!!!”

막상 명석의 입에서 만나자는 얘기가 나오자 얼어붙은 가영이 커다래진 눈만 깜빡거렸다.

“대신, 세 번을 만나도 아니면. 깨끗하게 갈 길 가는 겁니다.”

부산스럽게 눈을 깜빡거리던 가영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말…… 만나 주실 거예요?”

“예.”

“후우우우우…….”

가영이 복식호흡이라도 하듯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119 대기시켜야 하나. 나 진짜 심장 터질 거 같은데.”

제어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 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는 듯 가영이 앞에 놓인 아이스 라테를 쭈욱 들이켜고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던 명석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잘 들어요.”

명석의 말에 긴장한 가영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내가 자란 환경은 좋지 못해요. 난 폭력배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정가영 씨가 본 분들도 그쪽에 몸을 담고 있었던 분들이고요.”

명석은 여자를 만날 때 늘 자신의 집안 이야기를 꺼냈다. 가벼운 관계든 아니든 간에 이 부분은 밝히고 시작했다.

“겉모습만 보고 호기심에 만나고 싶은 거라면 이쯤에서,”

“호기심 아니에요! 호기심으로 이렇게 심장이 뛰지 않죠. 제 심장 소리 들어 보실래요?”

가영이 바짝 가슴을 내밀자 명석이 당황해서 몸을 뒤로 빼냈다. 가영의 행동은 도저히 예측하기 힘들었다.

“그러고 저도 좋은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어요. 아빠는 네 번? 다섯 번? 결혼했다가 이혼했고, 엄마도 두 번이나 재혼했거든요.”

가영의 모습이 밝아 보여 행복한 가정에서 사랑만 듬뿍 받고 자란 줄 알았던 명석이 사뭇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사람만 제대로 되면 됐지, 자란 환경, 집안. 이런 게 뭐가 중요해요? 세상이 이렇게나 넓은데. 화목하게 산 사람도 있고, 그러지 못한 사람도 있는 거죠.”

가영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제법 어른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요? 오빠에 관한 건 뭐든 좋으니까 다 얘기해 주세요.”

“내 이름은 알아요?”

“당연하죠!”

메시지 프로필에 ‘임명석’ 세 글자만 적어 놓은 명석이었다.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도 압니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은데.”

“중요해요.”

“그럼 오빠 하는 일이 뭔데요? 전에 보니까 덩치 이만한 아저씨들이 도련님 도련님 하던데.”

자신이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마냥 좋다고 웃고 있는 가영의 모습을 명석이 팔짱을 끼며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 보이면서도 세상 무서운지 모르는 어린아이 같아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난 지금 ‘STN’ 방송국 강태준 대표님 비서실에서 일합니다.”

“우와, 방송국 대표님 비서. 멋지다!”

“한 가지 더 얘기하자면. 나한테 최우선은 내가 모시는 대표님입니다.”

“네!”

“정가영 씨를 만나는 상황이어도 대표님께 생기는 일이 우선이 될 거예요.”

“알겠습니다!”

명석이 대답과 동시에 맹렬히 고개를 끄덕이는 가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태 사귀었던 여자들도 처음엔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뭘 하다가도 태준에게 가는 명석을 여자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명석에게 1순위는 태준, 2순위는 일, 나머진 모두 그다음이었다.

무슨 일이든 자신을 1순위로 하라고 태준이 시킨 것도 아니었다. 명석에겐 14살에 한 태준과의 약속이 우선시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으니 평생 그 약속을 지키는 게 명석의 성격이었다.

“당연히 월급을 주는 대표님이 최우선이죠! 저는 오빠가 만나 준다고 한 것만으로도 엄청, 무지, 기쁜걸요!”

가영이 세상을 다 얻은 듯 해맑게 미소 지었다.

“세 번 안에 오빠 마음을 돌릴 수 있게, 열심히 하겠습니다!!”

결의에 찬 가영의 모습에 명석이 슬며시 입술을 올렸다.

“나도 약속한 세 번은, 최선을 다하죠.”

가영이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말아 물었다. 단언컨대 살면서, 이보다 더 기쁜 적은 없던 가영이었다.

Rrrr-

명석이 발신자를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예, 삼촌.”

명석을 ‘도련님’이라 부르는 험악한 인상을 지닌 많은 삼촌들 중 한 명의 전화였다.

“아침 7시에서 저녁 9시까지 있는 걸로 예약해 뒀어요.”

10월이 되면 토요일 하루, 판석을 비롯해 지금은 각 지역 고깃집 사장이 된 옛 수하들이 절을 빌려 그동안 지었던 죄를 반성하는 시간을 갖는 템플스테이를 해오고 있었다.

정기적으로 기부도 하고 다른 좋은 일도 많이 해 오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거친 내면을 다스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예, 그럼 토요일에 뵐게요.”

전화를 끊은 명석이 검은색 눈물 자국으로 범벅이 된 채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가영을 쳐다보았다.

“우선, 화장실을 좀 다녀오는 게 어때요?”

“화장실이요?”

명석이 다녀오라는 듯 고개를 까닥이자 가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후, 여자 화장실에서 카페가 떠나갈 듯한 괴성이 들려왔다.

* * *

새벽 5시.

모두가 잠든 시각, 태준이 펜션 문을 열고 나왔다.

1층에 세 개, 2층에 세 개. 총 6개의 방이 있는 단독 룸이었다.

그중 2층에 있는 방 중 한 곳은 혁진이 태준을 위해 준비한 방이었다.

태준이 남자 스태프들과 같이 자겠다고 했지만, 모두가 알아서 그 방을 피했다.

덕분에 불편함 없이 잠을 잔 태준은 새벽같이 일어나 씻고 준비를 해서 나온 참이었다.

두어 시간 걸리는 거리라 한남동으로 가 샤워만 한 후, 바로 회사로 출근할 생각이었다.

일교차가 큰 계절답게 새벽바람이 꽤 추웠다.

어젯밤, 가을과 단둘이 다른 곳으로 가자던 얘기는 도식에게 잡혀 있다 풀려난 서준의 등장으로 무산되었다.

가을이 허락할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마음 같아선 30분이라도 가을과 좀 더 산책을 하고 싶었던 태준이었다.

그 바람을 이루지 못한 채 서준이 낀 상태로 어색하게 펜션으로 돌아와야 했다.

가을에 대한 마음을 자각한 후, 태준은 ‘STN’의 주가를 높이기 위해 계획했던 일들을 앞당겼다.

고백하자마자 다녀온 며칠간의 출장도 그 때문이었다.

문규와 약속한 기간보다 시간을 좀 더 단축해 ‘STN’의 주가를 확실히 올릴 생각이었다.

기한이 2년이었을 뿐, 그 안에 주가를 확실히 올려놓으라는 지시였으니 조금 더 빨리 ‘세양 그룹’의 후계를 이어받기 위한 계획이었다.

정치가 집안답게 미연의 오빠인 진성은 정치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진성에게 정치 자금을 대주는 게 ‘세양 그룹’이었다.

후계를 물려받은 후 정치 자금을 끊는다면 내년에 선거를 앞둔 진성의 정치 생명은 장담할 수 없었다.

친정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미연의 목줄을 잡는 데 이만한 일은 없었다.

거기다 최근 들어 진성과 미연의 행보가 수상해 태준은 한층 더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가을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 준다면, 가을을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미연의 목줄을 확실히 쥐고 있는 것이었다.

태준은 찬영의 감시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다.

찬영이 승무원에게 아파트를 사 준 자금이 수상스러워 ‘세양 홈쇼핑’과 관련된 비자금이 있는지 조사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태준은 ‘STN’과 관련된 업무뿐만이 아니라 미연과 찬영의 문제로 밤낮없이 일을 하는 중이었다.

얇은 옷차림에 가볍게 몸을 한번 털어 낸 태준이 주차장을 향해 몸을 돌릴 때였다.

“지금 가시는 거예요?”

가을의 목소리에 태준이 뒤를 돌아보았다.

“추운데 왜 나와요.”

“그냥, 잠이 깨서요.”

가을이 겉옷도 없이 나와 있자 태준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감기 걸리니까 얼른 들어가요.”

“……저기…….”

“음?”

“도착하시면…… 메시지 주세요. 요즘 고속도로 사고가 워낙 많기도 하고…… 시간이 이르기도 하고…… 하니까요.”

자신을 걱정해 주는 가을의 말에 태준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럴게요. 얼른 들어가요. 춥다.”

고개를 까닥여 인사한 가을이 안으로 들어가자 잠시 가을이 들어간 문을 바라보던 태준이 몸을 돌렸다.

몇 시간 뒤.

전날 과음을 한 스태프들이 일어나 한바탕 라면으로 해장을 하고 회포를 푼 후에 워크숍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도식에게 잡혀 잔뜩 술을 마시고 그것도 모자라 도식과 함께 잠이 들었던 서준은 가을에게 점수를 따겠다는 계획을 전혀 실행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을 삼켜야 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 역시 가을이 정찬 CP와 함께 가겠다고 해 결국 서준은 별다른 수확을 올리지 못한 채 혼자 서울로 되돌아갔다.

생각보다 차가 막혀 오후 2시가 되어서야 서울에 도착한 가을이 김 감독을 만나기 위해 쉬지도 못하고 바로 ‘STN’ 근처 카페에 들어섰다.

디링-

가을이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했다.

얼마 전 태준이 고소한 은진과 희수의 사건이 ‘공소권 없음’으로 끝났다는 메시지였다.

태준의 고소로 검찰로 넘겨진 후 가을은 이들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을 전달했다.

태준이 바로 고소를 취하하지 말고 1심 재판 중 처벌불원 의사를 밝히라고, 그래야 이들이 더 정신을 차린다고 했지만 가을은 두 사람을 만나 사과를 받은 후 고소를 취하했다.

어떻게 알고 소문이 났는지 태준이 두 사람을 고소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평소 이들의 악의적인 뒷말을 알고 있었던 스태프들은 정의 구현이라며 좋아했다.

보통 연예인을 향한 악의적인 댓글에 선처를 해 주는 모습만 보던 사람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태준의 성격에 오히려 박수를 쳤다.

거기다 태준의 계획대로 가을에 대한 나쁜 말들도 사람들 사이에서 나돌지 않았다.

가을이 막 카페 의자에 앉을 때 김 감독이 안으로 들어왔다.

“감독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얼굴 좋아졌네.”

가을이 슬쩍 입으로만 미소를 지었다.

잠시 뒤, 가을이 커피 두 잔을 들고 와 김 감독 앞에 놓고 한 잔은 자신의 앞에 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서로 궁금하지 않은 그동안의 안부를 주고받다가 김 감독이 본론을 꺼냈다.

“촬영 준비는 잘되고?”

“네.”

“그 소문 말인데, 하 참. 내가 어디서 쫓겨나고 할 사람인가. 어처구니없는 소문에 부인하는 것도 웃기고. 누가 그런 소문을 냈는지 나도 아주 기분 더러웠다고.”

가을이 별다른 말 없이 앞에 놓인 커피만 만지작거렸다.

“그것 때문에 캐스팅 어려웠다며.”

“네. 뭐, 다 지난 일이니까요. 캐스팅도 잘됐고.”

“은서준이 한다던데.”

“네.”

“내가 준 시나리오는 당분간 연기할 생각이 없다고 거절하더니.”

“……서준이가요?”

“그 친구 단편영화 출연했을 때 눈여겨봤었는데, 연기를 제법 하더라고.”

서준이 영화계에서 탐내는 인재라는 지영의 말이 거짓이 아닌 모양이었다.

“네 후배라며. 하여간 인복도 좋아?”

어딘가 묘한 뉘앙스에 가을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제가 연출자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시나리오만 보고 오디션 요청한 거예요.”

“그래 뭐, 시나리오 보는 안목 없는 걸 누굴 탓하겠어. 후회하는 건 그 친구 몫이지.”

김 감독이 앞에 놓인 커피를 쭉 들이켜는 모습을 가을이 빤히 바라보았다.

3년 넘게 보아 온 가을의 눈에 김 감독은 지금 심사가 단단히 꼬여 있었다.

“감독님. ‘STN’ 4부작 그만두시고 ‘BSC’ 방송국 4부작 연출 맡으신 이유가, 뭐예요?”

가을과 김 감독의 눈빛이 맹렬히 마주쳤다.

“왜, 너 때문일까 봐?”

“…….”

“네가 뭐라고 내가 방송국을 옮겨.”

한껏 비웃는 표정을 한 김 감독이 말을 이었다.

“그쪽 조건이 더 좋아서 간 거야.”

빤히 김 감독을 바라보던 가을이 낮은 목소리를 냈다.

“감독님은…… 제가 잘되는 게 싫으세요?”

그 말에 김 감독이 어이없다는 듯 큰소리로 웃었다.

“내가 널 방해하는 거 같아? 뭐, 본인이 엄청 잘될 거 같은가 보지?”

“잘되게, 해 볼 생각입니다.”

김 감독이 대놓고 비웃어도 가을은 동요하지 않았다.

“감독님이 그러셨죠. 연출자는, 작품으로 얘기하는 거라고. 저에 대한 평가는 4부작이 끝나고 해 주세요.”

“강 대표 손에 얻더니 아주 배짱이 좋아졌어. 대체 어떻게 구워삶았길래 여자 때문에 협박도 하고 정신을 못 차리게 하나?”

“협박이라뇨?”

“몰랐어? 너한테 사과하지 않으면 ‘은봉 필름’에 투자 안 한다고 친히 불러서 협박했는데.”

“하.”

가을의 입에서 어이없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사과하신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어요?”

“아니면 내가 왜 사과를 해.”

그런 줄도 모르고 김 감독이 정말 잘못을 시인한 거라 생각했던 가을이 밀려오는 화를 꾹 참아 냈다.

“네 말대로 평가는 4부작 끝나고 하자고. 누구 작품이 더 제대로인지. 재밌겠어.”

한껏 비웃음을 흘린 김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갔다.

Rrrr-

태준의 전화에 발신자를 빤히 보던 가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집에 도착했어요?

“아직이요.”

-아직? 늦게 출발했어요?

“아뇨, 서울에 도착해서 김 감독님 만났어요.”

-아. 그때 그 소문 때문에?

“…….”

-여보세요?

“……대표님.”

-얘기해요.

“김 감독님한테 사과하라고 시키셨다면서요.”

-아…….

잠시 말이 없던 태준의 목소리가 수화음을 타고 흘러나왔다.

-미안해요.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서 내가 나섰어요. 사과를 해야 마땅한 일인데, 그러지 않을 게 뻔해서.

“…….”

-김 감독 같은 사람들은 압력을 받지 않으면 계속 그렇게 행동하거든요.

“…….”

-일 적인 부분이 아니고 김 감독이 개인적으로 잘못한 부분이라 괜찮을 거라고 판단했고.

“…….”

-가을 씨 때문이 아니더라도 또다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걸 대비해서 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

-미안합니다.

김 감독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한 줄 알았던 가을은 남은 촬영을 하는 동안 평소처럼 김 감독을 대했었다.

진심으로 한 사과가 아니라는 것도 모르고 똑같이 행동했던 자신이 바보 같아 화가 났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하. 바보가 된 기분이네요.”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미안해요.

잔뜩 날 선 목소리를 냈던 가을이 제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이렇게 화를 내야 할 대상은 태준이 아니라 김 감독이었다.

“아니에요. ……대표님은 절 위해서 하신 일인데.”

가을이 제 마음을 추스르며 말을 이었다.

“대표님께 화가 난 게 아니라, 뭐랄까. 힘없는 사람은 사과도 힘이 있는 사람 통해서 받는구나 싶어서…… 그게 화가 나네요.”

-이해합니다. 힘이 가해져야 사과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거니까. 가을 씨는…… 마음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잠시 들리지 않던 태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을 씨한테 한 가지 더 얘기할 게 있어요.

“어떤 얘기요?”

-최고은에 관한 얘기입니다. 그게…… 잠시만요.

말을 멈췄던 태준의 목소리가 다시 수화음을 타고 흘러나왔다.

-지금 회의에 들어가야 해서. 이 얘긴 나중에 다시 하죠.

“네.”

전화를 끊은 가을이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최고은이라니. 무슨 얘기일지 궁금해 잠시 생각하던 가을이 이내 가방을 챙겨 들었다.

“후우…….”

가을이 깊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런 일로 감정을 낭비하고 있을 시간에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현명했다.

베테랑인 김 감독을 이길 순 없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마음을 다잡은 가을이 막 횡단보도로 향할 때였다.

‘빵-’

경적 소리에 가을이 고개를 돌리자 골목길에서 나오던 흰색 밴의 보조석 창문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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