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90)

“은서준?”

서준이 해맑은 미소로 가을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얼른 타요.”

“난 정찬 CP님이랑 가기로 했는데.”

“CP님 대신 내가 온 거니까 얼른 타요. 추워요.”

가을이 CP에게 확인하려는 듯 휴대폰을 들었다.

“어제 CP님 만났거든요. 일이 생겨서 선배님 만나기로 한 거 걱정하시길래 내가 대신 온다고 했어요. 뭐, 정 못 믿겠으면 전화해 보든가.”

정찬 CP와 얘기를 한 게 아니라면 여기서 만나기로 한 걸 서준이 알 리가 없다는 생각에 가을이 낮게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근데 넌 스태프들이랑 같이 안 가?”

“워크숍에 무슨 스태프들을 우르르 데리고 가요. 나 혼자면 되지. 얼른 좀 탑시다. 추워 죽겠네.”

서준이 춥다는 듯 몸을 매만지며 성화를 하자 가을이 어쩔 수 없이 보조석에 올랐다.

그 모습에 입꼬리를 올린 서준이 운전석에 올라 내비게이션에 워크숍 장소인 펜션 주소를 치곤 슬쩍 가을을 돌아보았다.

“선배, 어제 라면 먹고 잤어요?”

“어? 안 먹었는데. 부었나??”

가을이 손바닥으로 뺨을 누르는 모습을 서준이 핸들에 팔을 두른 채 은근히 바라보았다.

“땡글땡글한 게 귀엽네.”

“장난칠래?”

“장난 아니고 진짜 귀여워요.”

가을이 내리려는 듯 문손잡이를 잡자 서준이 냉큼 가을의 안전벨트를 잡아 채웠다.

그 탓에 서준과의 거리가 한 뼘도 되지 않게 가까워지자 가을이 슬쩍 몸을 뒤로 빼냈다.

“한번 들어왔으면 못 나가지.”

“너 진짜,”

“출발합니다.”

서준이 입술을 올리며 빠르게 안전벨트를 맨 후 시동을 걸었다.

“음악 좀 틀게요.”

빠른 비트의 음악과 함께 서준의 차가 시원스레 차도를 달렸다.

“근데 진짜 너 혼자 가는 거야? 매니저는?”

“내가 뭐 스타도 아니고, 매니저 없어도 아무 문제 없어요. 가서 회의하고, 밥 먹고 하는 거라면서요.”

어떤 배우든 매니저 없이 행동하는 사람을 보지 못한 가을이 서준을 신기하게 바라보다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참을 달리던 서준의 차가 서울을 벗어났다.

“오늘 날씨 진짜 좋지 않아요?”

“그러게. 좋네.”

갑자기 내려간 온도에 바람은 매서웠지만 새파란 하늘에 몽글한 흰 구름이 사진에서 볼 법한 모습이었다.

“나랑 다른 데 갈래요?”

“안 돼.”

“하하. 안 된다니까 더 하고 싶네.”

서준의 말에 가을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창밖으로 이정표를 확인했다.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은데 내가 그렇게 생각 없는 놈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요.”

빠른 비트의 노래만 흐르던 차 안을 어느새 잔잔한 발라드가 가득 채웠다.

사랑에 관한 노래들이 나오자 저도 모르게 감정이입을 한 듯 가을의 마음이 일렁였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이런 사랑 노래는 질색하던 가을이었다.

“선배, 배 안 고파요?”

“난 괜찮은데. 너 배고파?”

“엄청 고파요. 휴게소에서 뭐 좀 먹고 가요.”

가을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펜션에서 모이기로 한 시간보다 제법 시간 여유가 있었다.

“뭐 먹을래? 내가 가서 사 올게.”

“같이 가요.”

“사람들 알아보잖아. 내가 사다 줄게.”

“오, 이 배려심. 엄청 감동이긴 한데, 나 알아보는 사람 별로 없어서 괜찮아요.”

휴게소 주차장에 여유 있게 주차를 하며 서준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 드라마 대박 나서 사람들이 죄다 알아보게 만들어 줘요.”

가을이 슬쩍 웃으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얼마 뒤. 휴게소 파라솔 테이블에 떡볶이와 튀김, 우동을 놓고 가을과 서준이 자리했다.

“이 집 떡볶이 잘하네. 선배도 얼른 먹어 봐요.”

가을이 떡볶이 하나를 집으며 슬쩍 휴대폰을 보았다.

아침에 늘 ‘일어났냐.’, ‘좋은 하루 보내라.’ 등의 메시지를 보내던 태준의 연락이 없었다.

아직 자나?

그러기엔 늘 6시에 일어나는 태준이라 가을이 신경이 쓰여 휴대폰만 바라보았다.

“연락 올 데 있어요?”

“응? 아니.”

가을이 들고 있던 떡볶이를 냉큼 입에 넣었다.

“어? 맛있네.”

“맛있다니까. 얼른 먹어요.”

휴대폰에서 시선을 거둔 가을이 이내 떡볶이에 집중하자 서준이 그녀의 눈치를 살핀 후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강태준 대표랑은 어떻게 돼 가요?”

“어떻게 되긴 뭐. ……똑같지.”

“아직도 대표 혼자 선배 좋아하나 보네.”

“…….”

서준이 내심 기쁜 표정을 지으며 떡볶이를 집어 입에 넣었다.

“강태준 대표한테도 나한테 했던 것처럼 틈 하나 안 주면 좋겠는데.”

“내가 너한테 그 정도로 했나?”

“그랬죠. 그래서 상처 많이 받았지.”

서준이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선배를 맹목적으로 좋아한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시간이었어요.”

“…….”

“선배 엄청 좋아했어요, 나.”

“…….”

“선배 눈짓, 손짓 하나에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가, 어떤 날은 펑펑 울었다가, 내 세상이 모두 선배 위주로 돌아갔으니까.”

서준이 새빨개진 얼굴을 가라앉히려는 듯 고개를 돌려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했다.

“부끄러워 죽겠네.”

학창 시절부터 직진밖에 몰랐던 서준이 의외로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자 가을이 슬쩍 입술을 올렸다 내려놓았다.

서준이 파라솔 테이블에 천천히 팔을 올리며 가을을 빤히 쳐다보았다.

“가장 순수했던 때예요. 그때가.”

가을에겐 선호 일로 힘들어 다른 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어떤 건지 알게 된 가을은 어쩐지 서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말 이제 와 우습긴 한데…… 미안했어.”

“미안하긴요, 고맙죠. 그런 경험을 하게 해 줘서.”

해사하게 웃는 서준의 미소에 가을이 화답하듯 연한 미소를 보냈다.

“그래서 그런가. 선배 볼 때마다 마음이 그때로 돌아가요. 설레고. 두근거리고.”

“…….”

잠시 말을 하지 않던 서준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선배.”

서준이 평소와는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가을을 응시했다.

“난 여전히, 선배가 좋아요.”

“……서준아, 나는,”

“바로 거절하지 마세요.”

“…….”

“나한테도 강태준 대표만큼만, 기회를 줘요.”

“서준아.”

“아니면 4부작 촬영할 때까지만이라도 날 생각해 줘요.”

서준의 애절한 눈빛에 가을이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여기서 거절하면 드라마를 찍는 내내 서로 불편하겠지만 그렇다고 가망이 없는 일에 여지를 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생각을 굳힌 가을이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서준아. 난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도 사귀고 싶지 않아.”

이 말은 태준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자신이 태준을 좋아하고, 태준 역시 자신을 좋아한다고 해도, 가을에게 이별은 두려운 일이었다.

“눈 딱 감고, 나 한 번만 제대로 봐 주면…… 안 되나.”

가을이 뭐라고 얘기하려 하자 서준이 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서준이 앞에 놓인 음식을 집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선배. 이거 하나만 알아 둬요.”

“…….”

“난 직진밖에 모르는 놈인 거.”

그 사실은 가을이 잘 알고 있었다. 그 시절의 서준은 1년 내내 직진만 했으니까.

가을이 아무리 거절을 해도 서준은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일 스타일이었다.

“은서준 아니야?”

“진짜?”

그때, 몇몇 사람들의 말소리와 함께 두 사람에게 이목이 쏠렸다.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서준의 말과 달리 단번에 그를 알아보는 여자들이 수군거리자 서준이 고개를 돌렸다.

“어머 어머, 난 몰라. 진짜 은서준이네.”

“사진 좀 찍어 주세요~~.”

서준이 사람 좋은 미소로 여자들과 사진을 찍어 준 후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여자들이 가을과 서준을 번갈아 가며 보다 자리를 벗어났다.

“괜히 의심받는 거 아니야?”

“의심받는 김에 사귀면 좋고.”

가을이 가늘게 눈을 흘겼다.

“걱정 말아요. 오늘 드라마 관계자분들이랑 워크숍 간다는 거 공식 아웃 스타에 이미 올라갔으니까.”

가을이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서준이 그런 가을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얼른 먹어.”

가을의 말에 애써 미소를 보인 서준이 음식을 집었다.

얼마 후.

가을이 2층으로 된 단독 펜션에 도착했다.

이미 도식을 비롯해 혁진과 지영, 주연 여배우인 보라와, 작가, 몇 명의 피디, 스태프들, 배우들이 도착해 있었다.

가을이 도착하자마자 도식이 잔뜩 궁금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정찬 CP랑 같이 온다더니 어떻게 둘이 와? 선후배 사이라더니 친했나 봐?”

“제가 엄청 존경하던 선배님입니다.”

서준의 말에 여기저기서 ‘오~~’ 하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뭘 어떻게 했길래 엄청씩이나 존경을 했을까.”

도식의 말에 서준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한번 정하면 앞뒤 안 가리는 모습이 멋있잖아요.”

낮게 고개를 젓던 가을이 서준을 돌아보았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얼른 가서 짐 풀어.”

덩치는 가을의 두 배는 될 듯한 서준이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바로 걸음을 옮기자 도식이 따라와 은근한 목소리를 냈다.

“우리 정 감독 존경하게 된 얘기는, 이따 식사하면서 제대로 하자고.”

“예.”

웃어 보인 서준이 2층으로 올라가자 가을이 스태프들을 둘러보았다.

“자자, 다들 짐 정리하시고 11시 30분까지 모여서 회의 진행하죠.”

가을이 짐을 풀기 위해 2층으로 향하자 그 모습을 보던 도식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강 대표 긴장해야겠네.”

존경이라는 표현을 했지만 가을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도식이었다.

“전 대표님께 한 표요.”

냉큼 도식의 곁으로 온 혁진이 물어보지도 않은 투표권을 행사했다.

그 옆으로 다가와 선 지영은 자신의 일도 아닌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누굴 골라야 하지.”

촬영장에서 생기는 연애 문제에 눈치가 빠른 세 사람이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그나저나 오늘 점심은 뭐야.”

늘 가을에게 질문을 하던 도식이 이젠 혁진에게 식사 일정을 물었다.

“점심은 마당에서 가볍게~ 삼겹살 어떠세요?”

말이 드라마 회의였지, 서로 친분을 익히기 위한 단합회나 다름없어 먹을 음식을 가득 준비해 온 사람들이었다.

“그럼 저녁은?”

“저녁은 무겁게~ 바베큐로 준비했습니다.”

“오오오 좋아. 마음에 들어.”

혁진과 도식이 서로에게 엄지를 들어 보이며 만족한 표시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찬 CP가 음식이 가득 든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손에 들고 거실로 들어왔다.

“아이고, 한참 늦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이 일찍 끝나서 다행이지 뭐야.”

“이게 다 뭐예요?”

혁진이 빠르게 다가와 아이스박스를 챙겨 들었다.

“와이프가 이거저거 싸 줬는데 나도 잘 모르겠네. 1박 2일인데 뭔 피난용 음식을 싼 건지.”

그때 가을이 2층에서 내려오자 정찬 CP가 가을에게 향했다.

“정 감독, 서준이랑 같이 온 거지?”

몇 번의 회식 자리로 친해져 살갑게 서준의 이름을 부르게 된 정찬 CP였다.

“CP님 일이 생기셨다고 해서요.”

“어, 그것 때문에 정 감독 데려갈 시간이 안 될 것 같았거든.”

정찬 CP가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이 나는지 손으로 얼굴을 슥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어제 우연히 만났는데 다행히 서준이가 오늘 정 감독이랑 같이 가겠다고 해서 말이야.”

“네.”

“말도 없이 미안해.”

“아유, 아니에요.”

가을이 웃어 보이곤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Rrrr-

휴대폰 벨소리에 발신자를 확인한 가을이 사람들과 떨어진 곳으로 향하며 전화를 받았다.

발신자에 태준의 이름이 뜬 것만으로도 심장이 뛰었다.

“여보세요?”

-펜션에 도착했어요?

대표답게 ‘거기에 네가’ 관련 스케줄은 모두 꿰고 있는 태준이었다.

연락이 없어 내심 신경을 쓰고 있던 가을이 태준의 목소리에 입술이 올라가려는 걸 참아 냈다.

사귈 마음이 없으면 밀어내야 하는데, 서준에게 하던 것과 달리 태준에게는 그게 되지 않았다.

“네, 지금 도착했어요.”

-잠깐 나올 수 있어요?

“네?? 어딜요?”

-주차장 있는 곳으로 와요.

“지금이요?”

-예. 끊어요.

전화가 끊기자 가을이 뭔가 싶어 펜션 주차장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설마 태준이 왔나 싶어 가을이 두리번거리자 주차장에 서 있던 고급세단 운전석 문이 열리며 연한 브라운 브이넥 티셔츠에 베이지색 슬랙스를 입은 태준이 차에서 내렸다.

가을이 놀라서 말을 하지 못하는 사이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태준이 가을에게 향했다.

두툼해 보이는 체크 남방에 청바지,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에 화장기라고는 전혀 없는 피부.

여전히 꾸미지 않은 가을의 모습을 바라보며 태준이 가을의 앞에 다가와 섰다.

당황한 가을의 표정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 태준이 낮은 목소리를 냈다.

“보고 싶었어요.”

“…….”

두근거림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동안 참았거든.”

태준이 보기만 해도 설레는 미소를 지었다.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어서.”

찬 바람에 섞인 태준의 체취와 환한 미소가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가을의 마음을 밀고 들어왔다.

며칠 만에 보는 태준의 모습에 멋대로 뛰는 심장과 달리 가을이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보고 싶다’거나, ‘좋아한다’는 말은 ‘계약 짝사랑’을 하던 때부터 태준이 하던 말이었다.

그때마다 진심 같아 가을은 태준의 연기에 감탄했었다.

그런데 지금, 같은 말을 하는 태준의 눈빛은 그때와는 사뭇 달랐다.

좀 더 깊고, 그윽한. 따듯함이 묻어난 눈빛이었다.

“내일까지 출장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여기 오려고 서둘렀어요.”

출장을 가 있는 동안 태준은 오늘 하루 시간을 내기 위해 평소보다 더 열심히 일을 했다.

오늘 새벽에 입국해 회사에 들러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쉴 사이도 없이 바로 이곳까지 온 상태였다.

워크숍 명단에 여자들이 꽤 보여 걱정은 됐지만 가을과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다른 건 모두 차치했다.

“설마, 대표님도 워크숍에 참석하시려고요?”

태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치 회사 직원들이 놀러 온 자리에 사장이 함께하는 분위기가 될까 봐 가을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돌아가라고 할 건 아니죠?”

“…….”

“이대로 가게 되면, 가을 씨 태우고 같이 갈 거예요.”

“저, 대표님,”

“안 된다고 하지 말아요.”

태준이 청아하게 미소지었다.

“어떤 불이익이 있을 줄 알고.”

태준이 장난이 섞인 말투로 전혀 협박 같지 않은 근사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빨개진 얼굴이 들킬 것 같아 가을이 펜션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불편해할 텐데.”

“걱정하지 말아요. 난, 가을 씨만 볼 거니까.”

“아니, 그래도 사람들이…….”

“어? 대표님.”

“강 대표~.”

마당을 나오다 태준을 발견한 도식과 혁진, 스태프들이 빠르게 태준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태준이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혁진의 말에 가을이 뭔가 싶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돌아보았다.

“아, 그게 대표님이 꼭 비밀로 해 달라고 하셔서요.”

워크숍에 참석해 스태프들에게 깜짝 선물을 주고 싶다며 태준은 조연출인 혁진에게만 얘기를 전달한 상태였다.

그래서 일정을 잡는 내내 혁진은 태준이 올 것을 예상해 워크숍을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도식과 지영을 비롯해 대부분의 스태프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안이었다.

눈치 빠른 혁진은 태준이 비밀로 해 달라는 게 가을을 향한 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와서 괜히 폐가 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태준의 말에 도식과 혁진, 스태프들이 연신 손사래 쳤다.

“아이고~~ 무슨 소리예요, 강 대표가 와 주면 우리야 고맙지.”

“잘 오셨습니다~!”

“환영합니다, 대표님!”

환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가을이 기막힌 표정을 짓자 그런 가을을 향해 태준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얼마 뒤.

회의가 이어지는 내내 태준은 정말 너무 열심히 가을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태준의 등장을 못마땅해하던 서준은 그런 태준의 모습을 은근히 노려보았다.

“자, 그럼 회의는 여기서 마치고 조금 쉬었다가 다들 점심 식사하죠.”

가을의 말에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자 눈치를 보던 지영이 혁진에게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꽃 같은 남자 두 명이 가을 언니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이라니. 아름답지 않아?”

“아름다운 건 모르겠고, 흥미롭긴 하네.”

“완전 꿀잼각.”

“누가 이길 거 같아?”

혁진의 말에 지영이 슬며시 서준의 모습을 훑었다.

“은서준 쪽 서사가 더 좋긴 한데. 학교 선후배 사이라니. 뭔가 아련하달까? 설렌달까?”

“쟨 군대 갔다 와야 해.”

“벌써 갔다 왔거든.”

혁진이 그새 다 알고 있냐는 눈빛을 보내자 지영이 어깨를 으쓱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정 감독님~”

“네!”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가을이 밖으로 향하자 커다란 1층 거실에 태준과 서준만 남았다.

그 모습을 보던 태준이 스태프들이 마당에 음식을 차리는 걸 도와줄까 싶어 몸을 돌렸다.

“되게 한가하신가 봐요?”

서준의 날 선 목소리에 태준이 걸음을 멈췄다.

“무슨 상관이지.”

“상관있죠.”

가을을 다시 만난 후로 자꾸만 가을이 생각나 서준은 일부러 매니저를 두고 혼자 워크숍에 참석했다.

단둘이 여행을 가자고 하면 절대 가지 않을 걸 알고 있는 서준은 여행의 느낌이 물씬 묻어나는 워크숍에서 가을에게 다가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나타난 태준의 등장으로 계획에 차질이 생겨 잔뜩 날이 선 상태였다.

“제가 선배님과 잘해 보고 싶거든요.”

서준의 말에 태준의 미간이 거칠게 꿈틀거렸다.

“과거형으로 끝내라고 했을 텐데.”

“사람 앞일은 모르는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가을 씨를 좋아한다는 뜻인가?”

“예.”

마당에 모인 사람들이 점심을 준비하며 화기애애한 목소리를 낼 때,

가을을 사이에 둔 두 남자의 눈빛이 뜨겁게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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