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쉬는 것도 잊을 만큼 놀란 가을이 커다래진 눈만 깜빡거렸다.
자신의 손안에 감겨 있는 가을의 작은 손을 바라보던 태준이 이내 고개를 들어 가을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 손을, 놓지 않고 싶어졌어요.”
갑작스러운 태준의 고백에 놀라서 언 듯이 서 있던 가을이 손을 빼내려 하자 태준이 더 힘껏 가을의 손을 당겨 잡았다.
“열심히 밀어내요.”
“…….”
“더 열심히 다가갈 테니까.”
태준에게 잡혀 있는 손을 보며 입술을 말아 물던 가을이 이내 작은 목소리를 냈다.
“……저는. 저는 누굴 만날 자신이 없어요…….”
“…….”
“또다시 누군가 떠나는 걸 견딜 자신이 없어요…….”
혼자 남겨졌던 아픔이 떠오른 듯 숨을 한번 몰아쉰 가을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루아침에 사라질까 봐 매 순간을…… 두려워하면서 지내고 싶지 않아요.”
“난 사라지지 않아요.”
“…….”
“떠나지도 않을 거고.”
가을이 겪은 가정사, 믿고 의지하던 선호가 실종된 얘기를 들으며 누구보다도 마음이 아팠던 태준이었다.
혼자 남겨진 게 뭔지.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볼 수 없는 게 어떤 마음인지. 애란을 떠나보낸 태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날 좋아해 달라고 강요하는 거 아닙니다.”
“…….”
“내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얘기하는 거예요.”
“진심이었던 마음도 끝은 언제나 똑같아요. 증오하고 미워하고 결국 헤어지고. 대표님 마음도 그럴 거예요.”
“변하지 않는 마음도 있다는 걸 내가 증명해 보일게요.”
“…….”
“나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내가 좋아지면 그때…….”
가을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온 태준이 잡고 있는 가을의 손을 자신의 앞으로 당겨왔다.
“나한테 와요.”
진심을 전하는 태준의 눈빛이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가을의 눈빛과 맞닿았다.
두근. 두근. 두근.
가을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태준의 눈길을 피하며 시선을 내린 가을이 손을 빼내려는 듯 힘을 주자 태준이 그제야 가을의 손을 놓아주었다.
“계약을 어기면 생각보다 더 큰 불이익을 당하게 될 거라는 말. 기억하죠?”
가을이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는 돼 있어요?”
“……네??”
“계약을 먼저 깬 건 가을 씨예요.”
“지, 지금은 대표님이 깨신 거잖아요.”
당황하는 가을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태준이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먼저 얘기한 사람은 가을 씨죠.”
“그건…….”
“내가 한 번 더 물었는데. 계약을 끝내자는 생각은 변함없냐고.”
“…….”
“가을 씨가 변함이 없다고 했고.”
“…….”
“난 어쩔 수 없이. 동의한 겁니다.”
“……그래서 어떤 불이익을 주실 생각인가요……?”
가을이 걱정이 되는지 말끝을 흐리자 태준이 느슨히 풀려 있던 넥타이를 반듯하게 올렸다.
“일단, 가면서 생각해 보죠.”
“네?”
“약속 장소까지 바래다줄게요.”
“아뇨, 저 혼자,”
“불이익의 정도가 달렸는데.”
“…….”
“앞으로 가을 씨가 어떻게 하는지 봐서, 결정할 생각이거든요.”
아무렇지 않게 협박을 하며 청초하게 웃는 태준을 보며 가을은 자신의 앞날을 예상했다.
이런 식으로 협박하며 꼼짝 못 하게 할 것이란 걸.
얼마 뒤.
가을이 자신의 집과 멀지 않은 주택가 골목길을 천천히 걸으며 뻐근해진 목을 연신 주물렀다.
태준과 함께 차를 타자 심장이 멋대로 튀어나올 것 같아 계속 창문만 봤더니 왼쪽 목에 담이 올 지경이었다.
애써 모르는 척했지만 자꾸만 자신을 쳐다보며 운전을 하는 태준 때문에 화끈거림이 더해져 차에 있는 내내 긴장까지 해야 했다.
그대로 있다간 안 될 것 같아서 창밖으로 보이는 카페가 약속 장소라고 둘러댔다.
며칠 출장을 가야 한다며 아쉬운 목소리를 내던 태준이 돌아간 후 가을은 휴대폰으로 위치를 검색해 몇 번의 버스를 갈아타고 동네로 왔다.
태준이 퇴근해 산장 빌라로 오면 마주 볼 자신이 없어 그대로 가영의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골목 꼭대기에 위치한 낡은 4층짜리 빌라 옥탑이 가영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단독으로 옥상을 쓸 수 있다는 말에 다른 단점을 죄다 무시하고 바로 계약을 했던 가영은 날씨가 좋을 때면 한 번씩 옥상에서 고기 파티를 열었다.
“후우…….”
가을이 떨림이 묻어난 깊은숨을 내쉬었다.
[내가 아주 많이, 좋아합니다.]
‘찰싹.’
가을이 실감이 나지 않아 제 뺨을 세게 쳤다.
“아야…….”
아픔이 느껴지는 걸 보니 꿈은 아니었다.
태준의 고백을 듣는 순간 자꾸만 다리에 힘이 풀려 가을은 넘어지지 않게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야 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벅찰 정도로 뛰었다.
하지만 이런 설렘 뒤에 올 영원하지 않은 감정이 더 두려웠다.
지금은 좋아한다고 하지만 언젠가 태준의 마음이 변해 자신을 떠나간다면, 견딜 수 있을까.
거기다 찬영의 말처럼 자신과는 사는 세상이 다른 사람이었다.
마음을 자각한 것만으로도 벅찬데 태준의 마음을 확인하자 설렘과 함께 두려움으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영원하지 않을 감정이라면 태준을 피해야 한다고 제 안의 보호막이 소리쳤다.
사람에게 상처받지 않으려면, 상처받지 않을 정도만 마음을 주면 되는 일이었다.
한 번 마음을 주면 둑이 넘쳐흐르듯 모든 걸 내어 주는 자신의 성격을 아는 가을은 언제나 견고하게 둑을 쌓았다.
그동안은 아무 문제 없이 잘해 오던 일이었다.
하지만 턱 끝까지 차오른 태준을 향한 마음은 자꾸만 입 밖으로 넘치려 했다.
Rrrr-
가영에게 걸려 온 전화에 가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가영아.”
-언니 지금 어디야?
“거의 다 왔어.”
-진짜 미안한데, 친구가 교통사고 당했다고 연락이 와서 지금 병원에 가고 있거든.
“그래? 많이 다쳤대?”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암튼 사장님이랑 맛있게 먹어.
“의찬이 벌써 와 있어?”
-언니 오기 전에 고기 구워 놓고 있으려고 일찍 불렀거든. 암튼 미안해. 어어, 버스 버스.
툭- 전화가 끊겼다.
가영의 집에서 혼자 고기를 굽고 있을 의찬을 생각하며 가을이 걸음을 서둘렀다.
얼마 뒤.
주인도 없는 집 옥상에서 가을과 의찬이 돗자리를 깔고 삼겹살을 먹는 중이었다.
불판 위에 삼겹살이 각이라도 잰 듯 줄을 맞춰 있고, 그 옆으로 김치, 마늘, 등등이 보기 좋게 배열되었다.
고기 굽기의 정석을 보여 주듯 야무지게 고기를 구우며 자신 쪽으로 오는 연기를 손으로 휘휘 젓던 의찬이 갑자기 현실 타격이 온 듯 낮게 한숨을 쉬었다.
“초대한 놈은 없고. 난 고기나 굽고 있고. 이게 대체 무슨 짓일까.”
“그러게 그냥 가자니까.”
“구워 놓은 거 아깝잖아. 삼겹살은 구웠을 먹어야 맛있지.”
빨리 오라고 성화를 하는 가영의 말에 삼겹살을 비롯해 갖은 음식을 준비해서 온 의찬은 가을이 올 시간에 맞춰 세팅을 하고 고기를 굽다가 갑자기 나가야 한다는 가영의 말에 덩그러니 혼자 옥상에 남아 있던 상태였다.
“진짜 뉘 집 자식인지 끝내주게 잘 굽지 않아?”
“인정.”
의찬이 잘 구워진 삼겹살을 가을의 그릇에 올려 주었다.
“맛 어때?”
“좋아.”
의찬이 능숙한 솜씨로 고기를 뒤집었다.
“지난번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특별히 흑돼지 삼겹살로 사 온 거야.”
자기 물건 사는 데는 오천 원도 아까워하는 가을이 제주도에서 사 온 선물에 의찬은 큰 감동을 받았다.
그 뒤 잔 세트를 가보로 물려주겠다는 둥, 가게에 특별 진열장을 만들어 진열을 해 두겠다는 둥, 하며 선물에 큰 만족을 보인 의찬이었다.
작게 잘라진 고기를 쌈장에 찍어 먹던 가을이 의찬의 접시에 고기를 올려놓았다.
“너도 좀 먹어.”
“너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웃기지 말라고.”
“웃겼어?”
“웃겼지 그럼.”
“웃긴 걸로 만족.”
“왜 안 먹는데.”
“아까 친구 만나서 점심을 늦게 먹었어.”
“근데 왜 이렇게 많이 사 왔어?”
“너랑 가영이 먹이려고.”
“하여간 김의찬, 내 친구지만 참 좋은 놈이야.”
“알면 팍팍 먹어. 오늘 왜 이렇게 못 먹어?”
좋아하는 삼겹살을 눈앞에 두고도 가을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중이었다.
“연출하는 거 때문에 그래?”
“뭐, 그것도 그렇고.”
디링-
가을이 메시지 음에 혹시 태준의 연락일까 싶어 저도 모르게 재빨리 휴대폰을 확인했다.
[사장님이랑 잘 먹고 있어?]
가영의 메시지에 가을이 답변을 보낼 때였다.
디링-
[지금 뭐 해요? 저녁은 먹었어요?]
태준에게 온 메시지에 가을의 손끝이 떨려 왔다.
“가영이야?”
“어?”
의찬이 잘 익은 김치를 접시에 덜어 놓으며 무심히 가을의 얼굴을 보았다.
“응, 가영이. 너랑 잘 먹고 있냐고.”
“친구는 괜찮은지 물어봐 봐.”
가을이 의찬의 말처럼 친구 상태를 물어본 후 여긴 신경 쓰지 말고 친구 잘 챙겨 주고 오라는 답변을 보냈다.
슬쩍 의찬의 눈치를 본 가을이 태준에게도 답변을 보냈다.
[지금 먹는 중이에요.]
디링-
[맛있게 먹어요. 이따 다시 연락할게요.]
태준의 메시지를 물끄러미 보던 가을이 낮은 목소리를 냈다.
“의찬아.”
“어.”
“네가 여자친구를 몇 번이나 사귀어 봤지?”
“갑자기 그건 왜.”
가을이 젓가락으로 즉석밥을 툭툭 건드렸다.
“사귈 때 말이야.”
“응.”
“무섭지 않았어?”
“어떤 부분이?”
“……아무리 좋아해도 결국 이별하잖아. 절절했던 마음도 언젠가는 식고.”
가을이 바닥에 내려놓은 휴대폰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대론데 상대방 마음이 변해서 떠나면…… 그땐 혼자 남겨지는데…… 그런 거 무섭지 않아?”
의찬이 불판에 불을 줄이고 고기 집게를 내려놓았다.
“무섭지.”
“…….”
“내 마음은 그대론데 상대가 변한 게 느껴지면 매 순간 마음 졸이고, 걱정하고, 눈치만 보다가 결국 이별 통보받으면. 힘들지.”
의찬이 앞에 놓인 음료수를 쭉 들이켜고 내려놓았다.
“그런데 난 끝을 생각하고 시작하지 않으니까.”
“…….”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어디 있겠어. 매 순간, 내 감정에 최선을 다하면서 사는 거지.”
슬쩍 가을의 눈치를 살핀 의찬이 말을 이었다.
“너무 겁먹지 마.”
“…….”
“인생 뭐 있냐. 이 사람 못 보면 죽을 것 같다. 이러면 올인하는 거지.”
가을을 향해 씨익 웃어 준 의찬이 커다란 쌈을 싸 가을에게 건넸다.
“넌 생각이 너무 많아, 인마. 단순하게 생각해.”
의찬이 건넨 쌈을 받아 입에 넣으며 가을이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의찬의 말뜻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가을에겐 아직 ‘사랑’이라는 감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 * *
가을이 맡은 4부작 ‘여기에 네가’ 1박 2일 워크숍 일정으로 아침 일찍 일어난 가을이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주요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단합 및 회의를 위해 가는 일정이었다.
태준과 ‘계약 짝사랑’을 끝낸 가을은 본래 ‘여기에 네가’ 연출자 자리에서 물러나려고 했었다.
자신을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미안한 일이었지만 ‘계약 짝사랑’이 끝이 났으니 그 조건으로 맡게 된 연출 자리를 내려놓는 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준은 어차피 가을의 능력으로 얻은 자리나 마찬가지라며 그대로 하라고 거듭 강조했다.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건지 고민을 하던 가을은 자신을 믿고 와 준 사람들을 생각해 태준의 의견을 따랐다.
가을이 휴대폰을 집어 스태프들에게 연락이 온 게 있는지 확인한 후 후드점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출장을 가 있던 태준은 ‘계약 짝사랑’을 할 때보다 더 부지런히, 더 열심히 연락을 해 왔다.
가을이 답변을 제대로 하지 않아도 개의치 않고 끊임없이 문자며 전화를 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라면 늘 하던 ‘보고 싶다.’라는 말을 보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계약 짝사랑’을 할 때와, ‘진짜 짝사랑’을 할 때. 태준이 보내는 메시지의 내용은 같았지만, 어딘가 느낌이 달랐다.
태준의 고백 이후 오는 메시지들에는 떨림이 묻어난 느낌이었다.
그 메시지를 보는 가을의 마음속 떨림도 더 깊어졌다.
밀어내야 한다는 마음과 달리 가을은 쉽게 태준을 밀어내지 못했다.
지금은 계약인 상태가 아니었다. 의무적인 상황이 사라졌으니 언제든 태준과의 관계가 끝날 수 있었다.
밀어내야 하는데, 밀어내면 태준을 보지 못할까 봐 두려운 이중적인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가을이 꼼꼼히 챙긴 커다란 백팩을 메고 현관을 나섰다.
가을의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정찬 CP의 차를 타고 워크숍 장소까지 함께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빌라를 나서며 시간을 확인한 가을이 걸음을 서둘렀다.
8시에 버스정류장 근처 편의점 앞에서 정찬 CP를 만나기로 한 상태였다.
“아으, 춥다.”
10월의 날씨를 만끽할 새도 없이 갑자기 훅 떨어진 온도에 가을이 옷을 꽉 여몄다.
10여 분 내려가 편의점 앞에 도착한 가을이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7시 50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빵-’
경적 소리에 가을이 고개를 들자 스포츠카 운전석에서 흰색 맨투맨 티에 흰 모자, 무릎이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훤칠한 키의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