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90)

‘세양 그룹’ 회장실 안.

문규와 태준이 소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얼마 전 문규는 자신의 생일날 몸이 아프다고 자리를 벗어났던 태준이 집이 아니라 가을을 만나러 제주도에 갔었다는 사실을 찬영에게 전해 들었다.

가을의 옆집으로 이사를 한 것으로도 기함할 노릇이었는데 가을을 만나러 그 시간에 제주도에 갔다는 얘기를 들으니 태준의 행동들이 더 이상 거짓말이라고 의심하기 어려웠다.

거기다 태준이 가을을 데리고 ‘희망 병원’ 응급실에 왔었다는 사실까지 보고받은 상태였다.

며칠간 태준을 지켜보다가 혼자 애태우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아 부른 참이었다.

“얼마 전에 가을 양 데리고 응급실에 갔다던데. 몸이 그렇게 약해서야 원.”

당연히 문규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태준이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를 냈다.

“괜찮다는 걸 제가 억지로 데려간 거예요.”

“쯧쯧쯧-. 이렇게 지극정성인데도 네가 싫다는 게야?”

잠시 말을 하지 않던 태준이 이내 입을 열었다.

“제가 많이 부족해요.”

“네가 뭐 부족해.”

문규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썹을 쓸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밝은 가정에서 자란 여자를 만나야 하는 게다. 가정환경이 그러니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게야.”

“그래서 제가,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요.”

대답하고 멈칫. 태준이 자신이 한 말을 되뇌었다.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그냥 연기일까.

단순히 착각에 불과한 감정일까.

“일전에 얘기한 대로 반대할 생각은 아니다만, 좀 더 좋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아가씨를 만났으면 싶은 게 할애비 맘이다.”

“그건, 가을 씨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부모 마음이라는 게 다 그런 게야.”

“가을 씨…… 좋은 사람이에요, 할아버지.”

가을을 떠올리며 태준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씩씩하고, 밝고, 따듯하고…….”

잠시 말을 멈춘 태준이 그동안 자신이 느껴 온 가을에 대한 얘기를 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울어 주기도 하고…… 힘을 주기도 하고……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자신의 힘으로 해내려는 멋있는 여자예요.”

문규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가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하는 말과도 같았다.

한결같은 태준의 모습에 천천히 턱을 쓸어내린 문규가 나직한 목소리를 냈다.

“언젠가 정열이가 그러더구나. 자기가 가진 걸 다 버리고 네 엄마에게 가고 싶었다고 말이다.”

“…….”

“혹시라도 말이다. 가진 걸 다 내어놓으라고 하면, 어쩔 셈이냐.”

“…….”

“정열이처럼 너도 다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게야?”

다 버릴 각오.

오직 ‘세양 그룹’ 후계만을 위해 달려온 세월이었다.

그런 자신의 인생에 들어온 정가을이라는 여자.

그 여자를 위해. 자신이 인생에 건 모든 걸, 버릴 수 있을까.

Rrrr-

휴대폰 벨소리에 생각을 멈춘 태준이 슈트 재킷에서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전화 좀 받을게요.”

문규가 고개를 끄덕하자 태준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오늘 오후 5시에 정가을 씨, 4부작 회의 일정이 잡혔습니다.

“그래?”

-긴급 안건으로 잡힌 일정 같은데 그 시간 스케줄, 어떻게 할까요.

“취소해.”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 태준이 전화를 끊었다.

“뭐 좋은 전화인 게야?”

“예?”

“무슨 전환데 그렇게 웃는가 싶어서 말이다.”

문규의 말에 태준이 머리에 뭔가를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웃었습니까?”

“웃더구나.”

그저 가을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보고 싶어서. 며칠이 1년 같아서. 가을을 볼 수 있다는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들떴다.

뭔가에 이렇게 들뜬 적이 있었나.

자신이 들떴던 일은, 모두 가을과 연관된 일이었을 때뿐이었다.

태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내가 진심이 되면, 감당할 수 있겠어요?]

진심이 아니길 바랐던 마음은 이미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진심이었다.

지킬 수 있을까가 아닌. 지키고 싶다.

감당할 수 있을까가 아닌. 뭘 잃더라도 얻고 싶은.

그런 마음이 뭔지.

혼란했던 마음의 답이 내려졌다.

‘STN’ 방송국 안.

가을이 드라마국 회의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주연 여배우가 결정되면서 소속사 측에서 대본 내용 중 몇 곳을 고쳐달라 요구해 작가와 몇 명의 피디, 소속사 직원과 함께 하는 회의였다.

드라마국 회의실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장소를 바꿀 수가 없었다.

“후우…….”

어젯밤 가영의 집에서 밤새 잠을 설쳐 피로함이 몰려온 듯 가을이 연신 어깨를 주물렀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여기저기서 삐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태준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곳이었지만 산만한 가영의 성격 때문에 요즈음 정신이 쏙 빠지고 있었다.

디링-

[언니 오늘 삼겹살 먹자! 사장님이 언니 오면 게임기 가져온대.]

얼마 전에 가영의 집에서 술을 마실 때 최신형 게임기를 샀다고 밤새 자랑하더니 결국 가져올 모양이었다.

밤새 떠들고 게임을 할 두 사람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선택지가 없는 가을이 답변을 보냈다.

[알았어.]

끊어 내기 힘든 태준의 생각을 할 바에야 정신이 쏙 빠지는 두 사람과 함께 있는 게 나았다.

디링-

[오늘도 불태워 보자!]

오싹한 가영의 답변을 보던 가을이 태준이 보낸 메시지 창을 터치했다.

계속해서 보내는 태준의 메시지에 단답식으로 보낸 자신의 메시지가 보였다.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거나, 답변을 보내지 않으면 태준이 괜한 걱정을 할까 싶어 짧게 대답만 보내던 상태였다.

가을이 어젯밤 마지막으로 온 태준의 문자를 보았다.

[알았어요. 잘 자요.]

메시지를 본 순간 마음이 욱신거려 가을은 어떤 답변도 보내지 못했다.

“후우…….”

가을이 바닥만 본 채로 걸으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방송국으로 향하기 전 혹시 태준이 회의실에 찾아올까 싶어 가을은 자신이 본 가장 무서운 영화를 떠올리는 연습을 했다.

아무리 피한다고 해도 ‘계약 짝사랑’을 끝내지 않는 이상 태준과 만날 일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 그때마다 그 영화를 떠올릴 생각이었다.

Rrrr-

그때,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번호를 보자마자 가을은 단번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오늘은 정신 차리고 서준의 번호를 저장해야겠다고 생각한 가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선배 뭐 해요?

가을이 연락처를 알려 주고 난 후 화보 촬영차 유럽에 갔던 서준은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왔다.

그 후 가을은 한국으로 돌아온 서준과 드라마와 관련된 일로 몇 번의 만남을 가졌었다.

“지금 회의 가는 중인데.”

-끝나면 뭐 할 거예요?

가을이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향해 빠르게 뛰어 열림 버튼을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약속 있어.”

-약속 끝나고는?

“집에 가야지.”

-그럼 회의 끝나면 얼굴 한 번만 보여 줘요. 방송국 근처니까 기다릴게요.

가을이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뚝’ 전화가 끊겼다.

“하, 정말 얘는.”

가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을을 쫓아다니던 시절에도 서준은 늘 이렇게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띵- 3층입니다.]

가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계단으로 올라와 복도를 걷던 도식이 빠르게 다가왔다.

“여~ 정 감독.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뇨. 근데 감독님은 오늘 무슨 날이에요?”

190센티의 장신인 도식이 평소 입지 않은 슈트를 쫙 빼입은 모습을 가을이 빤히 바라보자 도식이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와이프 생일. 사람답게 입고 나오라잖아.”

“진짜 멋있어요.”

“내가 어디 가서 꿀릴 인물은 아니지.”

가을이 인정하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어디 가실 거예요?”

“오늘 같은 날은 고기 좀 썰어야겠지?”

가을이 입 모양으로 ‘오~’를 연발하며 회의실로 향했다.

“참, 김 감독한테는 연락해 봤어?”

“네.”

“뭐래.”

“‘STN’에서 쫓겨났다는 소문 감독님도 들으셨는데 사람들한테 아니라고 얘기하셨대요. 어디서 퍼진 건지 감독님도 잘 모르겠다고요.”

“음.”

“자세한 건 나중에 만나서 얘기하기로 했어요.”

전화로 꺼내기엔 민감한 얘기라 만나서 얘기하자는 가을의 말에 통화로 짧게 소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김 감독이 촬영 문제로 지방에 내려갔다며 나중에 연락하자는 얘기를 했다.

“김 감독 만날 때 강 대표랑 같이 가지 그래.”

“제 일인데요.”

“든든한 사람이 옆에 있는데, 이럴 때 써먹으면 얼마나 좋아.”

가을이 슬쩍 미소를 짓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뒤.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회의가 시작되었다.

“납득할 만한 부분은 수정의 여지가 있지만 그 외 부분은 수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여자 주인공인 보라의 소속사에서 요구한 부분에 대하여 가을이 확실한 제 목소리를 내자 소속사 직원이 태블릿 PC에 체크해 온 부분을 다시 짚었다.

“1부에 신 60부터 여주가 뛰거나 비를 맞거나 고생을 하는 신이 많은데 그 부분은 못 줄입니까? 굳이 그런 고생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소속사 직원의 말에 가을이 작가를 돌아보았다.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

“제가 생각할 땐 꼭 필요한 장면이라서…….”

소심한 성격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작가의 말에 가을이 자신의 목소리를 더했다.

“제가 볼 때도 꼭 필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그 부분은 1부 전체를 볼 때 클라이맥스인 구간이고, 그 장면들이 3부에서 남주가 찍을 장면과 오버랩되는 신들이라 수정은 못 합니다.”

‘탈칵.’

회의실 문이 열리자 가을이 흠칫 놀라 문 쪽을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박 피디님!”

직원이 안에 있던 제작 피디에게 용건이 있는지 나오라고 손짓하자 피디가 재빨리 밖으로 향했다.

회의실에 도착해 문이 열릴 때마다 혹시 태준이 들어오나 싶어 저도 모르게 계속 문을 의식했던 가을이 괜히 주변을 둘러보다 앞에 놓인 커피를 쭉 들이켰다.

태준을 피해 가영의 집으로 도망쳐 놓고 은연중에 태준을 기다리는 모습이 스스로 너무 우스웠다.

한참이나 소속사와 설전을 벌인 끝에 몇 장면만 빼고 대부분의 장면은 그대로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배우를 과하게 보호하는 소속사에서 이런 식으로 대본 수정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도 촬영을 하면서 갑자기 밀어붙인 것은 아니라 다행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저, 감독님.”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회의실을 나가려고 했던 가을이 작가의 질문에 답변을 해 주느라 가장 마지막까지 회의실에 남았다.

디링-

문으로 향하던 가을이 혹시 태준인가 싶어 슬며시 휴대폰을 확인했다.

[끝났어요?]

메시지를 보낸 건 서준이었다.

서준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후 기다리지 말라고 메시지를 보낸다는 게 태준의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서 깜빡 잊고 있었다.

[미안. 기다리지 말라고 보낸다는 걸 잊었네. 약속 때문에 오늘은 안 돼.]

가영과 한 약속도 약속이지만 지금은 서준을 만날 기분이 아니었다.

디링-

가을이 답변을 보내자마자 서준에게 메시지가 왔다.

[무슨 약속인데요? 나도 가면 안 되나?]

[넌 다음에 보자.]

[집에 갈 때라도 잠깐 못 봐요? 5분도 안 되나?]

[미안. 다음에.]

[알겠어요. 오늘은 이만 후퇴. 재밌게 놀아요.]

서준의 메시지를 확인한 가을이 회의실 문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덜컥.’

문이 열렸다.

급하게 뛰어왔는지 태준이 문손잡이를 잡은 채 들썩이는 숨소리를 내며 넥타이를 살짝 잡아 내렸다.

가을을 만나기 위해 스케줄을 취소했지만 앞에 있던 일정이 예상치 못하게 꼬였다.

그 바람에 급하게 마무리를 하고 돌아와 주차장에서부터 회의실까지 계단으로 빠르게 뛰어 올라온 태준이었다.

“잠깐 얘기 좀 하죠.”

숨소리가 섞인 목소리를 낸 태준이 가을을 밀듯 안으로 들어와 ‘쿵’ 회의실 문을 닫았다.

갑자기 밀고 들어온 태준 때문에 가을의 심장 소리가 요란해졌다.

태준을 보면 공포영화를 생각하겠다고 부단히 노력한 것도 소용이 없었다.

“……제가 약속이 있어서,”

가을이 슬쩍 문으로 향하려 하자 태준이 그 앞을 막아섰다.

“무슨 약속.”

“동생이랑 만나기로 해서요.”

“늦는다고 전화해요.”

태준이 문 앞을 막은 채 동생에게 연락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게 약속도 약속인데 지금 박 감독님하고 얘기할 게 있어서,”

“박도식 감독님?”

정신없이 계단을 오르던 태준은 싱글벙글하며 계단을 내려오던 도식과 마주쳤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와이프 생일이라 옷을 이렇게 입었다며 호탕하게 웃던 도식이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내려갔다.

“오늘 아내분 생일이라 바빠 보이시던데.”

“……어쨌든 저도 바빠서요.”

가을이 슬며시 걸음을 옮기자 그 앞을 태준이 다시 막아섰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을을 태준이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정가을 씨.”

“……네.”

묵직한 태준의 목소리가 깊게 내려앉았다.

“계약 끝내고 싶다던 말, 유효합니까?”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지 가을이 떨려 오는 마음을 누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좋아요.”

“…….”

“끝내죠.”

태준의 말에 가을의 심장이 끝도 없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시선 둘 곳을 잃은 가을의 눈동자와 달리 태준의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요.”

까만 눈동자에 가을을 가득 담은 태준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난, 진짜로. 정가을 씨를 짝사랑할 생각입니다.”

무슨 말인가 싶어 가을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런 마음이 들게 한 건 가을 씨가 처음이에요.”

가을을 바라보는 태준의 눈동자가 떨려 왔다.

“내가 경험할 모든 처음이, 가을 씨였으면 좋겠습니다.”

“…….”

갑작스러운 태준의 고백에 언 듯이 눈만 깜빡이던 가을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저는 대표님을……,”

“허락을 구하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건 계약이 아니니까.”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터질 듯해 시선 둘 곳을 잃은 가을이 제 손톱을 잘근 물어뜯자 태준이 가을의 손을 잡아 자신의 앞으로 가져왔다.

이 손안에 들어오는 게 뭐든지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그때처럼. 태준의 눈동자가 빛났다.

“처음으로 좋아하는 게 생겼어요.”

“…….”

“정가을.”

“……!”

“내가 아주 많이, 좋아합니다.”

가을의 손을 좀 더 힘껏 잡은 태준이 가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번엔,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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