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각.
‘디링’
태준과 함께했던 놀이터 의자에 앉아 있던 가을이 태준의 문자를 확인했다.
[보고 싶어요.]
태준이 보낸 메시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가을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 흘러내렸다.
“하…… 왜 이러니 진짜.”
가을이 거칠게 눈물을 닦았다.
마음을 자각한 후론 태준의 문자 하나하나에 슬픔이 묻어나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뒤늦은 선호의 생일을 축하했던 가을은 간단한 짐을 챙기고 나와 휴대폰 수리를 맡겼다.
그 후 태준을 피하기 위해 가영의 집에 있다가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산책을 나왔다.
가영이 의찬을 집으로 불러 술을 마시는 바람에 두 사람의 수다를 듣느라 머리가 지끈거려 술을 사러 간다는 핑계로 나온 참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동네를 걷다가 태준과 함께 왔었던 놀이터 의자에 앉아 복잡한 머리를 식힐 때 태준에게서 문자가 온 것이었다.
보고 싶다는 말이 거짓말인 걸 뻔히 아는데도 평소처럼 ‘나는 아니에요.’라는 답변을 보낼 수가 없었다.
계약을 끝내자는 말을 했는데도 평소와 똑같이 이런 문자를 보내는 태준에게 원망이 들기도 했다.
잔인하다고 느낄 만큼 태준은 똑같이 하고 있을 뿐인데 마음이 변한 자신은 그 문자를 볼 때마다 힘이 들었다.
“좋아할 일 없다고 그렇게 큰소리쳐 놓고…….”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마음이, 한없이 소중해져 두려워지는 마음이.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힘들었다.
곁에 소중한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가을에겐 의찬도, 가영도 소중했다. 이들이 자신의 곁을 떠난다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지끈거렸다.
하지만 태준은 그것과는 다른, 제어되지 않는 두려움이었다.
짧은 시간에 자신의 마음을 헤집어 놓을 만큼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남자.
‘계약 짝사랑’이 끝나고 혼자 남겨질 걸 생각하자 그것만으로도 세상이 슬픔으로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잠시 멍하니 앉아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Rrrr-
의찬의 전화에 가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너 술 사러 어디까지 간 거야?
술을 사러 간다고 하자 의찬이 자신이 다녀오겠다며 일어서는 걸 간신히 말려서 나온 가을이었다.
“머리가 아파서 잠깐 앉아 있었어. 금방 갈게.”
-머리 아파? 약국 아직 문 열었나? 두통약 사다 줘?
“내가 가는 게 빠르지 않을까?”
-아 그렇네. 얼른 약 사서 들어와. 가영이가 지금 노래방 가자고 난리야.
“알았어.”
통화를 끝낸 가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꾸만 자동으로 재생되는 태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몰두할 만한 다른 일이 필요했다.
가을이 놀이터를 벗어나 골목길을 걸을 때, 산장 빌라를 돌아 골목길을 걷던 태준이 다른 방향에서 놀이터를 향해 걸어왔다.
가을과 함께했던 의자에 한참이나 앉아 있던 태준이 아무런 대답 없는 메시지 창을 바라보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이내 휴대폰을 슈트 재킷에 넣고 쓸쓸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전화를 한다고 가을이 받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다른 시간, 같은 공간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생각했다.
얼마 뒤.
가을과 가영, 의찬이 노래방에서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영혼을 불사르며 노래를 불렀다.
세 사람 중 누구 하나 제대로 노래 실력을 갖춘 사람은 없었지만, 흥만큼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았다.
“아우, 죽겠다. 난 잠깐 휴식.”
가을이 의자에 앉자 흥에 겨워 춤을 추던 가영이 빠르게 다음 곡을 이어 나갔다.
그 곁으로 의찬이 마이크를 들고 다가가 음정 박자를 무시하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
술에 잔뜩 취해 엉망으로 노래를 부르는 두 사람을 보며 박장대소하던 가을이 이내 웃음을 멈췄다.
가을의 눈앞에, 자리에 있지도 않은 태준의 모습이 보였다.
빠른 비트의 곡이 점점 줄어들며, 잔잔한 ‘선 리버’가 가을의 귀에 흘러들었다.
“……니.”
“…….”
“언니!”
“응??”
가영의 목소리와 함께 눈앞에 있던 태준의 모습이 사라졌다.
“눈 뜨고 잤어?”
가을이 정신을 차리려는 듯 양 볼을 손으로 찰싹 때렸다.
“다음은 이 시대가 낳은 가수~ 정가을~.”
의찬이 테이블에 있던 책자를 가을에게 건넸다.
“뭐 부를래.”
“…….”
“네 최애곡 눌러 줘?”
“아니.”
“그럼?”
“……선 리버.”
“……선 리버??”
자기도 모르게 태준이 불렀던 노래 제목을 말한 가을이 낮게 고개를 털며 혼잣말을 뱉었다.
“하, 정신이 나갔네.”
“뭐야. ‘로마에서 아침을’ 주제곡 아냐? 영화까지 보러 가더니. 너 가을 타?”
의찬의 말에 가영이 갑자기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가을이 가을을 탄대. 가을이 어떻게 가을을 타지?”
의찬이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미쳤구나?”
“으하하하하하. 나보고 미쳤대. 난 도를 쳤거든요? 으하하.”
“…….”
“…….”
가을과 의찬이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아예 의자에 드러누워 웃고 있는 가영을 바라보았다.
“네 동생이야.”
“……알아.”
한창 웃어 대던 가영이 갑자기 통곡 소리를 냈다.
“부채 오빠…… 으허헝.”
“부채 오빠??”
“있어 그런 사람.”
가영이 첫눈에 반했다는 남자 얘기를 귀에 딱지가 앉게 들은 가을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와 다르게 의찬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웃다가 울다가 다채롭다, 다채로워.”
연신 훌쩍이던 가영이 소파에 누운 채 눈을 감자 의찬이 빠르게 가영을 일으켜 세웠다.
“여기서 자면 버리고 갈 거야.”
언제 울었냐는 듯 가영이 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사장님! 언니! 3차 갑시다, 3차!”
방방 뛰던 가영이 비틀거리자 의찬이 냉큼 가영의 팔을 낚아챘다.
“안 되겠다. 얘 맛이 갔어.”
“가자.”
가을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찬과 함께 가영을 부축해 노래방을 나갔다.
* * *
가을이 가영의 집에서 일주일을 지내는 사이 여배우 캐스팅이 확정되었다.
‘STN’ 드라마국 회의실에서 여배우인 보라와 간단한 미팅을 했을 때 가을은 혹시 태준과 만날까 싶어 도망치듯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이후 혁진, 제작 PD와 함께 장소 협찬을 담당하는 FD가 뽑아 놓은 리스트를 보며 촬영 장소를 돌아보았다.
스튜디오 촬영 외에 야외 촬영은 담당 FD가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 연출가에게 보여 준 후 함께 현장을 답사하며 논의를 해야 했다.
후반부에는 지방에서 촬영하는 신이 있었다.
협찬할 곳 사정에 따라 촬영을 먼저 당겨서 찍을지, 순서대로 할지를 정해야 해서 그와 관련된 회의도 단체 메시지를 통해 진행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 태준이 끊임없이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가을은 메시지에만 간단히 답변을 보냈다.
태준을 향한 마음을 멈추기 위해 가을은 4부작에 관련된 일을 더 열심히 하고, 등산을 가고, 도담 경찰서에 들러 박 형사를 만나고 왔다.
오늘은 상의할 게 있어 동네 카페에서 혁진을 만난 가을이 점심을 먹기 위해 자주 가던 단골 음식점으로 향했다.
“거기 찌개가 그렇게 맛있어요?”
“다음에 또 생각날걸?”
“오오~ 그 정도예요?”
가을이 음식점 간판을 가리키려고 할 때, 음식점 안으로 들어가는 태준과 명석의 모습이 보였다.
“어? 대표님 아니었어요?”
혁진이 반가운 표정을 하며 뛰어가려고 하자 가을이 혁진의 팔을 낚아챘다.
“다른 데 가자.”
“왜요??”
“그냥 다른 게 먹고 싶어졌어.”
방송 현장에서 익힌 빠른 눈치로 혁진이 아무런 질문 없이 가을을 따라 걸음을 돌렸다.
“이 동네 다른 건 뭐가 맛있어요?”
“돈가스 먹을래?”
“콜이죠.”
가을이 돈가스 가게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주 잠깐 태준을 봤을 뿐인데 그동안 피해 다닌 게 무색할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시간에 왜 동네에 있는지 궁금했지만 이내 생각을 멈췄다.
또다시 머리에 가득 찬 태준의 생각을 떨쳐 내려는 듯 가을이 가볍게 고개를 털었다.
아직 ‘계약 짝사랑’ 중이니 계속해서 피할 수는 없었지만 태준을 떠올려도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을 때까지만 피해 볼 생각이었다.
가을이 돈가스 가게로 향하는 동안, 태준은 김치찌개 가게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볼일을 보고 근처를 지나가던 길에 가을이 맛있다고 했던 음식점이 보여 들어온 참이었다.
“웬일로 김치찌개를 다 드세요?”
“맛집이래.”
“정가을 씨가요?”
“응.”
요사이 가을을 만나지 못해 부쩍 말이 없고 초조해하는 태준을 알고 있는 명석은 음식이 나오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태준의 상태는 ‘계약 짝사랑’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지만 명석은 굳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본인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깨닫는 게 태준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세상이 일로 돌아가던 태준의 24시간이 온통 가을에게 점령당해 있었지만 그 사실을 태준 본인은 모르고 있었다.
“박 비서가 연애를 한답니다.”
“그래?”
태준이 관심 없이 앞에 놓인 물 잔을 집었다.
“박 비서가 그러더라고요. 세상에 감출 수 없는 게 두 가지가 있다고요.”
“뭔데.”
“재채기랑, 뭘까요.”
“돈?”
다른 것엔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좋은 태준은, 이성에 관련된 건 바보나 다름없었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돈이라고 하는 태준의 말에 살짝 힌트라도 줄까 싶었던 명석이 생각을 바꿨다.
“그런 것 같네요.”
그사이 김치찌개가 나오자 두 사람이 수저를 들었다.
크게 한 수저 뜬 명석이 의외라는 듯 감탄 어린 표정을 지었다.
“정말 맛집이네요.”
명석과 달리 입맛을 잃은 태준은 아무런 감흥 없이 찌개를 입에 넣었다.
뭘 해도, 뭘 먹어도, 가을의 얼굴만 보고 싶은 태준은, 딱 짝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
502호 안. 벽에 걸린 고급 벽시계가 오후 8시를 가리켰다.
욕실에서 들리던 물소리가 그치고 샤워가운을 걸친 태준이 욕실에서 나와 소파에 앉았다.
며칠째 502호에 오고 있었지만 가을은 계속 귀가하지 않았다.
“후우…….”
답답함에 마른세수를 하던 태준이 소파 테이블에 올려 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오늘도 동생 집에서 잡니까?]
디링-
한참이 지나 가을에게 답변이 왔다.
[네.]
역시나 단답형 메시지였다.
가을이 ‘STN’ 회의실에서 여자 주연 배우와 미팅을 했을 때는 시간이 어긋나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다.
다른 스케줄을 할 때도 어찌나 잘 빠져나가는지 가을을 볼 수가 없었다.
가을이 자신을 피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강압적인 방법을 써서 만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몰아붙이다가 가을이 또다시 계약을 끝내고 싶다는 얘기를 꺼낼까 봐 겁이 났다.
얼마 전 김 감독과 관련된 소문의 출처를 알아 오라고 시켰던 태준은 명석이 관련 사실을 알아 오면 그 문제를 핑계로 가을과 만나자고 할 생각이었다.
김 감독 문제에 관여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어떻게 된 건지 진실을 알아보는 건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입으로 퍼져 나간 소문이라 출처를 알아낼 수가 없다는 보고를 받아 가을을 불러낼 기회를 잃었다.
또다시 깊은 한숨을 쉰 태준이 메시지를 보냈다.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면 목소리라도 좀 들려줘요.]
메시지를 읽었다는 표시는 사라졌지만 가을의 대답은 한참이 지난 후에 왔다.
[동생이 자고 있어서요.]
메시지를 확인한 태준이 고민하다가 휴대폰 화면에 보이는 자판을 눌렀다.
[잠깐 문밖에서…….]
[욕실에 가서 잠깐…….]
[1분이라도…….]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하던 태준이 결국,
[알았어요. 잘 자요.]
라는 지극히 평범한 답장을 보냈다.
“후우…….”
태준이 내쉬는 한숨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던 태준의 눈에 소파 테이블 아래 넣어 둔 장식함이 보였다.
장식함을 꺼내 든 태준이 뚜껑을 열어 안에 든 나무젓가락을 보았다.
[행운권, 선물이에요.]
“행운권이라…….”
자신에게 행운이라고 할 만큼 좋은 일이 있었나.
태준은 그동안의 일들을 되짚어 보았다.
나무젓가락을 받은 후 태준에게 생긴 일이라곤 가을과 한 ‘계약 짝사랑’이 전부였다.
그 생각에 미치자 뭔가 떠오른 태준이 천천히 한쪽 입술을 올렸다.
쓰러진 가을을 처음 만난 날, 이상하게 일정이 자꾸 꼬여 예정된 진료 시간보다 무려 한 시간이 늦었다.
명석보다 먼저 차에서 내려 가을을 뒷좌석에 태우라고 한 것도 평소 자신이 할 행동이 아니었다.
가을이 남긴 메모도 그랬다.
평소라면 현장 스태프가 남긴 메모에 명석에게 전화를 해 보라고 했을 텐데, 가을이라는 이름이 어딘가 신경이 쓰여 자신이 직접 전화를 걸었다.
거기다 가을을 만났던 주악산 역시 평소 가던 산이 아니었다.
태준이 장식함에 든 나무젓가락을 들어 보였다.
“내게 생긴 행운이, 정가을이었네.”
가을과 만난 인연이, 자신에게 생긴 행운이라는 걸 태준은 이제야 깨달았다.
Rrrr-
휴대폰 벨소리에 태준이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