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하자고 얘기하는 가을의 눈빛이 너무 슬퍼 보여 태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차마 태준을 보지 못하는 가을과 그런 가을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는 태준.
두 사람 위로 무거운 정적이 짓눌렀다.
심장 어딘가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태준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유가 뭐예요.”
낮게 가라앉은 태준의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그 목소리가 마음 아려 가을의 입술에 떨림이 묻어났다.
“……힘들어서요.”
“어떤 부분이.”
“…….”
“박선호 때문에?”
“아뇨.”
가을이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말을 이었다.
“선호 오빠는 저한테 가족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에요.”
“…….”
“하지만 오빠랑 전, 이성의 감정은 아니었어요. 그런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아니까.”
가족보다 소중한 존재일 뿐, 이성은 아니었던 사람.
그 말에 태준은 가슴에 막혀 있던 무언가가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럼 그때 좋아한다고 한 건,”
가을이 여전히 태준을 보지 못한 채 시선을 아래로 두었다.
“이성의 감정은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건 맞으니까요.”
답답하던 가슴은 뚫렸지만 태준은 지금 그걸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그럼…… 그만두자고 하는 이유가 뭐예요.”
“저 때문에요.”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하던 태준의 머리에 뭔가가 스쳤다.
조금 전. 박선호가 아닌 자신을 찾던 가을의 눈빛.
선을 넘으려고 하면 사람을 밀어낸다는 도식의 말.
“나 좀 봐 봐요.”
태준의 말에 입술을 깨물던 가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혹시…….”
태준이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누르며 가을의 눈동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나…… 좋아해요?”
태준의 눈을 마주 본 채로 가을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어딘가 어색한 고갯짓이었지만 두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혹시 싶었던 물음이었지만 단호하게 대답하는 가을의 모습에 태준이 쓰린 마음을 눌러 냈다.
“그럼 이유가 뭐예요.”
“그냥…… 예전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선호를 기다리며 꿈을 향해 정진만 하면 되던 일상. 누군가 다가올 일도, 떠날 일도, 그래서 두려움이 없는 그런 일상.
“4부작 연출은, 혁진이라고 전에 보신 친구가 실력이 아주 좋아요. 그 친구가,”
“정가을 씨.”
태준이 평소와는 달리 서늘함이 담긴 눈빛으로 가을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책임감 없는 사람이었습니까?”
자신도 느끼고 있는 부분을 태준이 꺼내 들자 가을이 입술을 깨물었다.
누구보다 책임감이 넘치는 가을이었지만 모든 걸 제쳐 두고서라도 태준을 향한 마음을 멈추고 싶었다.
흔들리는 가을의 눈빛을 놓치지 않은 태준이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정가을 씨 때문에 모인 스태프들입니다. 작가도, 정가을 씨를 추천한 정찬 CP도. 생각 안 합니까?”
손을 움켜쥐는 가을의 모습을 바라보던 태준이 더욱 낮은 목소리를 냈다.
“뭐 때문에 힘든지 모르겠지만.”
움켜쥔 가을의 손을 보던 태준이 시선을 올려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가을을 아프게 바라보았다.
“힘들 땐 주먹을 쥐지 말고…….”
“…….”
“내 손을 잡아요.”
태준의 말에 가을이 맞잡은 제 손을 하염없이 매만졌다.
한참을 말없이 가을의 모습을 살펴보던 태준이 강조하듯 강한 목소리를 냈다.
“정가을 씨가 어떤 말을 하든 난, 계약을 끝낼 생각이 없습니다.”
“…….”
“그럼 좀 쉬어요.”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을 나가자 가을이 그대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만하자고 말하면서도 태준이 정말 받아들이면 어쩌나 싶어 두려웠던 자신의 마음이 너무도 바보 같았다.
“후우…….”
가을이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 한참이나 깊은숨을 내쉬었다.
계약을 끝낼 수 없다면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어 가야 했다.
애초에 ‘계약 짝사랑’을 하면서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조건 같은 건 없었다.
태준을 진짜로 거부하는 것처럼 피한다고 해서 계약을 위반하는 건 아니었다.
가을이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저 마음이 혼란스러울 뿐, 태준에 대한 마음을 자각했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감정이었으니까.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희석될.
매번 사랑으로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하는 자신의 부모들처럼.
사랑했다가도 죽일 듯이 싸우는 영원하지 않은 감정.
소중한 사람이 되지 않게, 언젠가 사라져도 마음이 아프지 않게. 가을이 제 마음에 가득 찬 태준을 끊임없이 밀어냈다.
* * *
밤새 잠을 설치다 새벽이 돼서야 간신히 잠들었던 가을이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깨셨어요?”
간호사가 혈압과 열을 재기 위해 카트를 밀며 침대로 다가오자 가을이 얕게 고개를 털고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지금 몇 시예요?”
“오전 7시 30분이요.”
간호사가 기계를 체크하며 말을 이었다.
“혈압 좀 잴게요.”
팔에 혈압기를 두르고 버튼을 누르자 ‘지이잉’ 감겨 있는 부분이 가을의 팔을 눌렀다.
팔에 가해지는 압력이 어쩐지 자신의 마음까지 짓누르는 것 같아 가을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기계의 압력이 풀어지자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18에 76이네요.”
“지금 퇴원할 수 있죠?”
“지금이요?”
간호사가 난색을 띠며 말을 이었다.
“좀 전에 대표님이 환자분 영양제랑 비타민 맞고 아침 식사하시면 퇴원시키라고 당부하시고 가셔서요.”
“좀 전에요??”
“네. 7시쯤 오셨다가 좀 전에 가셨어요.”
간호사의 말에 가을의 마음이 욱신거렸다.
“참, 일어나시면 저거 전해 드리라고 하셨는데.”
간호사가 소파 테이블에서 케이크 상자와 메모지를 가져와 건네고 병실을 나가자 가을이 화려한 꽃이 그려져 있는 작은 메모지를 펼쳐 보았다.
[늦었지만 이걸로라도 축하해요.]
태준이 준비한 선호의 생일 케이크였다.
눈물샘이 고장 난 듯 가을의 눈이 또다시 물기로 차올랐다.
태준을 밀어내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계약을 끝내자고 했는데.
선호의 생일 케이크까지 준비해 둔 태준을 생각하자 심장이 아릴 만큼 태준이 보고 싶었다.
툭-
메모지에 적힌 글씨 위로 가을의 눈물이 떨어졌다.
자각한 마음이 흘러넘쳐 담을 수 없기 전에.
자신의 마음이 더 이상 태준에게 향하지 못하게 도망가야 했다.
‘STN’ 대표실 안.
태준이 책상에 앉아 휴대폰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몸은 괜찮은지, 기분은 어떤지. 아침부터 지금까지 보낸 자신의 메시지에 가을은 ‘네.’라고 보내거나 ‘감사합니다.’라는 답변만 보낼 뿐 그 외의 말은 보내지 않았다.
‘타닥, 타닥.’
자신이 책상을 두드리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태준이 손에 들린 휴대폰만 응시했다.
오늘은 4부작 회의도 없는 날이라 가을을 보러 갈 기회도 없었다.
입술을 잘근거리며 휴대폰을 노려보던 태준이 참지 못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자꾸 날 흔들어~ 네가 뭔데 흔들어. 왜 자꾸 날 흔들어~♪’
이제는 외우고 있는 ‘흔들어’라는 노래의 컬러링 노래만 들릴 뿐, 가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누가 봐도 가을은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후우…….”
‘짝사랑’이었으니 가을의 행동이 잘못된 건 없었다. 그동안 자신이 하는 행동에 하나하나 반응해 줬을 뿐, 오히려 계약에 충실한 행동이었다.
거기다 가을은 계약을 끝내자고 한 상태였으니 전과 같은 반응을 할 리가 없었다.
어젯밤 한남동으로 가 밀린 업무를 보고 쪽잠을 자다시피 한 태준은 아침 일찍 문을 연 케이크 숍에 들른 후 가을의 병실을 찾았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가을의 곁을 오랜 시간 지켜 준 사람이니 케이크라도 챙겨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거기다 선호가 실종되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마음 한쪽에 묘한 통증이 일었다.
가끔 ‘박선호’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질투심이 들었다가도 어쩔 땐 가슴 어딘가가 욱신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알 수 없던 그 기분이 어쩌면 이런 사연을 예감했기 때문이었나 싶어 더 마음이 쓰였다.
그렇게 케이크를 소파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곤하게 잠들어 있는 가을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편안히 잠들어 있는 모습이 아파 보이진 않아 이마를 만져 보려던 손을 거뒀다.
자신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던 단호했던 가을의 눈빛. 고백한 것도 아닌데 차인 기분이 들어 태준은 내내 마음이 복잡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믿지 않는다고 얘기할 때면, 가을의 눈빛은 늘 확고해 보였다.
어린 시절에 이혼한 부모님, 곁을 지켜 주던 사람의 실종.
가을의 과거를 알고 나니 소중한 걸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말이 이해가 되어 더 마음이 쓰렸다.
자신 역시 사랑이라는 감정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 것에 시간을 투자하느니 조금이라도 더 이익이 되는 일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을을 만나고 ‘계약 짝사랑’을 하면서 이익을 얻지 못하는 무의미한 시간들이 즐거웠다.
그렇게 병실에서 마음 아프게 가을을 내려다보다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던 태준이었다.
길게 한숨을 내뱉은 태준이 인터폰을 눌렀다.
-예. 대표님.
“잠깐 들어와.”
잠시 뒤, 명석이 대표실 안으로 들어왔다.
“필요한 거 있으세요?”
태준이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자 명석이 책상 가까이 다가섰다.
“명석아.”
투자, 인수, 개혁안, 등등. 지금까지 맞닥뜨려 온 어떤 문제를 상의할 때보다 태준이 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명석이 걱정이 짙게 묻은 목소리를 냈다.
“왜요, 무슨 일이신데요.”
업무 중에 자신의 이름을 부를 만큼 심각한 일인가 싶어 명석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무슨 일 생기신,”
“여자가 피할 땐, 어떻게 해야 하지?”
“…….”
태준이 답답한 표정으로 명석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그것 때문에 절 부르신 거예요?”
심각한 얼굴을 한 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태솔로인 태준에게 이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 왔던 어떤 것보다 어려웠다.
그런 태준의 모습을 보던 명석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짝사랑이 원래 그런 겁니다.”
“그런가.”
태준이 뭔가를 생각하며 팔짱을 낀 채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전에 말이야.”
“예.”
“네가 정가을 씨한테 커피 한잔 사 달라고 했던 거, 기억나?”
“예?”
“응급실에서 도와준 일로 커피 한잔 사 달라고 했었는데.”
“아아. 예. 기억납니다.”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태준이 혀로 입술을 훑다가 말을 꺼냈다.
“지금 사 달라고 해 봐.”
“지금이요?”
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한 태준의 표정에 명석이 슈트 재킷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시간은요.”
“오늘 점심.”
명석이 휴대폰 메시지를 켜 오늘 점심에 시간이 되면 커피 한잔하고 싶다는 무척 공손한 메시지를 가을에게 보냈다.
디링.
“뭐야. 벌써 답변이 왔어?”
“예.”
자신의 메시지는 한참이 지나야 답변하던 가을이 명석에게는 곧바로 답변을 보내자 태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지금 동생이랑 있다고 어렵다는데요.”
“그럼 저녁에 사 달라고 해.”
“…….”
명석이 꼭 그래야 하냐는 눈빛으로 묻자 태준이 얼른 보내라는 눈빛으로 답했다.
명석이 어쩔 수 없이 저녁으로 시간을 바꿔 메시지를 보내자 바로 가을에게서 답변이 왔다.
“뭐래.”
“저녁에 동생 집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고. 안 된다네요.”
태준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대표님이 시키신 거 눈치챈 것 같은데요.”
짝사랑이 연기라는 사실을 잊은 듯 한껏 인상을 쓴 채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는 태준을 명석이 빤히 내려다보았다.
“형.”
출근과 동시에 언제나 ‘대표님’으로 부르는 명석이 처음으로 회사에서 ‘형’이라는 호칭을 쓰자 태준이 사뭇 놀란 표정으로 명석을 올려다보았다.
“형이 ‘세양 그룹’ 회장이 되든, 한적한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짓든.”
명석이 진지한 눈빛으로 안경을 올렸다.
“그 옆은 제가 지킬 겁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형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뜻입니다.”
“뭐?”
명석이 자신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태준을 무시하며 빠르게 스케줄을 읊었다.
“어제 대표님이 정가을 씨 걱정된다고 뛰쳐나가서 못 한 회의 일정 한 시간 뒤에 잡혀 있고, 지난번 정가을 씨와 저녁 드신다고 취소했던 ‘세진 그룹’ 대표님과 식사 일정이 12시에 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6시엔…….”
태준이 알겠다는 듯 손을 들자 명석이 말을 멈췄다.
“그럼 필요한 거 있으시면 부르세요.”
일체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던 태준이 가을 때문에 얼마나 스케줄을 미루고 있었는지 상기시킨 명석이 공손히 인사를 건네고 대표실을 나갔다.
“후우…….”
태준이 가슴이 답답한 듯 넥타이를 잡아 내렸다.
짝사랑이라는 게 이런 거였나.
가을을 보지 못한 날은 많았어도 늘 목소리를 듣고 메시지를 주고받았던 태준에게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하고 온 신경이 곤두선 기분.
언제나 정해진 일을 하면서도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따라 하루가 너무 힘든 태준이었다.
늦은 저녁.
태준의 차가 골목에 들어섰다.
한남동으로 가려다 혹시 가을이 동생 집에서 돌아왔을까 싶어 산장 빌라로 향한 참이었다.
빡빡한 일정을 모두 소화한 탓에 가볍게 어깨를 주무르던 태준이 ‘CG 편의점’ 간판을 보자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잠깐만 세우세요.”
태준의 말에 운전기사가 차를 세우자 뭔가를 고민하던 태준이 차 문손잡이를 잡았다.
“전 여기서 걸어갈 테니까, 주차장에 차 세우고 퇴근하세요.”
차에서 내린 태준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가을이 좋아하는 ‘명란 볶음 김밥’을 찾았다.
“그거 다 나갔어요.”
아르바이트생의 말에 가을의 말이 생각난 태준이 피식 웃었다.
“마음대로 못 먹는다더니.”
편의점을 나와 무심히 고개를 돌렸던 태준이 1+1이라며 가을이 사 왔던 햄버거 가게 간판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햄버거는 불고기가 진리예요.]
좋아하지도 않는 불고기 햄버거가 든 봉투를 들고 태준이 천천히 골목길을 걸었다.
[걷는 거 좋아해요. 특히 바람 불 때 걷는 거요.]
산에서 불어온 바람이 태준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한낮의 바람과 달리 저녁의 바람은 제법 찬기가 묻어 있었다.
언제나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던 태준이 처음으로 바람을 느끼며 천천히 걸었다.
낡은 세탁소, 그 위로 작은 편의점, 늦은 저녁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사람, 한참을 올라가 나오는 작은 미용실까지.
좋아하는 건 아무것도 없던 태준이 가을이 좋아하는 음식과, 가을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가을이 매일같이 봤을 모습을 눈에 담았다.
찬 기운이 묻은 바람이 몸을 스쳐 갈 때마다 마음 한곳이 자꾸만 아릿해졌다.
그렇게 천천히 걷는 사이 어느새 빌라 앞까지 걸어온 태준이 불 꺼진 가을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싶었지만 역시나 가을이 집에 없다는 걸 확인하자 태준의 마음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팟-
1층 현관 앞 센서 등이 한발 늦게 켜졌다.
수명을 다해 가는 전등 불빛이 파르르 떨려 왔다.
떨리는 모습이 불빛 때문인지, 태준의 마음인지.
휴대폰을 꺼내 든 태준이 오늘 하루 가을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전했다.
[보고 싶어요.]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태준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그렇게 자꾸만.
태준의 마음에 가을이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