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앞에서 숨을 고르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남자.
언제부터였을까.
선호가 해 주던 말로, 자신을 걱정해 주던 순간부터였을까.
선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좋았던 걸까.
“왜 숨어 있어요.”
“…….”
“뭐가 무서워서.”
아니, 누구라도 좋은 게 아니었다.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태준의 까만 눈동자.
응급실에서 봤던 눈빛보다 한층 더 깊어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강태준이라는 남자가. 좋았다.
마음이 타들어 갈 듯 아프고 그리워 저도 모르게 눈물까지 흘렸던 꿈. 물안개에 싸여 보이지 않았던 사람.
자신의 앞으로 다가왔던 남자의 얼굴이 그제야 떠올랐다.
그 꿈속에서 자신이 기다렸던 사람은 태준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깨달은 가을이 그렁해진 눈물을 참아 냈다.
“괜찮아요?”
왜 연락을 안 했는지, 얼마나 걱정했는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함을 뒤로한 태준이 가을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몸을 움직일 때였다.
가을이 다급하게 손을 뻗어 태준의 팔을 잡았다.
꿈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태준이 사라질까 봐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자신의 팔을 꼭 쥐고 있는 가을을 바라보던 태준이 괜찮다는 듯 가을의 손을 부드럽게 도닥였다.
“집에 가야죠.”
“…….”
“일어날 수 있겠어요?”
태준의 말에 천천히 미끄럼틀 밖으로 나와 일어서던 가을이 현기증에 비틀거리자 태준이 얼른 가을의 어깨를 잡았다.
힘겨워 보이는 가을의 안색을 살펴본 태준이 몸을 돌려 그대로 앉았다.
“업혀요.”
“…….”
가을이 태준의 등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자신에게 등을 내준 이 남자는, 언젠가 사라질 사람이었다.
예고 없이 자신의 인생에 나타나 삶을 뒤흔들어 놓고 아무렇지 않게 떠날 사람.
“얼른.”
“……괜찮아요.”
“안 괜찮으니까 얼른 업혀요.”
“…….”
가파른 골목길. 힘든 하루에 지쳐서 누군가 자신을 업고 올라가 줬으면 하고 바랐던 일이 많았다.
떠날 사람이니까. 언젠가는 자신의 삶에서 사라질 사람이니까.
가을이 태준의 등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러니까 지금 한 번만. 기대도 되지 않을까.
우산을 쓰지 않아 살짝 젖어 있는 태준의 슈트 재킷 위로 가을이 몸을 숙이자 태준이 그대로 가을을 업고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가을을 업은 채로 태준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부슬거리며 내리던 비가 그치자 물기를 머금은 공기에 습해진 풀 내음이 짙게 배어났다.
조금씩 뱉어 내는 가을의 숨소리에 태준을 향한 떨림이 묻어났다.
가을을 업고 골목길을 올라가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태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거기 있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무서우면 숨는다고 했으니까.”
“…….”
“뭐가 무서웠어요?”
……대표님이요.
선호 오빠를 잊게 한…… 대표님이 무서워서요.
“…….”
“얘기하기 힘들면 나중에 해요.”
가을이 대답 대신 태준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자꾸만 얼굴에 열이 올라 견디기 힘들었다.
그사이 빌라 앞까지 온 태준이 가을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감사합…….”
가을이 말을 맺지 못하고 휘청이자 빠르게 어깨를 잡은 태준이 가을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이마가 불덩이같이 뜨거웠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가을의 얼굴이 벌건 열기에 차 있었다.
“후우…….”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상태가 됐는지 낮게 숨을 뱉어 낸 태준이 차 보조석 문을 열었다.
“타요.”
가을이 점점 거칠어지는 호흡을 누르며 태준을 바라보았다.
“…….”
“병원에 가야죠.”
“……아니에요. 집에 가서 쉬면 돼요.”
태준이 평소보다 강경한 표정으로 가을의 팔을 잡았다.
“그대로 두면 더 아파요.”
“괜찮,”
“내 말 들어요.”
언제나 다정하게 의견을 묻고 행동하던 태준이 가을을 그대로 보조석에 태운 후 운전석에 올랐다.
얼마 뒤.
가을이 수액을 꽂은 상태로 희망 병원 1인실에 누워 잠이 들었다.
주사와 수액까지 맞았는데도 가을의 몸에서 열이 떨어지지 않자 태준이 의사를 호출해 상태를 살핀 후 침대 옆에 앉아 가을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상태가 되었을까.
메시지는 수신 확인이 되었는데 가을에게서 답변이 없자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할머니께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다른 일이 생긴 건지 알 수가 없자 걱정이 돼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 태준이 회의를 뒤로하고 무작정 가을의 집으로 향했다.
가을이 집에 없는 걸 확인하고 발길을 돌리던 태준이 불현듯 어릴 적 무서운 일이 생길 때면 다락방에 숨었다던 가을의 말을 떠올렸다.
그러다 숨바꼭질을 하면 아무도 찾지 못할 것 같다는 가을의 말이 생각나 곧장 놀이터로 달려갔다.
그렇게 미끄럼틀 안에 숨어 있는 가을을 발견했다.
왜 이렇게 짠하고 안쓰러운지.
앞뒤 없이 달려가긴 했지만 가을이 정말 그곳에 있자 안심이 되는 동시에 마음이 아렸다.
태준이 링거 주삿바늘이 꽂힌 가을의 손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파리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가을 위에 애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냥 죽지 그랬어.]
끔찍한 말을 뱉어 내는 미연을 보면서도 태준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늘 애란을 지키겠다고 큰소리쳤지만 결국 자신은 그녀를 지켜 내지 못했다.
고작 10살이었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게 당연했지만, 태준의 마음엔 엄마를 지켜 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깊게 자리해 있었다.
박선호라는 사람 때문인가.
몸이 이렇게 될 정도로 그 남자가 좋은 건가 싶어 태준의 마음이 욱신거렸다.
[내가 진심이 되면, 감당할 수 있겠어요?]
그 말은 가을이 아닌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연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행동들이 어쩌면 진심이 아닌가 혼란스러웠다.
정가을이라는 여자에게 진심이 되면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이 여자를 지킬 수 있을까.
그래서 자신을 좋아하냐는 가을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연기로 대답했다.
자신의 마음은 진심이 아니라, 연기여야 했으니까.
“으응…….”
얕은 신음 소리를 낸 가을이 천천히 눈을 떴다.
“괜찮아요?”
가을의 모습을 살펴보려고 태준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지…… 마요.”
“…….”
태준이 움직임을 멈춘 채 가을을 내려다보았다.
[가지 마…….]
가을의 눈동자를 응시하던 태준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지금 보고 있는 게 누구예요.”
“…….”
“나예요. ……박선호예요.”
이 와중에도 자신과 박선호를 착각하는 건가 싶어 참을 수 없이 들끓는 마음을 눌러 낸 태준이 진득이 가을의 말을 기다렸다.
가을의 눈동자에 점점 가득히 태준이 채워졌다.
“……대표님…….”
한차례 열병을 앓은 후 선호를 향해 돌아가던 세상이, 태준으로 바뀌었다.
가을의 입에서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 나오자 떨리는 마음이 주체가 되지 않아 태준이 몸을 돌렸다.
“의사 불러올게요.”
“저…… 이제 괜찮아요.”
가을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태준이 다시 가을에게 다가왔다.
“올려 줄까요?”
“네.”
리모콘으로 침대 등받이를 적절한 위치까지 올린 태준이 열을 확인하려는 듯 가을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뜨겁던 이마가 제 온도를 찾았다.
“열 내려갔네.”
가만히 태준을 보던 가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호 오빠는…….”
“…….”
“10년 전에 실종됐어요.”
“……!”
가을이 어릴 적 선호를 만난 얘기부터 선호와 함께했던 얘기를 덤덤히 꺼내 놓았다.
“그날은 날씨가 굉장히 좋았어요. ……그 전날까지 비가 왔거든요.”
당시를 떠올리듯 잠시 말이 없던 가을이 얘기를 이었다.
“가까운 공원으로 소풍을 가기로 했는데 그날 친구랑 하던 아르바이트를 대신해 주고 온다고…… 금방 온다고 했는데 그날 밤까지…… 오빠랑 연락이 안 됐어요.”
“…….”
“난 기다리는 거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태준이 묵묵히 가을의 말을 들었다.
그렇게 가을은 최근에 박 형사가 신원 불명의 사체 DNA 결과를 전해 주었다는 얘기와, 오늘 선호의 모친을 만난 얘기를 태준에게 꺼내 놓았다.
10년간 선호를 기다렸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꺼내 놓은 건 태준이 처음이었다.
의찬도, 가영도, 선호라는 사람이 실종되었다는 사실만 알 뿐, 가을이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말없이 가을의 얘기만 듣던 태준이 가을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다.
“애썼어요.”
“…….”
애썼다는 말 한마디에 가을의 마음이 위로를 받은 듯 일렁였다.
가을에게 선호를 기다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실종된 선호를 혼자 기다리며 버텨 온 세월이 힘든 일이었다는 걸 가을은 스스로 알지 못했다.
‘애썼다’는 태준의 한마디에, 선호를 기다리던 일들이 가을의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그 세월을 태준이 알아준 것 같아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을을 힘껏 안아 주고 싶은 마음을 눌러 낸 태준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오늘이 선호 오빠…… 생일이었어요.”
“…….”
“그런데 생일인 걸…… 잊어버렸어요.”
생일을 잊은 것 때문에 이렇게 앓을 정도로 선호라는 존재가 가을에게 크다고 생각한 태준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가을의 마음이 이미 자신에게 향해 있다는 걸 모르는 태준은 자신이 무슨 수를 쓰든 넘볼 수 없는 세월, 뛰어넘지 못할 존재가 선호라고 생각했다.
“자책하지 말아요. 충분히 애썼으니까.”
가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태준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지어 보내 주고 언제나 다정한 말을 해 주는 사람.
위험한 일이 생기면 자신의 앞을 막아 주는 사람.
이렇게 바라만 보고 있는데도 심장이 떨리는 그런…… 사람.
두려워졌다.
선호처럼 어느 날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질까 봐. 또다시 혼자 남을까 봐.
이 마음이 더 커지기 전에.
“대표님.”
“…….”
“계약 짝사랑…….”
태준을 밀어내야 했다.
“그만해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