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90)

흔들리지 않고 응시하는 태준의 눈빛과 달리 가을의 눈동자는 사정없이 흔들렸다.

두근. 두근. 두근.

진심으로 대답해야 하는지, 농담으로 대답해야 하는지.

빠르게 뛰어 대는 맥박을 진정시키며 가을이 적당한 대답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가을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태준을 향해 다른 질문을 했다.

“대표님…… 저…… 좋아하세요?”

“좋아해요.”

“…….”

“아주 많이.”

거짓말.

거짓말을 하면서 그렇게 웃는 건 반칙이잖아요.

“내가 정가을 씨 좋아하는 건, 당연한 거죠.”

돌아올 대답을 뻔히 알면서도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가을의 머리가 혼란해졌다.

진짜로 좋아하는 게 아닌 걸 알면서도 자꾸만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태준이 평소처럼 미소 지으며 고개를 까닥여 식판을 가리켰다.

“밥, 마저 먹어요.”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로 사람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해 놓고 아무렇지 않은 태준의 모습에 가을의 기분이 가라앉았다.

가을이 수저를 들지 않자 태준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안 먹어요?”

여러 차례 식사를 함께한 결과 태준은 가을이 웬만하면 음식을 남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밥을 먹을 때도 밥그릇에 밥알이 남지 않도록 싹싹 긁어 입에 넣는 모습이 태준의 눈에는 마냥 귀여워 보였다.

“다 먹었어요.”

“음식, 안 남기던데.”

“……지금은 남기고 싶네요.”

태준이 뭔가 얘기하려 할 때 발신자 미표시로 전화가 걸려 왔다.

누군지 예상한 태준이 전화를 받았다.

“강태준입니다.”

-태준 오빠.

희연이었다.

-우리 아빠 만났다며.

이틀 전 민 회장을 만난 태준은 현재 자신에게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고, 희연을 절대 받아 줄 생각이 없으며, 강제적으로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희연이 얼마나 불행해질지를 민 회장에게 설명했다.

평소보다 더 독하게, 하나밖에 없는 귀한 딸이 눈물로 한평생을 살 수 있으니 희연을 알아서 잘 간수하라고. 자신의 강력한 뜻을 전달했다.

빠르고, 정확하고, 차가운. 태준의 방식이었다.

태준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던 민 회장은 그 모습에 희연을 향해 강력한 카드를 내밀었다.

당장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으면 직책은 물론이고, 집, 차, 카드. 모든 걸 빼앗겠다고 선언했다.

고집이 센 희연을 누구보다 아는 민 회장은 본보기로 프랑스 지사 대표의 자리에서 희연을 바로 해임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지 않으면 모든 걸 빼앗겠다는 민 회장의 협박에 희연은 결국 프랑스행 티켓을 손에 들었다.

-나 지금 프랑스로 돌아가.

“그래.”

-나한테 할 말이 그거뿐이야?

“조심해서 가.”

-…….

잠시 말이 들리지 않다가 희연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수화음을 타고 흘러나왔다.

-내가 잘못되면, 다 오빠 때문이야.

뚝- 전화가 끊겼다.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나 싶어 가늘게 눈을 뜨고 휴대폰을 보던 태준이 다시 표정을 돌렸다.

알아본 바로는 희연과 결혼할 상대는 꽤 괜찮은 남자였다.

민 회장의 성격이라면 한 달 남은 결혼을 앞당겨 시킬 게 분명했다.

태준은 이대로 희연이 그 남자와 결혼해 잘 살아 주길 진심으로 바랐다.

태준이 손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가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얘긴 언제 할 거예요?”

“무슨 얘기요?”

“강찬영 만난 거.”

“어? 어떻게 아셨어요?”

“박 비서가. 지나가던 길에 봤다고.”

“아…….”

“누가 찾아오면 나한테 얘기하라고 했는데.”

“그게, 별 얘기 안 해서요.”

“무슨 얘기 했는데요.”

“음, 정리해 보면 네 주제를 알아라?”

태준이 매섭게 눈썹을 일그러트린 채 입술을 쓸었다.

“자기 주제도 모르는 사람인데.”

태준은 화가 나서 한 말이었지만 그 모습에 가을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태준이 왜 웃냐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가을을 쳐다보았다.

“그게 절 걱정해 주시는 모습이 되게…….”

“……?”

“그러니까 절 걱정해 주시는 게…….”

……좋아서요.

가을이 뒷말을 삼켰다.

“걱정해 주는 게, 왜요?”

“아니에요.”

가을이 화제를 돌리듯 빠르게 다른 얘기를 꺼냈다.

“동생분이 자기 얼굴이 준수하다고 하더라고요.”

“강찬영이?”

“네.”

“거울을 선물해 줘야 하나.”

태준의 말에 가을이 큰소리로 웃었다.

별거 아닌 일로 우울했다가 즐거웠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변화하는 자신의 기분을 가을은 알 수 없었다.

“별다른 얘기 안 했다고 해도 앞으로 그런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해요. 내가 알고 있어야 하니까.”

“네.”

태준이 앞에 놓인 물을 마시고 내려놓았다.

가을에게 별다른 행동을 보인 것 같진 않아 태준은 찬영을 좀 더 지켜볼 생각이었다.

우연히 가을을 만난 일로 찬영을 몰아세우면 미연을 닮아 엇나가는 성격이 강한 찬영이 다른 일을 꾸밀 게 분명했다.

“은서준 씨 가셨네요?”

통화를 끝낸 명석이 커피 넉 잔이 든 캐리어를 들고 테이블 쪽으로 다가오자 태준이 냉큼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이쪽에 앉아.”

“제 식판이 여기에,”

그 말에 태준이 명석의 식판을 자신의 옆자리로 가져다 놓고 이쪽으로 앉으라고 고개를 까닥였다.

태준의 행동에 기가 막힌 웃음소리를 낸 명석이 태준의 옆자리에 앉았다.

“음식 다 식었는데, 다시 가져오든가.”

“아뇨. 다 먹었어요.”

“그런데 식판은 왜 찾아.”

“제 식판이니까요.”

“저기 앉아야 할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아니고요.”

가을이 태준과 명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멋스럽게 슈트를 차려입은 성인 남자 두 명이 아웅다웅하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태준이 캐리어에서 커피 하나를 꺼내 가을에게 건네고 하나를 더 꺼내 자신의 앞에 놓아두었다.

“누구 전화였어?”

“더 미디어 대표님이요.”

“근데 무슨 전화 통화를 그렇게 오래 해?”

“이번에 영화 제작사 인수하려는 건 때문에요.”

“드림픽쳐스? 인수 금액이 170억이었나. 투자 배급 말고, 자체 제작을 하고 싶어 했으니 인수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기원 그룹에서 인수 의향서를 제출한 상태랍니다.”

방금까지 아웅다웅하던 두 사람이 일 얘기를 나누자 이번엔 방금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저희 쪽 글로벌 미디어와 지분을 나누는 방향으로 대표님이 관심이 있는지 여쭤보시더라고요.”

“음. 그 얘기는 나중에.”

태준이 가을을 의식해 일 얘기를 멈췄다.

가을이 그사이 커피 하나를 다 마시고 내려놓았다.

“더 드세요.”

명석이 서준의 몫으로 사 온 커피를 가을의 앞에 놓았다.

“감사합니다.”

태준이 커피를 들어 쭉 들이켜는 가을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하루에 몇 잔 마셔요?”

“네 잔?”

“많이 마시면 속 쓰려요.”

명석이 슬쩍 목소리를 냈다.

“전 다섯 잔 이상 마십니다.”

“넌 좋은 거 많이 먹잖아.”

“제가요?”

“책상에서 홍삼 꺼내 먹던데.”

“보셨어요?”

“눈이 있으니까.”

“누나가 가져온 거예요. 누가, 일을. 야근할 정도로. 많이 시킨다고 걱정된다고요.”

다시 형제같이 아웅다웅하는 모습으로 돌아온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가을이 슬며시 미소지었다.

“두 분, 사이가 되게 좋으신가 봐요.”

“아뇨.”

“아닙니다.”

빠르게 부정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누구보다 사이가 좋은 게 느껴졌다.

커피를 마시는 명석을 보던 가을이 뭔가 생각나듯 입을 열었다.

“아참. 최고은이요.”

가을의 말에 두 사람의 시선이 모였다.

“임 비서님한테 할 얘기가 있는 것 같던데, 저한테 연락처를 물어보더라고요.”

“얼마 전에 만났습니다.”

“아아, 그러셨구나.”

“용건이 뭐였어?”

태준의 말에 명석이 슬쩍 안경을 위로 올렸다.

“여자친구 있냐고 묻던데요.”

“그게 용건?”

“예.”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느슨히 기댄 태준이 뭔가를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최고은 말이야.”

“예.”

“우리 회사 관련 CF 계약이 어떻게 되어 있지?”

“한 건은 장기고, 두 건은 단발입니다.”

“계약 기간 끝나면 재계약하지 마.”

태준의 말에 가을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명석은 덤덤했다.

“세 건 다 그렇게 진행할까요.”

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은의 그간 행동은 이미 업계에 조금씩 퍼지고 있는 상태였다.

거기다 얼마 전 대형 기획사 대표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모 기업 아들에게 스폰을 받고 있는 연예인이 고은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확실한 얘기가 아니라 알아보려고 했던 태준이 가을의 일을 생각하느라 잊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알아보지 않아도 소문의 주인공이 고은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이면 조만간 스캔들 터져.”

“예.”

이익이 안 되는 건 가차 없는 태준의 성격에 맞게 고은은 큰 CF를 모두 잃게 되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은을 내치는 태준의 모습에 가을이 사뭇 놀랐다.

자신에겐 한없이 다정해 잊고 있었는데. 태준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은 가을이었다.

“강태준?”

누군가의 목소리에 반가운 표정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태준이 가을을 내려다보았다.

“잠시만요.”

가을에게 양해를 구한 태준이 자신을 부른 여자를 향해 다가갔다.

어느 정도 거리에서 멈춘 태준이 여자를 향해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선배님.”

……선배님?

“태준이 형, 과외 했던 분일 거예요.”

가을의 눈빛을 읽은 명석이 물어보지도 않은 얘기를 꺼냈다.

태준이 반갑게 인사를 하는 여자는 태준이 고등학생 때 공부를 가르치던 과외선생이자 대학교 선배였다.

각 과목에 과외를 붙여 준다는 문규의 말을 거절하고 태준은 가장 약한 과목이었던 국어만 과외를 받았다.

그렇게 과외를 받은 후 같은 대학교, 같은 과로 입학해 태준이 입대를 하기 전까지 나름 친한 사이로 지내던 여자였다.

“이게 얼마 만이야? 그렇지 않아도 소식 들었는데 바빠서 연락을 통 못했네.”

“선배님은 그대로시네요.”

“너야말로 그대로네. 아니, 더 멋있어졌는데?”

태준이 여자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자 가을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가을에게 보내는 미소와 달리 형식적인 웃음이었지만 가을의 눈에는 한없이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보였다.

뭐야. 왜 저렇게 예쁘게 웃어.

태준이 다른 여자를 저렇게 오래 쳐다보며 얘기하는 걸 본 적이 없는 가을이 저도 모르게 자꾸 짜증이 났다.

“저분하고 대표님 친했어요?”

“제가 알기론 그나마 제일 가까웠던 여자분이실 거예요.”

서로 뭔가를 얘기하다 여자를 향해 가볍게 인사를 건넨 태준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미안해요.”

“대화가 되게 즐거우셨나 봐요.”

“예?”

“아니 계속 웃으시길래요.”

“내가요?”

“네, 대표님이요.”

태준이 명석을 슬쩍 돌아보자 명석이 맞다는 듯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오랜만에 만난 과외 선,”

“들었어요.”

가을이 태준의 말을 칼같이 잘랐다.

“근데 몰랐는데요. 대표님은 웃으시면 안 될 것 같아요.”

“음……?”

“되게 바보 같아요.”

“…….”

명석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는 듯 슬쩍 안경을 위로 올렸다.

Rrrr-

발신자 [고모]를 확인한 가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전화 좀 받고 올게요.”

빠르게 걸어가며 통화를 하는 가을의 모습을 보던 태준이 고개를 돌려 명석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태준의 시선을 느낀 명석이 할 말 있냐는 눈짓을 보내자 태준이 대답 없이 슬며시 웃어 보였다.

“어때?”

“뭐가요?”

“지금 내가 웃은 거.”

“…….”

“바보 같아?”

“바보 같네요.”

태준이 명석을 가늘게 노려보다 앞에 놓인 아이스커피를 집어 들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근데 대표님.”

“응.”

“조금 전에 말입니다.”

명석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태준을 돌아보았다.

“선배분한테 단걸음에 가신 거 아세요?”

“……그랬나.”

“제가 있어도 여자한테 갈 일이 있으면 행동을 조심하셨는데. 이렇게 단번에 가신 적 없으셨어요.”

태준이 뭔가 생각하듯 눈매가 가늘어졌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세양 호텔’에서도, 화가 난 상태라 그랬다고 해도 여자 스태프들에게 바로 다가갔다.

아무리 거리를 유지했다고 해도 가을을 만나기 전보다 경계심이 줄어든 건 확실했다.

어느 순간부터 가을이 곁에 있으면 마음이 한결 편하다고 생각했던 태준이었다.

“아무래도 정가을 씨하고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긴장이 풀리신 거 아닐까요.”

명석의 말에 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세요.”

“응.”

가을 덕분에 편안함을 느끼는 것과 별개로 그것에 익숙해지면 저도 모르게 다른 여자에게 방심할 수 있는 문제였다.

통화를 끝내고 온 가을이 빠르게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저,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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