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90)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태준이 가을을 향해 미소 짓다가 서준을 돌아보았다.

서준 역시 갑자기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태준과 명석을 번갈아 보았다.

“…….”

“…….”

오고 가는 시선을 느낀 가을이 빠르게 서로를 소개했다.

“이쪽은 오늘 오디션 본 은서준 씨, 이쪽은 대표님이세요.”

가을의 소개에 태준과 서준이 눈빛을 주고받으며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아아…….”

뭔가 생각난 듯 서준이 태준과 가을을 번갈아 보았다.

“그 소문의 주인공이 선배였어요?”

가을을 향해 아무렇지 않게 선배라고 부르는 모습에 태준의 미간이 좁아졌다.

“방송국 대표가 목매고 쫓아다닌다는 조연출?”

“아니 뭐, 목맨다고 할 정도는…….”

“정 감독을, 선배라고 부릅니까?”

틈을 파고들어 오는 태준의 날 선 목소리에 서준이 과하게 밝은 표정을 지었다.

“고등학교 선배님이시거든요.”

태준의 본능이 의찬에게서 느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위험을 감지했다.

“고등학교…… 선배.”

서준을 바라보며 느리게 혼잣말을 뱉어 낸 태준이 시선을 돌려 가을을 응시했다.

“회의 끝났으면, 점심 같이 먹죠.”

“저 그게,”

“선배, 선약 있어요.”

“선약?”

누구랑 약속이 있냐고 묻는 듯한 태준의 눈빛에 가을이 몇 번 눈을 깜빡이다 입을 열었다.

“캐스팅된 기념으로 점심 같이 먹기로 했어요.”

왜 태준의 눈치를 보는 건지 스스로 알 수 없었지만 마치 바람을 피우다 걸린 것처럼 한껏 작아진 목소리였다.

“둘이서만?”

“……둘이었는데…….”

태준의 뒤에 서 있는 명석이 아니라고 해 달라는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

“이젠 넷이 됐네요. 다 같이 먹으러 가죠!”

인상을 구긴 서준에게 미소를 지어 준 가을이 태준과 명석을 돌아보며 두루두루 자애로운 미소를 보냈다.

잠시 뒤.

구내식당 한쪽에 네 사람이 자리했다.

태준과 서준이 서로 가을의 옆에 앉겠다는 신경전을 벌이는 바람에 결국 가을의 옆자리는 명석의 차지가 되었다.

가을의 옆으로 명석이. 그 앞으로 태준과 서준이 앉아 각자의 식판을 올려놓자 쉽게 보지 못하는 광경에 구내식당에 온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명석이 슬쩍 가을을 보며 눈빛으로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가을이 보기에도 태준의 지금 상태는 한파 주의보가 내린 길거리에 서 있는 듯 한없이 매서웠다.

이런 태준과 단둘이 밥을 먹었다면 명석의 모습이 어땠을지 보지 않아도 눈에 훤했다.

눈빛을 주고받는 가을과 명석의 모습에 가뜩이나 자리 배치가 못마땅한 태준의 눈매가 곱지 않았다.

평소 식단 관리를 해 음식을 마음대로 먹지 못하던 서준이 앞에 놓인 음식을 빠르게 입에 넣었다.

“으음, 소문만큼 맛있네.”

서준이 감탄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 옆에 앉은 태준을 돌아보았다.

“대표님도, 맛있어요?”

그 말에 고개를 들었던 가을이 슈트 재킷 단추를 풀고 있는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충분히 맛있어 보이니까 그만하세요.]

“콜록.”

얼마 전 태준에게 잘못 보낸 문자가 생각난 가을이 눈 둘 곳을 잃은 듯 사정없이 눈동자가 흔들렸다.

“재벌들도 이런 음식이 맛있나?”

태준이 가을을 빤히 본 채로 슈트 재킷 단추를 마저 풀어내며 서준의 질문에 대답했다.

“나도 맛있죠. 충분히.”

“크흐음.”

가을의 얼굴이 귀까지 빨개지자 은근히 가을을 놀렸던 태준이 저도 모르게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이유를 모르는 서준이 두 사람을 대놓고 번갈아 바라볼 때, 명석은 눈동자만 이용해 태준과 가을을 살핀 후 다시 식판으로 눈을 돌렸다.

어딘가 묘한 분위기를 눈치챈 서준이 밥을 퍼 입에 넣으며 태준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대표님이 듣던 것보다 더 잘생기셨네요.”

태준이 서준에게 견제를 풀지 않은 채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를 냈다.

“너무 자주 듣는 말이라.”

“선배, 어디가 좋아요?”

“그것도 너무 자주 듣는 말이고.”

“난 정가을이라서 좋아했어요.”

가을을 좋아했다는 서준의 말에 일관된 표정을 유지하던 태준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왜 좋냐고 물어보면 얘기할 게 너무 많은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결국 이유가 하나더라고요. 그냥 정가을이라서.”

“은서준, 옛날 얘기하지 말고 밥이나 먹으면 어떨까?”

“저렇게 틈 없는 모습도 좋았는데.”

서준이 큼직하게 밥을 퍼 입 안에 넣으며 슬쩍 말을 이었다.

“쉽지 않을걸요.”

“쉬울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서.”

태준이 가을을 응시한 채 말을 하자 가을이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한 사람은 사실을 얘기하고,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가을의 마음은 거짓말을 하는 태준에게 반응했다.

“정 감독님 학창 시절엔 어땠습니까?”

명석이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듯 슬쩍 목소리를 냈다.

“뭐랄까, 사람 손길 무서워하는 강아지 같은 느낌? 왜 사람한테 상처받은 강아지들이 그렇거든요. 잔뜩 경계하고 겁내고, 무서워서 엄청 짖어 대는데 그 모습이 굉장히 안쓰러운 거.”

서준의 말에 가을이 뭔가를 생각하며 천천히 음식을 삼켰다.

당시의 가을은 지금보다 더 사람을 멀리했다.

“상처받은 강아지에게 잔뜩 사랑을 주고 싶은 마음. 선배는 나한테 그런 사람이었어요.”

학창 시절을 묻는 명석의 말에 가을에 대한 개인 감상을 말한 서준이 추억에라도 젖은 듯 가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한 알, 한 알, 밥알을 세며 먹던 태준이 ‘탁’ 소리를 내며 거칠게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확실한 과거형이면 좋겠는데.”

“글쎄요. 그건 장담 못 하겠는데요.”

태준이 매서운 눈빛으로 눈썹을 쓸어내렸다.

“그래서, 다시 좋아하겠다는 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얘깁니다. 사람 앞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두 남자의 시선이 뜨겁게 맞붙었다.

마치 경계선이라도 쳐진 듯 태준과 서준이 앉은 쪽엔 한파가 강하게 불었다.

“저기요, 두 분?”

가을의 목소리에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마주 보던 태준과 서준이 가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 분끼리 이래 봤자 아무 소용 없거든요?”

가장 중요한 여자의 마음은 제쳐두고 남자들끼리 죽자고 싸우는 드라마 같은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자 가을이 빠르게 중재에 나섰다.

“떡 줄 사람은 저니까, 식사하시죠.”

커다란 호랑이와 날렵한 표범이 영역 다툼을 하듯 노려보던 두 사람이 가을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조용히 젓가락을 들었다.

“정 감독님.”

“네?”

“잠깐만 실례할게요.”

가을의 눈 아래 붙은 속눈썹을 살며시 떼어 낸 명석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명석의 웃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가을이 입을 열었다.

“임 비서님은 눈매가 굉장히 멋지신 것 같아요.”

사람의 장점을 찾아 칭찬을 하는 가을의 스킬이 발동되었다.

“아, 그런가요?”

“남들보다 눈매가 길어서 웃으면 눈이 길어져서 굉장히 묘한 느낌이 든달까요?”

“칭찬 감사합니다. 정 감독님도, 웃을 때 예쁘세요.”

“아하하. 뭘요.”

가을이 수줍은 듯 머리를 귀 뒤로 넘기자 명석이 미소를 짓곤 무심히 고개를 들었다.

“…….”

방금까지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던 태준과 서준의 시선이 명석에게 꽂혀 있었다.

두 사람이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가을의 옆에 앉은 것도 명석, 가을에게 칭찬을 들은 것도 명석. 떡을 얻은 건 명석이었다.

디링-

메시지 음에 두 사람의 시선을 무른 명석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사진 두 장과 함께 가영이 보낸 메시지였다.

[하늘이 너무 예쁘죠? 그래도 나만큼은 아님.]

하늘 사진과 가영의 사진을 보던 명석이 슬쩍 입꼬리를 올릴 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예, 임명석입니다. ……아, 그건 내일 오후로 일정을 바꿨습니다.”

통화를 하고 오겠다는 손짓을 한 명석이 테이블에서 멀어지자 남은 세 사람 사이에 적막함이 찾아왔다.

서준이 어색한 공기를 가르고 입을 열었다.

“그 선배랑은 아직도 같이 다녀요?”

“누구?”

“왜 항상 같이 다니던 남자 선배요.”

“의찬이?”

“맞다. 그 이름.”

“의찬이는 왜?”

“내가 그 선배 엄청 경계했었거든요. 우리 반에 그 선배 좋아한다고 고백한 여자애가 있었는데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고 차였다길래.”

“그게 왜?”

“좋아하는 여자가 선배 같아서요.”

“나 아니야.”

“어떻게 알아요?”

“걔 여자친구가 아주 숱하게 바뀌었거든.”

“그래요?”

두 사람의 대화에 끼지 못한 태준이 여전히 밥알을 모래알처럼 씹었다.

요란한 벨소리에 서준이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어……. 바로 갈게.”

전화를 끊은 서준이 아쉬움이 잔뜩 묻어난 표정으로 가을을 바라보았다.

“전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좀 더 먹고 가지.”

가을이 스태프를 챙기던 습관에 반쯤 남은 서준의 식판을 가리켰다.

“많이 먹었어요.”

“그래, 그럼 얼른 가 봐.”

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을을 내려다보았다.

“선배.”

“응?”

“인연인 거 잊지 마요.”

가을에게 부드럽게 미소지은 서준이 태준에게 슬쩍 고개 인사한 후 어딘가로 전화를 하며 빠르게 구내식당을 나갔다.

“인연?”

무슨 뜻이냐는 듯 태준이 빤히 바라보자 가을이 괜히 제 뺨을 매만졌다.

“그냥 뭐, 전에 만났을 때 다음에 다시 만나면 인연이라고.”

“하.”

태준이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얼굴도 모르는 박선호로도 부족해 친구인 의찬, 거기다 가을을 좋아했다는 학교 후배라니.

‘계약 짝사랑’이라는 사실을 잊기라도 한 듯, 태준은 자신이 겪었던 어떤 경쟁보다도 지금 상황이 더 어렵다고 생각했다.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었던 가을이 태준과 둘만 남겨지자 어딘가 자꾸 의식이 돼 물만 홀짝였다.

넓은 구내식당 안에는 두 사람과 멀리 떨어져 앉아 있는 몇 명을 제외하곤 한산했다.

거기다 구석진 자리에 앉은 탓에 지나가는 사람도 없어 태준과 둘만 있는 게 더 신경 쓰였다.

잠시 말이 없던 태준이 앞에 놓인 물을 마시고 내려놓았다.

“저 친구가 도형이 역 하기로 한 거예요?”

“네. 오늘 오디션 봤는데 연기를 굉장히 잘하더라고요.”

다른 배우로 교체하라는 말이 목까지 차오른 태준이 애써 말을 참아 냈다.

“캐스팅에 문제가 좀 있다던데.”

배우들 소속사에서 신인 작가와 신인 감독이라는 이유로 캐스팅을 고사한다는 얘기를 4부작 총괄 PD에게 전해 들어 태준도 알고 있는 상태였다.

거기다 가을이 맡은 작품에 출연을 번복한 배우들이 김 감독의 작품에 합류했다는 사실과 소속사들 사이에 돌고 있다는 소문을 오늘 아침 전해 들었다.

소문의 출처가 어딘지 태준은 오늘 아침 명석에게 알아보라고 시켜 두었다.

“내가 도와줄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태준의 말에 뭔가 생각하던 가을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꺼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요.”

“예.”

“무슨 일이 있어도 대표님은 그냥 대표님으로서 하실 수 있는 일에만 관여해 주시면 좋겠어요.”

“좀 더 정확히요.”

“그러니까…… 저만 특별히 뭔가를 지원해 주실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김 감독과 관련된 소문이라면 보고 받아서 알고 있어요.”

가을이 앞에 놓인 물을 반쯤 마시고 내려놓았다.

“만약 김 감독님이 절 방해해서 하신 일이라고 해도 대표님이 해결해 주신다거나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째서요.”

“일단 그 소문은 김 감독님과 제가 얘기해 볼 거고요. 그리고…….”

“…….”

“제힘으로 해내고 싶어요.”

가을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전 제 실력을 당당히 증명해 보이고 싶어요. 그런데 만약 대표님이 뭔가에 나선다면, 제 실력이 아니라 대표님 후광으로 작품이 잘됐다는 얘길 듣게 되겠죠.”

팔짱을 낀 채 얘기를 듣고 있던 태준이 이해한다는 듯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니까 그냥 절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을을 지그시 보던 태준이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린 채 가을의 앞으로 바싹 몸을 가져다 대었다.

“그거 알아요?”

태준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가을이 슬며시 몸을 뒤로 빼냈다.

언젠가부터 자꾸만 태준의 행동들이 의식돼 몸이 경직되던 가을이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정가을 씨,”

“…….”

“참 멋져요.”

두근. 두근. 두근.

몸은 바짝 경직되었는데. 심장은 또다시 제 의지와 상관없이 뛰었다.

태준이 칭찬에 귀까지 빨개진 가을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거기다 귀엽고.”

“…….”

“그래서 내가 자꾸, 반하고.”

“…….”

태준이 느슨히 입술을 휘며 고개를 슬며시 기울였다.

“더 멋있어지면 곤란한데.”

떨리는 마음에 눈 돌릴 곳을 찾지 못한 가을이 괜히 장난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핫…… 그건 장담 못 하겠는데요.”

미소 짓고 있는 가을과 달리 태준의 눈빛이 한없이 깊어졌다.

“……그러다 내가 진심이 되면.”

태준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감당할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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