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90)

‘STN’ 드라마국 회의실 안.

가을이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 앉은 정찬 CP를 쳐다보았다.

“그게 정말이에요?”

배역을 확정했다가 돌연 출연을 고사한 남녀 배우가 김 감독이 하는 4부작에 캐스팅이 되었다는 얘기를 정찬 CP가 꺼낸 상태였다.

“우리 쪽 시나리오가 먼저 들어가고 나중에 김 감독 쪽 시나리오가 들어간 모양이더라고. 우리보다야 김 감독이 유명하니까 그쪽으로 옮긴 것 같아.”

정찬 CP의 말에 회의실 안에 있던 PD들, 도식을 비롯한 지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김 감독이랑 같이 작품하고 나면 영화 쪽까지 뚫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배우 입장에서 보면 이쪽보다야 김 감독의 작품에 들어가는 게 훨씬 나은 일이었다.

가을이 맡은 4부작 ‘거기에 네가’ 는 배우들의 출연 고사 이후 다른 두 작품에 비해 주연 배우 캐스팅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신인 작가와 신인 연출가라는 이유가 가장 컸다.

여기저기서 한숨이 흘러나올 때 통화를 하고 들어온 혁진이 잔뜩 격앙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소문이 이상하게 나고 있나 봐요.”

“소문?”

“가을 누나가 대표님 이용해서 4부작 페스티벌 맡고 김 감독님 ‘STN’에서 쫓아냈다고요.”

“뭐??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나.”

도식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매섭게 내려쳤다.

“그래서 우리 작품에 출연하면 김 감독님 작품에 출연 못 한다는 소문이 돌아서 다들 우리 작품 하기 꺼려 한대요.”

천만 영화 감독에, ‘시간을 지나서’가 성공적으로 끝난 것마저 김 감독의 재량이라는 평을 듣고 있었다.

김 감독의 눈에 띄어 작은 배역이라도 맡고 싶어 하는 배우들이 그런 소문을 듣고 가을의 작품에 합류할 리가 없었다.

“내가 김 감독한테 전화해 볼게.”

“아뇨.”

가을이 휴대폰을 들고 일어난 도식을 만류했다.

“제가 회의 끝나고 김 감독님하고 통화해 볼게요. 당사자끼리 얘기를 해 봐야죠.”

누구보다 침착한 가을의 모습에 도식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늘 침착하게 대안을 모색하는 가을의 성격다웠다.

“김 감독 설마, 일부러 그런 소문 낸 거 아니야?”

정찬 CP 말에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

“정 감독 일이라면 뭐든 방해하던 사람 아냐. 경쟁사 가서 4부작 맡은 것도 그렇고. 그런 소문 내서 정 감독 난처하게 하려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다 드네?”

“그런 거면 진짜 내가 SNS에 그동안의 만행을 확 다 올려 버릴 거예요.”

지영이 휴대폰을 들고 눈을 빛냈다.

자신과 김 감독 문제 때문에 드라마 팀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가을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저 때문에 드라마 촬영 전부터 힘든 일이 생겨서 죄송해요.”

“야 인마, 그게 왜 너 때문이야. 말도 안 되는 소문 낸 사람 탓이지.”

“맞아요. 가을 언니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

“괜히 이런 소문 나서 네가 의욕 꺾일까 봐 그게 걱정된다 우린.”

도식을 비롯해 안에 있던 사람들이 오히려 가을을 걱정하자 그 마음을 느낀 가을이 평소처럼 밝은 목소리를 냈다.

“김 감독님이 벌인 일이든, 사람들이 어떤 오해를 하든, 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가을이 기합을 넣듯 좀 더 목소리를 높였다.

“드라마는 작품으로 얘기하는 거니까. 우린, 작품으로 승부를 봅시다!”

가을의 각오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지영은 양손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한텐 김 감독님이 없는 게 있거든요.”

가을이 회의실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한명 한명 쳐다보았다.

“저한테 기회를 주신 CP님, 휴식도 없이 단걸음에 와 주신 감독님이랑 혁진이랑, 지영이도 있고. 또 무엇보다 이 팀엔, 제가 있죠.”

가을이 해맑게 웃어 보이자 안에 있던 사람들도 덩달아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자뻑 아주 좋아.”

도식이 엄지를 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고마워요.”

가을이 진심을 담아 사람들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가을 언니한테 이런 말 들으니까 되게 울컥한 거 있죠? 솔직히 언니가 어딘가 벽이 있잖아요.”

“맞아.”

“그렇지.”

“좀 친해졌다 싶으면 도로 그 자리고. 완전 철벽녀 느낌이 강했는데. 이제야 좀 친해진 것 같아서 진짜 대박 감격.”

지영의 말에 옆에 앉은 혁진과 도식도 맞장구치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는 게 두려운 가을은 언제나 상처받지 않을 만큼만 마음을 주고 살았다.

관계가 더 깊어지고 소중한 게 늘어나면 그만큼 두려움이 깊어질 게 뻔했으니까.

온전히 마음을 내주지 않은 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상처받지 않기 위한 가을의 보호벽이었다.

정도는 달랐지만 그건 의찬을 비롯해 가영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까 말이야. 정 감독 요즘 좀 달라지지 않았어?”

도식의 말에 혁진과 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는 개인적인 걸 조금이라도 물어보면 밀어내더니, 언젠가부터 그런 게 좀 없어졌어.”

“맞아요. 언니 보면 억지로 웃는구나 싶을 때가 많았는데 요즘 진짜 웃는 거 같아요.”

“그러고 보니까 진짜 그렇네. 가을 누나, 자기 얘기 절대 안 하는데 이사 간 얘기도 해 주고, 뭔가에 막 쫓기는 느낌이 없어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세 사람의 얘기에 가을이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 가을을 뒤로하고 세 사람이 자기들끼리 대화를 이어 갔다.

“강 대표가 쫓아다니고 나서부터 아니야?”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저도요.”

“확실히 그때부터 좀 달라졌지?”

“무척이요.”

“확실히요.”

태준을 만나면서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자신의 상태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가을이 세 사람의 말에 자신이 그랬나 싶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쨌든 우리한테 고맙다 이거지?”

도식의 말에 가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말이야,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그제야 내 편이 누군지 알게 되는 법이거든. 그런 의미로.”

도식이 술잔을 꺾는 시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집들이 한번 해.”

“찬성!”

“저도 찬성이요!”

분위기를 보던 정찬 CP가 자신도 슬쩍 목소리를 냈다.

“나도 찬성.”

화기애애한 회의실 안에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캐스팅 PD가 안으로 들어왔다.

“혹시 지금 배우 미팅 가능하세요?”

“지금이요?”

“요즘 잘나가는 모델인데 아까 소속사에서 오디션 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모델이요?”

“아, 모델이긴 한데 전공이 원래 연기더라고요.”

가을이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속사마다 주연 배우 역을 고사해서 걱정했는데 이렇게 먼저 연락 온 건 처음이에요.”

아직 소문을 모르는 캐스팅 PD가 그간 고생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말을 이었다.

“오늘 화보 촬영으로 출국하기 전에 오디션부터 보고 싶다고 하는데. 지금 들어오라고 할까요?”

“네. 지금 미팅하죠.”

가을의 말에 캐스팅 PD가 문밖으로 나가자 지영이 누군가 생각난 듯 눈을 빛냈다.

“어? 나 누군지 알 것 같은데.”

지영이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캐스팅 PD보다 한 뼘은 불쑥 올라온 큰 키의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무심히 고개를 든 가을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진한 청바지에 청으로 된 셔츠. 1990년대 남자 주인공이 타임 슬립한 드라마 설정에 맞게 소화하기 힘든 청청 패션을 하고 들어 온 남자.

“은서준??”

“어? 선배??”

남들이 입으면 패션테러라고 할 청청 패션을 멋스럽게 소화한 서준이 놀란 얼굴로 가을을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 아는 사이야?”

정찬 CP가 가을과 서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학교 후배예요.”

“이야, 잘됐네.”

“잘 부탁드립니다!”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꾸벅 인사한 서준이 캐스팅 PD가 안내한 자리에 앉았다.

다시 만날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가을이 결연한 표정을 하고 있는 서준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캐스팅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해도 자신만의 캐릭터 분석 및 연기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가차 없이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잠시 뒤, 서준의 맞은편으로 가을을 비롯한 회의실에 참석한 사람들이 자리를 옮겨 앉으며 오디션이 진행되었다.

“도형이란 캐릭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죠?”

가을의 질문에 서준은 망설임 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도형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술술 대답했다.

거기다 가을이 반대되는 의견을 내면 서준은 차분히 자신의 의견을 덧대었다.

그저 대본에 쓰인 대사를 외워 온 게 아니라 착실하게 캐릭터를 분석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묻어났다.

“자, 그럼 준비해 온 연기 한번 볼까요?”

가을의 말에 자세를 고쳐잡은 서준의 눈빛이 일순간에 바뀌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 당신 때문이야. 내 몸 세포 하나하나가 전부 당신을 기억하고 있어서…… 당신의 모든 것들이 날 잡아끌듯 이곳으로 이끌었어.”

서준이 애틋함과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가을을 응시한 채 대사를 이어 갔다.

“당신이 없는 난 아무것도 아니야. 내 모든 시간은 당신으로 차 있어서 움직이지 않아. 그러니까 난 당신과 함께 이곳에 남겠어.”

그렁하던 서준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사랑해.”

연기가 끝나고 일순 조용해진 회의실 안에 누군가 먼저 박수를 쳤다.

그러자 저마다 서준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이야~ 이 친구 연기 잘하네, 응? 연기 잘해.”

정찬 CP를 비롯해 도식도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대사를 하는 짧은 순간을 오롯이 캐릭터에 몰입하게 만드는 놀라운 연기력이었다.

가을 역시 ‘사랑한다’는 대사를 하는 서준에게 두근거릴 정도로 생각지 못한 연기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서준이 깊게 몰입했다가 나온 듯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 내자 지영이 빠르게 티슈를 건넸다.

“고마워요.”

“벼, 별말씀을요.”

서준이 미소 짓자 얼굴을 붉힌 지영이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어릴 때부터 배우가 꿈이던 서준은 연극영화과 재학 중에 선배들의 졸업 작품 영화에 출연을 했다.

뛰어난 서준의 연기력을 알아본 영화 감독들이 러브콜을 보냈지만 서준은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다는 욕심으로 친척이 대표로 있는 기획사의 모델로 데뷔를 했다.

준비해 온 몇 가지 연기를 더 선보인 서준은 그 후 드라마에 관한 질문에 대답을 하는 순서를 거쳤다.

그 후,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의 만장일치로 그 자리에서 남자 주인공 ‘도형’역으로 서준이 캐스팅되었다.

“잘해 봅시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려요~”

인사를 나눈 후 사람들이 회의실을 나가자 가을도 가져온 노트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모두 나가길 기다렸던 서준이 가을의 앞으로 다가왔다.

“역시 선배랑은 인연이었나 봐요.”

가을이 돌아보자 서준이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두 번째 만나면 인연이라는 말, 기억하죠?”

“그래 그 인연으로 열심히 찍어 보자.”

서준이 단호한 가을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 작품 선배 입봉작이죠?”

“응.”

“영광이네. 잘 부탁해요. 어쩐지 그 시놉이 눈에 띈다 했어.”

서준의 소속사로 보낸 시놉시스는 다른 배우의 몫으로 보낸 것이었다.

당분간은 모델 일에 전념하려던 서준이 대표실에 들렀다가 테이블 위에 놓인 시놉시스를 우연히 발견하고 내용이 마음에 들어 자신이 하고 싶다고 자처했다.

작가와 연출자의 이름은 신경 쓰지 않고 내용만 읽어 가을이 연출을 맡은 작품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신인 작가와, 신인 감독의 작품이라며 소속사 대표가 만류했지만 서준이 우겨서 오디션을 보러 오게 된 것이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할게.”

잠시 망설이던 가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출연을 번복하거나…….”

“그럴 일 없어요.”

가을이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 쫓아다닌 거 보면 모르나? 난 한번 하기로 마음먹으면 끝을 내는 성격이에요.”

꽉 채운 셔츠가 답답한지 서준이 단추를 하나 풀며 말을 이었다.

“내가 포기한 일은 선배밖에 없어요. 그건 뭐 전학이라는 불가항력 때문이었으니까.”

“전학은 왜 갔는데?”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지방으로 내려갔거든요.”

말과 달리 서준이 산뜻하게 미소지으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선배, 연락처 좀 주세요.”

“연락처?”

“대본 보다가 궁금한 거 생기면 물어보려고요.”

“그건 작가한테 물어봐야지.”

“작가님한테도 물어보고, 선배한테도 물어보고. 제가 학구파거든요.”

서준이 어서 알려 달라는 듯 손에 든 휴대폰을 톡톡 두드리자 어차피 함께 작업하면 알게 될 일이라 가을이 별다른 말 없이 휴대폰 번호를 알려 주었다.

“오케이. 저장 완료!”

잔뜩 신난 개구쟁이처럼 웃던 서준이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Rrrr-

가을의 휴대폰이 울리자 서준이 바로 통화를 종료했다.

“내 번호니까 저장해요.”

휴대폰을 청재킷 주머니에 집어넣은 서준이 귀여움이 넘치는 후배 표정을 지으며 가을을 바라보았다.

“캐스팅된 기념으로 점심 사 주세요.”

“너 화보 촬영가야 한다며.”

“아직 시간 괜찮아요.”

앞으로 계속 볼 사이가 되었으니 같이 밥 먹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가을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구내식당 괜찮아?”

“오~ 좋죠. 구내식당 음식 맛이 호텔급이라면서요.”

서준이 가을을 따라 몸을 돌렸다.

Rrrr-

발신자 [강태준 대표님]을 확인한 가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회의 끝났어요?

“네.”

-어딥니까.

“지금 회의실 안이에요.”

-들어갈게요.

“네??”

태준의 말과 동시에 ‘똑똑’ 소리가 들리더니 벌컥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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