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준이 싸늘하게 희연을 내려다보았다.
“네 인생은, 스스로 책임져.”
“좋아하는 여자 생겼다며?”
희연의 말에 태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태준이 낮은 목소리를 냈다.
“잠깐 얘기 좀 하자.”
태준이 대표실로 몸을 돌리자 명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희연과의 신체 접촉이 생길까 싶어 명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표실 문 앞에서 대기했다.
태준을 따라 희연이 대표실 안으로 들어가자 ‘탁’ 문이 닫혔다.
힘주어 머리를 쓸어 넘기던 태준이 책상에 몸을 기댄 채 희연을 돌아보았다.
“그 여자한테 신경 꺼.”
“바쁘다더니 그 여자 챙길 시간은 있나 봐? 어떤 여잔데?”
“신경 끄라고 했다.”
희연이 원망이 가득한 표정으로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어제 아침, 희연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결혼식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3년을 미뤄 오다 억지로 진행하는 결혼이었다.
어릴 때부터 원하는 걸 갖지 못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 갖고 말던 희연이 태준만큼은 갖지 못했다.
갖기는커녕, 태준은 한 번도 희연을 향해 웃어 주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을 싫어해도 희연은 태준을 포기하지 못했다.
희연이 태준을 따라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하자 희연의 부친은 재산을 한 푼도 주지 않겠다는 협박으로 희연을 프랑스로 보냈다.
그곳에서 대학까지 마친 희연은 바로 ‘르망 호텔’ 프랑스 지사에 입사했다.
그 후에도 희연이 태준을 포기하지 못하고 한 번씩 미국을 왔다 갔다 하자 결국 희연의 부친은 그녀를 모 그룹 아들과 강제 약혼을 시켰다.
여러 차례 반항을 해봤지만 협박에 가까운 부친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약혼을 한 희연은 태준이 자신이 아니라 어떤 여자도 만나지 않을 거라고 위안하며 약혼식 이후로 태준을 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어제 아침. 희연은 서울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태준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는 얘기에 들고 있던 고가의 식기를 놓쳐 산산조각이 났다.
자신에게는 따듯한 눈길은커녕 만지지도 못하게 하고 미국으로 찾아가도 도망가기 바쁘던 태준이 여자를 짝사랑한다니.
그 말을 듣는 순간, 견딜 수 없는 마음이 터져 버렸다.
강태준이 여자를 만난다면, 그건 무조건 자신이어야 했다.
그래서 희연은 결혼식을 앞두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태준이 좋아한다는 여자에 관한 얘기를 들으면서도 거짓말이길 바랐는데.
태준의 눈빛을 보니 사실이 분명했다.
“조연출이라며? 얼굴도 꽤 예쁘고.”
“민희연.”
태준의 검은 눈동자가 오싹할 만큼 깊게 내려앉았다.
“두말하게 하지 마.”
“…….”
“그 여자 입에서 네 얘기가 나오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몰라.”
찾아가지도, 건드리지도 말라는 경고였다.
“하…… 강태준이 여자 때문에 지금, 협박하는 거야?”
“협박에 그칠지 아닐지는 너한테 달렸어.”
자신이 알던 모습보다 더 서늘한 태준의 눈빛과 목소리에 희연의 몸이 떨려 왔다.
“알아들었으면, 이제 그만 나가.”
희연이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두고 봐.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내가 오빠 차지할 거니까.”
‘쾅!’
희연이 거칠게 문을 닫고 대표실을 나갔다.
그녀의 집착을 모르지 않는 태준이 목덜미를 주물렀다.
태준이 사고를 당해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 전까지 태준을 쫓아다니던 여자들을 괴롭히고 다니던 희연이었다.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할 줄 모르고, 원하는 것은 뭐든 가져야 하는 모습에 태준은 희연을 멀리했다.
그럴수록 희연은 오히려 태준에게 더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혹시라도 희연이 가을을 괴롭힐까 싶어 태준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탈칵.’
명석이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괜찮으세요?”
“응.”
“희연이 프랑스에서 결혼 한 달 앞두고 이쪽으로 온 거랍니다.”
일 잘하는 비서답게 짧은 사이 그동안 희연에게 생긴 일을 알아보고 온 명석이었다.
“혹시 정가을 씨를 괴롭히려고 온 건 아닐까요.”
“그렇게 두지 않지.”
입술을 쓸어내리는 태준의 눈빛이 강하게 빛났다.
“아이씨, 힘들어.”
가영이 커다란 봉투를 들고 낑낑거리며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최근에 산 옷을 중고 거래를 하려고 나왔다가 근처가 의찬의 집인 걸 깨달은 가영이 의찬에게 메시지를 보냈었다.
집 앞으로 나오면 강아지 옷을 주고 가겠다는 메시지였다.
키우는 강아지도 없는데 거래하러 나온 사람이 덤이라며 강아지 옷을 주고 갔다.
그 옷을 강아지를 키우는 의찬에게 주면서 슬쩍 월급을 가불해 달라는 얘기를 꺼낼 생각이었다.
[옷은 주면 고맙고, 가불 얘기 꺼낼 거면 사양인데. 심부름 좀 하고 가면 생각해 본다.]
의찬이 보낸 메시지였다.
“이 양반이 아주 눈치만 빨라서.”
어쩔 수 없이 심부름을 하겠다고 하자 의찬이 마트에서 사다 줄 품목을 잔뜩 찍어 보냈다.
종류도 다양했다. 라면에서부터 샴푸, 우유, 콜라, 과자 등등 대부분 생필품이나 간식이었다.
“배달비 그거 아끼려고 진짜. 돈도 많으면서.”
가영이 욕을 한 바가지 하는 사이 의찬이 사는 15층에 도착했다.
‘딩동.’
벨을 누르자 한눈에 봐도 편해 보이는 추리닝을 입은 의찬이 문을 열었다.
“멍, 멍.”
작은 말티즈가 의찬의 뒤에 숨어 가영을 향해 짖어 댔다.
“이야~~ 네가 망고구나? 주인이랑 달리 아주 귀엽네.”
“보자마자 헛소리야.”
의찬이 가영이 들고 있는 커다란 봉투와 강아지 옷을 낚아채듯 가져갔다.
“잠깐 있어.”
멀리서 왔다 갔다 꼬리를 치면서 짓는 망고가 귀여워 가영이 손을 흔들며 ‘이리 와, 이리 와.’ 하는 사이 의찬이 다시 현관으로 다가왔다.
“오늘 든 비용은 계좌로 보낸다.”
의찬이 손에 든 과자를 가영에게 건넸다.
“자.”
“뭐예요?”
가영이 의찬이 건넨 과자를 건네받았다. 조금 전 의찬이 사 오라는 품목에 있던 ‘좋은 맛, 쌀과자’. 가영이 가장 좋아하는 과자였다.
“뭐야? 나 주려고 사 오라고 한 거예요?”
“심부름 값.”
“오올~ 좀 감동인데?”
“싸게 먹히는 감동이네. 용건 끝. 가라.”
“잠깐!”
가영이 닫히는 현관문을 재빨리 잡았다.
“가불은요?”
“가불?”
“심부름하면 해 준다면서요.”
“생각해 본다고 했지.”
“아이씨! 치사하게.”
“치사하면 네가 사장하든가. 잘 가.”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밥도 못 먹고 공짜로 옷이나 주고~ 심부름하고~ 에잇, 악덕 사장.”
가영이 엘리베이터를 향해 몸을 돌리자 뒤에서 의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밥 안 먹었어?”
“사 주시게요?”
“아니.”
“난 배부른데, 이런 말 할 거면,”
“치킨 시켰는데. 들어와서 먹고 가든지.”
“뭐래? 남자가 막 여자를 자기 집에 들어오라고 해도 돼요?”
“여자는 무슨.”
“내가 남자는 아닌데?”
“안 먹을 거면 가.”
의찬이 문을 닫으려 하자 가영이 냉큼 현관문 안으로 들어갔다.
34평에 거실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한눈에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사장님 부자인 게 좀 실감이 되네.”
“반하지 마라.”
“늘어난 추리닝 입고 그런 소리가 나오나?”
“옷은 내 외모를 거들 뿐이지.”
어느새 망고를 안아 든 가영이 망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망고야~ 저런 주인이랑 살기 힘들지? 근자감이 아주 우주를 뚫고 나갈 기세야.”
“자기소개 그만하고 빨리 먹고 가.”
의찬이 소파 테이블로 다가가 바닥에 앉았다.
커다란 TV 화면에 광고가 끝나고 프로야구 올스타전이 시작했다.
“어어? 맞다 야구!”
“주방에서 컵 하나 더 가져와.”
두 사람의 공통된 취미는 야구였다.
가영이 컵을 들고 바닥에 앉자 의찬이 컵에 콜라를 따라 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의찬의 옆에 앉아 연신 치킨을 뜯던 가영이 소파 아래 떨어진 머리끈을 집어 들었다.
“사장님 여친 생겼어요?”
의찬이 무심히 슥 보고 다시 TV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을이가 한참 찾던 거네.”
“난 또. 갑자기 여친이 찾아오면 어쩌나 순간 걱정했네.”
“걱정마라. 이 집엔 가을이 밖에 안 온다.”
“다른 여자는요?”
“가을이 말고, 네가 처음.”
“얼마 전에 헤어진 여친은?”
“안 데려왔는데.”
“왜요?”
“데려와야 해?”
“그럼 어디서 놀아요?”
“밖에서 놀지.”
“밖에서 뭐 하고 놀아요?”
“그럼 안에선 뭐 하고 노는데?”
의찬이 별다른 생각 없이 대답하자 가영이 슬쩍 머리를 긁적이며 건전한 대답을 했다.
“이렇게 치킨 먹으면서 야구 보기?”
“그래. 조용히 야구 보자.”
의찬이 치킨을 들어 보이며 TV 화면을 돌아보았다.
한참을 얌전히 치킨만 먹던 가영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입을 열었다.
“사장님.”
“왜.”
“제가요.”
“어.”
“한번 자자고 하면, 어때요?”
의찬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1초 만에 대답했다.
“혼난다.”
반응이라고는 전혀 없는 의찬을 보며 가영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쩜 이렇게 평온한 얼굴로 치킨을 뜯지?”
“너 설마 남자한테 그러고 다녀?”
“아뇨!! ……딱 한 번……?”
의찬이 그제야 가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평소와 달리 의찬이 매섭게 바라보자 가영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정가영.”
“네……?”
“진짜 널 어쩌면 좋지?”
“첫, 첫눈에 반해서 그랬거든요?”
“그래서.”
“……뭐가요?”
“그래서 잤어?”
“아뇨……. 그 남자가, 그런 건 결혼하고 나서 하는 거라네요.”
“다행이네. 제대로 된 놈이라.”
“뭐야, 이 쎄함은? 설마 사장님 아직…….”
가영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의찬의 몸 어딘가로 향하자 의찬이 ‘쿵’ 가영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어린 노무시키가. 발랑 까져서.”
“스물두 살인데요.”
“너 그러고 다니면, 가을이한테 이른다.”
“아, 그러지 마요. 처음이니까.”
다시 치킨을 집어 들던 가영이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사장님.”
“왜, 또.”
“남자들은 어떨 때 질투해요?”
가영이 정말 궁금하다는 듯 의찬을 보며 눈을 빛냈다.
‘디링.’
신호대기에 잠시 차를 멈춘 명석이 메시지음에 휴대폰을 확인했다.
치킨과 함께 그 옆으로 한눈에 봐도 다부진 남자의 팔뚝이 함께 찍힌 사진이 전송되었다.
[지금 남사친 집에서 치킨 먹는 중인데, 치킨 좋아하세요?]
가영의 메시지였다.
얼마 전 가영은 병원에 다녀왔다며 허리는 후유증이 생길 수 있으니 상태를 지켜보고 치료비를 청구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치료비와 후유증을 생각해 금액을 보낼 테니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하자 가영은 그럴 수는 없다며 정확한 금액을 받고 싶으니 상태를 지켜봐야 한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메신저 기능으로 얼마라도 송금을 할까 싶었지만 가영의 말대로 정확한 금액을 보내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 후, 틈이 날 때마다 하늘이 예쁘다는 둥, 꽃이 피었다는 둥, 소소한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보내왔다.
중요하지 않은 메시지는 보내지 말라는 답변을 보냈는데도 가영은 굴하지 않고 하루에 두어 차례씩 메시지를 보냈다.
치료비 문제를 마무리 짓지 못한 명석은 가영의 메시지를 차단하지 못했다.
보낸 메시지에 대답을 하지 않아도 가영이 꿋꿋하게 메시지를 보내는 모습에 명석이 단답식으로 대답을 해 주게 되었다.
‘디링.’
뒤이어 TV 화면을 보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 전송되었다.
[제 남사친 몸매 좋죠? 그래도 제 눈엔 부채 오빠가 더 멋져요.]
명석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누가 봐도 연출한 사진이라는 티가 났다.
순진한 건지, 영악한 건지. 하는 행동이 꽤 귀여웠다.
명석이 가영의 메시지에 답변을 보내지 않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Rrrr-
“예. 임명석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명석이 보조석에 앉은 태준을 돌아보았다.
명석이 운전을 하는 경우엔 특별한 일을 제외하고 태준은 늘 뒷좌석이 아닌 보조석에 탔다.
“민 회장님 일정이 늦게 끝나서 10분 정도 늦으신답니다.”
태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르망 호텔’ 회장이 자신을 못마땅해한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던 태준이었다.
민 회장을 만나 희연이 자신을 만나면 얼마나 불행해지는지를 확실하게 보여 줄 생각이었다.
희연을 말리는 것보다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을 절대 자신에게 주고 싶지 않게 만드는 것이 희연을 떼어 낼 수 있는 빠른 길이었다.
“민 회장님이 정말 희연이를 막으실까요?”
“그러실 거야. 말했잖아.”
태준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연기를 아주 잘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