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90)

-아뇨 대표님도 맛있어, 아뇨, 아뇨. 그게 아니고,

“아하하하하.”

태준이 결국 참지 못하고 큰 웃음소리를 냈다. 보는 사람이 없는 게 아쉬울 정도로 아이 같은 해맑은 미소였다.

“맛있어 보였다고 생각할게요.”

-…….

얼굴이 빨개졌을 가을을 떠올리며 태준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잘 자요.”

* * *

“정수희도 출연을 취소했다고요?”

드라마국 회의실 안에 가을을 비롯해 캐스팅 FD, 혁진 등 몇 명의 스태프들이 자리했다.

스태프 선정은 대부분 연출자의 몫이라 가을은 도식과 혁진, 지영 등, 그동안 함께했던 스태프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캐스팅 역시 순조로워 남녀 주인공으로 일찌감치 대세 배우들이 출연을 확정한 상태였다.

그런데 돌연 남자 배우가 출연을 취소하더니, 여자 배우마저 출연 취소를 알려 왔다.

작가와 감독이 모두 신인이라 불안하다는 게 이유였지만 그랬다면 처음부터 출연을 고사할 일이었다.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분에 가을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 버릇처럼 다 마신 커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번에 조감독으로 일하게 된 혁진이 자리에서 냉큼 일어났다.

“제가 가서 더 사 올게요.”

“아냐. 내가 사 올게.”

“같이 가요, 그럼.”

방송국 1층 카페에서 가을과 혁진이 아이스커피 6잔을 주문하고 커피를 기다렸다.

연이어 드라마 두 편에서 조연출을 하고 쉬고 싶었을 텐데 혁진은 함께 일하자는 가을의 말에 망설임 없이 4부작에 참여했다.

“혁진아.”

“예?”

“같이 일해 줘서 고마워.”

“에이, 우리 사이에 당연히 해야죠. 참, 제가 티엔터에 아는 사람 있는데 슬쩍 분위기 한번 물어볼까요?”

티엔터는 이번에 출연을 고사한 남녀 배우가 있는 소속사였다.

“아무래도 좀 이상하긴 하지?”

“상당히 이상한 부분이 있죠.”

가을도 고개를 끄덕였다.

“참, 누나. 그때 은서랑, 희수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이 처벌 안 받더라도 고소는 한다고 강경해서.”

가을이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집 앞에서 얘기를 한번 꺼낸 후 자신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한 차례 더 전했지만 태준은 이번엔 자기 뜻을 따라 달라는 대답을 할 뿐이었다.

“누나는 처벌 원하지 않죠?”

“없는 말 하고 다닌 건 화나는 일이긴 한데, 같이 일한 것도 있고.”

고소를 하지 않아도 이번 일로 충분히 잘못을 깨달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난 대표님 의견에 한 표.”

혁진이 평소와 달리 매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대표님이 고소해도 어차피 누나가 처벌 원하지 않으면 끝나잖아요.”

“그건 그렇지.”

“걔들 혼 좀 나야 해요. 촬영장에서 사람들 뒷말하기로 엄청 유명하더라고요.”

“그래?”

“장난 아니었대요. 이번에도 촬영 내내 단체 메시지창에 말도 안 되는 누나 험담 엄청 하고 다녔다더라고요. 대표님이 해 준 건 자기들이 제일 잘 받아먹고 말이야.”

“정가을 씨?”

그때 어딘가 쇳소리가 섞인 가느다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을이 고개를 돌리자 슈트 차림에 과하게 머리를 올린 찬영이 아는 척을 하며 가을에게 다가왔다.

“그렇지 않아도 한번 보고 싶었는데 반가워요.”

어디서 봤던 사람인가 싶어 가을이 빠르게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강태준 동생, 강찬영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도식에게 ‘세양 가’ 얘기를 들었던 가을은 인터넷에서 ‘세양 그룹’ 가계도를 찾아봤었다. 그때 강정열 아들 강태준, 강찬영. 이라고 적혔던 내용이 떠올랐다.

아무리 이복형제라고 하지만 찬영은 태준과 외모적으로 닮은 구석이 별로 없었다. 길게 찢어진 눈은 음험해 보이고 몸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고압적인 느낌이 가득했다.

“혹시 잠깐 시간 돼요?”

가을에 관한 걸 조사하던 찬영은 가을의 사진을 보고 얼굴을 알고 있었다.

찾아가거나 연락하면 태준의 귀에 들어갈 게 뻔해 뒷조사만 해 둔 상태였다.

찬영 역시 문규처럼 가을의 집안, 학력 등에 대해서만 알아냈을 뿐, 선호에 대한 부분은 알지 못했다.

사진상 예쁜 얼굴이긴 했지만 대체 어디가 좋아서 태준이 그렇게까지 매달리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우연히 가을을 보자 반색하며 카페로 들어온 찬영이었다.

찬영의 말에 잠깐 망설이던 가을이 혁진을 돌아보았다.

“먼저 가 있을래?”

혁진이 그사이 나온 캐리어에 담긴 커피를 들고 자리를 벗어나자 가을과 찬영이 코너 쪽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했다.

한껏 건방진 자세로 다리를 꼰 찬영이 가을을 훑듯 쳐다보았다.

하나로 묶은 긴 머리에, 깨끗하고 흰 피부. 큰 눈.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예쁜 얼굴이었다.

사진으로 봤을 때도 느꼈지만 꾸미는 데 전혀 관심이 없는 모습이었음에도 눈길이 갈 만큼 예뻤다.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태준이 좋아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외모적으로 더 뛰어났던 여자들이 많았을 테니까.

얼마 전 태준이 몸이 아프다고 문규의 생일 파티장을 빠져나가자 찬영은 혹시 몰라 병원 진료 기록이 있는지 뒷조사를 시켰다.

그런데 태준이 병원을 간 게 아니라 드라마 팀이 있는 제주도를 갔었다는 얘기를 듣고 제 귀를 의심했다.

대체 뭐가 특별하길래 문규의 생일 파티를 하다 말고 이 여자를 만나러 제주도까지 갔을까 싶어 찬영이 빤히 가을의 모습을 살폈다.

“하실 얘기 있으시면 빨리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제가 지금 회의를 하다 내려와서요.”

“성격 급한 건 태준이랑 똑같네. 둘이 정확히 무슨 사이예요?”

“그걸 제가 왜 얘기해야 하죠?”

찬영이 ‘이것 봐라?’ 하는 눈빛으로 가을을 쳐다보았다.

“궁금해하면 안 됩니까?”

“궁금해하셔도 되는데, 제가 대답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태준과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가을은 찬영에게 기가 죽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음. 그럼 질문을 바꾸죠. 태준이가 싫어요?”

“네.”

가을이 1초 만에 대답했다.

“재밌네.”

찬영이 앞에 놓인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시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태준이 싫다는 여자 본 적이 없는데. 왜 싫어요?”

“잘생겨서요.”

“하긴. 걔가 쓸데없이 잘생겼어. 그죠?”

“무척이요.”

“잘생긴 놈들은 다 인물값을 하거든.”

“그럼요.”

“나처럼 준수하게 생긴 스타일이 훨씬 낫지.”

그건 아니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을이 계약에 맞는 충실한 대답을 했다.

“말이 잘 통하네.”

찬영이 마음에 든다는 듯 라미네이트를 한 이를 활짝 내보이며 웃었다.

“근데 이유가 그거 하나?”

“잘생긴 데다 키도 크고, 능력도 좋고, 돈도 많고. 심지어 다정한데. 전 그게 싫어요.”

칭찬인지 싫다는 건지 모를 말이었지만 찬영은 박수까지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태준이 다정하다니. 어우, 생각만 해도 싫다. 그거 다 가식이에요. 걔가 얼마나 무서운 놈인데.”

느물거리던 찬영의 눈빛이 묘하게 바뀌었다.

“태준이랑은 어디서 만났어요?”

“응급실에서요.”

“언제쯤?”

“그걸 제가 대답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찬영이 분위기를 타 은근히 궁금한 걸 물어봤지만 가을은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었다.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어보는 거예요. 여자엔 관심도 없던 녀석이 갑자기 짝사랑이니 뭐니 하니까, 믿어져야 말이지.”

“세상엔 믿기 힘든 일이 많이 일어나니까요.”

찬영이 전혀 기죽지 않고 오히려 당찬 가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태준이 이 여자를 좋아하는 게 사실이라면. 결실을 맺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 같았다.

“음. 정가을 씨가 꽤 마음에 드니까, 내가 조언 하나 해 줄게요.”

찬영이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리며 가을을 향해 슬며시 몸을 숙였다.

“태준이가 아무리 들이대도 넘어가지 않는 게 좋아요.”

“…….”

“감당하기 힘들 거란 뜻이에요. 뭐, 결혼이라는 게 그렇겠지만 특히 이쪽은 더 그래요. 비슷한 환경끼리 결혼을 해야 하거든.”

찬영의 눈매가 더 길게 가늘어졌다.

“나만 믿어라, 내가 지켜 준다. 태준이가 이딴 소리 하거든 믿지 말고. 이쪽 세계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거든. 평범하게 산 사람은 견디기 힘들지.”

재계 순위 20위 안에 드는 ‘세양 그룹’의 현재 가장 유력한 그룹 상속자가 태준이었다.

하지만 가을은 태준과 계약을 했을 뿐, 뭘 해 볼 생각이 없었기에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괜히 상처받지 말고 지금처럼 현실 직시하면서 정가을 씨 인생을 사는 게 좋다. 이 말입니다.”

“…….”

“현실에선 신데렐라가 해피엔딩이라는 법이 없으니까. 새겨듣는 게 좋아요.”

“새겨듣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전 지금도, 앞으로도. 강태준 대표님을 받아 줄 마음이 전혀 없으니까요.”

찬영이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더 하실 얘기 없으시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을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 인사를 한 후 자리를 벗어났다.

“태준이를 거절한단 말이지.”

찬영이 카페를 나가는 가을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좇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띵- 1층입니다.]

긴 다리로 성큼 걸어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가을이 냉큼 엘리베이터 안에 올랐다.

‘세양 그룹’에서 누군가 찾아오면 자신에게 무조건 연락하라던 태준의 말이 생각나 잠시 망설이던 가을이 이내 고개를 털어 냈다.

찬영의 행동은 그저 자신을 관찰하는 느낌이었다.

거기다 일부러 찾아온 것도 아니고 지나가던 길에 자신을 알아보고 얘기를 나눈 것뿐이었다.

별다른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굳이 얘기를 꺼내 태준이 신경 쓰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퇴근도 엄청 늦게 하는 사람인데.”

가을은 안방 침대에 누워서도 태준이 올라오는 발소리를 기막히게 알 수 있었다.

최근 들어 바쁜지 태준은 저녁 9시가 넘어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 들어왔어요. 보고 싶어요. 잘 자요.] 모범 답안 같은 내용으로 하루의 마감 메시지를 보냈다.

“현실이라…….”

현실을 직시하라는 찬영의 말은 틀린 소리가 아니었다.

태준과 계약이 끝난다면 지금처럼 쉽게 만날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없었다.

태준이 사는 세상과, 자신이 사는 세상은 엄연히 달랐다.

그런 걸 모를 만큼 순진하지도, 행복한 신데렐라가 되기를 꿈꾸지도 않았다.

계약을 했으니 약속한 기간 동안 충실히 이행하고 끝내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가을은 가슴이 욱신거렸다.

* * *

‘STN’ 대표실 비서실 안에 바닥을 찍는 하이힐 소리가 울렸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박 비서의 목소리에 명석이 고개를 들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고 방금 미용실에서 나온 듯 셋팅이 된 긴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있는 희연이 명석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환하게 미소 지으며 다가오는 희연을 보자 명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전 희연의 부친인 ‘르망 호텔’ 회장과 우연히 만났던 명석은 희연이 한국에 온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언제고 한번 찾아오지 싶었는데 생각보다 시기가 빨라 명석이 잠시 당황했다.

“언제 들어왔어?”

“어제 아침에.”

“연락하고 오지.”

“왜? 또 피하려고?”

희연이 보조개가 움푹 들어간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3년 만인가?”

“아마 그쯤.”

“난 되게 반가운데, 오빤 아닌가 봐?”

명석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희연이 슬쩍 대표실 문을 쳐다보았다.

“태준 오빠, 안에 있지?”

“희연아.”

가라앉은 명석의 목소리에 희연이 고개를 돌렸다.

“태준이 형.”

명석이 착실하게 태준이 시킨 말을 전했다.

“죽었어.”

그때, 태준이 대표실 문을 열고 나왔다.

“살아 있는데?”

희연이 태준을 보자마자 안길 듯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태준이 빠르게 희연을 저지했다.

“거기 서서 얘기해.”

“……반갑진 않아도 한번 안아 줄 순 있지 않아? 우리, 3년 만인데.”

태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희연을 내려다보았다.

“말하지 않았나? 그런 일은 거라고.”

“하, 여전하네 강태준.”

희연이 다크그레이 슈트를 멋스럽게 입고 있는 태준을 슬며시 훑었다.

“이렇게 슈트 입은 모습 보니까, 더 멋지다, 오빠.”

“용건 없지?”

“…….”

“바쁘니까, 용건 생기면 약속 잡고 와.”

태준이 희연을 지나쳐 가자 희연이 태준의 팔을 잡았다.

‘탁.’

동시에 태준이 거칠게 희연의 팔을 뿌리쳤다.

“약혼했으면, 처신 잘해 민희연.”

“나…… 결혼 안 할 거야.”

희연이 욕망이 가득한 얼굴로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오빠가 나 책임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