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90)

“콜록.”

명석이 얕은 기침을 뱉어 내곤 테이블 한쪽에 있는 냅킨을 꺼내 입을 닦았다.

“안 들은 걸로 하죠.”

“들었잖아요.”

비스듬히 고개를 내려 목을 한번 주무른 명석이 진지한 눈빛으로 가영을 쳐다보았다.

“내 이름도, 나이도,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런 말이 나옵니까?”

“그런 거야 차차 알아 가면 되죠.”

“순서가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빠가 틈을 안 주니까. 나랑 자고 나면 생각이 바뀔 수 있잖아요? 물론, 내가 그렇게 만들 거구요.”

한창 잘나가는 아이돌 멤버마저 쫓아다닐 정도로 섹시함과 귀여움이 공존하는 얼굴을 가진 가영이었다.

가만히 걸어가기만 해도 남자들이 다가올 만큼 인기가 넘치는 가영이 남자에게 먼저 대시를 한 건 명석이 처음이었다.

“몇 살이죠?”

“스물두 살. 궁금한 거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도 좋아요.”

“정가영 씨.”

명석이 이름을 부르자 가영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명석의 몸짓, 말투, 하나하나에 두근거림이 진정이 되지 않아 가영은 앞에 둔 음식도 손에 대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가영이 마음을 진정시킬 때 명석이 낮은 목소리를 냈다.

“남자한테 그런 말, 쉽게 하는 거 아닙니다.”

“쉽게 한 거 아니에요. 오빠니까 한 거라구요! 말했잖아요, 오빠한테 반했다구.”

“아무리 반한 상대라도 그런 건 안 돼요.”

“왜요?”

“남녀가 밤을 함께한다는 건 신성한 겁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알아가고, 결혼을 한 다음에. 그때야 할 수 있는 일이에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반듯한 자세로, 진지한 눈빛과 말투를 한 명석이 농담을 하는 것 같진 않아 보여 가영이 눈만 깜빡거렸다.

어떻게든 해 보려는 남자들만 있었지, 혼전 순결을 주장하는 남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

“……어디 조선에서 오셨어요? 타임슬립?”

“지극히 정상적 일인데 그런 생각이 든다니 무척 안타깝군요.”

“이 오빠 말투도 완전 조선사람인데…… 아이씨. 근데 왜 이렇게 멋있지?”

거절 의사를 밝혔음에도 대놓고 눈을 빛내는 가영의 모습을 보던 명석이 묵묵히 앞에 놓인 초밥을 입에 넣었다.

“먹는 모습도 멋있어.”

가영의 말에 잠시 움찔한 명석이 다시 초밥을 집었다.

명석이 앞에 놓인 초밥을 다 먹는 동안 가영은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명석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탁.’ 명석이 젓가락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안 먹어요?”

“어?? 언제 다 먹었어요? 잠깐, 먼저 가지 말아요.”

혹시라도 명석이 자리에서 일어날까 싶어 초밥 세 개를 한꺼번에 입에 욱여넣으며 가영이 연신 가지 말라는 손동작을 했다.

하는 행동으로 봐선 초밥을 다 남기고 따라나설 것 같은 가영이 음식을 남기긴 아까운지 열심히 입에 넣는 모습을 명석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같이 일어날 테니까 천천히 먹어요.”

막 초밥 하나를 입에 더 넣으려던 가영이 명석의 말에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조금 전보다 현저히 느려진 동작이었다.

초밥 하나를 입에 넣고 마치 백번 씹어 넘기듯 한참이나 씹으며 명석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일부러 느리게 먹는 모습에 명석이 의자에서 슬며시 일어나는 동작을 취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제대로 먹을게요.”

가영이 정상적인 속도로 먹기 시작하자 명석이 다시 허리를 반듯이 세워 의자에 앉았다.

얼마 뒤.

“잘 먹었습니다.”

지난번에 도와준 답례로 자신이 계산하겠다는 가영을 만류하고 명석이 음식값을 치른 뒤 식당을 나왔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진짜 연락처 안 알려 줄 거예요?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딱 세 번만 만나 줘요. 네?”

명석이 대답 없이 걷자 가영이 그 옆을 바짝 쫓아왔다.

“연락처 안 주면, 아무 남자랑 술 마시고 자자고 할 거예요.”

“…….”

“죽을 때까지 원망하면서 살아야지!”

“…….”

“좋다! 그럼 두 번만 만납시다!”

가영의 말에 명석이 뭔가 얘기하려고 몸을 돌릴 때였다.

“어? 잠깐만요.”

횡단보도를 걷는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를 향해 가영이 빠르게 달려갔다. 중간 정도밖에 못 갔는데 신호는 5초만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가영이 한 손을 들어 정차한 차들을 향해 양해를 구한 후 빨간불인 상태에서 할아버지를 부축해 건너편까지 함께했다.

명석에게 잘 보이려고 한 행동이 아닌 몸에서 배어난 행동이었다.

부모한테 반항하는 마음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산 가영이었지만 천성은 가을처럼 착했다.

가영이 맞은편에 서 있는 명석을 향해 커다랗게 팔을 휘두르며 목청껏 소리 질렀다.

“가지 마요!! 가면 안 돼~!!!! 거기 딱 서 있어요!”

그사이 명석이 갈까 봐 빨간불을 가리켰다가 손으로 엑스자를 그었다가 하트를 만들었다가 부산한 가영의 모습에 명석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빨간불 내내 쉬지 않고 수신호를 하던 가영이 파란불로 바뀌자마자 단숨에 명석을 향해 뛰어왔다.

“와- 내가 갈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알아요?”

가영이 환하게 웃으며 명석에게 다가옴과 동시에 배달 오토바이가 위험스럽게 가영의 곁을 지나쳤다.

그 순간, 명석이 가영의 팔을 잡아당겼다.

“엄마야아아아.”

힘 좋은 명석이 조절하지 못하고 당긴 힘에 가영이 오히려 앞으로 날아가듯 허둥대다 간신히 멈춰 섰다.

“괜찮아요?”

놀란 명석이 가영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나 지금…… 난 것 같은데?”

“미안해요. 내가 너무 세게 당겨서,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그 순간 가영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아야아아…….”

가영이 허리를 잡고 비틀거리는 모습에 명석이 부축하려고 다가오자 그녀가 와락 명석의 팔을 당겨 안았다.

말라 보이는 모습과 달리 단단한 명석의 팔에 가영의 심장이 요동쳤다.

거기다 은근하게 느껴지던 명석의 체향이 코끝을 맴돌자 가영의 심장이 터질 듯 뛰어 댔다.

“병원에 가죠. 차 가져올 테니까 저쪽에 잠깐 앉아,”

“병원은 다음에요!”

가영이 명석의 팔을 잡은 채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제가 지금은 정말 급한 볼일이 있어서요. 연락처 주시면 나중에 병원에 가서 연락 드릴게요.”

“무슨 일인지 몰라도 일단 병원부터,”

“진짜 진짜 급한 일이라서요.”

“괜찮겠어요?”

“참을 만해요.”

“그럼 약국에서 파스라도 사다 줄,”

“아뇨! 연락처요.”

연락처를 알아내려는 가영의 속셈이 눈에 보였지만 명석은 책임감이 강한 스타일이었다.

결국 명석이 자신의 연락처를 가영에게 알려 주었다.

“꼭 병원 가서 제대로 검사해요.”

가영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며 허리를 짚고 인상을 썼다.

“네. 그럴게요.”

“갈 곳이 어딥니까?”

“네?”

“급한 볼일이요. 태워다 줄게요.”

“그게…… 음, 한국대학교역이요.”

“여기 잠깐 있어요. 차 가져올게요.”

명석이 ‘STN’ 방송국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얼떨결에 의찬의 가게가 있는 곳을 말한 가영이 멀어지는 명석의 뒷모습을 보며 정신없이 뛰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나 진짜 어떻게 하지……?”

늦은 밤.

가을은 책상에 앉아 그동안 미뤄놓은 책을 읽고 있었다.

오늘 아침 태준의 집에서 나온 뒤 설비업체가 가을의 집을 방문해 누전된 곳을 찾았다.

30년이 넘은 집이라 누전된 곳을 찾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후 가을은 가볍게 가방을 챙겨 곧장 등산을 갔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겸, 4부작 연출의 각오도 다질 겸, 산 정상을 찍고 돌아오니 어느새 시간은 저녁 7시가 넘어 있었다.

간만에 산행이라 머리가 가벼워져 가을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사이 태준에게 수리는 했냐, 오늘은 한남동에서 자고 간다. 밥 챙겨 먹어라. 등등 한결같은 문자가 도착했다.

집에 돌아와 기분 좋게 샤워를 하고 가볍게 저녁을 먹은 후 책상에 앉아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을 읽는 중이었다.

‘디링.’

메시지 알림에 가을이 빠르게 휴대폰을 확인했다.

태준의 메시지인가 싶었지만 메시지를 보낸 건 도식이었다.

[정 감독, 뭐 해?]

늘 조감독이라고 부르던 도식은 가을이 4부작 회의를 시작한 순간부터 이젠 꼬박꼬박 정 감독이라는 호칭을 썼다.

[뭐 하든 술은 사양입니다.]

가을이 답변을 하고 다시 책을 읽었다.

‘디링.’

[애들이랑 송학 주점인데. 파전 사 줄 테니까 나와.]

[어제도 가셔 놓고 또 가셨어요?]

[어제는 쌀 막걸리, 오늘은 동동주. 나올 거지?]

[맛있게 드세요.]

가을이 책장을 넘기며 메시지를 보냈다.

‘디링.’

도식이 보낸 줄 알고 무심히 고개를 돌렸던 가을이 냉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뭐 해요?]

태준이었다.

[지금 책 읽는 중입니다.]

[무슨 책?]

[‘적을 알면 내가 보인다’]

[싸우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그럴까 봐 미리 공부하는 중이에요.]

태준이 보낸 메시지에 늘 답변만 보내던 가을이 저도 모르게 먼저 다른 메시지를 보냈다.

[대표님은 뭐 하고 계셨어요?]

태준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아지는 자신의 감정을 가을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운동 갔다 왔어요.]

[부지런하시네요.]

태준과 메시지를 하며 입꼬리를 늘이고 있던 가을이 숫자 1이 사라지지 않자 바쁜가 싶어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디링.’, ‘디링.’, ‘디링.’, ‘디링.’,

문자음이 연이어서 들려왔다.

가을이 도식과 나누고 있던 메시지를 켰다.

여러 장의 음식 사진과 함께 도식의 메시지가 보였다.

[맛있겠지? 새로운 메뉴래.]

[맛있겠네요.]

[사 줄게 나와.]

[많이 드세요.]

‘디링.’, ‘디링.’, ‘디링.’

또다시 음식 사진이 쏟아졌다. 이번엔 좀 더 안주를 확대한 사진이었다.

[맛있어 보이지 않아?]

사진을 보낸 후 계속 나오라고 얘기하는 도식과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던 가을이 또 사진을 찍어 보낸다는 도식의 메시지에 ‘이제 그만~~~’ 이라는 답변을 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디링.’

한숨을 쉰 가을이 메시지를 무시한 채 책을 읽다가 신경이 쓰이는지 휴대폰을 들어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빠르게 답변을 보낸 후 책에 집중했다.

그 시각.

[부지런하시네요.]

라는 가을의 메시지에 조금 늦게 답변을 보내 놓고 명석과 전화 통화를 하고 온 태준이 테이블에 올려둔 물 한 잔을 들어 마시며 가을에게서 온 답변 메시지를 확인했다.

“콜록, 콜록, 콜록.”

[누가 또 방문을 열지 몰라서 몸을 좀 만들려고요.]

라고 보냈던 자신의 메시지에,

[충분히 맛있어 보이니까 그만하세요.]

라는 저돌적인 가을의 메시지가 보였다.

“충분히…… 맛있어 보인다고?”

기침을 하다가 웃기 시작한 태준이 몇 년 만에 가장 큰 웃음소리를 냈다.

어제는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끓게 하더니. 사람을 들었다 놨다. 정신이 없는 태준이었다.

충분히 멋있어 보인다를 잘못 쓴 건가.

가을이 알아차릴 때까지 기다릴까. 아니면 바로 전화를 할까.

근래 들어 태준은 가을 덕분에 애교 많고, 웃음 많고, 장난기 많던 어린 시절의 모습을 조금씩 찾아가는 중이었다.

몇 분을 기다려도 가을이 알아차리지 못하자 태준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가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직도 책 읽고 있어요?”

-네. ……집이세요?

가을이 자신에 관한 걸 묻는 게 늘어날수록 진짜 짝사랑하는 상대가 조금씩 관심을 가져 주는 것 같아 태준의 기분이 자꾸만 곡선을 그었다.

“좀 전에 왔어요.”

-운동은 어디에서 하세요? 헬스장?

“예. 그런데…….”

태준이 장난을 칠 생각에 길어진 입술을 슬며시 쓸어 올렸다.

“가을 씨가 날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어요.”

-네?

“내가, 맛있어 보였어요?”

-네?????

가을의 반응에 태준이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잠시만요.

자신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는지 수화기 너머 조그맣게 ‘으허헉. 미쳤어!’라는 가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다시 가을의 목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이게 대표님한테 보낸 게 아니고요. 그러니까 박 감독님이요. 아시죠? 그때 노래방에서 머리에 휴지 칭칭 감으신 분. 그분이 자꾸 술 마시러 나오라고 안주를 찍어 보내서요.

태준이 당황할 때마다 속사포로 얘기하는 가을의 말을 미소 띤 얼굴로 들었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박 감독님한테 보낸다는 게 대표님한테 잘못 간 건데요. 놀라셨으면 죄송합니다.

“안주가 뭐였는데요.”

-파전이랑, 굴전이랑, 두부김치랑…… 또 뭐였더라.

“맛있겠네.”

-그러니까요. 맛있어 보이더라고요.

태준이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래서, 난 맛없어 보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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