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90)

태준의 눈빛에 가을이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뱉었는지 깨달았다.

“그게 그러니까…… 별 뜻은 아니고 좋아하는 연기를 하는 중이니까, 정말 별 뜻 아닌데…….”

태준이 묵묵히 가을을 내려다보았다.

“아니까, 자고 가요.”

“……네.”

가을이 꾸벅 90도로 인사를 한 후 자신의 집과 같은 구조인 큰방을 향해 자연스럽게 걸어갔다.

‘쿵-’

문이 닫히자 태준이 얕게 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위험한 말인 줄도 모르고.”

남아 있는 일을 마저 하고 한남동으로 갈 생각이었던 태준이 휴대폰을 챙겨 들었다.

가뜩이나 취기로 열이 도는 상태에 더한 열기가 더해져 이대로 일을 하긴 무리라 생각해 대리 기사를 불러 바로 한남동으로 갈 생각이었다.

* * *

“으음…….”

밤새도록 뒤척이지도 않고 그대로 잠들어 있던 가을이 잠에서 깨어나 천천히 눈을 떴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마치 눈을 감았다가 뜬 느낌이었다.

누워 있는 곳이 자신의 집인가 싶었던 가을이 자신의 집과는 달리 블라인드가 쳐진 창문에 태준의 집인 걸 깨달았다.

날이 밝았는지 블라인드 사이로 햇살이 비쳤다.

잠시 뒤척이던 가을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어젯밤, 마지못해 태준의 방으로 들어왔던 가을은 태준이 한남동으로 가면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다 자꾸 취기가 올라와 잠깐 태준의 침대에 누웠는데. 마음도 어지러운 상태에 태준의 체취가 가득한 침대에 누워 있자 심장이 머리가 울릴 정도로 뛰었다.

그러다 자신의 침대와는 달리 처음 느껴 보는 푹신한 느낌에 까무룩 잠이 들었다.

“하아…….”

그대로 얼굴을 감싼 가을이 낮게 숨을 뱉어 냈다.

태준에게서 나던 체취가 자신에게 묻어났다.

“정신 차려, 정가을. 애정 결핍도 아니고.”

대표님이 잘해 주는 건 연기라고. 다 알면서도 정신 못 차리면 어쩌자는 거야.

가을이 혼란한 마음을 떨쳐 내듯 빠르게 머리를 털어 낸 후 태준의 방을 나갔다.

늦은 오후.

명석이 고은의 매니저와 함께 방송국 인근 건물 7층에 위치한 카페를 찾았다.

자리마다 커튼을 칠 수 있게 되어 있어 배우와 작가, 피디들이 회의를 할 때 자주 애용하는 카페였다.

박 비서에게 몇 차례 고은의 매니저에게 연락이 왔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명석이 서로의 스케줄에 맞춰 약속을 잡은 상태였다.

매니저가 안내한 자리로 명석이 들어가자 잠시 뒤 큰 선글라스를 낀 고은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고은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과한 콧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예. 안녕하세요.”

잠시 뒤, 직원이 커피 석 잔과 서비스로 나오는 조각 케이크 세 개를 테이블에 놓고 가자 매니저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요.”

일부러 자리를 피하는 걸 모르지 않는 명석이 의자에 앉는 올바른 방법에 나올 법한 자세를 유지한 채 고은이 용건을 꺼내길 진득이 기다렸다.

먼저 보자고 한 사람이 고은이었으니 얘기를 기다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케이크 좀 드셔 보세요. 케이크를 먹으려고 일부러 오기도 할 만큼 맛있거든요.”

고은이 포크로 조각 케이크를 작게 잘라 은은한 립스틱이 발린 입술을 슬며시 벌리고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으음~ 정말 맛있어.”

중요한 얘기가 있다는 말에 퇴근 후 시간을 낸 명석이었다.

별다른 용건이 없는 것 같은 고은의 행동에도 명석은 그녀가 먼저 용건을 꺼내길 기다렸다.

한껏 CF 같은 표정을 짓던 고은이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꼿꼿하게 허리를 편 자세로 앉아 있는 명석을 보곤 포크를 내려놓았다.

“실례지만, 혹시 애인 있으세요?”

“없습니다.”

“제가 정말 이런 적은 처음인데 임 비서님을 처음,”

“죄송하지만.”

용건을 꺼내길 기다렸던 명석이 날카롭게 말을 잘라 냈다.

“오늘 보자고 하신 이유가 일 때문입니까? 아니면 개인적인 일입니까.”

고은이 한껏 외모를 끌어올려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개인적인 일이죠.”

고은의 말이 끝나자마자 명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눌 얘기가 없겠군요. 살펴 가세요.”

꾸벅 인사한 명석이 망설임이라고는 전혀 없는 모습으로 닫혀 있던 커튼을 열었다.

“하, 저기요!”

명석이 뒤돌아보자 고은이 ‘나 최고은인데?’ 하는 표정으로 명석을 올려다보았다.

“계산은 제가 하죠.”

예의 있는 미소를 지으며 명석이 ‘촤르륵’ 커튼을 닫았다.

입 한 모금 대지 않은 커피값을 계산하고 싶진 않았지만 명석은 묵묵히 값을 치르고 카페를 나왔다.

방송국 근처에 있는 카페라 타고 온 차는 그대로 방송국 주차장에 세워둔 명석이 빠르게 걸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고은의 매니저에게 연락이 와 중요한 얘기라고 하기에 태준에게 전할 말이라도 있나 싶어 나왔던 자리였다.

그런데 여자친구가 있냐는 질문이라니. 그런 사적인 관심은 사양이었다.

방송국으로 향하다 아무래도 살짝 허기가 진 명석이 방송국 근처 일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평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초밥이었다.

평소 별다른 일이 없으면 태준과 저녁을 함께했지만, 오늘은 태준에게 다른 일정이 있었다.

지금 향하는 일식집은 얼마 전 박 비서가 잘한다고 소개하던 곳이었다.

잘한다는 소문이라도 났는지 빈자리가 한 테이블만 남아 명석이 자리에 앉아 빠르게 초밥을 시켰다.

그사이에도 몇 명의 손님들이 자리가 없어 돌아갔다.

디링-

문자음에 명석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방송국 앞에 새로 생긴 일식집 잘한다더라. 내일 점심 거기서 먹자.]

태준에게 온 문자였다.

[예.]

명석이 짧은 답변을 보냈다.

혼자 저녁을 먹어야 하는 자신을 태준이 신경 쓰고 있는 게 보여 명석은 굳이 지금 먹고 있다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명석이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릴 적 명석은 말도 붙이기 힘들 만큼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던 아이였다.

오래전 명석의 친할아버지가 문규의 생명을 구해 준 일로 두 집안은 꽤 가깝게 지냈다.

아버지인 판석을 따라 성북동에 가는 일이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명석을 도련님이라고 하는 판석의 수하들과 마당에서 싸움 실력만 키웠다.

또래였던 태준이나 찬영과 어울리기엔 태준은 늘 공부한다고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찬영은 조폭의 아들이라며 명석을 무시했다.

정확히는 명석의 친할아버지가 조폭이었고, 판석은 일대를 장악하던 조폭 생활을 청산하고 클럽 사업을 하고 있었다.

명석은 돈과 주먹이 오가는 음울한 집안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아이였다.

뭘 하고 싶은 꿈도, 목표도 없이 타고난 체력과 싸움 기질을 판석의 수하들과 풀어내며 지냈다.

그러다 명석이 14살이 되던 해. 조폭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퍼지며 명석은 전교생에게 은근한 따돌림과 무시를 당했다.

조용히 학교를 다녔는데도 행실이 나쁘다, 무섭다, 면학 분위기를 흐린다는 소문이 돌면서 학생들은 명석을 피해 다녔다.

누군가 물건을 잃어버렸다며 명석에게 덮어씌운 일이 발생해도 아무도 명석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전교생이 뒤에서 명석의 흉을 볼 때, 태준이 나서서 물건을 잃어버린 경위를 다시 알아본 후 진범이 밝혀져 명석은 누명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얼마 뒤, 아이들을 괴롭히던 근처 질 나쁜 학생들을 명석이 일망타진하는 일이 발생했다.

하지만 퇴학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은 오히려 명석이었다. 그가 전 조폭 집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색안경을 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판석의 욱하는 성격에 상황은 더 안 좋아졌고 문규는 주변에 눈이 많아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쁜 학생들에게 당했던 아이들 역시 누구 한 명 명석을 위해 나서지 않았다.

그때 태준이 조용히 증거를 모아 인터넷 대형 카페에 억울함을 알리는 글을 썼다.

태준이 나서자 가만히 지켜보던 아이들이 한두 명씩 나서서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건이 알려지며 뉴스에까지 보도되자 가해자인 학생들은 처벌을 받고, 명석은 퇴학 위기에서 벗어났다.

남의 일엔 관심이 없는 태준이었지만 전교생이 명확한 근거도 없이 한 사람을 몰아세우는 것이나, 명석이 괴롭힘을 당하던 학생들을 위해 싸웠는데도 아무도 그를 위해 나서지 않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한 일이었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도 명석은 누구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자 학생이 나쁜 학생들에게 찍혔던 사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자 자신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약속을 지켰다.

누구보다도 강하면서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책임감도 강한 명석을 지켜본 태준은 그에게 약속했다.

평생 자신의 곁을 지키면, 남들에게 무시 받지 않고 살지 않게 해 주겠다고.

그 약속이 어둠을 장악했던 조폭 출신 클럽 사장 김판석을 잘나가는 고깃집 사장으로 만든 결과였다.

명석이 ‘세양 그룹’ 손자인 태준의 곁을 오른팔처럼 붙어 다니자 그를 무시하는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태준을 따라 공부도 하면서 음산했던 분위기가 사라진 명석은 이름처럼 명석한 두뇌를 얻어 갔다.

명석이 전교 1등을 하는 순간.

판석은 태준과 약속한 대로 클럽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식도락가였던 요리 재능을 살려 고깃집을 차렸다.

결론적으로 모두 태준의 계획대로 된 일이었다.

그래서 명석은 자신의 삶을 바꿔 놓은 태준과의 약속을 지키는 중이었다.

몇 명의 여자를 사귀면서도 늘 태준을 우선순위로 둬 여자들에게 먼저 이별을 통보받을 만큼 명석의 삶에 1순위는 태준이었다.

디링-

명석이 창밖을 보던 시선을 거두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혼자 먹지 말고.]

태준의 답변 메시지였다.

명석이 피식 웃으며 답장을 보내려는 순간,

“와……. 눈물 나게 반갑네.”

누군가의 목소리에 명석이 고개를 들었다.

짧은 반바지에 파란색 후드 티를 입고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가영이었다.

“저 기억나요?”

“……아.”

명석의 짧은 말에 가영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합석해도 돼요?”

다른 데 자리가 없나 주변을 둘러보던 명석이 만석인 가게 상태에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가영이 명석의 맞은편에 냉큼 자리 잡고 음식을 주문했다.

“어쩐지 오늘따라 초밥이 먹고 싶더니. 이렇게 부채 오빠를 만나려고 그랬나 봐요.”

명석이 대답 없이 물 잔 하나를 꺼내 물을 따라 가영의 앞에 놓아 주었다.

누군가를 챙기는 능숙한 명석의 모습을 가영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날, 명석을 향해 조폭처럼 생긴 남자들이 인사를 하는 걸 본 후, 친구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는 사이 명석이 눈앞에서 사라져 가영은 한참이나 그 일대를 돌아다녔다.

혹시라도 명석을 다시 만날까 싶어 약속이 있을 때면 일부러 그 근처로 잡았던 가영이었다.

예전에 클럽에서 만났던 모 아이돌 그룹 멤버가 만나자며 계속 연락을 해 와 잠깐 만나고 가던 길에 저녁이나 먹고 가려고 들른 가게였다.

꼭 한번 다시 만나고 싶었던 명석을 가게 안에서 본 순간 가영은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제 좋은 꿈 꿨다 했어. 내가 부채 오빠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모르죠?”

“날, 왜요?”

“얘기했잖아요. 여자친구 없으면 나랑 사귀자고.”

“별로라고 얘기했던 것 같은데요.”

“안경 다시 맞췄어요?”

“아뇨.”

“안경을 새로 맞춰야 내가 다시 보일 텐데. 오늘도 내가 별로예요?”

“예.”

“부채 오빠 취향은 어떤 여잔데요?”

“그쪽은 아닙니다.”

“그쪽 아니고, 정가영이에요.”

“…….”

“별로여도 이름으로 불러 달라구요.”

점원이 두 사람이 주문한 음식을 테이블 위에 놓고 가자 가영이 은근한 목소리를 냈다.

“다 먹고 뭐 할 거예요?”

명석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계산해야죠.”

“그죠. 먹었으면 계산은 해야지. 그럼, 그다음은요?”

“그다음?”

명석이 광어 초밥을 간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박 비서가 추천할 만한 맛이었다.

“할 거 없으면 나랑 술 마실래요?”

“아뇨.”

“술 마시는 동안 내가 진짜 별로면 더 귀찮게 안 할게요. 약속해요.”

“시간 낭비예요.”

묵묵히 초밥만 먹는 명석을 보던 가영이 앞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탁’ 내려놓았다.

“그럼 왜 그렇게 웃었어요?”

“……?”

“막 내 얼굴 보고 눈웃음치면서 애틋하게 웃었잖아요! 그렇게 웃어서 사람 심쿵하게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는 게 어딨어요?”

가영의 말에 자신이 언제 그랬나 싶어 명석이 고개를 갸웃하며 안경을 슥 올렸다.

그 모습마저 가영의 눈에는 한없이 멋있어 보였다.

“아이씨 진짜.”

가영이 짜증 난다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진짜 초밥 먹다가 이런 말 하게 될 줄 몰랐는데.”

가영이 주먹을 불끈 쥐며 명석을 바라보았다.

“나랑 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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