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90)

“안 써요?”

“네?? 아…….”

그제야 손수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가을이 손수건으로 슬며시 입술을 닦아 냈다.

“쓰실 줄 몰랐는데…….”

“당연히 써야죠. 좋아하는 여자가 준 선물인데.”

오늘 아침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태준이 처음으로 한 일은 손수건을 드라이클리닝 맡기는 일이었다.

“…….”

가을이 제 손에 들고 있는 손수건을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다 썼으면 달라는 듯 태준이 손을 내밀었다.

“빨아서 드릴게요.”

“괜찮아요.”

한 번도 손수건을 바로 돌려달라고 한 적이 없던 태준이 유채꽃 손수건을 건네받아 다시 슈트 재킷 안쪽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소중한 거라서.”

“큼큼.”

가을이 자꾸만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아이스커피를 집어 들고 입으로 쭈욱 넘겼다.

태준이 커피를 마시는 가을의 모습을 부드럽게 바라보다가 앞에 놓인 놀이기구들로 시선을 돌렸다.

가을이 어색한 마음을 누르듯 한껏 밝은 목소리를 냈다.

“대표님도 놀이터 좋아했어요?”

태준이 고개를 돌려 가을을 빤히 응시하자 가을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어 제 얼굴을 한번 쓸어내렸다.

“몰랐는데.”

“……?”

“되게 기분 좋은 일이었네요.”

태준이 청아하게 미소 지었다.

“나에 대해서 묻는 거.”

식당에 가자고 할 때 얌전히 갈걸.

태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릴 때마다, 가을의 마음이 자꾸만 일렁였다.

“난 10살 때까지 시골에 살았어요.”

모든 포털사이트에서 태준에 관한 기사가 사라져 태준과 ‘세양 가’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 관심 있게 본 사람들 외엔 잘 알지 못했다.

가을 역시 얼마 전 도식에게 대략적인 얘기만 들은 상태였다.

“산 아래 있는 시골이라 놀이터는 학교 안에 있는 게 다였죠. 수업이 끝나면 애들끼리 놀이터에 모여서 엄청 놀았어요. 그러다 저녁 먹을 때나 돼서 집에 가고.”

가을이 어린 시절의 태준을 떠올린 듯 밝게 미소지었다.

“귀여웠겠다.”

“아마도 그랬겠죠?”

가을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태준이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처음이에요. 명석이 말고 다른 사람한테 이런 얘기 꺼낸 거.”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야위어 가던 애란이 떠올랐다.

행복했던 시간만 떠올리고 싶어도 언제나 애란의 마지막 모습에서 끝이 나 태준은 어린 시절 자체를 봉인한 채 살았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어린 시절과 애란을 분리해서 생각했다.

태준의 모습이 어딘가 가라앉아 보여 가을이 슬쩍 텐션을 높였다.

“대표님은 뭐 하고 노는 걸 제일 좋아했어요?”

“음. 노는 거면 다 좋았던 거 같은데.”

“전 숨바꼭질이요.”

“숨바꼭질?”

“숨어 있으면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느낌이 좋았거든요. 날 찾을까? 못 찾을까? 기대감도 들고, 긴장되고.”

태준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데 숨어 있으면 진짜 못 찾겠다.”

가을의 시선을 따라 태준이 원통으로 된 미끄럼틀을 쳐다보았다.

“제가 살았던 곳도 외곽이라 놀이터가 그렇게 많지 않았거든요. 그냥 길에서 숨바꼭질하고 놀아도 워낙 컴컴해서 잘 보이지도 않고. 그땐 밤 되면 별도 되게 많이 보이고 그랬어요.”

두 사람이 동시에 슬며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린 시절에 보던 별은 찾아볼 수 없는 하늘이었다.

“그래도 제주도에선 제법 별이 보이더라고요.”

“쭈니랑은 잘 놀아 줬어요?”

“그럼요, 얼마나 귀여웠…….”

가을이 자신이 보낸 동영상이 생각나 말을 멈추었다.

“강아지 좋아해요?”

“좋아하죠.”

“그런데 왜 안 길러요?”

“불쌍하잖아요. 종일 나만 기다리고 있는 게…….”

잠시 말을 하지 않던 가을이 태준을 향해 웃어 보이곤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넣었다.

“후우…….”

놀이터에서 돌아와 책상에 앉아 책을 읽던 가을이 머리를 털었다.

한 시간 째 도서관에서 대출해 온 책을 읽고 있었지만 읽은 페이지는 몇 장 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태준과 있으면 자꾸 정신이 어지러워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을이 벽에 걸린 시계를 돌아보았다. 막 오후 9시가 지나고 있었다.

“선물이나 주러 가 볼까.”

제주도에서 사 온 의찬과 가영의 선물을 가게에 가서 주고 올까 망설이던 가을이 의찬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팟-’

집 안 불이 모두 꺼졌다.

“또 왜 이래??”

휴대폰에 있는 플래시를 켜 차단기를 찾아 올렸지만 불은 여전히 들어오지 않았다.

가을이 휴대폰으로 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설비 집을 검색해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여기 희망동 160번지 산장 빌라인데요. 지금 전기가 나갔는데 점검하러 오실 수 있나요? ……한 시간이요? 네, 그럼 연락 주세요.”

전화를 끊은 가을이 안방 쪽으로 몸을 돌릴 때, 혹시 태준의 집은 괜찮나 하는 걱정이 몰려왔다.

수리를 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어두운 거 무서워했는데…….”

잠시 고민하던 가을이 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만 갈 뿐 태준이 전화를 받지 않자 혹시 싶어 서둘러 현관문을 열고 태준의 집으로 향했다.

이번엔 제대로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딩동.’

‘딩동, 딩동.’

가을이 다시 초인종을 누르려고 할 때 ‘철컥’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에요?”

태준의 뒤로 거실 불이 환하게 보이자 가을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혹시 대표님 집도 정전이 됐나 해서요.”

“정전됐어요?”

“네.”

“설비 집은요?”

“한 시간 뒤에 온대요. ……그럼 쉬세요.”

태준이 멀쩡한 걸 확인한 가을이 몸을 돌렸다.

“들어와요.”

“네?? 아뇨,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요.”

“……저는 괜찮은데요…….”

태준이 가을을 보며 나직한 목소리를 냈다.

“그럼 나랑 같이 가을 씨 집에 가든가.”

“네????”

“어떻게 할래요.”

“…….”

태준이 당장 가을의 집에 갈 듯 앞으로 다가오자 가을이 냉큼 태준을 막아섰다.

“대표님 집이 낫겠네요.”

역시 둘 다 싫다고 하는 방향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한 가을이 환한 곳에 있는 게 낫다고 판단해 태준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서 TV 보든가. 아니면 영화 보면서 기다려요.”

“어? 대표님 술 드시고 계셨네요?”

식탁 위에 위스키와 잔, 치즈가 놓여 있었다.

정해 놓은 일을 하다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가볍게 한잔하려고 꺼내 놓은 참이었다.

“술친구 해 드릴까요?”

태준이 피식 웃었다.

“그래 주면 좋고.”

태준이 위스키 잔 하나를 더 가져와 식탁 의자에 앉자 가을이 맞은편 의자를 꺼내 앉았다.

슈트 차림이 아닌 편안한 트레이닝복에 자연스럽게 이마 위로 흘러 내려온 머리카락 때문에 태준에게서는 평소와 다른 청초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여긴 전기 수리하셨어요?”

“예.”

얼마 전 소름 돋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 후 태준은 바로 업체를 불러 전기를 수리했다.

여자에 대한 이상 증상이 생긴 후 한국에 잠시 들어왔던 태준은 병원 진료 기록은 물론이고 보험 회사에서 자세한 사건 경위까지 확인했었다.

당시 운전자의 얘기를 듣고 싶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없는 번호라는 안내만 나와 아쉽지만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는 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운전자와 연락은 되지 않았지만 보험 회사 사고 경위서엔 이상한 부분이 없어 교통사고와 자신의 증상이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걸 확신한 후 미국으로 돌아갔었다.

그러다 이번 일을 겪으며 운전자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사고 경위서에 적히지 않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더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보험 회사에 특별히 부탁해 알게 된 당시 운전자의 인적 사항과 예전 번호를 토대로 힘들게 조사를 했지만 운전자인 권기수의 명의로 가입된 휴대폰 번호는 없었다.

어떻게든 최근 소식을 듣고자 보험 회사를 통해 현재 가입되어 있는 자동차 보험이 있는지도 알아보았으나 그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혹시 몰라 당시 주소지로 찾아가 봤지만 그 집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어 권기수의 행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후 태준은 이비인후과에 들러 진료를 받았다. 예상대로 귀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 뒤로도 일부러 몇 차례 이비인후과를 방문해 진료 기록을 남겨 두었다.

혹시 그때와 같은 일이 발생해 쓰러진다면 귀가 불편해 생긴 일시적인 일이라고 둘러댈 생각이었다.

일시적인 환청 같은 건지 그날 이후로 들리지 않았지만, 사람들과 있을 때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한 잔만 마셔요.”

“네엡.”

가을이 잔에 채워지는 위스키를 물끄러미 보다 슬쩍 태준을 쳐다보았다.

“근데 왜 약속 안 지키세요?”

“음? 무슨 약속?”

“소맥 마시자는 약속이요.”

“기다렸어요?”

“그렇다기보다 갑자기 생각나서요.”

“술을 사 두긴 했는데. 기회를 계속 못 잡았어요.”

“맥주랑 소주 사다 놓으셨어요?”

태준이 멋쩍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냉장고에 소주와 맥주를 사다 놓고 기회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어쩐지 귀여워 가을이 슬며시 미소지었다.

“대표님 가끔 되게 귀여운 거 아세요?”

“내가?”

가을이 정말 귀여운 강아지라도 보듯 한껏 밝은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방금 표정도 그렇고 제가 준 나무젓가락도 장식함에 넣어…….”

저도 모르게 말을 꺼낸 가을이 태준의 눈치를 살폈다.

“……일부러 본 건 아닌데 장식함이 살짝 열려 있어서…….”

“과일 좀 먹을래요?”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태준이 냉장고로 향했다.

귀까지 빨개져 목덜미를 꾹꾹 누르는 태준의 모습이 심각하게 귀여워 가을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눌러 냈다.

평소와는 달리 어쩔 줄 몰라 하는 태준의 모습을 보니 마음 어딘가가 자꾸 간질거렸다.

“샤인머스캣 좋아해요?”

“없어서 못 먹죠.”

태준이 싱싱한 샤인머스캣을 식탁 위에 올려 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른 과일도 있으니까 먹고 싶으면 말해요.”

가을이 얼굴이 붉어진 태준을 힐끔 쳐다보았다.

다정한 태준의 모습은 그저 연기일 뿐 차가운 모습이 그의 본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태준과 함께하면 할수록 가을은, 다정한 모습이 태준의 본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술잔은 부딪쳐야 맛이죠.”

가을이 웃으며 위스키 잔을 들자 태준이 잔을 부딪쳤다.

“크으.”

단번에 술을 넘긴 가을이 걸쭉한 소리를 내고 냉큼 작은 치즈 조각을 입에 넣었다.

“위스키는 잘 안 마시는데 맛있네요.”

“독한 술이에요.”

태준의 말처럼 식도를 타고 내려간 술이 단숨에 화하게 몸에 퍼지는 느낌이었다.

“도식 감독님이 한 잔 술은 없다고 하셨지만, 오늘은 한 잔만 하겠습니다. 더 마시면 여기서 짖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 술이네요.”

쿡쿡거리던 태준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짖는지 궁금하지만 그 생각에 동의할게요.”

“근데 이거 무슨 술이에요?”

“로얄퀄리티 42년 산.”

“42년산. 어쩐지 비쌀 것 같은 느낌?”

“음, 한 이천만 원쯤 하려나.”

가을의 사고회로가 정지되었다.

“……이천 원??”

태준이 쓸데없는 데 돈을 쓰는 걸 싫어하는 가을을 떠올리며 빠르게 부가 설명을 붙였다.

“선물 받은 거니까 오해하지 말아요.”

“……이천만 원짜리 술이 선물…… 아니 그래도 이런 건 대대손손 가보로 간직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마시라고 있는 술이니까.”

“와, 이천만 원. 그럼 이게 한 잔에 얼마야. 어디 보자 용량이…….”

갑자기 계산을 하기 시작한 가을을 보며 태준이 느슨히 미소지었다.

“한 잔 더 할래요?”

“…….”

“어차피 선물 받은 거예요.”

꿀꺽.

이 타이밍에 침을 넘기면 너무 속 보이는…….

“감사합니다.”

가을이 넙죽 술잔을 앞에 가져다 대었다.

그래, 선물 받은 거지 대표님이 돈을 쓴 건 아니니까.

태준과 잔을 부딪친 가을이 이번엔 한 번에 마시지 못하고 반쯤 마시고 내려놓았다.

“위스키 좋아하세요?”

늘 태준의 질문에만 대답하던 가을이 점점 태준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들이 많아졌다.

“소맥 좋아합니다.”

“마셔 본 적도 없으면서.”

태준이 피식 웃었다.

“위스키는 가끔, 생각이 많을 때 한두 잔 정도.”

“생각할 게 많으세요?”

“많죠.”

“무슨 생각이요?”

태준이 대답 없이 가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정가을 씨 생각.’이라고 할 줄 알았던 태준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자 괜히 머쓱해진 가을이 반쯤 남은 술을 입에 넣었다.

“이래서 어른들 말씀이 맞는 건가 봐요.”

“음?”

“역시 한 잔 술은 없네요.”

가을이 한 잔 더 달라는 듯 위스키 잔을 태준의 앞에 내밀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태준이 위스키 잔에 술을 채웠다.

“딱 한 잔만 더 마셔요.”

“네.”

겨우 두 잔 마신 상태였지만 높은 도수 탓에 가을의 몸에 알코올 기운이 은근히 퍼졌다.

마지막 잔을 비우고 나니 알코올 때문인지 가을은 몸이 점점 바닥에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수리하는 사람 오면 내가 갈 테니까 가을 씨는 여기 있어요.”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다니까.”

동생을 걱정하는 오빠 같은 말투에 가을의 심장이 또다시 두근거렸다.

자꾸만 몸이 위로 올라가는 것 같아 마음이 어지러웠다.

“저 차가운 물 좀 주세요.”

가을의 말에 태준이 냉장고로 향할 때, 식탁 위에 있는 휴대폰이 울렸다.

Rrrr-

설비 가게 번호에 가을이 냉큼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네. 어쩔 수 없죠, 그럼 내일 다시 전화 드릴게요.”

태준이 냉장고에서 꺼낸 500ml 생수를 가을의 앞에 내려놓았다.

“무슨 전화예요?”

“설비 아저씨요. 볼일이 늦게 끝날 것 같다고 오늘 못 오신다고요.”

가을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오늘 잘 마셨습니다. 쉬세요.”

“여기서 자요.”

가을이 놀라서 커다란 눈만 깜빡거렸다.

“난 남은 일 좀 보고 한남동으로 가면 되니까. 내 방에서 자고 내일 가요.”

“…….”

“필요한 거 있으면 지금 얘기하고.”

“그래도…….”

가을이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남자 집인데…….”

태준이 금색 띠가 둘린 물컵을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왜요?”

가을이 몽롱해진 머리로 자신도 알 수 없는 말을 뱉었다.

“왜 아무 짓도 안 하는데요?”

“…….”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빤히 바라보는 가을의 모습에 태준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럼 내가, 무슨 짓을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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