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90)

‘STN’ 드라마국 안.

머리를 하나로 높게 묶고 단정하게 옷을 갖춰 입은 가을이 회의실로 향했다.

“휴우…….”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침에 그러고 나와 가을은 아직 태준에게 연락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아무리 명석이 집에 좀 가 보라고 했다고 해도 벨도 누르지 않고 다짜고짜 남의 집에 들어가서 방문을 열다니.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벨을 눌렀어야지……. 노크라도 했어야지.”

방송국에 도착해 드라마국에 올 때까지 가을은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멈추려고 해도 상의를 탈의한 태준의 모습이 머리에서 자꾸만 재생되었다.

느슨하게 벌어져 있던 샤워 가운 안으로 은근하게 보이던 태준의 상체와, 오늘 아침에 본 완전 탈의한 상체는 느낌이 무척 달랐다.

샤워가운 안으로 보이던 태준의 몸보다 완전 탈의한 상체는 훨씬 남성미가 흘러넘쳤다.

각이 진 넓은 어깨와, 단단해 보이는 근육이 태준의 얼굴만큼이나 완벽해 보였다.

하긴, 슈트가 괜히 어울리는 게 아니지.

가을의 얼굴이 또다시 홧홧해졌다.

‘내 마음이 불타요~ 그대에게 불타요~ 화상 입은 내 마음~♬’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는 트로트 가수의 노랫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내가 있다 전화할게.”

정찬 CP의 벨소리였다.

“CP님 안녕하세요~!”

“가을 씨. 아, 오늘부터 정 감독이라고 불러야지? 근데, 긴장했나?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정찬 CP의 말에 가을이 슬며시 제 뺨을 만졌다.

“아참, 김 감독 말이야, 4부작 총 책임 연출 그만둔 거 들었나?”

“네?”

“이번에 ‘BSC’에서도 4부작을 특별 편성한다는 얘기가 있던데, 그쪽으로 간 모양이더라고.”

하필 경쟁사인 ‘BSC’ 방송국이라니.

어제까지도 봤던 김 감독이었는데. 그런 얘기는 일절 없었다.

“어지간히도 자존심이 상했나 봐. 아무튼 우린 우리대로 잘 찍으면 되니까. 들어가자고.”

어딘가 찜찜한 마음이 들었지만 가을은 이내 생각을 털고 정찬 CP를 따라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회의실 안에 가을을 비롯한 작가, 관련 피디들이 모두 자리했다.

‘탈칵.’

회의 시작 5분을 앞두고 회의실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건 태준이었다.

회의에 대표가 들어오자 피디들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보통 드라마 회의에 대표가 참여하는 일은 드물었다.

당황하는 피디들의 모습에 개의치 않고 태준이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전 신경 쓰지 마시고. 회의 시작하시죠.”

대표가 있는데 신경을 쓰지 말라니. 다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저마다 각이 잡힌 자세로 고쳐 앉았다.

태준의 등장에 누구보다 긴장한 가을이 어색한 모습으로 노트를 펼치자 그 모습을 쳐다보던 태준이 팔짱을 낀 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작품 설명부터 하겠습니다.”

기획 피디의 말에 작가가 작품에 대한 기획 의도, 주제, 캐릭터 등등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총 세 작품으로 이뤄진 4부작 페스티벌에서 두 작품은 유명 작가가 집필한 대본이었고, 가을이 맡은 작품은 경력이 없는 신인 작가의 대본이었다.

이번 4부작으로 데뷔하는 데다 대표까지 참석하자 작가의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났다.

작가가 작품에 대한 설명을 끝내자 여기저기서 피디들의 얘기가 이어졌다.

“소재가 참신한 게 강점이긴 한데, 이 둘의 사랑을 얼마만큼 특별하게 보여 주느냐. 그게 관건인 것 같아요.”

기획 피디의 말에 가을이 입을 열었다.

“세상에 특별한 사랑은 없죠. 그저 남들과 똑같은 평범한 사랑일 뿐인데, 당사자들이 특별하다고 믿는 거예요.”

가을의 말에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가을에게 향했다.

“그래서 전, 특별함이 아니라 이 둘의 감정을 섬세하게 다루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면 시청자들이 주인공의 사랑을 특별하다고 생각하게 되거든요.”

연출자로 첫발을 내딛는 것과 달리 가을은 정확한 판단으로 확실하게 자기 목소리를 냈다.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했지만 자신감 넘치는 가을의 모습에 피디들은 하나둘 가을의 말에 설득되었다.

벌써 몇 번 가을과 만나 얘기를 나눈 작가도 전적으로 가을을 믿고 있는 상태였다.

길게 이어지던 회의가 어느새 끝을 보였다.

“스태프는 정 감독이 선정하는 사람들로 하고 주인공 캐스팅은 소속사 몇 군데에 돌렸으니까 상황 지켜보자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을 뿜어내던 태준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스태프들 업무 환경을 비롯해 충분한 제작비를 지원할 예정이니까, 제대로 만들어 보죠.”

“충분한 제작비라면, 캐스팅도 포함입니까?”

캐스팅 담당 PD가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태준이 그렇다고 얘기하려는 순간 누군가 정찬 CP에게 말을 걸었다.

“CP님, 차도진 배우랑 친하시잖아요.”

‘차도진’ 은 한류를 넘어 세계적인 배우로 입지를 굳힌 자타공인 톱스타였다.

“진짜요?!!! CP님 차도진 배우님이랑 친하셨어요?”

잔뜩 상기된 목청 좋은 가을의 목소리가 회의실을 크게 울렸다.

“아이고 깜짝이야. 반응이 왜 이래. 정 감독 도진이 좋아해?”

“맞다. 가을 씨 차도진 배우 엄청 좋아해요.”

가을과 일한 적 있는 캐스팅 PD의 말에 가을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배우예요.”

가을의 말에 태준의 미간이 한껏 좁아졌다.

“연기도 정말 잘하고, 예전에 잠깐 뵌 적이 있는데 엄청 잘생기셨더라고요. 인성 좋기로도 유명하고.”

화색을 띠는 가을의 모습에 표정을 굳히던 태준이 슬쩍 목소리를 냈다.

“그렇게 잘생긴 것 같진, 않은데.”

“실제로 보면 떨려서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잘생겼어요.”

테이블 위로 맞잡은 태준의 손에 힘이 실리는 걸 보지 못한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입을 열었다.

“정 감독, 도진이 진짜 좋아하나 보네.”

“그러게요. 저도 가을 씨가 연예인 얼굴 칭찬하는 거 첨 들어 봐요.”

“여러모로 차도진 배우가 하면 좋겠어요. 가을 씨 의욕도 오르고. 하하.”

“음, 도진이가 하면 좋긴 한데.”

정찬 CP의 말에 여기저기서 ‘차도진이면 대박이지.’, ‘시청률 보증 아냐?’, 등등 저마다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개런티보다 차도진이 4부작에 나오겠어?”

“안 되면 특별출연이라도 어때요?”

피디들이 여기저기서 들뜬 목소리를 냈다.

“그렇지 않아도 이따 오후에 도진이랑 저녁 약속 있는데. 정 감독도 같이 갈래?”

“저도요????”

더욱더 커진 가을의 목소리에 태준의 눈썹이 거칠게 꿈틀거렸다.

“저야 같이 가면 좋,”

“다들 4부작의 의도를 한 번씩 생각하시죠.”

부글거리는 마음을 눌러낸 태준이 서늘한 목소리로 가을의 말을 잘라냈다.

“단막극이 사라진 자리에 투입되는 기획입니다.”

태준이 가을을 비롯해 작가, 피디들 얼굴을 한 명 한 명 바라보았다.

“신인 작가, 신입 피디. 더불어 신인 배우에게 기회를 주는. 투자개념의 프로젝트라는 뜻입니다.”

유명 배우, 유명 피디를 이용해서 시청률을 올리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준이 갑자기 투자 운운하는 소리에 정찬 CP가 빠르게 감을 잡았다.

심지어 4부작 세 작품 중, 두 작품은 태준의 말과 달리 유명 작가의 대본이었다.

“그렇죠. 신인 배우에게 기회를 주는 게 맞죠. 도진이는 나 혼자 만나고 올게, 정 감독.”

정찬 CP의 말에 외주 제작사에 들어간 순간부터 최애 배우였던 차도진을 만날 기회를 잃은 가을이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 후 몇 가지 안건을 끝으로 첫 회의가 끝이 났다.

“정 감독, 처음으로 연출 맡아서 회의한 소감 한마디 해야지.”

정찬 CP의 말에 가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족한 게 많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소감을 묻는 정찬 CP의 말에 가을이 각오로 답했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크게 박수를 치며 저마다 잘해 보자는 말을 건네고 회의가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가을이 늘 하는 말을 뱉었다.

모두가 수고했다는 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날 때 태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 감독님은, 잠깐 남으시죠.”

태준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던 가을이 눈치를 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태준에게 인사를 건넨 사람들이 모두 회의실을 모두 빠져나가자 회의실 안에 태준과 가을, 둘만 남았다.

눈치를 보며 괜히 제 손만 매만지고 있는 가을을 태준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소 6시에 일어나 7시에 회사로 향하는 태준은 오늘따라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어젯밤부터 피로가 몰려왔지만 계획에도 없던 제주도를 왕복하느라 하지 못했던 일들을 모두 마치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6시에 맞춰 둔 알람이 언제 껐는지 모르게 꺼져 있었다.

8시가 훌쩍 넘긴 시간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나온 태준은 처음으로 늦잠을 잔 데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명석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었다.

일어나기 전까지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 두는 습관 때문에 명석의 전화 역시 받지 못했다.

그렇게 저조한 컨디션으로 옷을 갈아입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가을이 들이닥쳤다.

가을이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오늘 아침엔 죄송했습니다.”

“임 비서한테 들었어요.”

“아…… 네.”

“바로 연락할 줄 알았는데.”

“그게 제가 생각이 좀 많아서요. 사과가 늦었습니다.”

“음, 나도 생각 많았어요.”

태준이 등받이에 기댔던 몸을 가을 쪽으로 비스듬히 돌렸다.

“초인종을 먼저 눌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가을이 얼굴이 빨개져 빠르게 말을 뱉어냈다.

“그때 상황이 어떻게 된 거냐면요, 임 비서님이 대표님이 출근을 안 하셨다길래 혹시 지난번처럼 어디가 안 좋아서 쓰러진 거 아닌가 싶고, 혹시 너무 아파서 문을 열어 줄 상황이 안 될 수도 있고 그래서 제가 경황이 없어서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간 거죠.”

“그래서 안방까지 직진?”

“그렇죠!”

“문 닫는 속도는 왜 늦었어요.”

“초 스피드로 닫았는데요.”

“눈이 빛나던데.”

“제가 원래 눈이 초롱초롱해요.”

가을이 과하게 눈에 힘을 주었다.

“얼굴은 왜 그렇게 빨개요?”

가을이 당황하며 양 볼을 툭툭 두드리자 태준이 어깨를 낮게 들썩이며 웃었다.

“……어쨌든 제가 대표님 걱정으로 정신이 없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주세요.”

장난스럽던 태준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바뀌었다.

“정신이 없을 만큼, 걱정했어요?”

가을이 뒷말의 볼륨을 현저히 줄여 답했다.

“당연하죠. ……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좋네. 걱정해 주는 거.”

태준의 말에 어딘가 표정이 어두워진 가을이 입술을 깨물다 말을 꺼냈다.

“좋은 일 아니에요, 그거.”

“…….”

“그게 얼마나 피 말리는 건데요. 괜찮은지, 별일은 없는지, 어디가 많이 아프진 않은지…… 걱정하는 사람은요……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요.”

물기가 묻은 듯한 가을의 목소리에 태준이 바닥만 보고 있는 가을의 얼굴 가까이 몸을 숙였다.

“미안해요.”

그제야 바닥만 보고 있던 가을이 태준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빨려 들어갈 만큼 까만 태준의 눈동자가 살며시 흔들렸다.

“혹시…….”

가을의 얘기가 박선호라는 사람에 관한 건지 물으려던 태준이 말을 멈췄다.

“아닙니다.”

“…….”

태준이 몸을 바로 세우며 슈트 재킷을 매만졌다.

“오늘 저녁 같이 먹을래요?”

“저녁이요?”

“이따 집 앞에서 전화할게요.”

가을이 목덜미를 쓸며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일어날까요.”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자 가을이 노트를 챙겨 따라나섰다.

오후 7시. 태준과 가을이 집 근처 놀이터로 향했다.

맛있는 걸 사 주겠다는 태준에게 바람이 좋으니 훤히 트인 곳에 가서 간단히 먹자며 가을이 제안한 것이었다.

넓은 놀이터를 지나 조금 더 걸으면 나오는 작은 놀이터에 도착했다.

“저기예요.”

기다란 의자가 놓인 정자 스타일의 휴식 공간이었다.

가을이 의자에 앉자 태준이 아이스커피가 든 캐리어와 샌드위치를 의자에 내려놓고 그 옆에 앉았다.

“여기가 제 아지트거든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처의 다른 넓은 놀이터만 이용해 평소 이용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놀이터였다.

가을은 머리가 복잡할 때 산책을 하고 마지막으로 이곳에 앉아 어지러운 마음을 풀어내곤 했다.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한 놀이터라 의자에 앉으면 시원한 바람이 훤히 들어오는 곳이었다.

“좋죠?”

“좋네요.”

가을이 배가 고파 냉큼 봉투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태준이 캐리어에서 아이스커피 하나를 꺼내 가을의 앞에 놓고 자신도 나머지 커피를 집어 들었다.

“전 이렇게 먹는 게 좋더라고요. 꼭 소풍 온 것 같고.”

손에 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던 태준이 긴 다리를 꼬았다.

“근데, 그렇게 좋아요?”

“네?”

“차도진.”

“아…… 네.”

“나는?”

가을이 당황해서 눈만 깜빡거렸다.

“샌드위치도 사 주고 커피도 사 줬는데. 난 안 좋나?”

“……그게…….”

태준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피식 웃곤 고개를 돌려 놀이터를 바라보았다.

장난 섞인 태준의 말에 제 심장만 이유 없이 ‘쿵’ 떨어졌던 가을이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슬쩍 태준을 바라보았다.

놀이터와는 어울리지 않는 근사한 모습으로 태준은 놀이터에서 보이는 전망을 감상하듯 보고 있었다.

산에서 불어온 바람에 태준의 머리카락이 살포시 흩날리자 당장이라도 카메라를 꺼내 촬영을 하고 싶을 만큼 멋있었다.

잘생긴 사람은 보고만 있어도 꿀잼이라던 지영의 말에 이어, 잘생긴 사람은 뭘 해도 화보고, 자신은 뭘 해도 며칠 밤을 새운 사람이라며 불평하던 혁진의 말이 떠올랐다.

입에 있던 샌드위치를 삼키고 태준을 힐끔거리며 아이스커피를 쪽 빨던 가을이 태준과 눈이 마주치자 사레가 들어 기침을 뱉었다.

“콜록, 콜록.”

가을이 손으로 입을 막으며 낮게 콜록거렸다.

“써요.”

태준에 슈트 재킷에서 각이 진 손수건을 꺼내 가을에게 건넸다.

늘 쓰던 고가의 브랜드 제품이 아닌, 가을이 선물로 준 유채꽃 그림이 있는 손수건이었다.

태준이 가지고 다닐 거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던 가을이 손수건을 건네받았다.

이걸 갖고 다닌다고…….

아직 얼굴로 가져가지도 않았는데 유채꽃 손수건에서 태준의 체취가 짙게 배어났다.

쿵. 쿵. 쿵.

태준의 향기가 어지러울 만큼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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