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90)

스태프들과 함께 가을이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아침에 혁진에게 태준이 룸에 왔었다는 얘기를 듣고 가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술을 마시다 기절해 잠이 들었으니 어떤 꼴로 누워 있었을지 안 봐도 눈에 훤했다.

거기다 아침부터 스태프 두 명이 가을을 찾아와 자세한 설명 없이 잘못했다는 말만 하며 태준에게 얘기 좀 잘해 달라고 사정하고 갔다.

영문을 몰라 하던 가을에게 혁진이 태준과 스태프들 사이에 있던 얘기도 전해 주었다.

분위기로 봐서는 태준이 진심으로 고소를 할 것 같다고 했다.

“하아…….”

다크서클이 한층 더 내려온 기분이었다.

디링-

태준의 문자였다.

[도착했죠? 차 보냈으니까 타고 와요.]

태준이 보낸 문자 위로 어젯밤 자신이 보낸 메시지와 동영상이 보였다.

어젯밤 기분이 자꾸 가라앉아 다시 술자리로 돌아간 가을이 급하게 마신 소맥에 얼큰하게 취한 상태에서 도식과 지영, 몇 명의 스태프와 함께 밤바다를 구경했다.

그렇게 취한 상태로 태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쭈니라니.

거기다 동영상 속 자신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경악스러웠다.

술과 바닷바람이 만들어 낸 콜라보레이션이 충격적인 비주얼을 만들어 냈다.

가을이 태준의 문자에 답변을 하지 않고 휴대폰을 크로스 백에 넣었다.

제주도에 도착해서부터 처음 보는 바다, 처음 보는 멋진 광경들. 그런 것을 보자 제일 먼저 태준을 생각했다는 걸 깨닫고 가을은 아침내 머리가 복잡했다.

비행기에서 돌아오는 짧은 시간 동안, 좋아한다는 얘기를 끊임없이 들어서 그런 거라고. 그래서 저도 모르게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한 번씩 선호가 했던 말을 내뱉어 혼란스러운 것뿐이라고.

가을은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게이트로 나가자 태준이 보낸 운전기사가 가을에게 다가왔다.

빌라 앞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던 운전기사가 단번에 가을을 알아보았다.

다소 험악한 인상의 그가 최대한 살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대표님이 보내셔서 왔습니다.”

운전기사의 인사에 가을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저, 죄송한데…….”

가을이 일행이 모여 있는 곳을 한번 돌아보곤 운전기사에게 말을 이었다.

“저는 일행이랑 가야 해서요. 대표님께는 마음만 받는다고 전해 주세요.”

“예?? 대표님께서 꼭 모셔다드리라고 하셨는데요.”

“죄송합니다.”

가을이 꾸벅 인사를 건네고 자신을 기다리고 서 있는 지영에게 빠르게 향했다.

“누구예요?”

얼마나 물놀이를 했는지 그새 온몸이 벌겋게 익은 지영이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는 운전기사를 힐끔 쳐다보았다.

“대표님이 보내신 거 아니에요?”

“맞아.”

“근데 왜 안 타세요??”

“공항버스 타고 가는 게 더 편해.”

“아 진짜, 혁진 오빠가 대표님 왔다고 얘기만 했어도 같이 술 한잔할 수 있었는데! 내가 왜 술 마시다 말고 바다를 보겠다고 뛰쳐나갔는지.”

“후, 너 따라 나갈걸. 난 왜 감독님이랑 새우 과자 게임을 했을까.”

깊은 한숨을 쉰 가을이 빠르게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얼마 뒤.

배우는 타고 온 밴으로, 감독들과 스태프들은 대절한 버스로. 각자가 타고 왔던 교통수단으로 이동했다.

그 외 몇 명은 따로 가겠다며 공항버스나 지하철로 향했다.

가을은 공항버스를 택했다.

대절 버스가 하차하는 곳이 ‘STN’ 방송국 앞이라 어쩐지 태준을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태준을 만난다면, 굳게 마음을 다잡은 것과 달리 첫 여행의 감흥을 주절댈 것 같아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공항버스에 오른 가을은 동네 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기절한 듯 잠이 들었다.

가을의 예상대로 태준은 명석과 함께 ‘STN’ 방송국 주차장에 하차한 대절 버스에서 가을이 내리는 걸 기다렸다.

자신이 보낸 차를 타지 않고 일행과 간다고 했다기에 당연히 대절 버스를 타고 이동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바쁜 일정을 조절하기 어려워 통화를 할까 하다 잠깐이라도 가을의 얼굴을 보고 들어갈 생각으로 도착할 시간을 예상해 점심을 서두른 태준이었다.

“어? 대표님.”

도식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멀찍이 떨어져 있던 태준을 발견하고 반가운 얼굴로 다가갔다.

“어제 숙소에 오셨다면서요. 좋은 기회를 놓쳤네. 어쨌든 덕분에 잘 쉬다 왔습니다.”

“예.”

대답하는 태준의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는 사람들로 향했다.

그 모습을 눈치챈 도식이 슬쩍 태준을 바라보았다.

“조감독 공항버스 타고 간다고 먼저 갔어요.”

“아…….”

태준을 알아본 스태프들이 여기저기서 ‘대표님 감사합니다~!’라며 건네는 인사에 연한 미소로 답한 태준이 이내 도식을 돌아보았다.

“그럼.”

명석과 함께 다시 방송국 안으로 향하는 태준을 도식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조감독님 찾아온 거죠?”

“보기엔 그렇게 안 생겨서 되게 일편단심이네요.”

몇 명의 스태프가 도식과 함께 안쓰러운 표정을 보탰다.

“근데 대표님 옆에 저 비서분, 엄청 분위기 있게 생기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방송국이라고 비서도 얼굴 보고 뽑나?”

“니들도 잘생겼어. 인마.”

도식이 스태프들의 어깨를 한 명씩 꾹꾹 누르곤 버스 트렁크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고 난 뒤 샤워를 하고 나온 가을이 언제나 그랬듯 선풍기 앞에 앉아 긴 머리를 털며 말렸다.

내일부터는 드디어 4부작 페스티벌 회의가 시작되었다.

가을이 맡은 작품은 ‘거기에 네가’라는 로맨스 판타지였다.

대본은 이미 몇 번의 퇴고를 거쳐 준비를 끝낸 상태였고, 관련 피디와 작가가 모여 진행 방향 및 캐스팅, 스태프 선정, 등등 촬영에 필요한 전반적인 것들을 논의할 예정이었다.

조연출이 아닌 연출자로 하는 첫 회의. 드디어 꿈에 한 발짝 다가섰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자신의 이름을 건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그 순간을 위해 7년을 버텨 온 가을이었다.

그리고 그때 선호와 약속한 소원을 빌 생각이었다.

“그것만 생각하자, 그것만.”

일부러 흥겹게 드라마 OST를 부르며 머리를 말린 가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식탁 위에 올려놓은 태준의 선물을 바라보았다.

불과 일 분 전에 한 다짐을 잊고 가을의 머리에 다시 태준이 들어왔다.

“줘야 하나…….”

가을이 선물 옆에 놓아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혹시 연락이 왔을까 싶었던 태준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가볍게 점심을 먹고, 집 안을 청소하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내내 가을의 신경은 온통 휴대폰에 가 있었다.

분명 쉬고 있었는데. 가을의 눈가가 퀭해졌다.

“아악!”

가을이 거칠게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태준이 보낸 차를 타지 않은 것도. 메시지에 대답을 하지 않은 것도.

계약에 맞는 행동이었다.

분명 맞는 행동인데.

“대체 왜 미안하냐고…….”

차를 타고 오라는 메시지 이후 태준에게서 별다른 연락이 없자 오히려 더 초조해졌다.

망설이던 가을이 결심한 듯 휴대폰을 들었다.

‘계약 짝사랑’이니 태준을 피해도 되는 일이었는데. 그렇다고 왜 피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너무도 복잡한 마음이었다.

가을이 저녁 8시를 가리키고 있는 벽시계를 보았다. 지금쯤 퇴근하지 않았을까 싶어 막 태준의 번호를 누를 때였다.

Rrrr-

“깜짝이야.”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트릴 뻔했다.

[강태준 대표님]

발신자를 확인한 가을이 몇 번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혹시 자고 있었어요?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은 게 무색할 만큼 태준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아뇨.”

-그럼 잠깐 나올래요?

“지금이요?”

-집 앞이에요.

“아, 잠시만요.”

전화를 끊고 대충 거울로 제 모습을 확인한 가을이 손빨래 후 다리미로 다려 놓은 태준의 손수건 두 개와 포장한 선물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어딘가 평소보다 나른해 보이는 태준이 빼꼼히 문을 열고 나오는 가을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여행 후 피로함에 잠을 자고 있을까 싶어 연락하고 싶은 걸 꾹 참아 낸 태준이었다.

“잠은 저녁에 자는 거죠.”

어색함에 슬쩍 웃어 보인 가을이 말을 이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셨네요?”

“퇴근하는 시간도 알아요?”

“그게…….”

주로 늦은 시간에 들려오는 물소리. 시간이 늦어 그 소리는 더 크게 들려왔다.

태준이 집에 와 샤워하는 소리를 듣고 안다는 얘기를 할 수 없어 가을이 슬며시 다른 말로 바꾸었다.

“계단 올라오는 소리가 나니까…… 하핫.”

태준이 피식 웃었다.

“귀엽게.”

“…….”

“강아지도 아니고.”

“…….”

두근. 두근. 두근.

평소보다 숨소리가 묻어난 낮은 태준의 목소리와 나른한 분위기에 다잡은 마음도 소용없이 가을의 심장이 뛰었다.

“보고 싶었어요.”

평소보다 더 깊게 내려앉은 태준의 목소리가 계단을 울렸다.

……진짜로요?

입술까지 차오른 말을 가을이 뱉어 내지 못했다.

진짜냐는 질문에 태준이 어떤 대답을 해 올지 뻔히 알고 있었다.

“어제 오셨다면서요.”

“어젠 가을 씨가 잠들어 있어서.”

“깨우지…….”

“좋은 꿈 꾸는 것 같길래요.”

태준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저…… 어제 혁진이한테 들었는데 저희 스태프가,”

“미안한데, 그 문제는 내가 하자는 대로 했으면 좋겠어요.”

단호한 태준의 눈빛에 가을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복도에 있는 낡은 센서 등이 툭 꺼졌다.

복도를 밝히던 불이 사라지자 창문으로 들어오는 은은한 빛이 두 사람의 얼굴에 음영을 만들어 냈다.

불이 켜져 있을 때와 똑같이 마주 보고 서 있을 뿐인데 어색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유, 이게 툭하면 이래. 사람이나 기계나 오래되면 다 하자가 생긴다더니.”

가을이 도식이 했던 말을 꺼내며 손을 휘휘 저어 다시 센서 등을 밝혔다.

불이 켜지자 미동도 없이 선 태준은 그저 가을만 지그시 바라보았다.

무리한 스케줄에, 피곤함을 동반하는 문규의 생일 잔치, 그리고 제주도까지 다녀오자 태준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하얀 태준의 얼굴이 더 창백해 보이자 가을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혹시…… 어디 아프세요?”

느리게 숨을 뱉어 내는 모습이 평소와는 달라 보여 가을이 태준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아요. 얼굴 봤으니까 들어갈게요. 쉬어요.”

인사를 건넨 태준이 몸을 돌렸다.

“저기, 대표님.”

가을이 태준의 앞으로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거 전에 주신 손수건이랑, ……그냥 기념품 하나 샀거든요.”

생각지 못한 선물에 태준의 얼굴에 보기만 해도 설레는 환한 미소가 걸렸다.

“고마워요.”

태준이 쇼핑백 안에서 포장 상자를 꺼내려 하자 가을이 다급히 만류했다.

“자, 잠깐만요. 선물은 집에 가서 풀어 보세요.”

저지하는 듯한 가을의 손동작에 태준이 상자를 다시 쇼핑백 안에 넣었다.

“들어가세요!”

어쩐지 선물이 부끄러워 가을이 냉큼 현관문을 열었다.

쾅!

조만간 문도 고장을 낼 듯 또다시 요란하게 현관문을 닫은 가을이 안으로 들어왔다.

선물한 손수건을 사용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하지만 환하게 웃어 준 태준의 미소에 가을은 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 * *

분명 쉬러 갔던 여행인데 평소보다 몸이 더 피로해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던 가을이 오랜만의 휴식에 아침 일찍 등산을 가기 위해 이것저것 담긴 가방을 챙겨 들었다.

Rrrr-

모르는 휴대폰 번호로 전화가 오자 고개를 갸웃한 가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대표님 비서, 임명석입니다.

“아, 임 비서님. 안녕하세요~!”

-아침 일찍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죄송하지만 대표님 집에 한번 가 주실 수 있을까요?

“대표님 집에요?”

-늘 8시 전에 회사에 나오시는데 아직 출근을 안 하셔서요. 전화도 안 되고,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부탁 좀,

“제가 가 볼게요!!!”

명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은 가을이 빠르게 태준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태준의 상태가 어딘가 아파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그렇게 기운이 없어 보였던 건가.

혹시 지난번처럼 어딘가 좋지 않아 그대로 쓰러진 건 아닌지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삐비비빅-

현관 비밀번호를 누른 가을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빠르게 소파를 확인한 가을이 자신의 집과 구조가 같은 큰 방문을 벌컥 열었다.

“대표님! 괜찮…….”

가을의 눈에 상의를 탈의한 채 막 슈트 바지를 입고 있는 태준이 들어왔다.

방문 손잡이를 잡고 있는 가을과, 바지 지퍼를 잡고 있는 태준.

두 사람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

“…….”

“……수고하세요.”

당황한 가을이 더 당황스러운 말을 뱉고 살며시 방문을 닫았다.

‘탈칵.’ 조심스러운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힐 때까지 태준은 그대로 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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