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90)

굵직한 목소리에 가을이 무심히 뒤를 돌아보았다.

태준만큼이나 큰 키에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검은 반바지. 그 위로 짙은 회색 맨투맨 상의에 검은 모자를 깊게 눌러 쓴 누군가가 가을의 곁으로 다가왔다.

“진짜 정가을이네.”

“누구세요?”

스태프일 거라고 생각했던 가을이 처음 보는 남자의 등장에 긴장하며 슬쩍 몸을 사렸다.

“하긴, 내가 너무 변해서 알아보는 게 이상하지.”

남자가 모자를 벗어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휙휙 털어냈다.

“이제 알아보려나?”

남자가 온전히 얼굴을 드러냈지만 가을은 정말 누군지 모르겠다는 듯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엄청 섭섭하네. 1년이나 쫓아다녔는데.”

그 말에 가을이 그제야 남자를 기억해냈다.

“……은서준?”

가을이 기억하는 서준은 160센티 정도 되는 키에 얼굴엔 여드름이 가득한 후배였다.

가을이 19살. 서준이 17살이 되던 해, 운동장에서 날아온 축구공에 근처를 지나가던 여학생이 머리를 맞았다.

‘축구공이 날아오면 피해야지 그걸 왜 맞고 있어?’

축구공을 찬 서준은 개념 없는 말을 뱉고는 사과도 없이 애먼 여학생을 탓했다.

마침 체육 시간이 끝나 교실로 향하던 가을이 축구공을 들고 횅하니 돌아가는 서준에게 다가가 뒤통수를 냅다 갈겼다.

‘으악! 뭐야??’

‘손이 날아가면 피해야지. 그걸 왜 맞고 있어?’

뒤통수를 매만지며 놀란 얼굴로 쳐다보는 서준을 향해, 가을이 똑같이 되받아쳐 주었다.

정의감이 넘쳐 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신원확인이 되지 않는 사체의 DNA를 기다리느라 예민해진 가을이 앞뒤 없이 저지른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날 뒤로.

‘날 때린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드라마에서나 듣던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 대며 서준이 가을을 쫓아다녔다.

손이 귀한 부잣집 외동아들로 태어난 서준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으로 자랐다.

아무리 잘못을 해도 혼이 나긴커녕 행여 다치기라도 할까 금이야 옥이야 귀한 대접만 받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맞은 뒤통수가 서준에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키가 큰 가을이 위에서 메다꽂으며 때린 뒤통수의 충격만큼 서준의 심장은 가을에게 가격당했다.

가을보다 10센티가량이나 작았는데도 서준은 꿀리는 기색 없이 대차게 가을을 쫓아다녔다.

언제나 칼같이 대하는 가을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매 순간 제 마음을 표현했다.

포기하지 않고 들이대는 뚝심은 의찬이 인정할 정도였다.

그렇게 가을이 졸업할 때까지 쫓아다니던 서준은 돌연 전학을 가면서 연락이 끊어졌다.

그저 귀찮고, 가끔은 귀여운 후배 정도로만 생각하던 가을은 그 뒤 서준의 존재를 잊고 살았다.

“그래도 내 이름은 기억하네.”

서준이 반가움이 가득 묻어난 목소리로 미소 짓자 가을은 놀라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보다 한참이나 커 버린 서준을 올려다보았다.

키도 키지만, 뒤덮여 있던 여드름이 사라진 얼굴은 예쁘장한 미소년 느낌이 물씬 묻어났다.

“그때 왜 날 찼을까. 이런 후회 들지 않나?”

“은서준.”

“응?”

“오랜만에 봐서 반갑긴 한데.”

가을이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올렸다.

“반말은 하지 마라.”

가을의 말에 서준이 큰소리로 웃었다.

“여전하네, 진짜.”

가을을 쫓아다니던 때도 서준은 가을에게 존댓말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호칭 역시, ‘정가을’, 아니면 ‘선배’였을 뿐, 절대 ‘누나’라는 호칭은 쓰지 않았다.

“예전에 선배가 내 이름 불러 주면,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알아요?”

“…….”

“근데 왜 지금도 두근거리지?”

상큼한 미소와 함께 은근한 목소리를 내는 서준의 모습에 가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도 여전하구나.”

가을이 숙소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참이나 해변을 걸어 숙소까지 제법 걸어야 했다.

“혼자 왔어요?”

“아니.”

“그럼 누구랑? 애인?”

“넌 일행 없니?”

“난 일 때문에. 어디에 묵어요?”

“알 거 없지 않을까.”

“7년 만에 만났는데 왜 이렇게 철벽이지? 사람 섭섭하게. 나 좋다는 여자 엄청 많아요.”

“그래, 많게 생겼네.”

“이야~ 인정해 주는 건가?”

가을이 걸음을 멈추고 서준을 돌아보았다.

“이제 조용히 갈 길,”

“생각지 못한 데서 첫사랑 만나니까 반가워서 그래요.”

“…….”

“몰랐어요? 선배, 내 첫사랑인데.”

서준이 한껏 진지한 눈빛으로 가을을 응시했다.

“그래. 만나서 반가웠고, 잘 살아.”

하지만 가을은 언제나 그랬듯 철벽이었다.

“하하, 여전하니까 좋네.”

가을이 좀 더 빠른 걸음으로 해변을 걸었다.

“우연은 여기까지예요. 다음에 만나면 인연입니다~!”

서준이 뒤에서 소리치자 가을이 보지도 않고 잘 가라는 듯 손만 흔들어 보였다.

한참을 걷던 가을이 검색해 둔 작은 기념품 가게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의찬과 가영의 선물을 살 생각이었다.

큰 선물은 아니더라도 처음으로 온 여행이니까 뭔가를 사 주고 싶었다.

향수를 좋아하는 가영을 위해 특산품으로 만든 향수를 고르고, 의찬에겐 특이하고 화려한 잔 세트를 골랐다.

태준에게도 뭔가를 선물할까 싶어 둘러보던 가을이 다시 마음을 돌렸다.

선물을 주고받을 사이도 아니었지만 뭐든 고급 제품을 사용하는 태준이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향수와 잔 세트를 들고 계산대로 향하던 가을이 한쪽에 놓인 손수건을 보았다.

유채꽃이 은은하게 그려진, 15,000원짜리 손수건이었다.

20만 원짜리 손수건을 쓰는 사람인데.

손수건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가을이 결국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사용하진 않겠지만 포상 휴가를 보내 준 답례는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선물을 사서 호텔 로비로 올 때까지 태준에게 온 메시지는 없었다.

‘저는 아닙니다.’라는 대답에 언제나 ‘연락할게요.’로 마무리하던 태준이었기에 가을의 기분이 어쩐지 자꾸만 가라앉았다.

그 시각.

고급 차들로 가득한 호텔 주차장에 차를 세운 태준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마음 같아선 잠깐이라도 제주도로 가고 싶었지만, 이틀간 소화해야 할 일정이 많아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오늘은 1년에 한 번 온 가족과 함께 정·재계 인사들이 모이는 문규의 생일이었다. 미국에 있을 때도 이날엔 언제나 한국으로 들어왔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해마다 명석과 함께 참석했지만 쓸데없는 의심을 주지 않기 위해 이번엔 태준 혼자 생일잔치에 참석했다.

매년 문규의 생일잔치만 다녀오면 한껏 경계하느라 태준은 몸이 좋지 않았다.

이번엔 만약을 위해 문규에게 몸이 좋지 않다는 얘기를 해 두었다.

당장 병원에 가라고 성화를 하는 문규에게 과로 때문이니 병원까지 갈 정돈 아니라는 얘기를 덧붙였다.

여자와 몸이 스치는 정도나 작은 터치는 참아 볼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의 일이 발생해 쓰러진다면, 그 이유를 댈 생각이었다.

다행히 대부분 부부 동반이거나 친인척들뿐이라 큰 위험부담은 없는 자리였지만 태준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긴장감을 누르듯 느슨히 의자에 기댄 태준이 휴대폰을 들어 조금 전 가을에게서 온 메시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는 아닙니다.]

보고 싶다는 말을 하거나 좋아한다는 말을 할 때마다 듣던 말인데, 오늘따라 이 말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후…….”

제주도로 출발하는 날부터 오늘까지 시간이 날 때마다 태준은 가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때마다 가을은 짧은 답변만 보냈다.

가을은 태준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낸 적이 없었다. 먼저 전화를 한 것 역시 태준의 이름을 부르던 소름 끼치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처음엔 당연하다고 생각한 일이 시간이 지나며 가을에게 먼저 연락이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가을에게 오늘 처음으로 메시지가 왔다.

노을이 진 바다. 그 위를 나는 갈매기.

그 풍경을 보고 있을 가을을 떠올리자 그 옆에 함께 서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가야 할 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크게 숨을 뱉어 낸 태준이 차 문을 열고 파티가 열리는 VIP 홀로 향했다.

30여 분 전에 도착했는데도 곳곳에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정·재계 인사들이 도착해 있었다.

친인척들도 이미 도착해 가족 테이블에 앉아 있거나 사람들과 어울려 얘기를 하고 있었다.

태준이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문규에게 향했다. 그 옆으로는 찬영이 대화에 낄 틈을 노리는 듯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 왔습니다.”

“태준아, 우리 장손. 얼굴이 왜 이 모양이야. 아무리 바빠도 몸은 챙겨야지.”

태준의 등장으로 화색이 돌던 문규가 이내 걱정 어린 표정을 짓자 찬영이 입술을 비죽였다.

“여자 쫓아다니느라 그런,”

“씃!”

형형한 눈빛의 문규를 보고 찬영이 냉큼 입을 다물었다. 본전도 찾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찬영은 늘 매를 버는 스타일이었다.

“생신 축하드려요.”

“몸이 안 좋으면 쉬지. 뭐 하러 와.”

“할아버지 생신인데 와야죠.”

“늙은이 생일이 뭐 중요해. 네 건강이 우선이지.”

두 사람의 대화에 찬영이 또다시 입술을 비죽거렸다.

“인사 좀 드리고 올게요.”

“오냐.”

태준이 친인척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던 문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얼마 전 ‘사랑은 결국 증오로 번진다.’라는 가을의 말에 문규는 부모가 이혼을 했다는 사실 외에, 가을의 가정사를 좀 더 조사하라고 시켰다.

어린 시절 부모가 이혼을 하고 할머니 집에 맡겨져 컸다는 사실과, 가을의 부친은 몇 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고, 모친도 두 번이나 재혼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역시 그 말은 가정사 때문이었구나 싶었다.

이미 가을에 대한 걸 어느 정도 조사한 후에 만났던 문규는 태준에 비해 한참 부족해도 밝은 가을의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던 참이었다.

하지만 가을의 가정사를 자세히 알게 되자 여느 부모들이 그렇듯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여자를 태준의 짝으로 하고 싶다는 욕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라온 환경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게 문규의 생각이었다.

그사이 태준이 친인척들 앞으로 다가갔다.

문규는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일찌감치 시집을 간 정열의 두 여동생은 각자 몇 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누구도 태준을 능가하는 인물이 없었다.

거기다 대를 이을 친손자만 편애하는 문규 때문에 후계에는 욕심을 내려놓은 여동생들이었다.

“다들 잘 지내셨어요?”

언제나 반듯하고 예의 있게 행동하는 태준답게 친인척들을 향해 공손한 모습으로 인사를 건넸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태준을 보며 저마다 한마디씩 인사를 했다.

“요즘 ‘STN’ 주가 연일 상승이던데. 역시 강태준이야.”

“얼마 전에 방송국 호감도 조사에서 3위 했다며? 전엔 거의 꼴찌 아니었나?”

“전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제일 어린 나이었지만 태준에겐 넘볼 수 없는 기품과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어 사촌들은 늘 태준의 앞에서 작아졌다.

“태준아.”

한껏 멋을 내고 온 미연이 다정한 목소리를 내며 태준의 곁으로 다가왔다.

“성북동엔 통 오지도 않고 요즘도 많이 바쁘니?”

인자한 표정을 한 미연을 보며 태준이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예.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해요.”

“아무리 바빠도 건강은 챙겨야 하는데. 보약을 한 제 지어야 하나? 좀 마른 것 같네.”

“저까지 신경 쓰지 마세요.”

속내를 감춘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며 다정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죽지 그랬어.]

병실에 온 미연이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는 애란의 귀에 대고 한 말이었다.

[너 같은 게 왜 태어난 거야.]

[네 엄마 죽을 때 같이 죽어 버려.]

충격으로 서 있는 어린 태준에게까지 미연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퍼부었다.

“좋아하는 아가씨가 있다던데 잘 만나고 있니?”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태준은 숨겨진 미연의 눈빛을 알고 있었다.

어떤 여자를 데려오든 미연은 자신의 행복을 방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괴롭힐 게 분명했다.

애란이 사망하자 미연은 사람들 앞에서 태준을 아들처럼 생각하겠다며 천사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단둘만 남겨지자 미연은 본색을 드러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여기서 지내고 싶으면.]

어린 태준의 눈에 미연은 악마였다. 자다가 경기를 일으킬 만큼 무서웠지만 태준은 꿋꿋하게 참아 냈다.

갑자기 생긴 할아버지, 아빠. 낯선 집. 모든 것이 자신을 지켜 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 집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강해지는 것밖에는 없었다.

온갖 저주의 말을 퍼붓고 괴롭혀도 태준이 꿋꿋이 제 할 일을 보란 듯이 해내자 미연은 찬영을 들볶기 시작했다.

뭐든 태준보다 잘하라고, 해내라고. 태준과 넌 태생이 다르다고. 매 순간을 태준과 비교했다.

태준이 성장하며 미연은 그를 괴롭히는 대신 철저히 무관심한 쪽으로 방향으로 바꾸었다.

그러면서 늘 태준의 뒤를 캐고 조사하고, 언제라도 흠이 생기길 하이에나처럼 지켜보았다.

확실한 증거 없이 미연을 몰 수는 없었다. 거기다 문규는 자신의 집안에 이혼은 절대 없다는 사람이었다.

정열 역시 회사 일이 바빠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태준은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자신에게 힘이 생길 때까지.

단번에 미연의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을 때까지.

“난 네가 누굴 데려오든 찬성이야.”

자신에게 천한 피가 흐른다며 손 하나 만지지 않던 미연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태준의 팔을 슬며시 잡았다.

“……!”

“찬영이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며느리가 생기면 내가 딸처럼 예뻐할 테니까 결혼만 해.”

미연을 뿌리칠 수는 없어 태준이 주먹을 꽉 쥔 채 점점 가빠 오는 숨을 참았다.

빤히 올려다보는 미연의 눈빛을 받으며 태준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태준의 이마에 핏줄이 서고 등에 오싹한 소름이 돋으면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태준과 미연. 두 사람의 눈빛에 날 선 긴장감이 흘렀다.

“어머, 땀 좀 봐. 아버님이 너 몸이 안 좋다고 하시던데, 많이 아픈 거야?”

미연이 막 태준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려고 할 때였다.

“아유, 우리 언니는 이렇게 착하다니까?”

정열의 여동생이 다가와 미연의 어깨를 두드리자 고개를 돌린 미연이 태준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아슬아슬한 위기를 넘긴 태준이 조용히 숨을 골랐다.

“착하긴요, 당연한 거죠.”

미연이 세상 착한 눈빛으로 손사래 치자 옆에 있던 사촌들의 시선이 일제히 태준에게 향했다.

“그런데 그 여자, 태준이 너 혼자 좋아하는 거라며?”

“네가 뭐가 아쉬워서 여자를 쫓아다녀?”

“그러니까. 난 처음에 안 믿었다니까? 찬영이면 몰라도 너는.”

사촌 한 명이 흥미로운 목소리를 내다 미연의 눈치를 보며 냉큼 말을 멈췄다.

일순 매섭던 미연의 눈빛이 이내 평소처럼 돌아왔다.

“태준아.”

정열의 목소리에 태준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친인척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말씀들 나누세요.”

조용히 숨을 고르던 태준이 평소 같은 모습으로 인사를 하고 정열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자 사촌들이 저마다 한소리를 뱉었다.

“쟤는 웃는 것도 이상하게 긴장되더라.”

“난 쟤 보면 꼭 할아버지 보는 거 같아서 무서워.”

“그런 점이 천생 사업가 기질을 타고난 거지. 하여간 쟤는 인물이야.”

태준의 얘기를 하던 사촌들이 화제를 돌려 다른 얘기를 이어 가자 태준을 보는 미연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아이고, 서 회장님.”

“하하, 생신 축하드립니다.”

정열과 얘기를 나누던 태준이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문규와 서 회장 옆에 희라가 서 있었다.

단아하면서도 멋스럽게 꾸민 모습이 홀 안에 있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걸 증명하듯 찬영을 비롯한 남자 사촌들이 희라를 연신 힐끔거렸다.

누군가를 찾듯 슬며시 두리번거리던 희라가 태준을 발견하고 살짝 고개 인사를 건넸다.

“아는 사람이야?”

“전에 선본 여자예요.”

희라가 가까이 오려 하자 태준이 정열과 함께 정·재계 인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 인사를 나누었다.

얼마 뒤 문규의 성대한 생일 파티가 시작되었다.

화려한 케이크 커팅식이 끝나고 오케스트라 연주와 함께 디너가 시작되자 모두 정해진 테이블에 앉아 준비된 코스요리를 즐겼다.

큰 자리 이동 없이 둘러앉은 사람들끼리 식사만 하는 시간이었다.

태준이 문규의 옆에 앉아 수발을 들며 연신 미소 짓고 있는 미연을 돌아보았다.

정열의 여동생이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서 더 버틸 수 없었을지 몰랐다.

“후우…….”

그런 상황을 대비해 항상 같이 오던 명석이 자리에 없자 태준의 긴장감이 배로 들어 피로감이 쌓였다.

한 시간 정도 이어진 식사 시간이 끝나고 다과가 준비된 곳으로 사람들이 이동하기 시작할 때, 태준의 휴대폰 메시지가 울렸다.

디링-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태준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귀엽죠?]

가을이 보낸 건 해변을 거닐고 있는 강아지 사진이었다.

곧이어 동영상이 전송되자 잠시 주변을 확인한 태준이 영상을 재생했다.

화면에 강아지가 ‘월월’ 짖으며 꼬리를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쭈니야~’

가을의 목소리에 화면 속 강아지가 또다시 짖었다.

‘쭈니야~’

화면에 강아지를 쓰다듬는 가을의 손이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강아지만 보이던 영상이 어지럽게 돌아가더니 불쑥 가을의 얼굴이 나타났다.

얼굴이 뻘겋고 눈이 살짝 풀린 모습이 술에 취한 듯 보였다.

‘얘 이름이 쭈니라길래요. 대표님이 생각나서. 아하하하하. 대표님 이름이 태준이잖아요, 태준. 쭈니. 아하하하하하’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가을이 엉망으로 셀프 동영상을 찍으며 활짝 웃었다.

그 모습에 태준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덕분에 정말 너무 즐겁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한 듯 가을의 얼굴이 화면 아래로 사라졌다가 휙 나타났다.

어디선가 ‘정가을~~~ 한잔 더하러 가야지~’, ‘언니 얼른 오세요.’ 하는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동영상이 끝났다.

“……아.”

“…….”

“태준아.”

“예.”

태준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정열의 부름에 대답했다. 다과가 차려진 홀로 이동하려던 정열이 태준이 일어서길 기다렸다.

잠시 휴대폰을 바라보던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이 순간, 환하게 웃는 가을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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