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찬이 기억을 더듬으려는 듯 미간을 잔뜩 구겼다.
“분명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데…….”
“기억 안 납니까?”
“무슨 기억이요??”
“내가 집까지 데려다줬는데.”
“집?? 우리 집이요??”
의찬이 뭔가 생각해 보려는 듯 태준을 봤다가 눈알을 굴렸다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 모습이 가을과 닮아 있어 태준은 이래서 친구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짝-’
의찬이 그제야 생각났는지 짧게 박수를 쳤다.
“맞네! 그때 그 대리 기사네.”
대리 기사? 태준이 어이없다는 듯 낮게 실소했다.
기억을 떠올려낸 자신의 머리를 칭찬하듯 뿌듯한 표정을 짓던 의찬이 다시 가는 눈으로 태준을 훑어보았다.
“근데, 가을이 이사한 집엔 어떻게 오셨어요?”
“가을 씨가 불러서요.”
“아무리 불러도, 술 취한 여자 집에 막 가고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단막극을 폐지했다는 대표가 갑자기 가을을 좋아한다고 하자 무슨 꿍꿍이가 있나 싶어 의찬이 곱지 않은 목소리를 냈다.
“밤늦게까지 여자 집에서 술을 마시는 건 괜찮습니까?”
“저야 친구니까요.”
“친구 사이라도, 밤까진 곤란하죠.”
“아아, 그럼 앞으로 우리 가을이랑 낮부터 마실게요.”
우리라는 말에 태준의 눈썹이 거칠게 꿈틀거렸다.
“보통 친구 사이에서 ‘우리’, 라는 표현을 씁니까?”
기선을 제압하려는 날카로운 의찬의 눈빛에 태준이 특유의 위압감을 얹었다.
“질투가 심하신 분이시네요.”
“질투가 아니라, 경계죠.”
의찬은 절친의 마음으로. 태준은 남자의 마음으로.
두 남자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친구 병실까지 옮겨 주시고. 돈 자랑해서 점수 따고 싶을 정도로 가을이가 좋으세요?”
“돈 자랑으로 점수를 딸 수 있었으면 진작에 만점이었을 것 같은데.”
“하긴, 재벌이시니까. 근데 걔가 돈으로 어필이 되는 애가 아니에요.”
“아쉽게도.”
“어, 가을이 돈지랄 싫어하는 거 아시나 보네.”
“…….”
태준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의 본능으로 의찬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데 정신이 팔려 행여 가을이 싫어하는 범주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계산을 하지 못했다.
“혹시, 이런 것도 포함됩니까?”
“어떤 거요?”
“이렇게…… 병실을 옮겨 주고 하는 거.”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내던 태준이 혹시라도 가을이 싫어할까 봐 불안해하는 표정을 짓자 의찬이 경계심을 조금 풀어냈다.
도사견 같더니, 가을이 싫어할까 봐 걱정하는 모습은 꼭 시바견 같았다.
“싫었으면 당장 일반실로 돌아가자고 할 녀석인데 그건 아닌 것 같네요.”
그제야 태준이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의찬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적당한 마음으로 가을이 좋아하지 마세요.”
“…….”
“보기보다 상처가 많은 녀석이라. 마음고생 안 했으면 싶거든요.”
가을은 의찬에게 어릴 적 얘기를 꺼낸 적이 없지만 가끔씩 대수롭지 않게 하는 얘기나, 가영을 통해서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의찬이었다.
태준이 진심이 가득 담긴 의찬의 눈빛과 마주할 때 통화를 끝낸 가을이 안으로 들어왔다.
달라진 가을의 표정을 단번에 알아챈 태준이 날 선 분위기를 풀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무슨 일 있어요?”
“FD 하는 친구가 집에 일이 생겨서 포상 휴가 못 간다고요.”
일 잘하는 혁진이 휴가에 참석하지 못하면 가을이 해야 할 일이 늘어날 게 뻔한 일이었다.
“내일이죠?”
“네.”
두 사람의 대화에 의찬이 끼어들었다.
“너 내일 휴가 가?”
“어, 포상 휴가.”
“어디로 가는데?”
“제주도.”
발리로 예정되어 있던 포상 휴가는 주요 배우들의 스케줄 일정으로 제주도로 변경된 상태였다.
“그게 말이 휴가지. 가서 제대로 쉴 수나 있겠어?”
의찬의 말이 틀린 얘긴 아니었다.
휴가라고 해 봤자 2박 3일간 술 파티가 이어질 게 뻔했다.
“거기 가지 말고, 차라리 나랑 가자.”
“너랑?”
“나도 아직 휴가 못 갔잖아. 가게 문 닫고 속초에 있는 별장에…….”
어디선가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에 의찬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새 시바견에서 도사견으로 바뀐 태준이 서늘한 모습으로 의찬을 노려보고 있었다.
의찬은 가영을 포함한 직원들과 다 같이 가자는 뜻으로 꺼낸 얘기였지만 그걸 알 리 없는 태준은 가을과 단둘이 가자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왜 말을 하다가 말아? 별장에 가자고?”
“아니. 휴가 잘 다녀오라고.”
같이 가자고 했다간 이 병원에서 소리 소문도 없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 태준의 분위기에 의찬이 말을 바꿨다.
Rrrr-
휴대폰이 요란스럽게 울리자 의찬이 침대 위에 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어, 아니 병실 옮겼어. ……잠깐, 내가 금방 다시 전화할게.”
“왜? 누구 온대?”
“친구들 온다고.”
친화력이 좋은 의찬은 동창을 비롯해 갖은 동호회에서 만난 동성 친구들이 넘쳐났다.
“그래 그럼, 난 갈게.”
“어. 이따 연락할게.”
의찬이 슬쩍 태준을 돌아보았다.
“덕분에 편히 쉬겠습니다. 가을이 잘~ 바래다주세요.”
태준이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낮게 고개를 까닥였다.
‘탁.’
지하철을 타고 간다는 가을을 뒷좌석에 태우고 태준이 그 옆에 앉자 운전사가 빠르게 차 문을 닫고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가을이 ‘희망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태준은 예능국 본부장과의 점심 약속을 취소하고 온 상태라 가을을 집까지 바래다주고 다시 회사로 들어가야 했다.
“같이 여행도 다녀요?”
“네?”
“아까 그 친구랑.”
“아아, 그 별장이요?”
입술이 마른 듯 혀로 슬며시 입술을 훑은 태준이 가을의 말을 기다렸다.
“의찬이한테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가 본 적은 없어요.”
“……다른 데는요?”
“다른데요?”
“그러니까 둘이서 다른…… 그 어떤 곳이라도 갔다거나.”
“아뇨.”
가을의 말에 그제야 태준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끓어오르는 마음이 진짜 질투라는 사실을 모르는 태준과, 태준이 질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태솔로 두 바보가, 서로를 보며 연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데 ‘세양 호텔’을 숙소로 해 주신 건 너무 과한 거 아니에요?”
발리로 잡은 일정을 제주도로 변경하면서 태준은 숙소를 ‘세양 호텔’로 잡았다. 거기다 이틀간 VIP 라운지를 대관해 둔 상태였다.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태준은 스태프들에게 온갖 물량 공세를 했다. 가을을 좋아한다는 걸 알리기 위함이었지만 혹시라도 가을을 안 좋게 보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렇게 가을 덕분에 물질적인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가을의 편이 되어 주었다.
“부담 가질 거 없어요. 성적이 좋으면 누구나 이렇게 포상 휴가를 갈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그런 거니까.”
가을을 위해 호텔로 숙소를 잡은 이유가 더 컸지만, 태준은 굳이 그 이유를 대지 않았다.
“의영이가 사고 치는 바람에 걱정 많았는데 마지막에 시청률이 잘 나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4부작도 시청률 잘 나오면, 포상 휴가 보내 줄게요.”
“와, 진짜요? 완전 열심히 해야겠다.”
가을이 배시시 웃었다.
“이번에도 발리로 보내 주시는 거예요?”
“발리에 가고 싶어요?”
“가고 싶다기보다, 그냥 여행지니까요. 사실 이번이 처음 가는 여행이거든요.”
가을이 멋쩍어하다 말을 이었다.
“여행도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가는 건데 제가 그런 여유가 별로 없었어요.”
늘 시간에 쫓겨 피곤한 모습을 하고 있던 가을을 알고 있는 태준이 이해한다는 듯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여행 가 본 적 없어요.”
“정말요?”
가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미국에서 긴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 태준은 단 한 번도 여행을 가지 않았다.
여행의 필요성도, 여행을 갈 마음의 여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내 여유는, 등산 정도가 고작이라.”
지난번 대표실에서 바쁘게 일하던 태준의 모습을 떠올린 가을이 안쓰러운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냉큼 표정을 돌렸다.
“전 산에 가서 먹는 김밥이 그렇게 맛있더라고요.”
습하고 더운 여름날, 김밥을 입안에 가득 넣고 다람쥐처럼 양 볼을 늘이고 먹던 가을의 모습이 떠오른 태준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그때 제 행운의 나무젓가락이요.”
“……예.”
“그 후로 좋은 일 안 생겼어요?”
“글쎄. 아무 일도 없었던 거 같은데.”
“나무젓가락은, 어떻게 했어요?”
“……글쎄요. 어떻게 했더라.”
“기억이 안 나세요?”
“안 나네요.”
나무젓가락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알고 있는 가을이 웃음을 참기 위해 냉큼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장식함에 잘 간직해 놓고 거짓말을 하는 태준의 모습이 귀여워 자꾸만 마음 어딘가가 간질거렸다.
* * *
2박 3일간 제주도에서 가을은 스태프들과 함께 황금 같은 휴가를 즐겼다.
태준의 지시로 세 명의 직원이 스태프들이 해야 할 일을 전담으로 도맡아 가을이 해야 할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거기다 오지 못한다던 혁진이 합류해 한층 더 편해진 가을은 좀 더 느긋하게 휴가를 즐길 수 있었다.
낮에는 물놀이를 즐기다가 밤에는 VIP 라운지에서 음주와 가무가 이어졌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가을은 챙겨 온 반바지를 입고 바닷물에 발만 담갔다.
수영복을 살까 하다가 어차피 물에 들어갈 일이 없는데 돈만 낭비하는 것 같아 짧은 반바지만 챙겨 온 가을이었다.
“조감독! 어디 가?”
“잠깐~ 숙소 좀 다녀오겠습니다아!”
이틀 내내 술에 취해 있고 싶지 않아 도식에게 핑계를 댄 가을이 술자리에서 일어났다.
첫날은 짧은 물놀이 후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기절한 듯 잠이 들어 둘째 날인 오늘은 여유롭게 바다를 구경하고 근처 기념품 가게에서 선물을 살 생각이었다.
“조감독님.”
가을이 VIP 라운지에서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휴양지 느낌을 물씬 낸 고은이 곁으로 다가왔다.
“어디 가요?”
“숙소에요. ……근데 혹시 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
공항에서부터 고은이 계속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아 은근히 신경이 쓰였던 가을이었다.
뭔가 망설이던 고은이 슬쩍 목소리를 냈다.
“혹시 강태준 대표랑 같이 다니는 안경 낀 비서분 말이에요.”
“임 비서님이요?”
“어머, 잘 알아요?”
“잘 아는 건 아니고, 그냥 알죠.”
“그럼…….”
고은이 평소 여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은근한 미소를 띤 표정으로 가을을 올려다보았다.
“연락처 알아요?”
고은이 태준에게 무시를 당한 날.
쫓아 나온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에게 온갖 짜증을 내던 고은은 고급 세단 앞에 서 있는 명석을 발견했다.
날카로운 인상이 정확히 고은의 취향이었다.
길에서 번호를 묻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망설이는 사이, 차에 오른 명석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가 태준의 비서인 줄 몰랐던 고은은 취향의 남자를 놓친 걸 못내 아쉬워했다.
그러다 다음 날 고은은 소속사에서 명석을 다시 만났다.
태준의 지시로 고은의 소속사 대표를 만나 브랜드 평판을 위해 행동을 조심해 달라는, 가을을 괴롭히면 잘라버리겠다는 협박이 깔린 얘기를 전하러 온 것이었다.
좋은 얘기도 아니고 협박성 얘기를 전하러 온 명석이었는데. 그런 용건과는 상관없이 고은은 다시 만난 명석이 그저 반가웠다.
그가 할 말만 전하고는 말 붙일 틈도 없이 가버리자 매니저를 통해 비서실에 연락을 했지만 그때마다 명석이 자리에 없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그래서 참다못한 고은이 결국 가을에게 명석의 연락처를 물어본 참이었다.
“임 비서님 연락처는 왜요?”
“뭐, 뭐 좀 물어보려구요.”
“비서실에 전화해 봐요.”
“자리에 없으니까 그렇죠!”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 고은이 다시 소리를 줄였다.
“전화할 때마다 매번 자리에 없더라구요.”
“나도 개인 연락처는 몰라요. 뭐 물어보려고요? 급한 거면 메모 남겨 봐요, 거기 박 비서분이 메모를 잘,”
“됐어요!”
고은이 쌩하니 돌아서 가 버렸다.
“뭐야. 지금까지 이거 물어보려고 그렇게 날 힐끔거린 거야??”
기가 찬 표정을 짓던 가을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괜히 도식이나 스태프들 눈에 띄었다간 다시 술자리로 끌려갈 게 뻔했다.
쏴아아~~. 쏴아아아~.
로비를 나와 바로 앞 바닷가로 향한 가을이 파도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해변을 거닐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에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곳곳에 연인들과 가족들의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보던 가을이 끝없이 펼쳐진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찰칵.’
노을이 진 하늘 위를 날고 있는 갈매기의 모습이 너무 멋있어 가을이 재빨리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태준에게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보냈다.
[대표님 덕분에 호캉스 중입니다.]
좋은 곳에 오면 선호부터 떠올리던 가을은 태준부터 생각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태준의 답변을 기다리던 가을이 숫자 1이 사라지지 않자 다시 해변을 거닐었다.
마음 같아선 같이 오고 싶지만 중요한 일정이 있어 오지 못한다고 했던 태준이었다.
디링-
메시지 알림이 울리자 가을이 냉큼 휴대폰을 확인했다.
[멋지네요.]
태준의 답변에 노을이 멋스럽게 드리운 하늘을 둘러보던 가을이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하늘 한 번 보세요. 장소만 다르지 하늘은 다 같은 하늘입니다!]
[여긴 가을 씨가 없으니까.]
잠시 뒤, 태준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보고 싶어요.]
“…….”
태준이 하는 말은 모두가 거짓말임을 아는데도.
심장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소금기가 가득한 바닷바람이 마음에 닿아 통증을 일으켰다.
잠시 메시지를 바라보기만 하던 가을이 한결같은 답변을 보냈다.
[저는 아닙니다.]
바로 숫자 1이 사라졌지만 태준에게선 답변이 오지 않았다.
왜 답변을 하지 않는지 떨리는 마음으로 휴대폰만 보던 가을이 막 걸음을 옮길 때였다.
“정가을?”
누군가 반가운 목소리를 내며 가을을 향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