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90)

‘세양 그룹’ 사장실 안.

큰 키에 다부진 체격, 중후한 멋과 기품이 흐르는 정열이 소파에 앉자 태준이 손목시계를 보며 맞은편 소파에 다가와 앉았다.

어제저녁. 평소 특별한 일이 없으면 연락을 하지 않던 정열이 회사로 나오라는 얘기를 하자,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하고 있던 태준이었다.

“하실 말씀이 뭡니까.”

“얼굴이 핼쑥해졌네. 바빠도 식사는 제때 해라.”

“예.”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10살이 되던 해,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의 존재.

부자든 아니든 태준에게 그런 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왜 자신을 보며 우는지도 관심 없었다.

정열을 따라가야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애란의 말을 듣고 ‘세양 가’에 들어갔을 뿐이었다.

돈이 많은 아버지라고 하니 애란의 병을 고쳐 줄 수 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학교가 끝나면 정열의 운전기사가 태준을 애란의 병원까지 데려다주고 늦은 시간 병실에 찾아오는 정열과 함께 다시 성북동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런 시간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1인 병실로 옮긴 후 애란의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고 산소마스크를 쓴 채 하루하루 고비를 넘기던 애란은 태준의 존재를 알리고 불과 며칠 만에 사망했다.

그 후 태준은 말이 없는 아이가 되었고, 정열은 그저 묵묵히 태준을 지켜보는 아버지가 되었다.

“태준이 네가 좋아하는 아가씨가 있다던데.”

그 얘기를 할 줄 알았다는 듯 태준이 짧게 대답했다.

“예.”

정열이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결혼할 생각이냐.”

“저야 그러고 싶은데, 제 마음대로 할 순 없는 일이라서요.”

“그 아가씨 옆집으로 이사까지 갔다던데.”

태준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찻잔을 들었다.

“예.”

잠시 망설이던 정열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좋다면, 놓치지 마라.”

“…….”

“나처럼 후회하고 살지 말란 소리다.”

태준이 빤히 정열을 응시했다.

“후회하셨어요?”

정열이 대답 대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만으로 정열이 얼마나 회한의 삶을 살았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태준이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여자라면 난 좋은 여자라고 믿는다.”

“…….”

“놓치지 말고 꽉 붙잡아.”

“……제가 잡아서 불행해지면.”

태준이 처음으로 제 속내를 정열에게 내비쳤다.

“저 때문에 힘들어지면 놓아주는 게 맞는 거 아닐까요.”

자신에게 처음으로 이런 얘기를 하는 태준의 모습에 정열이 더욱더 진심이 묻어난 표정을 지었다.

“서로 마음이 같다면 말이다. 상대가 힘들까 봐 손을 놓는 게 아니라,”

“…….”

“더 꽉 잡아 주는 거다.”

진심이 담긴 정열의 말에 태준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띵- 5층입니다.]

드라마 포상 휴가로 가게 된 여행을 위해 캐리어에 짐을 꾸리던 가을이 ‘희망 병원’ 내과 병동에 도착했다.

어젯밤 태준과 영화를 보고 난 후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저녁을 먹었다. 분명 연출에 관한 얘기를 했고, 태준은 조언을 해 주었는데 제대로 기억이 나지도 않았다.

촉촉한 태준의 입술 감촉이, 손에, 볼에, 입술에. 자꾸만 생생히 느껴져 가만히 있다가도 얼굴이 홧홧해졌다.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재생되는 태준과의 사건을 잊기 위해 가을은 집으로 오자마자 가영과 한 시간이 넘게 전화 통화를 했다.

가영이 첫눈에 반했다는 남자 얘기를 한 시간가량 듣는 동안 가을은 엄마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한바탕 운 것으로 영숙을 만난 시간을 기억에서 도려냈다.

태준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아침 일찍 약수터에 가서 물을 받아 온 가을은 오전에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내일 떠날 여행 짐을 준비했다.

여행이라기보다 일의 연장처럼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넘쳐나겠지만 처음 가는 여행에 가을은 잔뜩 설레었다.

그러다 영화가 끝나면 연락을 하라던 의찬을 까맣게 잊어버려 뒤늦게 전화를 했는데.

어젯밤에 기절할 만큼 배가 아파 응급실에 실려 왔다가 맹장 수술을 했다는 의찬의 말에 가을이 병원에 찾아온 참이었다.

가을이 4인실 병실 문을 열고 의찬이 누운 병상으로 향했다.

“김의찬!”

휴대폰으로 야구를 보고 있던 의찬이 고개를 들었다.

“정가을이~.”

환자 같지 않은 밝은 표정으로 의찬이 가을을 반겼다.

“괜찮아? 수술 잘 됐대?”

“잘됐지 그럼. 내가 누구냐.”

“누구긴, 미련한 놈이지. 너 얼마 전부터 계속 배 아프다고 했잖아. 그걸 참다가 응급실까지 와?”

“너 한가하니까 좋네. 이렇게 바로바로 와서 잔소리도 해 주고.”

가을이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펼치면 간이침대가 되는 의자였다.

“좋기도 하겠다. 근데, 아직 아무도 안 오셨어?”

“알잖아. 우리 집은 어디 하나 부러져도 얼굴 보기 힘든 거.”

4남 중 막내아들인 의찬은 형들과 워낙 험하게 놀고 자라 병원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그 탓에 부모님들은 웬만한 일엔 놀라지도, 동요하지도 않았다.

의찬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배고프지? 여기 1층에 돈가스 맛있다더라. 가자.”

가을이 링거대에 있는 ‘금식’ 표시를 올려다보았다.

“너 금식인데?”

“어, 난 6시 이후에 가능. 너 먹는 거 구경할 거야.”

“배고프잖아.”

“네 입에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불러.”

“웃기고 있네.”

가을의 말에 의찬이 맑게 웃으며 링거대를 잡고 일어났다.

Rrrr-

태준의 전화에 가을이 의찬을 돌아보았다.

“전화 좀 받고 올게.”

가을이 의찬을 두고 복도로 나와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통화 돼요?

“네.”

-점심 먹었어요?

“지금 먹으려고요.”

-어디예요? 목소리가 울리는데.

“그게 친구가 병원에 입원해서요. 지금 병원이에요.”

-……이사 갔을 때 왔던 친구?

“네.”

-어디가 아파서요?

“맹장 수술했대요.”

-아, 맹장. 그럼 혼자 밥 먹으러 가는 건가?

“아뇨, 저 먹는 거 구경한다고 같이 간대요.”

-…….

“여보세요?”

-친해요?

……친하니까 친구인 거죠.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가을이 상냥하게 대답했다.

“친하죠.”

-뭐 먹을 예정이에요?

“1층에 돈가스 맛있다고 해서 거기 가려고요.”

-어느 병원이에요?

“희망 병원이요.”

-희망 병원. 알았어요, 맛있게 먹어요.

뭐지 싶어 고개를 갸웃한 가을이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가 의찬과 함께 돈가스 가게가 있는 1층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왜요?”

의문으로 가득 찬 의찬의 눈동자가 간호사에게 향했다.

돈가스를 먹고 돌아오자 병실이 바뀌었다는 간호사의 말에 영문도 모르고 짐을 챙겨 따라온 가을과 의찬이었다.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VIP 병동 1인실이었다.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지시가 내려온 거라서요.”

간호사의 말에 의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집이 아무리 잘 산다고 해도 이런 호화스러운 병실로 바꿨을 리가 없었다.

사내아이 네 명을 키운 부모님들은 정글만 아니었지 야생과도 같은 삶을 살아와 자신이 14인실에 있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을 분들이었다.

“김의찬 맞아요? 정의찬이나, 박의찬, 이런 이름 아니고?”

간호사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가을 역시 어떻게 된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릴 때 병실 안으로 의료진이 우르르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직급이 높아 보이는 의사가 따스한 눈빛으로 의찬을 바라보았다.

“김의찬 환자분.”

“예?”

“수술은 아주 잘됐습니다.”

“예…… 근데 그건 아까 아침에도 들었는데요.”

의사가 일반실에서는 보기 힘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식사는 오후 6시부터 가능하시고 지금부터는 조금씩 움직이시는 게 좋습니다. 퇴원은 상태 봐서 다시 말씀드리죠.”

수술 후 회진도 아니고. 그것도 6명이나 되는 의사가 따스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게 영 이상해 의찬이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저 선생님.”

“예.”

“제가 4인실에 있다가 왜 여기로 온 거죠?”

“대표님께서 특별히 지시하셨습니다.”

“대표요????”

의문이 섞인 의찬의 말과 동시에 뭔가를 짐작한 가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가을이 빠르게 문규의 자서전 내용을 머리에 떠올렸다.

“아.”

‘희망 병원’은 고인이 된 문규의 아내, 문여옥 여사의 집안에서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한마디로 태준의 친할머니 병원이란 뜻이었다.

“불편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호출해 주십시오.”

6명의 의사가 의찬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한 후 병실을 빠져나갔다.

“뭐야? 나한테 출생의 비밀이 있는 거야? 알고 보니까 내가 막 재벌 아들인가?”

“…….”

“어쩐지 우리 엄마가 형들보다 날 더 때린다 했어.”

“그게 의찬아…….”

가을이 계약이라는 얘기와 옆집으로 이사를 왔다는 얘기를 뺀 후 ‘STN’ 대표인 태준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꺼냈다.

“그러니까 방송국 대표가 널 쫓아다닌다고. 그것도 단막극 폐지한 그 ‘STN’ 대표가?”

“응…….”

가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의찬이 얼마 전 거금을 들여 염색했다고 자랑하던 애쉬그레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정가을 인기 여전하네.”

장난스럽게 고개를 바짝 든 가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한 인기 했지?”

“그러니까. 그 왜 너 좋다고 1년이나 쫓아다닌 은서준인가, 은서진인가, 하던 놈 생각나네.”

“아…….”

“틈이라곤 요만~ 큼도 안 주는데 대체 왜들 그렇게 좋다고 들이대는지 몰라.”

“예쁘니까.”

의찬이 링거대를 끌고 4인실 침대와 확연히 달라 보이는 푹신한 침대로 다가갔다.

“하긴, 우리 학교에서 네가 제일 예뻤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비웃을 거라 예상한 의찬이 동의하자 가을의 눈이 커다래졌다.

“미친 거야? 아님, 맹장이 아니라 머리를 수술했나?”

의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근데. 너도 아니고, 왜 내 병실을 바꿔?”

그때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뚜벅, 뚜벅’ 바닥을 찍는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병상이 있는 쪽으로 모습을 보인 건 유독 멋있는 차림으로 과일바구니를 들고 걸어오는 태준이었다.

“어?? 대표님.”

가을의 말에 의찬이 빠르게 태준의 모습을 훑으며 작은 목소리를 냈다.

“저 사람이 대표야?”

가을이 고개를 끄덕인 사이 태준이 소파가 있는 테이블에 과일바구니를 내려놓고 두 사람 앞으로 다가섰다.

“안녕하세요.”

태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의찬 역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수술하셨다는 얘길 들어서 들렀습니다.”

“예. 근데, 병실은 왜 바꿔 주셨어요? 저랑 안면도 없는데.”

“가을 씨 친구분이니까. 편히 계셨으면 해서요.”

“뭐 1인실이니까 편할 것 같긴 한데, 당황스럽네요.”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맹렬한 빛을 띤 의찬이 말을 이었다.

“아무리 원룸에 살고 있었던 사람이라도 집주인이 말도 없이 큰집으로 옮겨 버리면, 당황스럽지 않겠어요?”

가을이 하지 말라는 듯 의찬에게 눈으로 눈치를 주었다.

“미안합니다. 직접 와서 바꿔 드리려고 했는데, VIP 병실을 확인해 두라는 지시에 병원 측에서 미리 움직인 모양입니다.”

태준의 말에 가을이 두 사람 대화에 슬쩍 끼어들었다.

“저한테 먼저 전화라도 주시지.”

“가을 씨한테 몇 번 전화했는데, 연결이 안 돼서요.”

“어? 전화 안 왔는데요?”

가을이 휴대폰을 확인하자 뭔가 잘못 눌렀는지 벨소리가 무음으로 되어 있었다.

“어라??? 이게 왜…….”

화면에 태준에게 온 두 통의 전화와, 혁진의 전화 세 통이 와 있었다.

그때 혁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저,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중요한 전화인가 싶어 가을이 휴대폰을 들고 빠르게 병실을 나갔다.

두 사람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병실에 서로를 탐색하는 눈빛이 이어졌다.

의찬이 입원했다는 사실을 안 순간, 태준은 자신의 존재를 의찬에게 강하게 심어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녀 사이에 친구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태준이 남자로서의 본능을 발휘한 것이었다.

태준이 의찬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예전에는 의찬이 술에 취해 있어 몰랐지만 이렇게 보니 꽤 잘생긴 얼굴이라 태준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태준이 몸 좋은 모델 과라면, 의찬은 건강함이 물씬 묻어나는 운동 과였다.

“혹시…….”

어색한 분위기에 입을 먼저 연 건 의찬이었다.

“저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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