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90)

입술을 깨문 채 참았던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마음이 아려 가을의 뺨에 입을 맞췄던 태준이 위로 같은 말을 전했다.

“내 앞에선, 참지 말아요.”

태준이 마음껏 울어도 괜찮다는 듯 미소 짓자 마음이 터져 버린 듯 가을의 들썩임이 커졌다.

그 모습에 태준이 숙였던 상체를 일으켜 살며시 가을을 당겨 안았다.

아무런 말 없이 그저 천천히. 태준은 가을의 등을 쓰다듬었다.

맞닿아 있는 태준의 심장 고동이, 일정하게 쓸어내리는 손길이. 포근하고 안심이 돼 가을이 오랜 시간 눌러 놓은 울음을 터트렸다.

누군가에게 안겨 울 수 있다는 게, 지금 이 순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겹겹이 쌓아 왔던 가을의 마음속 벽이 허물어졌다.

서럽게 우는 가을의 들썩임이 잦아들 때까지 태준은 말없이 등을 쓰다듬었다.

한참이 지나 가을이 들썩임을 멈추자 태준이 살며시 가을을 품에서 놓아주었다.

“좀 괜찮아졌어요?”

태준의 말에 가을이 고개를 낮게 끄덕였다.

“다행이네.”

“…….”

“혼자 있을 땐 울지 말아요.”

“…….”

“대답해 줘요.”

“……네.”

“착하다.”

태준이 마치 다정한 오빠처럼 가을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

정신이 돌아오자 그제야 태준의 입술이 닿았던 뺨이 의식돼 가을이 젖은 뺨을 가볍게 문지르며 얕게 훌쩍였다.

그 모습에 태준이 슈트 안쪽에서 각이 접힌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써요.”

지난번 손수건과 마찬가지로 ‘THE MJ’ 로고가 새겨진 손수건을 받아 든 가을이 눈물에 젖어 있는 뺨을 닦아 냈다.

태준에게 안겨 펑펑 운 게 부끄러워진 가을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냈다.

“이것도 비싼 거죠?”

“음, 아마도?”

“귀하게 쓸게요.”

“막 써요.”

“그럼 코도 풀어야지.”

“마음대로.”

빨개진 코를 훌쩍이는 가을이 귀여워 태준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가을은 태준에게 조금씩 의지하고 있었다.

“손수건 갖고 다니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처음이라니 좋네.”

태준이 지그시 가을을 내려다보았다.

“나도 손수건 빌려준 건 가을 씨가 처음이었어요.”

“…….”

태준의 체취가 가득 묻어 있는 손수건으로 제 뺨을 연신 눌러 내던 가을이 슬쩍 목소리를 냈다.

“……언제부터 계셨어요?”

“처음부터.”

가을이 자신의 얘기를 해야 하나 싶어 입술을 달싹였다.

“묻지 않을 테니까, 언제든 얘기하고 싶을 때 해요.”

태준의 말에 가을이 고개를 끄덕이며 연하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듯 태준이 고개를 모로 돌려 양쪽 볼을 포함해 코까지 빨개진 가을을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되게 귀여운 거 알아요?”

“…….”

“얼굴도 빨갛고, 코도 빨갛고.”

“그건 흉하다는 뜻인데요.”

“그런가?”

태준이 장난 섞인 웃음소리를 내자 가을이 살짝 흘겨보다 손수건을 가방에 넣었다.

“이건 나중에 돌려드릴게요.”

“편할 대로 해요.”

가을의 모습을 빤히 보던 태준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랑 좀 달라 보이네.”

태준을 의식한 게 들킨 것 같아 제 색을 되찾아 가던 가을의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그, 그냥 오랜만에 보는 영화라서요.”

태준이 빤히 바라보자 가을이 다급하게 말을 첨가했다.

“영화 볼 땐 또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춰야 하는 거니까요. 안, 안 어울리나? 이상한가……?”

갈 곳 읽은 가을의 눈동자가 부산스러워졌다.

“잘 어울려요.”

인사치레라고 생각하는데도. 태준의 눈빛이 꼭 진짜인 것만 같아 가을이 시선 둘 곳을 잃었다.

어쩐지 집요하게 바라보는 태준의 눈빛에 가을이 입술만 달싹일 때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깔끔한 유니폼을 갖춰 입은 직원이 시간을 체크한 후 커다란 문을 열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가을이 멈춰 선 곳은 상영관 뒷문이었다.

“그래서 저거 내용이 뭐야??”

“봤는데 본 게 없어. 대체 뭔 내용이야?”

“야! 이거 보자고 한 새X 나와.”

재미없는 영화였는지 표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저마다 욕을 하며 지나갔다.

가을이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우리 영화도 곧 하겠네요.”

“볼 수 있겠어요?”

20년 만에 만난 엄마의 존재에 참을 수 없이 터져 오르던 분노는, 태준과 함께하며 어느새 줄어들어 있었다.

“봐야죠.”

디링-

가을이 휴대폰으로 가영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언니~ 영화 끝나면 가게 온다며? 나 알바 끝나면 술 한잔?]

가겠다고 한 적이 없는데. 의찬이 마음대로 정해 가영에게 얘기한 모양이었다.

[미안. 다음에 하자.]

가영에게 바로 메시지를 보낸 가을이 가영의 프로필 사진을 클릭했다.

얼마 전 이사했을 때 술을 마시던 가을과 가영의 모습을 의찬이 찍어 준 사진이었다.

꽤 웃기게 나온 사진이었는데 가영이 마음에 든다며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했다.

가을과 가영은 평소 부모님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언젠가 술에 취한 가영이 자신의 얘기를 처음 꺼낸 적이 있었다.

그 얘기로 가을은 가영 역시 자신만큼이나 외롭게 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외할머니에게 맡겨진 가영은 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컸다는 사실이었다.

가영을 맡기고 회사에 다니던 영숙은 몇 번이나 남자가 바뀌었고 그때마다 가영을 방치했다고 했다.

부모님에겐 부모님의 인생이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서로 죽일 듯이 싸워 놓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또다시 싸우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는 게 사랑인지.

유효기간이 짧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버려진 게 싫을 뿐이었다.

가을이 태준과 함께 상영관 안으로 들어섰다.

VIP 관을 예약하려던 태준은 상영관이 일반관 하나뿐이라 어쩔 수 없이 일반관을 예약할 수밖에 없었다.

유명한 고전 영화라 그런지 재개봉임에도 불구하고 상영관 안은 꽤 많은 사람으로 차 있었다.

혹시 영숙이 같은 영화를 보러 온 건 아닌가 싶어 가을이 저도 모르게 상영관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빠르게 훑었다.

다행히 영숙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캐러멜 팝콘이 든 작은 상자와 콜라를 손에 든 가을이 맨 뒷좌석 오른쪽 끝에 있는 의자에 앉자 그 옆으로 태준이 앉았다.

170센티인 가을과 187센티인 태준이 의자에 앉자, 긴 다리 탓에 앞 좌석까지의 거리에 여유가 없었다.

그 탓에 가운데 좌석으로 가려는 커플들 때문에 두어 차례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시 앉아야 했다.

평소 영화를 볼 일이 있으면 VIP 상영관에서 보던 태준에게 이런 불편함은 처음이었다.

아직 시작 전이라 커다란 화면에 광고가 한참 나오자 가을이 먹으라는 듯 태준에게 팝콘을 내밀었다.

“단 거 안 좋아해요.”

“어? 그럼 일반 팝콘 살걸.”

“일반 팝콘도 안 좋아하니까 신경 쓰지 말고 먹어요.”

정말 좋아하는 게 없구나.

가을이 의자 컵 홀더에 끼워 둔 콜라를 쭉 마시자 태준은 작은 보리 음료 뚜껑을 따 반쯤 마시고 컵 홀더에 끼워두었다.

“그런데요.”

태준이 고개를 돌리자 가을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보통 재벌들은 이런 데 통으로 빌려서 보고 그러지 않아요?”

“실망했어요?”

“아뇨. 그랬으면 실망했겠죠. 수많은 지랄 중에, 돈지랄이 제일 나쁘다고 생각하거든요.”

“하하하. 명심할게요.”

태준의 웃음소리에 가을의 마음에 심장을 간질거리는 봄이 날아들었다.

사방이 막힌 답답한 극장 안인데 스치듯 태준의 어깨와 닿을 때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부는 것처럼 마음이 자꾸만 일렁거렸다.

몇 개의 광고가 지나가고 대화가 사라지자 옆에 앉은 태준이 더 의식돼 가을의 몸에 뻣뻣한 긴장감이 몰려들었다.

의식하지 말자. 옆에 앉은 사람은 의찬이다. 도식 감독님이다. 혁진이다.

한참 광고가 나오던 화면에 ‘시간을 지나서’ 남자 주인공의 새로운 광고가 보였다. ‘세양 식품’에서 만든 새우 과자였다.

“어, 이혁 배우 언제 저거 맡았어요?”

그때 상영관 안이 어두워지자 태준이 가을의 귀에 대고 얘기해 주려는 듯 고개를 숙이고 다가왔다.

그 순간, 태준이 다가온 줄 모르고 가을이 고개를 돌렸다.

“저 과자 내가 좋아…….”

다가온 태준과, 고개를 돌린 가을.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그 상태로 두 사람이 얼어붙은 듯 눈만 깜빡거렸다.

정신을 차린 가을이 놀라서 몸을 뒤로 젖히자 태준이 그대로 팔을 뻗어 가을의 뒷머리를 잡았다.

갑작스러운 태준의 행동에 움직임이 제한된 가을이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커다래진 눈만 깜빡였다.

목덜미에 닿은 태준의 손이 뜨거웠다.

“대, 대표님·····?”

당장이라도 가까이 다가올 듯 태준의 눈동자가 위태로운 빛을 띠었다.

“영화…… 시작하는데…….”

“…….”

가을의 말에 입술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올린 태준이 주먹을 그러쥔 채 가을에게 속삭였다.

“드라마 끝나고 계약했습니다.”

귓속말로 전하려던 얘기를 끝낸 태준이 몸을 일으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태준이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려고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가을이 홧홧해진 뺨을 만지며 화면을 응시했다.

곧 화면에 ‘선 리버’가 깔리며 우아한 여배우의 모습이 등장했다.

숱한 장면으로 화면이 바뀌며 영화는 클라이막스를 향해 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머리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느슨히 의자에 기대 영화를 보던 태준이 얼마 남지 않은 팝콘을 먹으며 화면을 보고 있는 가을을 슬며시 쳐다보았다.

화면에 고정하고 있는 눈을 지나 팝콘 소리가 나지 않게 하려는 듯 작게 우물거리는 가을의 입술로 태준의 시선이 천천히 옮겨 갔다.

달콤한 향과 함께 말랑거리는 입술이 떠오르자 태준이 제 입술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가을의 입술에 닿은 순간부터 달콤한 향이 제 입술에 묻어나 끊임없이 후각을 자극했다.

단 음식은 끔찍이도 싫은데. 이 향기는 먹고 싶을 정도로 탐이 났다.

조금만 이성을 잃었다면 가을과 한 계약은 끝이 났을 게 분명했다.

언제나 이성적인 삶을 살아왔는데. 가을을 만나고부터 스스로 놀라울 만큼 한 번씩 끓어오르는 욕망과 싸워야 했다.

하지만 이 감정이 어떤 종류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어쩌면 유일하게 만질 수 있는 상대라는 이유로 그저 단순히 본능적으로 생기는 감정일지 몰랐다.

여자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가져 본 적이 없는 태준은 지금 자신의 마음이 어떤 건지 정의 내릴 수 없었다.

팔짱을 낀 태준이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는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영화가 끝을 향해 달려가자 가을이 뻐근해진 목을 주물렀다. 태준을 의식하지 않으려 화면만 봤더니 몸이 여기저기 쑤셔 댔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한 행동인데, 오히려 과한 의식을 한 상태였다.

다시 보고 싶었던 영화였는데 내용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목을 주무르는 척 슬며시 태준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태준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자고 있었나?

계속 긴장 모드였던 자신과 달리 아무렇지 않은 태준의 모습에 괜스레 기분이 가라앉았다.

하긴, 접촉사고에 불과한 일이었다.

……목덜미는 왜 잡았지? 뒤로 넘어갈까 봐? 아니면…….

가을이 고개를 털어 냈다.

뭐가 되었든 대수롭지 않은 사고에 불과했다.

연출가가 되는 것과, 선호. 두 가지만 생각하면 되던 일상에 태준이 나타나고부터 모든 게 복잡해졌다.

영숙을 만나 울었다는 사실도 잊을 정도로 가을의 머리는 태준의 생각으로 뒤덮였다.

가을이 잠든 태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화면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얼굴의 음영이 영화보다 재밌었다.

잘생긴 사람은 TV에 나와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어도 꿀잼이라던 지영의 말이 공감되는 순간이었다.

가을이 태준의 이마를 따라 감겨 있는 눈, 그 아래로 길게 뻗은 속눈썹. 높은 콧대를 따라 입술까지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자신의 입술에 닿았던 태준의 입술 감촉이 떠오르자 가을이 냉큼 고개를 돌려 화면을 응시했다.

자꾸만 느껴지는 감촉을 없애려는 듯 가을이 제 입술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손과 뺨에 닿았던 태준의 입술은 위로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방금은 사고에 불과했는데. 손과 뺨에 닿았던 느낌과 입술에 닿은 느낌은 무척 달랐다.

가을이 마음을 진정시키는 사이 영화가 끝나고 OST와 함께 엔딩 자막이 올라가자 여기저기에서 의자에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태준을 깨우려고 가을이 고개를 돌리자 태준은 이미 눈을 뜬 상태였다.

“잘 주무셨어요?”

가을이 일부러 놀리는 목소리를 내자 태준이 고개를 돌려 가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 보고 있었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가슴을 일렁일 만큼 근사했다.

“그, 그게 아니라 영화가 다 끝나가서 깨워 드리려고 보니까…… 주무시는 것 같아서…….”

마치 죄를 지은 양, 가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눈만 감고 있었어요.”

어쩐지 자신이 태준을 본 게 들킨 것 같아 가을이 냉큼 화제를 돌렸다.

“여배우 진짜 예쁘죠?”

“그러게요…… 예쁘네요.”

태준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 알 수 없는 대답을 했다.

얼마 뒤.

가볍게 저녁을 먹고 함께 집으로 향한 두 사람이 각자의 집 앞에 섰다.

“오늘 영화랑 저녁까지 사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엔 제가 대접할게요.”

한사코 자신이 낸다는 가을을 말리고 태준이 저녁 식사까지 계산을 했다.

저녁을 먹는 내내 어색함을 이기지 못한 가을은 자신이 본 4부작 드라마를 얘기하며 앞으로 촬영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논의했고, 태준은 묵묵히 들어주며 의견을 내어 놓았다.

“그럼, 들어가세요.”

가을이 꾸벅 인사하고 몸을 돌릴 때였다.

“아까 일은…….”

결국 태준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알아요. 접촉사고인 거. 신경 안 씁니다!”

가을이 밝은 표정으로 다시 꾸벅 인사하고 ‘쾅’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신경을 안 쓴다고.”

당연한 말이었는데, 태준의 손에 힘이 실렸다.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인데. 계약에 불과한 사이일 뿐인데.

정가을이라는 여자가, 진심으로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그대로 서 있던 태준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떨쳐 내려는 듯 가볍게 머리를 털어 냈다.

Rrrr-

502호로 몸을 돌렸던 태준이 발신자를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예,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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