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90)

아껴 뒀던 블라우스에 작은 클로스백을 두르고 복합 쇼핑몰을 향해 걸어가던 가을이 상가 건물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걸음을 멈추었다.

얼마 만에 보는 영화인지 자꾸만 마음이 설레었다.

집에 있는 거울도 제대로 보지 않던 가을이 상가 건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한번 단장한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지 않아도 재개봉 사실을 알고 커다란 화면으로 다시 보고 싶었는데. 태준이 함께 보자는 얘길 해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수락한 가을이었다.

시간에 맞춰 차를 보낸다는 태준의 말에 오랜만에 쇼핑도 할 겸 먼저 가 있겠다고 거절했다.

천천히 복합 쇼핑몰 안을 구경하며 태준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며칠 쉬는 사이 연해진 다크서클에 나름대로 신중히 구매했던 연한 베이지색 블라우스가 가을의 외모를 돋보이게 했다.

블라우스에 통이 큰 청바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치마나 다른 종류의 바지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아래는 늘 입던 바지를 입어야 했다.

Rrrr-

발신자 [의찬이]를 확인한 가을이 전화를 받았다.

“어 김의찬~.”

-뭐야? 목소리 왜 이래?

“내 목소리가 왜?”

-좋은 일 있는 목소린데? 뭐 먹으러 가?

“아니이~.”

-그럼 뭐 하는데.

“넌 왜 전화했는데?”

-드라마 끝나고 심심할 거 같아서, 가게 나오라고.

“안 심심한데?”

-그니까, 뭐 하냐고.

“영화 보러 왔다.”

-영화?

평소 화장품에 관심이 없는 가을이 세일 중이라는 표시에 화장품 코너로 들어가 이것저것 둘러보며 통화를 이어 나갔다.

“너 ‘로마에서 아침을’ 봤어?”

-당연하지. 그 영화 한 열 번은 봤을걸? 근데 그 영화가 왜?

“그거 보러 왔거든.”

-재개봉해?

“응.”

가을이 어깨를 올려 휴대폰을 댄 채 테스트용 립글로스 하나를 꺼내 입술에 바르고 거울을 확인했다.

흰 피부에 연한 핑크빛 립글로스가 더해지자 얼굴이 한층 생기 있어 보였다.

-누구랑?? 스태프?

“난 만날 사람이 스태프밖에 없다고 생각해?”

-어.

“그래, 스태프라고 치자.”

-아니야? 아니면 누군데?

“뭘 꼬치꼬치 물어. 심심해?”

-심심해. 영화 끝나고 가게 놀러 와. 스태프도 데려오고.

“봐서. 가영인 뭐 해?”

가영은 일주일에 세 번 의찬의 가게에 출근했다.

-손님한테 또 대시 받았다고 가게 매상이 자기 때문이라는 둥, 월급을 올려 달라는 둥 하더니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사러 갔다.

“이상한 사람이 꼬이지 않게 네가 신경 좀 써 줘.”

-걔가 말을 들어 쳐 먹, ……말을 들어야지.

“그러다 이상한 남자 만날까 봐 걱정이다.”

-걱정하지 마. 네 동생이 더 이상하니까.

“야! 우리 가영이가 어디가 어때서.”

-양심적으로, 몰라서 묻냐?

“……아직 어리잖아.”

-어쨌든 영화 잘 보고, 끝나면 연락해라.

“알았어.”

가을이 전화를 끊고 립 제품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립밤 아니면 색이 나는 뭔가를 입술에 발라 본 게 언젠지 기억이 나지도 않는 가을이 방금 바른 립글로스 제품명을 확인했다.

[복숭아에 빠진 딸기.]

제품명처럼 입술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는 립글로스를 들고 고민하다가 20% 세일에 큰마음을 먹고 계산대로 향했다.

7,500원을 결제하고 나와 빠르게 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두고, 에스컬레이터를 타며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극장이 있는 10층으로 향했다.

태준과의 약속 시간이 30여 분이 남아 매점 앞 의자에 앉아 있던 가을이 가방에 넣어 온 작은 손거울을 꺼내 보았다.

“너무 티나나…….”

오랜만에 바른 립글로스가 어색해 가을이 의자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할 때였다.

“가을이니……?”

누군가의 목소리에 가을이 고개를 돌렸다.

165cm 정도 되는 키에 하나로 묶은 머리. 50대라고는 믿겨 지지 않는 맑은 피부와 큰 눈망울.

가을의 모친, 영숙이었다.

누구냐고 물어보려던 가을이 그렁해진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이 가영의 얼굴과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을아……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니?”

“…….”

“……엄마야.”

아무렇지 않게 ‘엄마’라고 하는 영숙의 모습에 가을이 입술을 깨물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데.

그저 가영이와 닮아 엄마인가 보다 하는 것뿐인데.

자신 앞에서 ‘엄마’라고 표현하는 영숙이 우스웠다.

“나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말없이 영숙을 내려다보던 가을이 입술을 깨물다 말을 꺼냈다.

“무슨 얘기요.”

“그냥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어디 앉아서…… 나랑 얘기 좀 해.”

그렁한 눈으로 바라보는 영숙을 표정 없이 바라보던 가을이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가을이 영숙과 함께 극장 매점 옆에 있는 작은 카페에 앉았다.

방금만 해도 이상하리만큼 기분이 좋았던 가을이 왜 영화를 본다고 했을까 후회했다.

한참이나 말없이 커피잔만 만지던 영숙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영이랑 있는 사진 봤는데 어릴 때 그대로더라…….”

가영의 메시지 프로필은 가을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가을은 엄마인 영숙의 얼굴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아빠와 할머니는 한 번도 영숙의 사진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영숙의 연락처를 알게 된 건 우연히 본 할머니 휴대폰에서였다.

그 후 용기를 내 몇 번의 전화를 했지만 그럴 때마다 영숙은 바쁘다며 전화를 끊었다.

아빠의 재혼으로 할머니 집에 혼자 남겨진 걸 알면서도 영숙이 양육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가을은 자신의 마음에서 영숙을 지웠다.

사무치게 엄마를 그리워했던 건 열일곱 살이 마지막이었다.

성인이 된 후에도 가을은 부모님을 찾지 않았다. 그저 가끔씩 할머니에게 안부 전화를 하고 볼 일이 생겼을 때 만나러 가는 게 다였다.

거기다 가을과 가영은 꼭 해야 할 얘기가 아니면 부모님에 관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한번 연락하고 싶었어.”

가을이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왜요?”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혹시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는지…….”

“이제 와서요?”

가을이 원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영숙을 응시했다.

“……용서를 바라는 건 아니야. 그래도 날 좀 이해해 주면 안 될까?”

“20년 만에 만났는데, 제가 뭘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죠?”

“넌 모르겠지만 나도 많이 힘들었어. 가영인 고작 두 살이었는데……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서 너까지 신경 쓸 수가 없었어.”

“그래도…….”

가을이 더 힘껏 주먹을 쥐었다.

“한 번은 만나러 오실 수 있었잖아요.”

영숙이 입술을 잘게 깨물다 입을 열었다.

“네가…… 네가 그 사람을 너무 많이 닮아서…… 널 보면 자꾸 네 아빠가 생각나서…….”

“하…….”

20년이나 만나러 오지도, 연락도 없던 이유가 고작 아빠를 닮아서라는 이유라니.

가을의 눈에 핏줄이 섰다.

혹시라도 이런 날이 오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죽을 때까지 엄마를 보지 않고 살겠다고 다짐하던 마음 한편에 언젠가는 엄마를 보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엄마도 힘들었을 거라고, 여자 혼자서 아이 둘을 키우기 어려웠을 거라고.

미워하는 마음속에 끊임없이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자리했다.

어쩌면 엄마가 먼저 자신을 찾아오길 바라면서 오기를 부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자신을 버리고, 외면한 이유를 알게 되자 엄마를 미워하면서도 그리워한 자신이 불쌍해졌다.

자신이 원해서 닮은 것도 아닌데. 그저 아빠를 닮았다는 이유로 그 긴 세월 자신을 외면했다는 사실이 끔찍이도 우스웠다.

“혹시 어디서 보게 되도 아는 척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가을아…….”

“연락도 하지 마시고요.”

“…….”

“20년 동안, 쭉…… 잘해 오셨잖아요.”

가을의 눈에 이쪽을 힐끔거리며 카페 근처를 서성이는 중년 남성이 보였다. 가영이 말한 두 번째 새아빠가 분명해 보였다.

“먼저 일어날게요.”

주먹을 쥔 채로 일어나 몸을 돌렸던 가을이 흠칫 멈춰섰다.

“……!”

카페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태준이 가을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얘기를 다 들은 건지 몰랐지만 가을이 태준을 지나쳐 어디론가 빠르게 걸어갔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가을은 그저 사람이 적은 곳으로 향했다.

건들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아 가을이 주먹을 좀 더 움켜쥐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걸어 사람이 없는 구석진 자리에 오자 그사이 눈물을 참아 낸 가을이 걸음을 멈췄다.

묵묵히 뒤에서 쫓아오던 태준이 곁에 다가와 서자 가을이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착하면 연락한다더니 왜 안 하셨어요.”

태준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가을의 눈동자가 부산스러워졌다.

“팸플릿 가져온다는 거 깜빡했네. 전 영화 팸플릿 모으는 거 좋아하거든요. 잊어버리지 말아야지.”

“봐 봐요.”

가을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던 태준이 가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가을은 여전히 주먹을 꽉 쥔 상태였다.

가을이 손을 주지 않자 태준이 움켜쥔 가을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 쪽으로 가져왔다.

태준이 손에 힘을 풀라는 듯 넌지시 바라보자 가을이 주먹을 쥐고 있던 힘을 천천히 풀어냈다.

얼마나 꽉 누르고 있었는지 손바닥을 찌른 손톱이 연한 피부에 상처를 냈다.

상처가 난 손바닥을 아프게 바라보던 태준이 가을의 손바닥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이렇게 손을 잡고 상대를 위로할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태준은 처음 느꼈다.

이런 식으로 참아 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얼마나 아팠을까.

태준이 저도 모르게 상처가 난 가을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자 예상치 못한 행동에 가을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플 것 같아서.”

걱정이 잔뜩 묻어난 태준의 눈빛과 목소리에 차오르는 눈물을 참듯 가을이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힘들면…….”

“…….”

“울어도 돼요.”

다정한 태준의 목소리에 늘 참기만 하던 가을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눌러 놓은 마음이 터지듯 눈동자가 빨개진 채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가을은 어깨를 얕게 들썩일 뿐 눈물을 닦아 내지 못했다.

“마음껏 울어요.”

상처가 난 가을의 손을 잡은 채로 태준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위로 살며시 입술을 대었다.

눈물을 닦아 주듯 가을의 뺨 위에 닿은 태준의 입술이 얕게 달싹거리자 흠뻑 젖은 가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뺨에 닿았던 입술을 살며시 떼어 낸 태준이 지척에 있는 가을의 입술로 방향을 바꾸며 물기에 젖은 가을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숨이 닿을 듯 태준의 목소리가 가을의 입술 위로 감겨들었다.

“내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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