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90)

어디선가 들리는 굵직한 목소리에 가영과 남자의 고개가 한꺼번에 돌아갔다.

“여자분이 싫다는데.”

명석이 길에서 나눠 준 손부채로 느긋하게 부채질을 하며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뭐야? 정가영, 너 아는 사람이야?”

“아니. ……근데, 알고 싶네.”

가영이 출중한 외모의 명석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에이씨. 아저씨 뭐야?”

명석이 남자의 질문을 무시하고 가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손봐줘야 하는 상황, 맞습니까?”

“맞아요.”

가영의 말에 눈빛이 바뀐 명석이 남자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 손 놓죠.”

명석이 눈빛에 저절로 움찔한 남자가 짜증 난 듯 목소리를 더 거칠게 냈다.

“괜히 얻어맞지 말고 가던 길 가세요, 아저씨.”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가영의 팔을 더 세게 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잠시 그 모습을 보던 명석이 남자에게 다가가 팔을 움켜잡았다.

“아악!!!”

명석의 힘에 남자가 반사적으로 가영의 손목을 놓았다.

“놔!! 아악! 놓으라고!!”

남자가 고통에 발버둥 쳤다.

명석이 팔을 놓아주자 거칠게 손을 털며 인상을 쓰던 남자가 그제야 창피함이 몰려온 듯 명석을 매섭게 돌아보았다.

“에이씨, 진짜!!!”

“조심하세요!! 얘 싸움 잘해요.”

가영의 외침이 무색하게 남자가 휘두른 주먹을 명석이 크지 않은 동작으로 가볍게 피했다.

공격이 먹히지 않자 악에 받친 남자 다시 명석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툭-

명석이 들고 있던 부채로 간단히 막아 냈다.

그 모습이 마치 도포를 입은 선비가 부채를 휘두르는 모습 같아 가영의 눈에서 하트가 쏟아졌다.

“끝을 볼까요, 그냥 조용히 갈래요.”

음산한 기운을 내며 명석이 남자에게 다가갔다.

“물론, 난 끝을 보는 걸 좋아합니다.”

존댓말을 하며 다가오는 명석의 모습이 더 오싹해 남자가 뒷걸음질 쳤다.

“내, 내가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래. 야, 정가영. 너 나중에 봐.”

남자가 그대로 뒤돌아 뛰듯 사라지자 볼일이 끝난 명석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저기요, 아저씨! 아니, 오빠!”

가영이 부르는 목소리에도 명석은 뒤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만 갔다.

“거기 부채 오빠!!”

가영이 빠르게 뛰어 명석의 앞을 막아서자 걸음을 제지당한 명석이 슬쩍 인상을 썼다.

“고맙다는 인사는 됐습니다.”

“여친 있어요?”

생각지 못한 가영의 말에 명석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건 왜요?”

“여친 없으면 나 어때요?”

명석이 지그시 가영을 내려다보았다.

쫙 달라붙어 가슴이 강조된 윗옷에, 핫팬츠. 길게 내려오는 짙은 검은색 머리에 고양이 같은 얼굴.

누가 봐도 한번은 돌아볼 법한 미인이었다.

“미안하지만, 별로입니다.”

다시 걸음을 옮기는 명석의 앞을 가영이 또다시 막았다.

“내가 별로예요?”

“예.”

“어디가요?”

“전부 다요.”

“오빠, 시력 안 좋아요?”

고양이처럼 쏘아보는 가영의 말에 안경을 맞추라던 태준이 떠올라 명석이 슬며시 웃어 보이자 붓으로 그린 듯 유려한 눈매가 매력적인 호선을 그렸다.

두근, 두근, 두근.

“뭐야? 나 진짜 반한 거 같은데.”

양 볼이 빨개진 가영이 명석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연락처 주기 싫으면, 나랑 술 한잔할래요?”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간 명석이 마치 동생에게 충고하듯 묵직한 목소리를 냈다.

“아무한테나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위험하니까.”

또다시 심장을 폭격당한 가영이 멍하니 서 있는 사이 명석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퍼뜩 정신이 돌아온 가영이 서둘러 몸을 돌렸다.

“저기 오…….”

“도련님!”

“오랜만입니다, 도련님~!”

명석의 주위에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덩치 큰 남자들이 우르르 다가와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가운데 우뚝 서서 남자들을 돌아보는 명석의 모습이 마치 조폭 우두머리 같아 보였다.

지레 겁을 먹고 피하는 사람들과 달리 가영의 눈은 더 큰 하트로 변했다.

“완전 멋있어…….”

* * *

아침 8시.

태준이 언제나 그랬듯 차 뒷자리에 앉아 신문을 읽었다.

휴대폰으로 보는 기사 외에 언제나 종이로 된 신문을 종류별로 읽는 게 태준의 일과 중 하나였다.

스포츠면을 살피던 태준의 눈에 ‘야구선수, 최선호’라는 커다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신문 기사에서 ‘선호’라는 이름만 점점 확대되어 보이던 태준이 저도 모르게 거칠게 신문을 구겼다.

“음악을 좀 줄일까요?”

내내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태준의 눈치를 살피던 운전기사가 작은 목소리를 냈다.

태준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일 때 틀라며 명석이 건네준 조용한 클래식 모음을 차에 오르자마자 틀어 놓았던 운전기사였다.

“괜찮습니다.”

태준이 옆자리에 던지듯 신문을 내려놓았다.

일곱 살 때부터 알던, 가을이 애타게 기다리는 남자. 박선호.

아는 건 그것뿐이었다.

박선호…… 박선호…….

선호의 이름을 되뇌자 가슴 한쪽이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져 태준이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아무래도 조만간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국에 다다라 신호대기에 걸려 차가 멈춘 사이 무심히 창밖을 보던 태준의 눈에 영화관 간판이 보였다.

‘로마에서 아침을’ 재개봉 간판이었다.

“재개봉이라…….”

태준이 뭔가를 생각하듯 손가락을 허벅지에 대고 두드리다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가을에게 문자를 보내기엔 이른 시간인가 싶어 고민하던 태준이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로마에서 아침’을 재개봉하는데. 같이 봐 줄래요?]

메시지를 보내 놓고 태준이 답변을 초조히 기다렸다.

일 문제 외에 누군가의 답변을 기다려 본 적이 없는 태준이 뚫어져라 휴대폰 화면만 노려보았다.

메시지 옆에 숫자 1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 자나 싶어 휴대폰을 내려놓으려 할 때 숫자 1이 사라졌다.

마치 투자자의 대답을 기다릴 때처럼 초조한 마음이 들어 태준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숫자 1이 사라졌는데도 답변이 오지 않자 태준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그렇게 10분을 휴대폰만 노려보는 사이 방송국 주차장에 도착한 운전기사가 차를 세웠다.

“저 대표,”

운전기사의 말에 태준이 제지하듯 손을 들어 보였다.

대체 왜 저렇게 휴대폰을 노려보나 싶어 운전기사가 태준의 눈치만 살펴보았다.

5분여를 그 자세로 기다리던 태준이 숨을 한번 내쉬고 휴대폰을 슈트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디링-

기다리던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태준이 빠르게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언제 보실 거예요?]

가을의 메시지에 태준이 곧장 답변을 보냈다.

[오늘 어때요?]

가을이 화면을 보고 있는 듯 그대로 숫자 1이 사라졌다.

[오늘 저녁이요?]

[시간 괜찮으면 끝나고 전화할게요.]

[알겠어요. 연락 주세요.]

마치 커다란 계약이 성사라도 된 듯 태준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내 굳어 있던 태준의 표정이 그제야 부드럽게 풀렸다.

‘STN’ 방송국 회의실 안.

고위 간부들과 함께 태준이 여러 개의 서류 중 하나를 넘겨 보았다.

“아무래도 드라마 제작비가 많이 들다 보니 PPL이 과하게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드라마국 CP의 말에 태준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찍는 방법이 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백하는 장면에서 갑자기 눈에 띄는 PPL이 나오면 당연히 거부 반응이 나오겠죠.”

“제작 여건이 좋지 못하다 보니 세심하게 신경을 쓸 여력이 없는 것도 문제고요.”

과한 업무 시간과 최저 임금도 되지 않는 임금 등, 스태프들에 대한 처우 개선도 해결해야 할 사항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명석이 안으로 들어왔다.

“대표님, 오영국 CP님 오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회의가 시작된 지 무려 15분이나 지난 상황이었다.

5분 정도 늦었을 땐 태준의 불호령으로 끝나지만, 그 이상 늦으면 회의에 참석조차 불가능했다.

“들어오시라고 해.”

태준의 말에 안에 있던 고위 간부들이 저마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얼마 뒤.

한 시간가량 순조롭게 진행된 회의가 끝나고 태준이 회의실을 나갔다.

너그러워진 태준의 모습에 명석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좋은 일 있으세요?”

“그런 게 어딨어 내가.”

“그런데 왜 안 하던 행동을 하세요?”

“오늘 차가 많이 막히더라고.”

평소라면 차가 막혀 회의에 늦었다는 핑계에 첫 출근도 아닌데 차 막히는 걸 이제 알았냐며, 집에서 10분만 일찍 나와도 막힐 일이 없다고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내쫓았을 태준이었다.

“오늘 저녁 스케줄이 어떻게 되지?”

“오후 6시에 권은찬 사장님과 저녁 약속이,”

“취소해.”

“예?”

“주말에 라운딩하자는 얘기가 대화의 90%야. 다음으로 미뤄.”

‘세양 그룹’ 주주들과의 약속은 미룬 적이 없던 태준이 약속을 미루자 명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오후에 정가을 씨 만나세요?”

“응.”

태준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명석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정가을 씨를 보려고 권은찬 사장님 약속을 취소하신다고요.”

“응. 왜.”

“아닙니다.”

뭐든 작정하면 완벽하게 하는 태준이었지만 최근의 행동들은 자신이 아는 태준의 모습과 달라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던 명석이었다.

“그럼 적당한 날짜로 다시 잡겠습니다.”

명석이 휴대폰으로 일정을 체크하는 사이 태준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저, 그리고…….”

뭔가 망설이는 목소리에 태준이 고개를 돌렸다.

“희연이가 곧 들어온답니다.”

희연이란 말에 태준의 미간이 확 일그러졌다.

민희연. 어릴 때부터 태준을 쫓아다니던 르망 호텔 외동딸이었다.

태준이 교통사고 후 미국으로 떠나자 희연은 르망 호텔 회장의 지시에 강제적으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절대 근처에 못 오게 하는데도 희연은 해마다 한두 번씩 미국에 있는 태준을 찾아왔다.

희연이 미국에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태준은 도망치듯 다른 나라에 있다가 돌아왔다.

그러다 3년 전 모 그룹 장남과 약혼을 하게 된 희연이 발길을 끊어 편안해진 태준이었다.

“희연이가 결혼을 했던가?”

여자에겐 어떤 것도 관심을 두지 않던 태준답게 희연에 관해선 아무것도 몰랐다.

“아직 약혼 상태랍니다.”

“곧 결혼하겠네.”

[띵- 10층입니다.]

안내 음성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혹시 연락 오면,”

“죽었다고 해.”

태준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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