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딕-
빠르게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와 함께 ‘벌컥’ 현관문이 열렸다.
“대표님!!”
가을이 손에 든 봉투를 던지듯 내려놓고 태준을 찾기 위해 어두운 집 안을 돌아다녔다.
“대표님!! 어디 계세요?”
빠르게 주변을 살펴보던 가을이 베란다를 통해 흘러들어 온 달빛에 흐릿하게 비치는 태준을 발견했다.
“대표님!!!!”
가을이 가슴을 움켜쥐고 괴로워하는 태준에게 빠르게 달려갔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대표님!”
가을이 휴대폰으로 119를 누르려 할 때 태준이 그대로 가을을 끌어안았다.
“그냥…… 그냥 조금만…… 조금만 이렇게…….”
“어디 아프신 거예요? 빨리 구급차를,”
“그냥…… 그냥 이대로…….”
마치 엄마에게 매달린 아이처럼 간절히 안기는 태준의 모습에 가을이 힘껏 태준을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자신을 향해 외던 주문처럼 가을이 품에 안긴 태준의 등을 쓸어내리며 달랬다.
힘겹게 들썩이는 태준의 떨림이 가을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대체 왜 이렇게 떠는 걸까. 이유는 모르지만 가을의 마음이 아려 왔다.
가을이 부드럽게 등을 쓸어내리자 손으로 전해진 따듯한 온기에 들썩이던 태준의 떨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가을이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 않는 태준의 모습을 살폈다.
“……괜찮으세요?”
태준이 낮게 숨을 뱉어 내며 호흡을 골랐다.
“괜찮아요…….”
“그럼 잠시만요.”
살며시 태준을 놓은 가을이 달빛에 의존해 현관 근처에 있는 차단기를 올렸다.
치직, 팟-
몇 번 깜빡이던 집 안 불이 들어오자 가을이 다시 태준에게 다가갔다.
“대표님.”
태준이 숨을 고르며 이마에서 뺨을 타고 흘러내린 식은땀을 천천히 닦아 냈다.
“……정말 괜찮으세요? 병원에 안 가셔도 돼요?”
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괜찮아졌어요.”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태준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잠깐만 기다릴래요?”
땀으로 젖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태준이 방으로 향하자 가을이 거실에 뒹굴고 있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오랜만에 휴식으로 야간 산행을 하고 돌아와 휴식을 취하던 가을은 산책도 할 겸 동네를 돌다가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 앞의 1+1 광고를 보고 고민도 없이 햄버거를 샀다.
그렇게 늦은 여름의 밤공기를 만끽하며 돌아오다 주차장에 세워진 태준의 차를 보고 저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빌라 앞에 서서 망설이다가 단순히 이웃사촌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며 가을은 처음으로 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혼자 충분히 다 먹을 수 있는 햄버거였지만 1+1이니까, 한 개를 전해 줄 생각이었다.
태준에게 전화를 하고 집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가을은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햄버거 봉투를 들고 있는 가을의 손이 아직까지 옅게 떨렸다.
‘탈각.’
태준이 마음을 가라앉히듯 몇 번의 숨을 고른 후 옷장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
왜 갑자기 그런 목소리가 들린 걸까.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소름 끼치는 목소리였다.
방금 느낀 공포는 태준이 여자와 몸이 닿았을 때 느끼던 공포와 같았다. 점차 호흡이 가빠지면서 결국 의식을 잃었던. 그 두려움.
하지만 가을을 안고 나서 두려웠던 마음이 점차 진정되었다.
괜찮다는 가을의 말에 정말로 모든 게 괜찮아지는 기분이었다.
어째서일까. 가을에겐 그 모든 게 괜찮은지 알 수 없었다.
가을이 아니었다면…….
태준이 생각하기 싫은 듯 낮게 고개를 털어 냈다.
미국도 아닌 한국에서 자신이 응급실에 실려 갔다면 주가 문제뿐만이 아니라 어떤 먹잇감을 미연과 찬영에게 제공할지 모를 일이었다.
여자에 대한 이상 증상과 같은 반응을 일으킨 목소리.
증상이 시작된 후 혹시 자신이 겪은 교통사고와 관련이 있을까 싶어 태준은 한국에 들어와 사건 기록과 진료기록을 확인했었다.
졸음 운전을 한 운전자가 태준의 차로 돌진한 사고.
그 바람에 머리에 충격을 받은 태준이 의식이 없는 상태로 한 달을 누워 있었다고 했다.
혹시 운전한 사람이 여자인가 싶었지만 운전자는 20대 후반의 남성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자신을 부르던 끔찍한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에 반응한 자신의 몸.
이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건을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후우…….”
태준이 옷을 갈아입은 후 땀으로 젖어 있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거실로 향하자 매서운 기세로 내리는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햄버거가 든 봉투를 들고 어색하게 서 있던 가을이 태준의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저녁에 비 온다더니 진짜 많이 내리네요.”
태준의 시선이 가을의 손에 든 봉투로 향했다.
“뭐 사 오는 길이었어요?”
가을이 햄버거 봉투를 들어 보이며 슬며시 웃어 보였다.
“햄버거요.”
아직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듯 가뜩이나 하얀 가을의 얼굴이 더욱 하얘 보였다.
“일단 좀 앉······.”
고개를 돌리다 소파 테이블 위에 놓인 장식함을 발견한 태준이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태연하게 다가갔다.
살짝 열려 있던 뚜껑을 자연스럽게 닫은 태준이 장식함을 원래 있던 자리에 넣어 두었다.
그 모습을 보던 가을이 어색한 표정으로 슬며시 뺨을 매만졌다.
“괜찮아지셨으면 저는 그만,”
“앉았다 가요.”
어딘가 거절하기 힘든 태준의 눈빛에 잠시 망설이던 가을이 소파로 다가가 앉자 그 옆으로 다가온 태준이 소파에 앉았다.
“나 때문에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혹시 어디 아프신 거예요?”
“그냥 갑자기…… 어두워져서 좀 놀랐어요.”
태준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웃어 보였다.
“……트라우마 같은 거 있으세요?”
“글쎄,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색한 공기 속에 맹렬한 빗줄기가 베란다 창문을 두드렸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빗소리였다.
“전화는, 왜 했어요?”
태준의 물음에 가을이 손에 든 봉투를 들어 보였다.
“햄버거가 1+1이라서 하나 드리려고요.”
어딘지 뿌듯한 표정으로 봉투를 흔들어 보이는 가을의 모습이 귀여워 태준이 피식 웃어 보였다.
“잘됐네요. 배고프던 참인데.”
“드실래요?”
가을이 햄버거 하나를 꺼내 주려는 듯 봉투에 손을 넣었다.
“같이 먹어요.”
태준의 말에 가을이 테이블 위에 햄버거 두 개를 꺼내놓자 태준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샐러드 있는데, 줄까요?”
“음식은 사양하지 않습니다.”
태준이 슬며시 웃고 주방으로 걸어가 커다란 냉장고 문을 열었다.
평일 낮에 오는 가사 도우미가 잘 정리해 둔 샐러드를 꺼내 포크와 함께 소파 테이블에 올려놓고 500ml 생수 두 개를 가져와 가을의 옆에 앉았다.
가져온 500ml 생수 뚜껑을 따 하나는 가을 앞에, 하나는 자신의 앞에 놓은 태준이 테이블 위에 있는 햄버거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두 사람이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역시, 햄버거는 불고기가 진리예요.”
“불고기 좋아해요?”
“없어서 못 먹죠. 대표님은요?”
“오늘부터 좋아해 보려고요.”
태준이 햄버거를 든 채로 가을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가을 씨가 좋아하는 거니까.”
“……제 식성까지 좋아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고. 그렇네요.”
“다 좋아할 생각이에요. 그게, 뭐든.”
“저 좋아하는 거 엄청 많아요.”
“바빠지겠네요.”
태준이 들고 있던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다른 건 뭐 좋아해요?”
“음, 걷는 거 좋아해요. 특히 바람 불 때 걷는 거요.”
“또?”
태준의 질문에 가을이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다.
“선풍기로 머리 말리기.”
“그리고요.”
“CG 편의점 명란 볶음 김······ 여기까지요. 너무 쉽게 가르쳐 주면 안 되는 법이거든요.”
갑자기 말을 멈추고 일부러 배시시 웃는 가을의 모습에 태준이 느슨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 그렇게 떨었나 싶게 멀쩡한 태준의 모습에 안심이 된 가을이 그제야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가구 때문인가.
전에는 도망치듯 나가 보지 못했었는데 지금 보니 자신의 집과 같은 구조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전혀 다른 공간처럼 느껴졌다.
집 안을 둘러보던 가을의 눈에 햄버거 소스가 묻은 손가락을 느슨히 혀로 핥는 태준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냥 스윽 핥은 것뿐인데 혀를 말아 올리는 느낌이 어딘가 선정적이었다.
그 상태로 태준과 눈이 마주치자 머리가 아플 정도로 심장이 울려 댔다.
그제야 가을은 태준의 집에서, 그와 단둘이 있다는 사실이 의식되었다.
진정해.
강아지다. 옆에 있는 건 강아지야. 강아지가 음식을 핥은 것뿐이야.
쏴아아-
천둥·번개와 함께 빗소리가 요란해졌다.
“TV 볼래요?”
“네? 아, 네.”
잠시 개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태준이 어색해하는 가을을 위해 테이블 위에 있는 리모컨을 건넸다.
“보고 싶은 거 봐요.”
리모컨을 건네받은 가을이 전원을 누르자 뉴스에 맞춰져 있던 TV에서 곧바로 일기예보 화면이 보였다.
[각 지역에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집중호우가 예상되니 큰 피해가 없도록 대비를 단단히 하셔야겠습니다. 이번 비는 목요일 오후…….]
가을이 채널을 돌리다 영화 화면에서 멈췄다.
유명 여배우가 나오는 공포영화가 화면을 가득 채우자 인상을 쓰는 태준과 달리 가을은 눈이 초롱해져 화면을 응시했다.
“와, 이거 보고 싶었던 건데.”
“공포영화 좋아해요?”
“이것도 좋아해 보시게요?”
“그건 좀, 힘들겠네요.”
공포영화를 싫어하는 태준을 위해 채널을 돌리려던 가을이 TV 화면에 다락방이 나오자 잠시 화면을 멈췄다.
“어? 저 다락방. 어릴 때 살던 집이랑 똑같네.”
“다락방이 있었어요?”
“네.”
가을이 포크로 샐러드를 듬뿍 찍어 입에 넣었다.
“아주 작은 다락방이었는데 거기에 있으면 몸에 딱 맞는 게 뭔가 포근해서 무서움이 줄어들었달까요.”
“뭐가 무서웠는데요.”
“엄마 아빠요.”
“…….”
“어릴 때 엄마랑 아빠가 늘 싸웠거든요.”
TV 화면 속, 어린아이가 누군가를 피해 다락방으로 숨는 장면을 보며 가을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일곱 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전 아빠랑 할머니 집에 갔었는데, 그때도 무서운 게 있으면 늘 어딘가에 숨었어요.”
“…….”
슬픈 얘기와 어울리지 않게 마치 즐거운 추억인 듯 가을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제가 숨어 있으면 선호 오빠가 찾아내서 달래 줬는데…….”
선호라는 말에 태준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예요?”
“일곱 살 때부터요.”
그저 사귀던 남자 친구를 잊지 못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던 태준이 일곱 살 때부터 알았다는 말에 가슴 어딘가가 지끈거렸다.
일곱 살부터라니. 자신이 뭘 해도 넘볼 수 없는 세월이었다.
“아, 비가 와서 그런가 괜한 얘길 주절댔네요.”
그사이 햄버거와 샐러드까지 깔끔히 비워 낸 가을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태준이 굳은 표정을 돌리고 가을을 따라 일어섰다.
“그럼 쉬세요!”
태준이 뭐라 할 새도 없이 꾸벅 인사를 건넨 가을이 빠르게 현관을 빠져나와 자신의 집으로 들어왔다.
“후우······.”
자신에게 안겨 있던 태준의 떨림이 남아 있는 탓인지 그와 함께 있는 내내 긴장되고 떨려 머리가 울릴 지경이었다.
무서움에 떨던 태준을 떠올리던 가을의 생각이 이내 장식함까지 옮겨 갔다.
조금 전 태준을 기다리다 가을은 테이블 위에 있는 장식함에 눈길을 주었다.
살짝 열린 장식함 안에 든 나무젓가락을 봤지만 태준이 무안해할까 싶어 못 본 척한 것이었다.
차가웠다가, 다정했다가, 안쓰러웠다가.
“이젠 귀엽기까지.”
귀까지 빨개져선 아무렇지 않은 척 장식함을 닫던 태준이 떠올라 가을의 입에 저도 모르는 미소가 걸렸다.
그러다 덜덜 떨던 태준의 모습이 생각나 가을의 얼굴에 걱정이 번졌다.
외모도, 배경도. 겉으로 볼 땐 완벽한데. 뭐 때문에 그렇게 무서워한 걸까.
어두워서 놀랐다는 태준의 말이 사실일 리가 없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넘칠 정도로 무서운 일이 대체 뭐였을까.
“아······ 진짜. 훠이~ 훠이~!”
가을이 더 이상 태준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듯 손으로 공기를 흩트리고 방으로 향했다.
그 시각.
술집이 즐비한 번화가에서 가영은 건장한 체격의 전 남자 친구와 말다툼을 벌이는 중이었다.
“진짜 왜 이러는 거야? 짜증 나게.”
가영이 다가와서 붙잡는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내가 잘못했어.”
“잘못인 걸 들키고 나서 아니?”
남자는 가영의 대학교 동기와 바람을 피우다가 걸린 상태였다.
“술에 취해서 그런 거야. 실수였다고.”
“실수 좋아하네. 실수는 내 의지로 안 됐을 때 하는 소리야. 모텔 들어가서 할 짓 다 하는 게 무슨 실수야?”
너무도 큰 목소리에 남자가 가영의 손을 잡아챘다.
“조용한 데 가서 얘기하자. 응?”
“안 놔?”
“또 물기만 해 봐.”
“그러니까 좋게 얘기할 때 놔.”
“아 좀~!!”
남자가 가영의 팔목을 세게 잡아당기며 어딘가를 향해 끌고 갔다.
“놓으라고!!!”
가영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였다.
“힘쓰지 말고 말로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