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90)

그 순간 가을이 재빨리 베란다 창문 옆으로 숨듯 몸을 돌렸다.

“……내가 왜 숨지??”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듯 피식 웃어넘긴 가을이 다시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에 본 남자는 그새 사라지고 이삿짐 직원밖에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에 현관 앞에서 마주친 502호에 사는 아주머니가 이 건물이 지어질 때부터 사셨다면서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라고 했었는데.

이렇게 금방 이사를 가실 줄은 몰랐던 가을이 사다리차를 타고 짐이 올라가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거실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먹다 남은 배달 음식과 반쯤 마신 음료수, 소시지 같은 간식이 전부였다.

“아 배고파…….”

촬영 내내 집을 비워 마땅히 먹을 음식도, 마실 물도 없는 상태였다.

뭐라도 사 올 생각으로 젖은 상태에서 침대에 눌려 눅눅해진 머리카락을 하나로 돌돌 말아 묶고 휴대폰을 챙긴 가을이 현관문을 열었다.

드드드드드, 드드드드드드-

가을이 막 빌라 앞으로 나가자 고급 포장 이사 전문이라고 쓰인 차는 사라지고 가구 전문 차량이 새 제품으로 보이는 고급 소파를 조심스럽게 사다리차에 싣고 있었다.

가구들이 고급이라 그런지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유니폼에 금색 명찰을 한 단정하고 깔끔한 차림새였다.

산 아래 낡은 빌라에 이사를 오는 것과는 어딘가 이질적인 모습을 둘러보던 가을이 발길을 돌렸다.

“어디 가요?”

누군가의 목소리에 가을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동굴 같은 저음의 목소리.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엔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는 음색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가을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태준이었다.

흰색에 연한 회색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상의에 흰 슬랙스 차림의 태준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가을을 향해 미소지었다.

왜 갑자기 대표님이 거기서 나오세요?

“시끄럽죠. 금방 끝날 거예요.”

아니, 그러니까 왜.

가을의 표정을 읽은 태준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 이사 왔어요.”

“……이사 온 집이 설마…….”

“502호.”

가을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제 이웃사촌입니다.”

“…….”

“놀랐어요?”

가을이 고개를 낮게 털어 내고 정신을 차렸다.

“안 놀라는 게 이상하죠.”

“이사 끝나면 연락하려고 했는데, 촬영이 일찍 끝났나 봐요.”

가을이 눈앞에 서 있는 태준과 502호로 올라가는 비싸 보이는 가구들을 현실감 없는 표정으로 번갈아 보았다.

“……정말 이사 오신 거예요??”

“예.”

“왜요?”

태준이 피식 웃었다.

“말했잖아요. 난 뭐든 열심히 한다고.”

“그래도 이건 뭐랄까. 좀, 자칫. 그러니까, 남들 눈에…….”

“스토커?”

가을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정가을 씨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뇨, 저야 상관없지만…….”

“그러면 됐어요.”

“…….”

“남들한테는 여자한테 미쳐서 정신 빠진 모습을 보여 줘야 하니까.”

그런 거라면 성공입니다.

충분히 미쳐 보여요.

가을이 흐릿하게 웃어 보이자 태준이 화답하듯 미소를 보냈다.

“정가을 씨.”

“네?”

태준이 그윽한 목소리를 내며 가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보고 싶었어요.”

느닷없는 태준의 말에 가을의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저는 아닙니다.”

심장 박동과는 달리 가을이 연기에 맞는 대답을 했다.

당연한 대답이라고 생각한 듯 슬며시 미소 지은 태준이 가을의 모습을 살폈다.

“어디 가는 길이었어요?”

“마트요.”

“같이 가요.”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잠시만요.”

태준이 검은색 상하 유니폼을 입은 남자에게 다가가 뭐라고 얘기하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태준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뭔가를 지시하고 깍듯한 인사를 받는 것에 익숙해 보이는 태준의 모습에 가을은 역시 그가 자신과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죠.”

가을이 먼저 걸음을 옮기자 태준이 따라 걸었다.

햇살이 가득 내리쬐는 골목길을 두 사람이 천천히 내려갔다.

마주쳐 오는 여자마다 태준을 힐끔거리는 게 느껴져 가을은 괜히 자신의 상태가 신경 쓰였다.

아무 생각 없이 갈아입고 나온 옷은 시장에서 산 5천 원짜리 티셔츠였다.

지난번에 산 옷 입고 나올걸.

우연히 인터넷을 보다 샀던 블라우스는 촬영할 때 입기엔 어울리지 않아 옷장에 고이 모셔 둔 상태였다.

촬영장에서도 아까워서 입지 않는 옷을 마트 갈 때 입었을 리가 없지만.

슈트나 등산복을 입은 모습만 봤던 태준이 일상복까지 멋스럽게 입고 있는 모습을 보니 평소라면 관심도 없었을 옷 상태가 신경 쓰였다.

산에서 불어온 바람에 가을이 입고 있는 커다란 티셔츠가 펄럭이자 가슴에 새겨진 노란색 병아리가 마치 살아 움직이듯 물결쳤다.

태준의 시선이 존재감을 뿜어내는 노란 병아리로 향했다.

“옷이 귀엽네요.”

“진짜요?”

처음 듣는 옷 칭찬에 가을이 밝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도식이었다면 키워서 잡아먹을 거냐고 했을 게 분명했다.

태준의 시선이 병아리에서 위로 옮겨가자 가을이 당황해하며 다급히 머리를 매만졌다.

“제가 머리를 안 감아서 떡이 진 게 아니고요. 안 말리고 묶어서 그렇게 보이는 거거든요.”

태준은 그저 어떻게 묶어서 올린 건지 궁금해서 봤을 뿐이었는데 그 시선을 오해한 가을이 괜한 말을 늘어놓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을의 모습에 태준의 입술이 슬며시 호선을 그었다.

햇빛을 피해 그늘로 걸음을 옮긴 가을이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근데 이사는 정말 생각도 못 했어요.”

“불편해요?”

“같이 사는 것도 아닌데 불편할 것까진 없죠.”

말을 뱉어 내고 뭔가 움찔한 가을이 슬며시 태준을 올려다보자 눈빛을 읽은 태준이 찰떡같은 대답을 했다.

“같이 살자고는 안 합니다.”

“다행이네요.”

자신과 한 통화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가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준이 입을 열었다.

“마트엔 뭐 사러 가요?”

“물하고, 이것저것 먹을 거 좀 사려고요.”

“점심 안 먹었어요? 밥차 보냈는데.”

“바빠서 전 못 먹었어요.”

“괜히 보냈네.”

가을이 피식 웃어 보이자 태준이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체크했다.

“뭐라도 먹고 들어가죠.”

“아뇨, 괜찮아요.”

“지금 집에 가면 시끄럽기만 해요.”

태준의 말에 가을이 뭔가를 생각하다 작은 카페를 가리켰다. 배가 고픈 것 보다 졸린 게 더 문제였다.

“그럼 커피 드실래요?”

잠시 뒤.

태준이 트레이에 아이스 커피 두 잔과 샌드위치를 들고 가을이 앉은 테이블로 향했다.

지난번에 샌드위치를 잘 먹던 가을의 모습이 생각나 태준이 고른 메뉴였다.

“잘 먹겠습니다.”

샌드위치부터 집어 든 가을이 눈 깜짝할 새에 하나를 다 먹어 치웠다.

“하나 더 할래요?”

“사양하진 않겠습니다.”

가을의 말에 태준이 카운터에서 샌드위치를 두 개를 더 사서 가을의 앞에 놓아 주었다.

“하나면 되는데.”

“천천히 먹어요.”

태준이 빨대를 잡고 안에 있는 얼음을 휘휘 돌리며 가을이 먹는 모습을 감상했다.

입 안이 터져라 샌드위치를 넣고 우물거리는 가을의 모습은 꼭 다람쥐 같았다.

가을이 우물우물 말을 뱉어 냈다.

“좀 안 드세요?”

“난 점심 먹었어요.”

가을이 반쯤 남은 샌드위치를 한입에 넣었다.

요란하게 꼬르륵거리던 배가 샌드위치가 들어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태준이 말없이 빤히 바라보기만 하자 머쓱해진 가을이 아이스 커피를 습관처럼 쭈욱 빨아 마셨다.

쪼로로로록-

그새 얼음만 남아 빨대에 공기만 들어가는 소리가 요란할 정도로 카페 안에 울려 퍼졌다.

이렇게 요란하게 다 마셨다는 소리를 내는 건 처음 듣는 태준이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냈다.

“다른 거 더 마실래요?”

“아뇨.”

가을이 머쓱함을 숨기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거절했다.

Rrrr-

태준이 발신자를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통화 좀 하고 올게요.”

가을의 시선이 카페 문을 열고 나가 그 앞에 서서 통화를 하는 태준에게 자석처럼 따라붙었다.

태준이 통화를 하며 고개를 돌리자 미처 피하지 못한 가을이 연하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에 태준도 미소를 지어 보냈다.

햇살 아래 서서 미소를 보내는 태준의 모습에 가을이 얼른 고개를 돌려 남아 있는 샌드위치 포장지를 벗겨 냈다.

태준의 미소가 햇살 같아 보이는 건, 그저 태준에게 햇살이 비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쉬어요.”

태준이 인사를 하고 502호 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가을은 태준이 정말 이사를 왔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다.

디딕-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른 가을이 거실로 들어왔다.

조금 전과 달라진 게 없는 집이었는데 어쩐지 집 안에 긴장감이 느껴졌다.

가을이 진하게 커피 한 잔을 타 작은방에 있는 책상에 앉았다.

연출과 관련된 공부를 하고, 4부작으로 방영된 드라마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몇 시간 후.

공부에 몰두하던 가을이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저녁 9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가을이 잠을 깰 겸 세수를 하려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자,

‘쏴아아-’

바닥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샤워하나.”

‘찰싹.’

가을이 자신의 양 뺨을 약하게 쳤다.

“신경 안 써. 난 신경 안 쓴다. 정말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가을이 주문 같은 말을 뱉고 세수를 했다.

짧게 세수를 하고 나오는 동안에도 바닥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내 집인데, 편하게 쉬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시각.

한남동에 있는 집으로 가서 업무를 보고 온 태준이 502호로 돌아와 샤워를 끝내고 샤워가운을 두른 채 물 한 잔을 따라 소파에 앉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그대로 두고 몇 가지 필요한 가구와 물건만 사서 옮긴 상태였다.

술에 취했던 가을과의 통화를 떠올리며 태준이 천천히 손에 든 물잔을 입게 가져다 대었다.

[와라…… 나한테 좀 와주라…….]

[기다려.]

[올 거야?]

[응. 갈게.]

[오빠가 옆에 있으면 좋겠어. 그때처럼. ……부르면 올 수 있는 거리에서…… 그렇게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옆에, 있어 줄까.]

[……응.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내 옆에…… 떨어지지 말고 꼭 붙어 있어 주라.]

[그래.]

[약속…… 하는 거지?]

[약속할게.]

선호라는 사람과 혼동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태준은 가을에게 약속했다.

가을이 자신과 한 얘기를 기억하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선호와 착각했다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들으면, 이유를 알지 못할 마음이 들끓을 것 같았다.

가능하면 이대로 기억이 나지 않길. 누군가와 착각했다는 사과 따위는 듣지 않길 바랐다.

502호로 이사를 온 건 가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 일이었지만,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문규와 미연, 찬영 때문이기도 했다.

눈에 띈 건 황 비서뿐이었지만 곳곳에 사람을 붙였을 게 뻔해 가을과 함께 있으면 좋아한다는 티를 계속 내던 태준이었다.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던 태준이 집 안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웃돈을 주고 매입한 집이었지만 태준의 집 거실 크기도 되지 않는 평수에, 여기저기 낡아 손을 봐야 할 곳이 많은 집이었다.

리모델링이니 뭐니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아 청소만 하고 가구를 들여놓은 상태였다.

“후우…….”

어깨를 한번 주무른 태준이 남은 업무를 보려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틱-’

그 순간, 집 안의 모든 불이 나갔다.

“뭐야.”

어둠 속에서 소파 옆에 둔 휴대폰을 집어 든 태준이 습관적으로 관리실 번호를 찾았다.

전화 연결음이 나오자마자 한남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종료 버튼을 눌렀다.

모든 걸 관리실에서 해결해 주던 것과 달리, 이곳엔 관리실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 시간에 멀리 있는 명석을 오라고 할 수도 없었다.

베란다를 통해 들어오는 불을 보니 다른 집은 이상이 없어 보였다.

혹시 가을은 괜찮은지 태준이 휴대폰으로 가을의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혹시 거기도 정전이 됐습니까?”

-정전이요?? 아뇨, 괜찮은데요.

“…….”

-정전됐어요?

“그런 것 같네요.”

-두꺼비집은요?

“두꺼비 집?”

-현관 입구에 보면 두꺼비 집 있거든요. 그거 한 번 체크해 보세요.

어둠 속에서 현관을 찾아 고개를 돌리던 태준이 번거로운 듯 찾기를 멈췄다.

“사람을 부르는 게 낫겠네요. 그럼 쉬,”

-주말이라 전부 문 닫았을 거예요.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에 난처한 듯 태준이 작게 한숨을 뱉어 냈다.

그때 믿음직스러운 가을의 목소리가 수화음을 타고 흘러나왔다.

-제가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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