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지나갈 때까지 태준은 가을을 안고 있었다.
태준에게 안겨 있는 가을이 떨리는 마음을 입 밖으로 밀어내듯 계속 질문을 했다.
“그냥 이렇게 있으면 돼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해요? 아직도 있어요?”
걱정이 되는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가을의 모습에 태준이 아쉬움을 눌러 내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이제 갔어요.”
“후아…….”
“…….”
“정말 감시도 하고 그러네요.”
가을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슬며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 품에 안았던 가을의 체취가 자신에게 옮겨 오자 태준의 귀가 쩌릿해졌다.
“대표님……?”
“……예?”
빤히 올려다보는 가을의 모습에 태준의 정신이 온전히 돌아왔다.
“그만 갈까요.”
태준이 왔던 길로 몸을 돌리자 가을도 서둘러 몸을 돌렸다.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그저 따듯한 온기가 좋아 그랬을 뿐이라고 태준은 자신의 행동을 빠르게 정리했다.
* * *
‘STN’ 방송국 편집실에서 작업을 끝내고 화장실에 들른 가을이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페이퍼 타올을 꺼냈다.
디링-
그때 울리는 문자음에 가을은 바지 주머니에 넣어 놓은 휴대폰을 꺼내 스태프들끼리 쓰는 단톡방 메시지를 확인했다.
[대표님이 또 커피차 보내셨음.]
B팀 촬영장에 있는 스태프의 메시지였다.
이어서 커피차 사진과, 스태프들이 커피를 들고 있는 사진, 커피만 확대해서 찍은 사진 등 메시지가 이어졌다.
[조감독님 덕분에 호강하네요.]
[가을 씨 잘 마실게.]
[이렇게 지극정성인데 웬만하면 대표님 좀 받아 줘라.]
[난 찬성.]
[난 반대. 싫으면 싫은 거죠.]
[싫으면 이런 거 받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대표가 밀어붙이면서 주는 걸 어떻게 거절하냐? 개인적인 것도 아니고 촬영장에 보내는 건데.]
[내 말이. 거절하기 힘들지.]
스태프들끼리 논쟁을 벌이는 메시지를 읽다가 가을이 휴대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태준은 끊임없이 촬영장에 간식차, 커피차, 밥차를 보내거나 식당을 예약해 두었다.
밥차나 간식차, 커피차를 보낼 땐 [아름다운 조감독, 정가을]이라는 문구를 빼먹지 않았다.
한강에 다녀온 이후 회사 일로 바쁘다며 만나러 오진 않았지만 남들이 보기에 ‘STN’ 대표가 정가을이라는 조감독을 좋아한다는 인식은 확실하게 심어 주고 있었다.
식사 시간이 되면 ‘맛있게 먹으라’는 메시지나, 틈틈이 ‘보고 싶다’, ‘힘내라’는 메시지도 잊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든 안 보든, 태준은 정말 열심히 연기를 했다.
하지만 모든 게 다 쇼일 뿐, 가을은 태준의 행동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태준이 스태프들 사이에서 함께 밥을 먹거나, 촬영 현장에 들른다거나, 보고 싶다,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것들은 그저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행동에 불과했다.
그런데 선호가 해 주던 말로, 한 번씩 자신의 마음 어딘가를 건드렸다.
‘가을아, 오빠가 혼내줄 테니까 다 일러.’
어릴 적, 학교 행사에 아무도 오지 않아 부모 없는 아이라는 놀림을 받았을 때도, 여자아이들이 가을을 따돌리고 괴롭혔을 때도. 가을은 울지 않았다.
작은 손을 꽉 쥐고 입술을 앙다물 때면 선호는 참지 말라고, 자기가 혼내 줄 테니 다 일러도 된다며 가을을 따듯하게 안아 주었다.
그때는 선호가 있어서 참을 수 있었고, 지금은 선호가 없어서 참아야 했다.
그런데 자꾸만 태준이 선호가 하던 말을 뱉어 냈다. 그저 계약으로 만나는 사이일 뿐인데 가을은 그 말에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얼마 전 한강에서 태준에게 안겨 있었을 때 어딘가 태준에게 떨림이 묻어나 덩달아 더 떨렸던 가을이었다.
누가 지켜보고 있어서 그랬나.
그렇게 감시받는 것도 힘들겠다고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으윽!!! 그만 생각하자 그만.”
가을이 고개를 털어 냈다.
의미 없는 행동에 위로를 받으며 별것 아닌 일까지 생각하다 보면 계약이 끝났을 때 상처를 받는 건 자신이었다.
“진짜?”
“그렇다니까.”
가을이 페이퍼 타월을 한 장 더 꺼내 손을 닦을 때 방송국 직원으로 보이는 여자들이 화장실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거기 조연출인가 뭔가를 대표가 쫓아다닌다고?”
소문만 들었을 뿐 가을의 얼굴을 모르는 여자들이 얘기를 이어 갔다.
“얼마나 예쁘길래?”
“그냥 웬만큼 생기긴 했다는데 예쁜 걸로 치면 그동안 들이댄 여자들이 훨씬 예쁘겠지.”
“완전 봉 잡은 거 아냐? 왜 튕기는 거래?”
“글쎄, 모르지 뭐.”
“주제 파악하는 거지. 대표야 잠깐 정신이 나가서 쫓아다닌다고 쳐도 그게 오래 가겠어?”
“하긴, 매일 스테이크만 먹으면 가끔 김치찌개도 먹고 싶고 그러잖아.”
여자들이 재밌다는 듯 깔깔거렸다.
“그래도 부럽네. 그런 남자가 쫓아다니면 무슨 기분일까?”
“그 조연출 이름이 뭐라고 했지?”
“정 뭐라고 하던데.”
“정가을입니다.”
옆에서 조용히 얘기를 듣고 있던 가을이 대답하자 그제야 가을의 존재를 인식한 여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뭐라구요??”
“그 조연출 이름이, 정가을이라고요.”
여자들이 가을이 입고 있는 검은색 스태프 티셔츠를 보며 서로 눈짓을 보냈다.
“혹시 그쪽 스태프세요?”
“제가 그 김치찌개입니다.”
“네??”
“김치찌개라구요. 제가.”
눈만 말똥말똥 뜨던 여자들이 그제야 가을의 말뜻을 이해하고 ‘어머 어머, 웬일이야.’ 하고 중얼거리며 사과도 없이 우르르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남의 뒷말을 하는 사람들은 왜 저렇게 똑같은 모양새로 퇴장을 하는지.
가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얘기해도 가을은 왜 태준과 사귀지 않냐는 얘길 들어야 했다.
그런 질문엔 ‘네 주제에.’, ‘언감생심.’, ‘튕길 걸 튕겨.’, 등등의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는 걸 알고 있었다.
“돈 많고 잘생기면, 아~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사귀어야 하나?”
가을이 아무도 없는 화장실 안에 한숨 같은 말을 뱉어 내고 몸을 돌렸다.
잠도 자지 못하고 꼬박 하루를 촬영장에 있다가 ‘STN’에서 편집까지 끝낸 가을이 오후 2시가 되어서야 동네 버스 정거장에 도착했다.
앉아 오는 내내 어찌나 창문에 머리를 박으며 졸았는지 골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집까지는 15분 정도 걸어가야 하는 거리였지만 피곤한 가을의 몸 상태로는 한 시간도 넘게 걸리는 거리처럼 느껴졌다.
가을이 까마득한 골목길을 올려다보았다.
“누가 업어 주면 딱 좋겠다.”
몸은 피곤한데 배에서는 연신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이 고단함도 이틀 뒤면 당분간 끝이었다.
이틀 뒤 ‘시간을 지나서’가 종방을 하고 나면 얼마 후 4부작 회의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촉박한 일정에 쉴 수 있는 시간이 많진 않지만 연출과 관련된 공부를 하며 충전을 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끝을 향해 가면서 시청률이 높게 나와 촬영장 분위기는 좋게 흘러갔다.
김 감독은 가을에게 사과를 한 후로 그날 일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특별히 가을을 괴롭히는 일도 없었다.
남은 촬영 기간에 자신을 어떻게 괴롭힐까 은근히 걱정했던 고은 역시 별다른 행동 없이 얌전히 촬영에 임했다.
너무 평온해서 이상할 정도의 촬영이었다.
가을이 끝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한낮이었지만 그늘로 걸어가면 괜찮은 정도의 날씨로 변해 있었다.
골목길 맞은편에서 엄마와 아이가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걸어왔다.
“맛있어?”
“응!”
입 여기저기에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묻어 있는 아이와 그 모습을 보는 엄마의 얼굴엔 행복함이 묻어 있었다.
행복한 모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미소로 바라보던 가을이 이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빌라 입구까지 온 가을이 텅 비어 있는 주차장을 돌아보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며 아파트 CCTV를 돌려 보겠다던 의찬은 다음 날이 되자 잘 들어왔으면 됐다고 그날 일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뭐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의찬의 성격다웠다.
높은 곳에 위치한 가을의 집까지 걸어오기 힘들다며 차도 찾아가지 않더니 결국 오늘 찾아간 모양이었다.
의찬이 어떻게 집으로 갔는지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의찬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전화를 걸어 볼까 싶어 휴대폰을 꺼내 들었던 가을이 다시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었다.
의찬과 수다를 떨기보다 지금은 뭐라도 빨리 먹고 쉬고 싶었다.
빌라 입구로 들어가려던 가을의 눈에 한군데 모아 둔 가구들이 보였다.
어디서 이사라도 갔는지 폐가전 수거 스티커가 붙은 낡은 가구들이었다.
혹시 쓸만한 게 없나 유심히 살펴보던 가을이 마땅한 게 없는 듯 그대로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삐빅-
가을이 빠르게 안으로 들어와 던지듯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벗었다.
늘 편안한 복장을 해서 티가 나지 않을 뿐, 가을은 말라 보이는 몸과 달리 우윳빛 피부가 돋보이는 글래머였다.
“역시 내 집이 최고야.”
자연인의 상태가 된 가을이 욕실로 들어가 빠르게 샤워를 끝내고 커다란 수건만 두른 채 거실로 나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을이 싱크대 서랍을 열었다. 빨리 라면을 끓여 먹고 한숨 잘 생각이었다.
“어? 다 먹었나??”
분명 한 봉을 사다 놓고 한 개가 남아 있는 줄 알았는데 서랍은 텅 비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가을이 휴대폰을 집어 들고 방으로 가 침대에 누운 채로 배달 어플을 살펴보았다.
배달비가 들지 않는 음식점 위주로 골라 리뷰를 살펴보던 가을이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이내 몸을 움찔거리며 깜빡 잠이 든 가을이 손에 든 휴대폰을 놓쳤다.
“아야!”
갑작스러운 휴대폰 공격을 받은 가을이 이마를 문지르다가 휴대폰을 던지듯 옆에 두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얼마 뒤.
드드드드드- 드드드드드드-
어디선가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가을이 잔뜩 인상을 쓰며 눈을 떴다.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어 가을이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둘렀던 커다란 타월을 벗고 옷장에서 편안한 옷을 꺼내 입었다.
드드드드드- 드드드드드드-
그사이 끊임없이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지?”
밖에서 나는 소리에 가을이 큰 방에 연결된 베란다로 가서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빌라 앞에 ‘고급 포장 이사 전문’이라고 쓰인 커다란 이사차와 그 옆에 사다리차가 보였다.
“누가 이사 오나 보네?”
드드드드드- 드드드드드-
가구들이 사다리차를 타고 하나씩 위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위치로 볼 때는 502호였다.
올라가는 물건들이 까막눈인 가을의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잠시 그 모습을 보던 가을이 베란다 문을 닫으려는 순간, 한눈에 봐도 키가 훤칠한 남자가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주인인가?”
앞집에 이사를 오는 사람인가 싶어 가을이 유심히 살펴보려 할 때, 남자가 고개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