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의 신호가 가고 태준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빠·····.”
-……
가을이 통화를 하며 쓰러지듯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선호…… 오빠.”
한참이나 말이 없던 태준의 목소리가 수화음을 타고 흘러나왔다.
-……술 마셨어요?
“마셨지. 아주 맛있게 말아 마셨지.”
-얼마나 마셨는데 정신을 못 차려요.
“얼마나 마셨더라, 다섯 잔인가, 여섯 잔인가…….”
-누구랑요.
“의찬이랑 가영이랑.”
-집이에요?
“응. 집.”
-정신 좀 차리고,
“선호 오빠…… 박선호.”
-…….
“……대체…… 어디 있는 거야.”
-…….
“왜 안 와…….”
무릎에 좀 더 얼굴을 파묻은 가을이 몸을 휘청거렸다.
“대답 좀 해 주라…… 오빠…….”
-…….
“오빠…….”
-……응.
“어딨어……?”
-회사.
“왜…… 안 와?”
-갈까.
“응. 와라…… 보고 싶어…….”
-…….
“오빠는 나 안 보고 싶어? 그래서…… 안 오는 거야?”
태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와라…… 나한테 좀 와 주라…….”
태준의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았다.
-기다려.
딩동- 딩동-
똑똑-
삐비빅-
초인종 소리에 이어 노크 소리, 이내 도어락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덜컥’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건 태준이었다.
가을이 알려 준 주소와 현관 비밀번호를 듣고 무작정 가을의 집으로 찾아온 태준이 신발을 벗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거실 가운데엔 신문지 위로 꽤 많이 남아 있는 여러 개의 배달 음식과 빈 맥주병, 소주병이 보였다.
거실을 보던 태준이 가을을 찾으려는 듯 방문이 활짝 열려 있는 큰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침대 위에 의찬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잠들어 있었다.
“하…….”
가을이 말한 의찬이라는 친구일 거라고 생각한 태준이 인상을 썼다.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남자가. 그것도 가을의 침대에 누워 있자 당장이라도 깨워 쫓아내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태준이 몸을 돌렸다.
다른 방으로 향하다 문득 반쯤 문이 열려 있는 화장실로 다가가 툭- 문을 밀었다.
그 안에는 가을이 몸을 웅크린 채 화장실 바닥에 누워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태준의 입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태준이 슈트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가 흐르고 명석이 전화를 받았다.
-예.
“좀 올라와.”
몇 분이 지난 후 명석이 501호 안으로 들어왔다.
회사에서 업무를 보던 중 걸려 온 가을의 전화에 태준이 일을 잠시 미루고 온 참이었다.
전화하는 상대가 누군지도 모를 만큼 인사불성이 된 가을의 상태를 살필 겸, 이사한 집이 어딘지 확인도 할 겸, 겸사겸사 찾아온 상태였다.
“화장실 바닥이 시원하긴 하죠.”
명석이 곱게 잠들어 있는 가을의 모습에 한마디 거들었다.
“안방부터 치우자.”
두 사람이 의찬이 자고 있는 안방으로 향했다.
명석이 침대에 잠들어 있는 의찬의 어깨를 손으로 흔들었다.
“으응…….”
슬쩍 눈을 떴던 의찬이 몸을 뒤척이다 다시 눈을 감았다.
명석이 다시 흔들어도 의찬은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 되겠는데요.”
“업어.”
“제가요?”
“그거 하라고 부른 거야.”
태준보다 다소 마른 체형이었지만 어둠의 태생인 명석은 힘이 넘쳐나는 강골 체질이었다.
태준이 의찬을 힘으로 반쯤 일으켜 세워 침대에 걸터앉은 명석의 등으로 가져갔다.
“으으으응…….”
살짝 발버둥 치던 의찬이 이내 얌전해지자 그 상태로 명석이 의찬을 업어 작은방으로 옮겼다.
그사이 태준은 화장실로 향했다.
가을은 여전히 새근거리며 단잠에 빠져 있었다.
“제가 할게요.”
어느새 다가온 명석이 가을에게 향하자 태준이 손을 뻗어 명석의 걸음을 막았다.
“이번엔 내가.”
태준이 화장실에 잠들어 있는 가을을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으응…….”
가을이 이불을 끌어안듯 태준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목을 감싸 안았다.
예상치 못한 가을의 행동에 흠칫 놀란 태준이 그 상태로 눈앞에 있는 가을을 내려다보았다.
색색거리는 가을의 숨결이 목 언저리에 닿을 때마다 전기가 통한 듯 몸 곳곳이 저릿해졌다.
살짝 고개만 숙여도 입술이 닿을 듯 가까이 있는 가을의 얼굴에 사로잡힌 듯 태준이 시선을 떼어 내지 못했다.
태준이 그대로 서 있자 명석이 슬쩍 목소리를 냈다.
“무거워요? 제가 할까요?”
“됐어.”
그제야 태준이 안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 거실 좀 치울게요.”
명석이 신문지 위에 널브러져 있는 음식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안방으로 향한 태준이 침대 위에 가을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으응.”
목을 감고 있던 가을이 손을 놓지 않자 태준의 자세가 엉거주춤해졌다.
“손…… 놔야지.”
태준의 목소리에 가을이 살며시 눈을 떴다.
두 사람의 시선이 지척에 닿았다.
“……가려고……?”
태준이 대답 없이 가을만 바라보았다.
[……오빠.]
조금 전 가을이 전화로 했던 말에, 태준은 발신자가 가을이 맞는지 확인했다.
수없이 들어 본 ‘오빠’라는 말이 가을의 목소리로 들려오자 마치 다른 단어처럼 느껴졌다.
‘오빠’라는 말이 그렇게 심장을 간지럽게 하는 단어임을 처음 느낀 태준이 대답하려던 순간, 선호라는 이름이 들렸다.
술에 취한 가을이 애타는 목소리로 찾은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박선호였다.
지금 가을이 보고 있는 사람 역시, 자신이 아니었다.
태준이 목을 감싸고 있는 가을의 손을 풀어냈다.
맥없이 손이 풀린 가을이 다시 태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지 마…….”
태준이 가을의 손을 보았다.
애타는 눈빛으로 내민 저 작은 손을, 잡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가을이 원하는 건 자신의 손이 아니었다.
태준이 주먹을 꽉 쥔 사이 점점 눈이 감기던 가을이 이내 잠에 빠졌다.
박선호.
대체 누구길래.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알 수 없는 감정. 다른 남자와 자신을 착각했다는 불쾌함을 넘어 가슴 어딘가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다 치웠어요.”
명석이 안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이사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짐이 아직 다 안 온 건가?”
명석이 썰렁해도 너무 썰렁한 집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 친구는.”
“일단 작은방에 눕혀 놨어요.”
태준이 성큼 걸어 작은방으로 향했다.
작은방에 대자로 누워 있는 의찬에게 다가간 태준이 몇 번 가볍게 의찬의 뺨을 때렸다.
“이봐.”
“으응…….”
“집이 어디야.”
태준이 다시 의찬의 얼굴을 가볍게 때렸다.
“으으응…….”
“깨워서 어쩌시려고요.”
“이 친구 집에 데려가야지.”
“······.”
“아무리 친구래도 남자를 두고 갈 수는 없잖아.”
명석이 처음 보는 태준의 행동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저 좋아하는 연기를 하는 것뿐인데. 번거롭고 귀찮은 건 질색하는 태준이라면 그대로 두고 가야 정상이었다.
“제가 때려 볼까요.”
“그랬다간 집이 아니라 병원으로 가야지.”
태준이 커다란 손으로 의찬의 턱을 잡고 흔들었다.
“이봐. 집 주소가 어디냐고.”
그 순간 의찬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떠 태준과 명석을 바라보았다.
“누구……? 대리기사……??”
명석이 특유의 신뢰감이 가득 묻어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집 주소가 어디세요~?”
집 주소와 현관 비밀번호까지 술술 말한 의찬을 자신의 차에 태운 태준은 결국 의찬의 집 침대에 그를 던지듯 놓고 나서야 회사로 복귀했다.
* * *
“아으, 머리야.”
가을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방에서 나와 거실 벽에 걸어놓은 시계를 확인했다.
아침 7시. 거의 12시간이 가깝게 잠들어 있다가 깨어났다.
“대체 몇 시간을 잔 거야…….”
가을이 깔끔한 거실을 둘러보았다.
“누가 치운 거지.”
가영은 중간에 갔고 의찬은 자기보다 먼저 취해 안방으로 갔는데. 설거지까지 깔끔하게 되어 있었다.
가을이 작은방으로 향했다. 작은 방엔 가을이 가져다 놓은 옷이 들어 있는 박스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얜 언제 간 거야.”
가을이 화장실로 몸을 돌렸다.
[나한테 좀 와 주라.]
“……뭐야??”
가을의 머리에 퍼뜩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기다려.]
이번엔 상대방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대체 뭐야. 뭔데…….”
침을 꿀꺽 넘긴 가을이 휴대폰을 찾아 안방으로 향했다.
“어딨지??”
안방에도, 거실에도, 작은방에도 휴대폰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휴대폰을 찾아 돌아다니던 가을이 마지막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 옆에 휴대폰이 보이자 잽싸게 집어 들고 통화 내역을 확인했다.
“허허억!!!!!”
가을이 입을 막고 비명을 질렀다.
[강태준 대표님. 통화 7분 2초.]
“7분??????”
가을이 뭔가를 떠올려 보려고 열심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술을 더 사 오겠다는 의찬을 말렸던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통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왜 대표님이랑 통화를 한 거지??”
통화 내역을 보면 걸려온 전화가 아니라 자신이 한 전화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게 없자 가을이 거칠게 머리를 헝클였다.
기억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신 건 지난번 드라마 종방 회식 이후 처음이었다.
“미치겠다, 진짜.”
아침 7시부터 태준에게 연락을 하긴 시간이 너무 일러 가을이 빠르게 세수를 했다.
아침 촬영이 잡혀 있어 9시까진 스튜디오에 가야 했다.
“여기 조명 좀 체크해 주세요.”
주연 배우들의 스튜디오 녹화 준비가 한창이었다.
출근하자마자 도식과 혁진에게 붙들렸던 가을은 태준과 어떻게 된 건지 한참이나 얘기한 후에야 두 사람에게서 탈출할 수 있었다.
가을이 녹화 준비를 하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정가을입니다. 어제 대표님과 통화를 했던데 혹시 제가 뭔가 실수를 했나요?]
보통 9시가 출근임을 생각해 9시 10분쯤 태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한 시간이 지나도록 답변이 없었다.
디링-
메시지 음에 가을이 냉큼 휴대폰을 확인했다.
[통화되면 전화 줘.]
의찬의 메시지에 가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김의찬. 너 언제 집에 갔어?”
-그러니까. 나 언제 집에 왔어?? 대리기사 불렀던 거 같은데, 내 차가 안 보여…….
“네 차 우리 집 앞에 있던데?”
-뭐?? 그럼 난 어떻게 온 건데???
두 사람이 의문에 가득 쌓인 통화를 이어 갈 때 스튜디오 안으로 김 감독이 들어왔다.
“의찬아,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가을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스태프들의 인사를 받던 김 감독이 가을에게 다가왔다.
“나오셨어요.”
잠시 가을을 보던 김 감독이 기침을 한번 뱉어 내곤 말을 이었다.
“저번엔, 내가 말이 좀 심했다.”
예상치 못한 김 감독의 말에 가을이 놀랐던 표정을 되돌렸다.
“알잖아, 화나면 막말하는 거. 미안하다.”
가을이 습관처럼 하던 ‘괜찮다.’는 대답 대신 다른 말을 뱉었다.
“네.”
“이렇게 된 거 좋은 기회니까 잘해 봐.”
술을 마셨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얌전한 김 감독의 태도에 가을이 낮게 고개 인사를 했다.
오늘 촬영장에 김 감독이 오면 자신이 먼저 가서 풀어 보려던 가을이었다.
평생 안 볼 사이도 아니고, 이 바닥에 있으면 부딪혀야 할 사이었다.
김 감독이 잘못한 부분을 다시 한번 짚은 후 ‘3년간 곁에서 배웠으니 부족하더라도 열심히 해 보겠다’, ‘책임 PD를 맡은 김 감독에게 누가 가지 않게 하겠다.’ 이런 각오를 얘기할 생각이었다.
가을의 어깨를 툭툭 치고 김 감독이 다른 곳으로 향하자 잠시 볼일을 보고 온 도식이 그 모습을 보고 가을에게 다가왔다.
“왜, 또 뭐라고 해?”
“미안하다는데요?”
“뭐야, 술 마시고 온 거야?”
“그건 아닌 것 같던데요.”
“왜 저래 저 양반. 안 하던 짓 하면 무서운데.”
도식이 스태프와 얘기 중인 김 감독을 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집들이는 언제 할 거야?”
“무슨 집들이예요.”
“무슨 집들이긴, 조감독 집들이지.”
“나중에, 기회 되면요.”
“기회는 만들면 되지. 술 많이 안 마실게.”
술 얘기에 가을의 입에서 저도 모르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기분 좋게 한 잔 마셨을 때 멈췄어야 했는데.
“근데, 그냥 조감독 좋다는 대표랑 살림을 차리지 그랬어.”
“결혼하지 말라면서요.”
“그 정도 인물이면 해 볼 만하지. 인생 한 번인데 이왕이면 잘난 놈이랑 해.”
“후우…….”
“왜. 그쪽 집안에서 난리 칠까 봐? 하긴 피도 눈물도 없는 그 대표 성격이 누굴 닮은 거겠어. 반대가 만만치는 않을 거야? 그래도 결혼하면 오너 아내가 되는 건데 참아 봐.”
“너무 멀리 가셨으니까 돌아오세요.”
“좀 멀리 갔나? 어디쯤 가 있을까 그럼?”
가을이 도식의 촬영용 카메라를 가리켰다.
“저리로 가셔야죠.”
도식이 자기 자리로 가며 목소리를 냈다.
“오늘은 뭐야.”
“오늘은 각자 먹습니다.”
가을이 다시 휴대폰을 보았다. 여전히 메시지는 ‘0’이었다.
순조롭게 오전 촬영이 끝나고 1시가 되자 혁진이 가을에게 다가왔다.
“조감독님! 오늘 점심, 요 앞에 청남 해장국으로 잡혔습니다!”
“갑자기?”
혁진이 ‘흐흐흐’ 웃음소리를 내며 가을에게 바짝 다가와 섰다.
“덕분에 잘 먹을게요.”
“응?”
“대표실에서 쏜답니다.”
혁진이 가을을 지나치며 ‘청남 해장국으로 이동할게요!’ 하고 소리쳤다.
그때 가을의 휴대폰으로 메시지 음이 울렸다.
[점심시간이면 잠깐 스튜디오 앞으로 나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