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가을이 놀란 얼굴로 복도 계단을 내려가자 의찬이 커다란 상자 옆에 주저앉아 있었다.
“김의찬! 너 괜찮아? 넘어진 거야? 다쳤어??”
가을이 의찬의 앞에 앉아 상태를 살폈다.
“어떻게 하냐. 네 살림살이 내가 다 부쉈나 본데.”
“그게 문제야? 다쳤냐고!”
“······지금 날 더 걱정하는 거야? 이리 와. 오빠가 한번 안아 준다.”
“장난치지 말고. 다쳤어?”
“날렵한 운동신경으로 보다시피 멀쩡하다.”
의찬이 자리에서 일어나 멀쩡하다는 듯 다리를 흔들어 보이자 가을이 그제야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뭔지 몰라도 박살 난 건,”
“네가 사.”
“그러려고 했어.”
주택가 꼭대기에 있던 원룸에서 멀지 않은 곳. 산 아래 위치한 낡은 빌라 501호가 가을이 새로 얻은 보금자리였다.
시간이 없어서 많은 집을 돌아다니진 못했지만 이 집을 보자마자 시야가 막히지 않은 조망이 무척 마음에 들었었다.
예상한 것보다 큰 15평 빌라라 전세대출을 받아야 했지만 비슷한 조건의 집들보다 저렴한 데다 구조도 무척 좋았다.
얼마 되지 않는 보증금을 날린 스태프들의 얘기를 많이 들어 대출까지 받아야 하나 고민했던 가을은 사람 좋아 보이는 집주인 때문에 마음의 결정을 할 수 있었다.
“아이구, 죽겠다. 내가 포장 이사비 준다니까. 그럼 땀 뺄 일 없이 벌써 이사 끝나고 좋잖아.”
가을과 의찬이 마지막 짐을 들고 계단을 올랐다.
짐도 몇 개 없으니 자기가 다 들겠다며 큰소리를 뻥뻥 치던 의찬이었지만,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커다란 상자를 들고 5층까지 옮기는 게 제법 힘이 드는지 연신 구시렁거렸다.
“짐도 달랑 이거밖에 없어서 포장 이사도 안 해 줘.”
“이 아가씨야. 돈 많이 주면 다 해 주거든요.”
“그 돈 내가 아껴 줬으니까 가영이가 깬 접시 사.”
“그건 이미 샀고.”
“샀어?”
“샀지.”
“얼마.”
“……십,”
“십???”
“10만 원짜리 하려다가 8만 원.”
“거짓말하지 말고.”
“야, 네가 내 와이프야? 왜 자꾸 남의 취미 생활에 간섭하고 그래.”
“가영이가 다 깰까 봐 그런다.”
“자를 거야.”
가을이 믿기지도 않는다는 듯 어이없는 웃음소리를 냈다.
“네가 자르기 전에 취업 먼저 하겠다.”
“그럼 좋지. 그 돈 다 받아 낼 거야 내가.”
“사장님, 또 내 흉보죠?”
170cm인 가을보다 더 큰 키에 연한 청 멜빵바지, 까맣게 염색한 머리를 동그랗게 말아서 올린 가영이 501호 현관문 앞에 비스듬히 섰다.
“저 봐, 저 시건방진 포즈. 골반이 멀쩡한 게 이상할 지경이야.”
“그거 하나 들었다고 헥헥대는 거 봐. 체력이 그따위니까 여자 친구가 없지.”
“사장한테 말하는 꼴 좀 봐.”
“여기 가게 아니거든요?”
“가게에선 뭐 달랐고?”
의찬과 가영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가을이 들고 있던 짐을 거실에 내려놓았다.
싱글 침대, 작은 세탁기와 일반형 냉장고. 설치가 되지 않은 가스레인지가 집 안에 있는 커다란 살림살이의 전부였다.
당장 필요한 것들만 빠르게 구매해서 501호에 준비해 둔 가을은 나머진 시간이 날 때마다 차차 마련할 생각이었다.
“아이고 덥다.”
의찬이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가영이 틀어 놓은 선풍기로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사장님이 언니 에어컨 사 주면 되겠네.”
“너는 뭐 할 건데.”
“제가 돈이 어딨어요.”
“클럽 갈 돈 조금만 아끼면 네 언니 뭐라도 사 주겠다.”
“클럽은 공짜로 가는 거예요.”
“뭔 공짜.”
더위로 양 볼이 빨개진 가영이 의찬의 옆에 쪼그려 앉아 선풍기를 쐬었다.
“진짜 뭘 모르네. 나처럼 생긴 애들이 있어야 클럽 물이 좋아지니까, 클럽에서 서로 모셔 가려고 안달이거든요~.”
“자랑이다. 자랑이야.”
“당연히 자랑이죠. 나 때문에 가게 매상 오른 걸 생각하셔야지.”
의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땀에 젖은 티를 잡고 퍼덕거렸다.
친남매 사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언제나 서로를 헐뜯지 못해 안달이었다.
선풍기를 좀 더 자기 쪽으로 향하게 하려고 두 사람이 서로의 어깨를 힘주어 밀어냈다.
“지금 연약한 여자를 상대로 힘쓰는 거예요?”
“체력이 없어서 여자 친구도 못 사귀는데 내가 힘이 어딨어.”
“에이, 진짜!”
가영이 힘주어 의찬의 어깨를 밀었지만 의찬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자 가영이 선풍기를 자신의 앞쪽으로 확 돌려세웠다.
“야!”
“아 저리 가요!”
커다란 상자 하나를 작은 방에 가져다 놓고 나온 가을이 아옹다옹하는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배고프지? 뭐 먹을래?”
“난 물냉면.”
가영이 먼저 빠르게 대답했다.
“이사하는 날엔 짜장면이지.”
“아이, 촌스럽게.”
“물냉면은 뭐 대단히 고급스럽나 봐?”
가을이 무심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들고 두 사람의 곁을 지나가며 빠르게 말을 뱉었다.
“안 내면 진다.”
가을이 던진 말에 의찬과 가영이 반사적으로 가위바위보를 했다.
“아싸!!”
승리는 가영이었다.
베란다로 향한 가을이 새로 이사 온 곳으로 주소를 바꾸고 배달 어플에서 냉면집을 찾았다.
냉면 한 그릇에 8천 원이라는 믿지 못할 가격이 보였지만 이사를 도와주러 온 의찬과 가영에게 큰마음을 먹고 사 줄 생각이었다.
꼼꼼히 음식점 리뷰까지 살펴볼 때 가을의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도식에게 온 전화였다.
“네, 감독님~!”
-이사 잘하고 있어?
“넵!”
-내가 지금 굉장히 놀라운 얘길 들었는데 말이야.
도식이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짐작한 가을이 얼굴을 따라 목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STN’ 대표가, 조감독 좋아한다며?
“뭐, 그렇게 됐네요.”
-그렇게 됐네요? 아니 뭐 이런 편성 직전에 드라마 엎는 부장 같은 소릴 하고 있지?
“지영이한테 들으셨어요?”
-지영이도 있었어? 내가 그 좋은 구경을 놓친 게 한이야. 혁진이랑 그 얘기 듣고 아주 땅을 쳤다.
지영뿐만이 아니라 현장에 있던 스태프들이 발 빠르게 소문을 내고 다녀 방송국엔 태준이 가을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 있었다.
-김 감독은 그러고 가서 별다른 말 없고?
“네, 어제 촬영 끝날 때까지 안 오셨어요.”
-들어 보니 김 감독이 엄청 잘못했더만. 너무 신경 쓰지 마.
“네.”
-근데, 대표랑은 진짜 어떻게 된 거야?
“자세한 건 내일 말씀드릴게요.”
-꼬치꼬치 캐물을 거니까 각오 단단히 하고 나와.
“넵.”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휴대폰이 울렸다.
도식이 뭔가 할 말을 잊었나 해서 무심히 휴대폰을 보던 가을의 눈이 커다래졌다.
[강태준 대표님.]
발신자를 확인한 가을이 슬쩍 거실을 살펴보았다.
의찬과 가영인 여전히 선풍기 앞에 앉아서 뭔가를 얘기하며 각자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가을이 베란다 문에서 끝으로 살며시 걸어가며 조용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강태준입니다.
“네. 말씀하세요.”
-통화하기 힘들어요?
“아뇨, 그건 아니에요.”
-오늘 촬영 없는 날 아닙니까?
“어? 어떻게 아세요?”
-촬영 일정표가 내 앞에 있거든요.
“아……. 역시 대표님이시네요.”
-뭐 하는데 목소리가 그래요?
“지금 이사를 하던 중이었거든요.”
-이사? 어디로요?
“원래 살던 집 근처예요.”
-바쁘겠네. 도와줄 사람 보내 줄게요.
“아뇨!! 짐은 다 옮겼고, 지금 막 냉면 시키려던 참이었어요.”
-혼자?
“친구랑, 동생이랑요.”
-동생이 있었어요?
“네.”
-그럼 냉면 말고 출장 셰프를 보내 줄,
“예에? 아뇨! 냉면이 적절할 것 같아요.”
-그럼 청소하는 사람을,
“괜찮습니다!”
-음, 알겠어요. 그럼 점심 맛있게 먹고 도와줄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요.
가을이 끊길 것 같은 전화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근데 왜 전화하셨어요??”
-왜 했을까요?
“글쎄·····요?”
-목소리 듣고 싶어서 했습니다.
“…….”
-좋아하니까.
“……!”
-오래 듣고 싶었는데, 바쁜 것 같으니까 끊을게요.
“아…… 네, 그럼…….”
뚝- 전화가 끊겼다.
좋아한다는 말 참 잘하네.
어쩐지 금방 끊긴 전화가 아쉬워 가을이 휴대폰을 빤히 바라보았다.
“누구야?”
“아이 깜짝이야.”
의찬이 베란다로 고개를 쑥 내민 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길래 정가을이가 이런 데 숨어서 통화를 하지?”
“숨기는. 냉면 시키려다가 전화 받은 거지.”
“그래서, 누군데.”
“스태…… 야, 네가 내 남편이야? 누군지 뭘 물어?”
“왜 발끈하지? 되게 수상하게?”
“수상할 것도 많네.”
가을이 재빨리 휴대폰에 있는 배달 어플을 다시 켰다.
“물냉면, 비빔냉면?”
“당연히 물냉면.”
고개만 내밀고 있던 의찬이 베란다로 나와 창문을 열었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집에 탑층이라 앞이 막힌 곳 없이 뻥 뚫려 있었다.
“전망은 좋네.”
“그게 제일 마음에 들었지.”
“집에 오지도 않으면서.”
“종방하면 당분간 집에 있을 거니까.”
“웬일이야. 바로 다른 드라마 촬영 안 해?”
“그게, 오늘 얘기하려고 했는데.”
물냉면 세 그릇을 선택하고 결제를 하기 전 ‘육수 많이 주세요.’라고 메모를 남기던 가을이 의찬을 돌아보았다.
“의찬아.”
“왜 이래. 너 이런 목소리면, 좋은 일 아니면…… 되게 안 좋은 일인데?”
가을이 말없이 의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전자야, 후자야?”
표정이 없이 의찬을 보던 가을이 씨익 웃어 보였다.
“나 드디어 입봉한다.”
“진짜???? 뭐야, 단막극 폐지 취소된 거야?”
가을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STN’에서 4부작 드라마를 하는데, 거기에 한 작품. 내가 하기로 했어.”
“야 이 자식! 왜 그걸 이제 얘기해?”
‘STN’에서 하는 드라마는 절대 하지 말라고 하던 의찬이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얼마 전에 결정된 거야.”
“정가을!”
의찬이 와락 가을을 끌어안았다.
“둘이 사귀어?”
가영의 목소리에 의찬이 보지도 않고 꺼지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형부로 좀 별론데.”
“처제로도 별로니까 좀 꺼져 줄래.”
여전히 가을을 안은 채 의찬이 다시 손을 휘휘 저었다.
“우리 언니 넘보지 마요.”
가영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거실로 돌아가자 의찬이 품에서 가을을 놓아주었다.
“왜? 가영이한테도 얘기…….”
가영을 부르려는 듯 몸을 돌리는 가을의 어깨를 의찬이 꽉 잡아 세웠다.
“쟤는 조금 이따가. 지금은 나 혼자 축하하자. 쟤 끼면 산만해.”
가을이 피식 웃었다.
“축하한다. 정가을.”
“고마워.”
“이제 진짜 감독님이네?”
“그렇지.”
“멋지다.”
“알아.”
의찬이 가을의 머리를 사정없이 헝클였다.
“머리 안 감았어.”
“잘했어. 그런 건 새집에서 감아야지.”
의찬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내가 오늘 축하의 의미로 거하게 한턱 쏜다.”
“술은 다음에. 나 내일 촬영 있어.”
“한잔만 해. 이사 축하 겸, 입봉 축하 겸. 물냉면 아직 안 시켰지?”
“응.”
의찬이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냈다.
“너 좋아하는 양장피랑, 고추잡채랑, 또 뭐 시켜 줄까?”
“다 못 먹어.”
“누가 다 먹으래? 먹을 만큼 먹으면 되지.”
의찬이 베란다에서 몸을 돌렸다.
“정가영! 중국집에서 음식 시킬 건데 뭐 먹을래.”
거실에서 가영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짜장면 싫다니까요.”
“면 말고, 요리시킬 거야.”
“깐쇼새우!!!”
만나기만 하면 아옹다옹하면서도 가영을 챙긴 의찬이 배달 어플에서 중국집을 찾았다.
얼마 뒤.
가영은 약속이 있다며 먼저 일어나고, 소맥을 커다란 물컵에 여섯 잔이나 말아 마신 의찬은 가을의 침대에 대자로 누워 잠이 들었다.
의찬을 따라 소맥을 여섯 잔이나 마신 가을은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한 잔만 마시려던 계획은 입봉을 축하한다며 자꾸만 잔을 부딪히는 의찬과, 가영 때문에 결국 여섯 잔이나 마시고 말았다.
하나뿐인 선풍기를 의찬이 있는 안방에 놓아 준 바람에 가을의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벽에 기대어 있던 가을이 천천히 눈을 떴다.
고개만 돌리면 싱크대와, 세탁기와, 침대가 있던 공간이 아닌 엄연한 거실이 있는 공간이었다.
비록 갚아야 할 대출금이 많은 전세였지만 독립한 지 7년 만에 제대로 된 집을 얻게 되었다.
거기다 자신의 일을 누구보다 축하해 주는 친구와, 동생도 있었다.
“……좋다.”
가을이 휴대폰을 들어 사진함에 저장된 환하게 웃고 있는 스무 살의 선호 사진을 바라보았다.
“어때…… 나 잘살고 있지? ……이제 내 소원 들어줄 날 얼마 안 남았으니까…… 준비하고 있어.”
선호의 얼굴을 보던 가을이 술기운에 살짝 몸을 휘청였다.
오늘같이 좋은 날. 선호의 목소리가, 너무도 듣고 싶었다.
무의식에 가깝게 몽롱한 상태의 가을이 휴대폰 최근 목록에서 누군가의 번호를 꾸욱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