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실로 들어오기 전 격한 감정을 어느 정도 진정시킨 가을이 명석의 안내를 받아 대표실 안으로 들어왔다.
태준이 앉아 있는 책상 위로 수북한 서류들이 보였다.
“여기 앉으세요.”
가을이 명석이 안내하는 소파에 앉았다.
태준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느라 가을에게 짧게 아는 척을 한 후 계속 통화를 이어 나갔다.
언뜻 보기에도 태준은 무척 바빠 보였다.
“차 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심신 안정에 좋은 차가 있어요. 한번 드셔 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에 가을이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후 명석이 따듯한 차를 내왔다.
“필요한 거 있으시면 부르세요.”
명석이 가을을 향해 깍듯이 인사를 하고 대표실을 나갔다.
흰 바탕에 금색 장식이 들어간 잔은 마치 왕실에서 쓸 것처럼 고급스러워 보였다.
가을이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한 후 차를 마셨다.
명석이 왜 심신 안정에 좋은 차라고 했는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차에서 나는 향기만으로도 가을은 어쩐지 마음이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아뇨, 거기에 투자하는 건 안 됩니다.”
태준은 아직까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흰 와이셔츠에 반쯤 접어 올린 셔츠 소매. 그 아래로 한눈에 봐도 단단해 보이는 팔뚝에 굵은 힘줄이 드러난 채로 태준은 책상을 ‘툭- 툭’ 치고 있었다.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 그게 말이 됩니까?”
혁진이 얘기한 차가운 사람이라는 소문이 저절로 떠오를 만큼 태준의 주변엔 냉기가 가득했다.
태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마치 얼음이 돼서 바닥에 떨어지고 있다는 착각이 들 만큼 차가운 목소리였다.
“아니죠. 예산 기준을 한참 잘못 잡으셨습니다.”
태준이 통화를 이어 가는 동안 가을은 차를 마시며 자신의 마음을 조금 더 가라앉혔다.
“예, 그럼 내일 뵙고 다시 얘기하죠.”
10여 분간 이어지던 통화를 끝낸 태준이 의자에서 일어나 소파로 성큼 다가왔다.
“미안해요.”
얼어붙을 것 같은 목소리에서 다시 평소 태준의 목소리로 돌아오자 가을이 안도하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아니에요. 제가 갑자기 찾아왔는걸요. 바쁘신데 죄송해요.”
“정가을 씨에게 낼 시간은 됩니다.”
태준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가을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막상 태준과 마주하자 긴장감이 몰려온 가을이 찻잔을 들어 홀짝였다.
그저 앞에 앉아 있는 것뿐인데도 태준에게선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마는 왜 그래요?”
태준이 가을의 이마에 연하게 진 멍을 가리키자 가을이 이마를 문질렀다.
“그냥, 어쩌다 보니까요.”
더 묻고 싶었지만 얘기를 피하는 듯한 가을의 말투에 태준은 입을 닫았다.
가을이 차를 몇 모금 더 마시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향 좋죠? 임 비서가 좋아하는 차예요.”
“안정이 좀 되네요.”
“긴장돼요?”
“뭐랄까, 학교 다닐 때 교장실에 온 것 같은 느낌?”
“하하하.”
태준이 큰소리로 웃다가 말을 이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긴장할 일이 없는데, 좀 놀았나 봐요.”
“많이 논 편이죠.”
태준의 입술이 슬쩍 올라갔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가을이 긴장감에 마른 입술을 혀로 살짝 축였다. 다짜고짜 하겠다고 했지만 한번 거절했던 일이었다.
“그 계약…… 아직 유효한 거죠?”
“정가을 씨만 괜찮다면, 언제든 유효합니다.”
가을이 맞잡은 주먹을 매만졌다.
“이번에 하는 4부작 페스티벌이요.”
가을이 깊은숨을 뱉어 내곤 태준을 똑바로 응시했다.
“총 세 작품 방송한다고 들었습니다.”
“예.”
“그중에 한 편을 제가 연출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지난번 공원에서 계약을 통해 드라마 입봉을 하면 선호가 실망할까 봐 그런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던 가을이었다.
단막극 폐지는 수많은 이해관계와 이익, 여러 가지 문제들이 얽혀 방송국 차원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이렇게 내린 결정을 일개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돌린다는 건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4부작의 경우는 얘기가 달랐다. CP에게 인정받아 얻은 기회를 부당한 방법으로 잃은 것이었다.
이 상황을 제자리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은 태준을 이용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가을의 말에 태준이 팔짱을 낀 채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거면 됩니까?”
“네.”
태준이 가을을 본 채로 입술을 쓸었다.
“좋아요. 정가을 씨를 연출자로 추천하죠.”
“정말요??”
목청 좋은 가을의 목소리가 대표실을 떠나갈 듯이 울렸다.
정작 소리를 지르고 좋아해야 할 태준은 표정을 유지했다.
“그렇게 좋습니까?”
“네!”
좋아하는 가을의 모습에 태준도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자, 그럼. 우리 얘길 하죠.”
태준의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을 눌렀다.
“들어와.”
잠시 뒤 안으로 들어온 명석을 향해 태준이 눈짓을 해 보이자 명석이 휴대폰에 있는 녹음기를 켜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 우리가 하는 얘기는 녹음이 될 겁니다.”
가을이 끄덕였다.
“이게 계약서를 대신할 테니 정가을 씨와 내가 지켜야 할 사항을 얘기하면 됩니다.”
“네.”
“우선 내가 얘기하죠.”
태준의 말에 가을이 긴장한 듯 숨을 죽였다.
“알다시피 이 계약의 조건은 짝사랑입니다.”
가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가을 씨를 좋아하는 기간은 전에도 얘기했지만 1년 정도 될 거예요.”
“네.”
“그 기간엔, 정가을 씨가 남자를 사귀면 안 됩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
가을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믿지 않았다.
사랑해서 결혼한 부모님은 가을이 기억하고 있는 대부분의 날을 서로 죽일 듯이 싸웠다.
한참이나 어린 여자와 재혼을 하면서 가을을 버리고 떠났던 부친은 1년도 되지 않아 이혼을 했다.
그 뒤로 두 번이나 더 재혼했지만 역시나 모두 헤어지며 끝났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허망한 건지 가을은 어린 시절에 깨달았다.
무엇보다 가을은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게 무서웠다.
부모님의 사랑을 바랐지만 그들은 자신을 버렸고, 정을 주었던 할머니는 끝내 가을을 방치했다.
세상에서 가장 믿고 따랐던 선호도 자신의 곁을 떠났다.
그래서 가을은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게 무섭고 또 두려웠다.
선호처럼 떠날까 봐. 또다시 혼자 남겨질까 봐. 다가오는 누구에게든 선을 긋고 넘지 않았다.
“그 부분은 확실하게 약속할 수 있습니다.”
태준이 뭔가를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정가을 씨가 좋아하는…… 선호라는 사람과도 사귈 수 없습니다.”
“그럴 일은…… 없어요.”
가을의 표정을 살피던 태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
“좋아요. 만약 계약을 어기고 누군가에게 발설하거나, 계약 내용을 지키지 않으면, 정가을 씨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큰 불이익을 당하게 될 겁니다.”
“네.”
“이제, 정가을 씨가 원하는 걸 얘기해요.”
가을이 크게 심호흡을 한 후 태준을 응시했다.
“전 이번 4부작 페스티벌에 한 작품을 연출하고 싶습니다.”
“약속할게요. 그거 외에도 원하는 게 있으면 지금 얘기해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가을이 입을 열었다.
“이번 4부작은 중간에 제작이 무산되거나, 편성이 엎어지거나 하는 일 없이 무조건, 반드시! 방송이 되었으면 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할 겁니다.”
“방송이 무산된다면 대표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한 불이익을 당하실 거예요.”
가을이 태준의 말을 흉내 내자 태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명심하죠.”
“이상입니다.”
“더 없어요?”
“없습니다.”
“난, 가진 게 많다고 했는데.”
“이거면 충분합니다.”
만 원만 빌려달라던 가을이 떠올라 티 나지 않게 입술을 올리던 태준이 고개를 끄덕하자 명석이 휴대폰 녹음을 끄고 대표실을 나갔다.
가을이 마치 고용 계약서를 작성이라도 한 듯 열정이 과한 눈빛으로 태준을 바라보았다.
“그럼 전 이제 뭘 해야 하죠?”
“조만간 연락할게요.”
“네.”
“그리고 만약에 ‘세양 그룹’에서 누군가 정가을 씨를 찾아오거나 연락하면, 나한테 바로 얘기해 줘요.”
“누가 찾아오거나 연락하나요?”
“그러지 못하게 할 생각이지만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부분은 정가을 씨가 나한테 얘기를 해 줘야 합니다.”
“…….”
“그래야 내가 정가을 씨를 온전히 지킬 수 있어요.”
가을이 빤히 태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지금 눈뜨고 계약 사기당한 건가요?”
“음?”
“계약할 때 얘기 안 하고 지금 하신 거, 일부러 그런 거죠?”
태준이 한쪽 입꼬리를 느슨히 올렸다.
“좋아하는 여자 지키는 건, 옵션입니다. 아무런 해도 가지 않게 약속할게요.”
벌써부터 좋아한다는 말이 나오자 가을이 괜히 ‘큼큼’ 기침 소리를 냈다.
“옵션도 계약서에 넣어야 하는 건데.”
“하하. 임 비서 다시 들어오라고 할까요?”
“농담입니다!”
가을이 웃어 보이자 태준도 가을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후, 어디서 만났는지, 어디서 고백했는지 등등 몇 가지 말을 맞춘 후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가을도 따라 일어섰다.
“난, 뭐든 확실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저도 확실한 걸 좋아합니다.”
태준이 가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가을은 눈앞에 보이는 태준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 순간 태준이 가을의 손을 당겨 더 깊게 쥐어 잡았다.
그 탓에 태준의 커다란 손 안으로 가을의 손이 쏙 들어왔다.
가을이 슬쩍 손을 빼내려 하자 태준이 더 힘을 주었다. 그 상태로 태준이 가을을 지그시 응시했다.
끓어오르는 듯한 태준의 눈동자와, 의문이 많은 가을의 눈동자가 맞닿았다.
“그럼 이제부터 내가 정가을 씨를, 아주 많이. 좋아하는 겁니다.”
가을과의 계약이 끝나고 책상 소파에 앉은 태준이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을의 손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무척 부드러웠다.
손을 맞잡은 감각이 이렇게 좋은 건지 태준은 처음 느꼈다.
여자와 제대로 손을 잡는 건 처음이라 그런 건지 부드러운 감촉 때문인지 태준은 가을의 손을 놓지 못했다.
태준이 빤히 응시하던 자신의 손을 그러쥐었다.
이 손으로 뭘 잡고 싶어질지, 뭘 원하게 될지 모르지만. 그게 뭐든 놓고 싶지 않아졌다.
* * *
“3신 촬영 시작할게요!”
배우들이 맞춰 둔 동선으로 이동했다.
“레디, 액션!”
‘탁-’
슬레이트 소리와 함께, 배우들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스튜디오 근처 초등학교에서 진행하는 야외 촬영이었다. 방학 기간이라 학교가 텅 비어 수월한 촬영이었다.
낮 기온이 32도가 넘어 가을을 비롯한 스태프들이 기다란 손수건을 목에 두르고 챙모자로 햇빛을 막았다.
“컷!”
김 감독의 사인에 맞춰 잠시 촬영이 끝났다.
“30분 쉬고 가겠습니다~!”
가을의 목소리에 스태프들이 그늘로 달려갔다.
조명 박스 위에 올려 둔 손 선풍기를 챙겨 든 가을이 화장실로 향하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태준과 계약을 하고 난 후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 가을은 내내 긴장해야 했다.
아주 많이 좋아하는 건 어떤 건지.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계약을 한 게 사실이었나 싶을 정도로 이틀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가을은 꿈에 그리던 입봉을 하게 됐다는 사실도 아직 와닿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김 감독을 보는 눈빛에 분노하는 마음이 더해졌다는 것 정도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왜 자신이 연출을 맡는 걸 방해했냐며 따지고 싶었지만 아직 드라마 촬영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할 시기에 자신과 김 감독이 싸우기라도 한다면 드라마에 고스란히 영향을 줄 게 뻔했다.
거기다 그런 얘기를 꺼내면 자신을 챙겨 준 정찬 CP가 곤란해질 게 분명했다.
위이잉-
Rrrr-
의찬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어, 의찬아.”
-통화 돼?
“지금 쉬는 시간.”
-이사가 1시랬지?
“응.”
원룸에서 15평으로의 이사가 드디어 사흘 뒤로 다가왔다. 짐이 별로 없어 의찬과 가영이 이사를 도와주기로 되어 있었다.
-알았어, 그럼 12시까지 갈게.
“그래, 고마워”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운동장으로 향하던 가을의 눈에 스태프들이 우르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 커피차를 보낸 듯 스태프들의 손엔 커피가 들려 있었다.
“조감독님!!”
혁진이 가을을 보자마자 손이 안 보일 만큼 빠르게 흔들었다.
“이쪽으로 와 보세요.”
가을이 대수롭지 않게 커피차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이게 뭐야……?”
커피차 위쪽과, 양쪽 옆 라인에 형형한 색상의 현수막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감독, 정가을.]
[정가을 조감독님과 드라마 ‘시간을 지나서’를 응원합니다.]
그 아래로.
[‘STN’ 대표, 강태준 보냄.]
이라는 문구가 강렬한 색상 조합으로 존재감을 뿜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