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을 일렁이게 하는 태준의 간절한 목소리가 공원을 가득 채웠다.
“난 정가을 씨가 정말 필요해요.”
태준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까 봐 가을은 앞에 보이는 작은 나무만 뚫어지게 응시했다.
“말했지만 정가을 씨한테는 아무런 피해가 가지 않을 거예요. 약속할게요.”
“…….”
“당신이…….”
태준의 목소리가 한없이 낮아졌다.
“필요합니다.”
간절한 태준의 마음을 느낀 가을이 단단히 마음을 먹으려는 듯 질끈 눈을 감았다가 뜬 후 태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혹시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안아 달라는 것과 연관이 있나요?”
태준이 가을을 빤히 응시했다.
눈앞에 있는 정가을이라는 여자를 믿어도 되는 건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다.
비밀이란 건, 한 명이 알게 되면 두 명이 되고 그러다 순식간에 퍼지게 되어 있었다.
명석과 같은 믿음이 없다면, ‘세양 그룹’을 물려받느냐 물려받지 못하느냐 하는 중대한 비밀을 섣불리 얘기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긴박한 처지라도 확실한 신뢰가 있지 않은 이상 이 비밀만큼은 끝까지 가져가야 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그건 얘기해 줄 수가 없어요. 미안합니다.”
“…….”
“그 얘기만 아니면 뭐든, 숨기는 거 없이 얘기할게요.”
잠시 숨을 고른 가을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할아버지한테 이미 절 좋아한다고 얘기해서 그런 거라면.”
가을이 결연한 표정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냥 차였다고 하세요.”
“…….”
“그러고 난 후에, 다른 분을 찾아보시는 게 빠를 거예요. 제가 할 말은 그것뿐입니다.”
가을은 아무리 거짓말이라고 해도 태준이 자신을 좋아하겠다는 계약이 부담스러웠다.
진심이 아니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불필요한 감정은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가을이 되려면 한참 남았는데 어디선가 귀뚜라미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름과 어울리지 않게 처연하게 우는 귀뚜라미 소리에 태준의 목소리가 더해졌다.
“다시 생각해 줘요.”
슬퍼 보이는 태준의 모습에 흔들리지 않으려는 듯 가을이 주먹을 그러쥐었다.
꿈에 그리던 입봉을 할 수 있는 계약. 심지어 보기만 해도 심장이 남아나지 않게 생긴 남자가 짝사랑을 하게 해 달라는 계약이라니.
손해 볼 게 없는 계약이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가을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단막극……하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요?”
“하고 싶죠.”
“그런데요?”
“생각해 보니까 이런 식으로 계약을 해서 이루는 꿈은 누가 싫어할 것 같아서요.”
“…….”
“좀 더 오래, 아니 시간이 많이 걸려도 제 능력으로 이뤄 보려고요.”
멋진 생각이었지만 태준은 가을의 생각에 박수를 쳐 줄 수 없었다.
“혹시…….”
잠시 말을 멈췄던 태준이 조심스럽게 가을을 바라보았다.
“선호라는 사람 때문이에요?”
태준의 입에서 선호의 이름이 나오자 가을이 눈에 띄게 놀랐다.
“선호 오빠를 어떻게 아세요??”
“응급실에 갔던 날, 정가을 씨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어요.”
선호라는 이름에 표정이 달라진 가을의 모습에 어딘가 태준의 기분이 가라앉았다.
“좋아하는…… 사람입니까?”
잠시 망설이던 가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호를 이성적으로 좋아했던 건 아니었지만 한 사람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사람임엔 분명했으니까.
무엇보다 선호는 지금껏 가을이 버티고 살 수 있게 해 준 사람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가을의 모습에 선호라는 사람이 역시 좋아하는 남자가 맞았구나 싶어 태준의 마음이 더 깊게 가라앉았다.
잠시 말이 없던 태준이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럼 더 좋은 거 아닌가.”
태준의 말에 가을이 고개를 돌렸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서로…….”
태준이 가을을 지그시 응시했다.
“좋아하게 될 일이 없잖아요.”
공원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와 달리 태준과 가을이 앉아 있는 공간엔 다른 공기가 흘렀다.
“생각보다 난 가진 게 아주 많아요. 그 말은, 단막극이 아니더라도 정가을 씨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많다는 뜻이죠.”
“…….”
“시간이 더 필요하면,”
“아뇨. 제 결정은 똑같아요. 죄송합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 닿았다가 흩어졌다. 단호한 가을의 모습에 태준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아무런 말 없이 바닥을 내려다보는 태준의 모습이 무척 슬퍼 보여 가을의 마음이 무거웠다.
얼마 뒤.
가을이 사는 곳 근처에 태준의 차가 멈춰 섰다.
버스를 타고 간다는 가을을 태준이 극구 차에 태워 바래다준 참이었다.
30여 분을 오는 내내 태준과 가을은 창밖만 보고, 명석은 운전만 했다. 어색한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지만,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지 않은 채 목적지에 다다랐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차 문을 열고 나간 가을이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태준이 고개를 돌렸다.
뭐든 될 때까지 밀어붙이는 태준의 성격답지 않게 그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명석이 룸미러를 통해 태준의 분위기를 살폈다.
“포기하실 거예요?”
“아니.”
억지로 밀어붙인다고 될 일이 아니었지만, 태준에겐 가을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단막극 폐지 취소 제안이라는 수를 두었다.
이미 결정 난 사안을 개인적인 이유로 번복한다는 게 자신답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걸 이용해서라도 가을을 곁에 두어야 했다.
기다린다고 했지만 마음이 조급해져 촬영팀 스케줄을 확인하고 일부러 이곳까지 온 태준이었다.
뭔가를 고민하는 듯 태준의 표정이 점점 깊어졌다.
Rrrr-
휴대폰 벨 소리에 [이모]라고 뜬 발신자를 확인한 태준이 전화를 받았다.
애란과 세 살 터울 동생인 재란이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방금 자다 깼는데 꿈자리가 영 별로라서, 태준이 너 별일 없지?
“예. 아무 일도 없어요.”
애란이 신신당부해 태준의 존재를 비밀에 부쳤던 재란은 애란이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태준을 ‘세양 가’에 보내라고 설득했다.
가진 것 없는 자신이 맡는 것 보다, ‘세양 가’로 들어가는 게 태준에게 나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세양 가’에 들어오기 전 태준은 애란에게는 딸 같고, 아들 같은 아이였고 재란에게는 한없이 사랑스러운 조카였다.
제 엄마를 지키겠다며 주먹을 쥔 모습이 귀여워 동네 사람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다.
애교 많고, 웃음 많고, 살갑던 태준이 애란이 사망한 후 바뀌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재란은 태준을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아렸다.
[언제 속초 한번 와, 우리 조카 얼굴 한번 보자.]
“예.”
어두운 표정으로 전화를 끊은 태준이 한없이 가라앉은 눈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 * *
“미쳤어?”
김 감독이 던진 대본이 또다시 가을의 얼굴을 강타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대체 일을 왜 이따위로 하는 거야! 이래서 어디 너랑 또 일하겠어?”
스태프가 한 실수를 가을에게 한참이나 풀어 대던 김 감독이 ‘아이 씨’를 연발하며 편집실을 나갔다.
가을이 묵묵히 바닥에 떨어진 김 감독의 대본을 집어 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대본 모서리에 맞은 가을의 이마가 그새 퍼렇게 멍이 들었다.
“죄송해요…….”
“괜찮아.”
가을이 미소 지으며 스태프의 등을 툭툭 쳤다.
기분 전환을 하고 싶어 편집실을 나와 화장실로 향하던 가을이 복도를 걸으며 어깨를 꾹꾹 주물렀다.
[당신이 아니면. 안 돼요, 내가.]
며칠 전 태준이 한 말에 계속 잠을 설쳐 오늘 아침에도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못하고 대충 동그랗게 말아 올리고 나와야 했다.
자꾸만 눈앞에 나타나 마음을 어지럽히는 남자.
자신이 아픈 걸 알아채는 모습 때문이었을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가을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목조목 예쁘게 생긴 가을은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쪽지를 주고 가거나, 직접 고백을 받는 일도 꽤 되었다.
고맙게 생각하긴 했지만 고백을 받았다고 심장이 두근거린 적은 없었다.
그렇게 20살 이후로는 정신없이 일만 했다.
여전히 고백해 오는 남자들이 있었지만 선호를 기다리면서 꿈을 좇기에도 빠듯해 가을은 고백을 모두 거절했다.
“조감독.”
도식의 목소리에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걷던 가을이 이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어우, 난 커다란 나무가 걸어오는 줄 알았어.”
도식이 너무도 쨍한 가을의 녹색 티셔츠를 가리켰다.
“저한테 피톤치드 향기가 나는 것 같지 않아요?”
“그래, 산속에 온 것 같고 좋네. 아참, 오늘…….”
“오늘 저녁은 김가네 국밥입니다.”
“오~ 좋아.”
엄지를 척 들어 보인 도식이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막 화장실로 들어가려던 가을을 보고 누군가 빠르게 다가왔다.
“가을 씨!”
“어? CP님 안녕하세요!”
가을에게 단막극 연출 기회를 줬던 정찬 CP였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연락하려고 했는데, 잘됐네.”
“무슨 일이신데요?”
“김 감독한테 뭐 밉보였어?”
“네??”
“그게, 이번에 4부작 페스티벌이 편성될 예정이거든.”
“4부작 페스티벌이요?”
“총 세 작품이 방송될 예정인데, 그중에 한 작품이 내가 아는 작가한테 받아 둔 기획안이란 말이지.”
“네.”
“그래서 내가 연출가로 가을 씨를 추천했는데, 김 감독이 반대를 했어.”
“……김 감독님이요……?”
“가을 씨는 아직 4부작 맡을 깜냥이 아니라고 말이야.”
“하…….”
충격으로 바닥에 닿았던 가을의 심장이 이내 어지러울 만큼 거칠게 요동쳤다.
보나마나 자기 대신 김 감독의 학교 후배나 지인을 연출가로 추천하려는 게 분명했다.
“그 페스티벌 총 책임 연출이 김 감독이야. 그러니 내가 더 우기지도 못했고. 가을 씨, 김 감독 밑에서 오래 일했잖아. 밀어 줄 만도 한데 오히려 반대를 하니까 이유가 뭔지 궁금하더라고.”
정찬 CP가 뭔가 생각난 듯 눈을 빛내다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말이야. 단막극 폐지 강력하게 찬성한 사람이 김 감독이었네.”
“……네??”
뭔가에 얻어맞은 듯 가을의 머리가 멍해졌다.
“뭐 이유야 시청률이 안 나온다는 거였는데. 피디들 사이에서 가을 씨 일 잘한다는 얘기 나오면 희한하게 흉을 보더란 말이야. 근데 생각해 보니까.”
뭔가를 생각하며 가늘게 눈을 뜬 정찬 CP가 말을 이었다.
“가을 씨 일 잘하니까, 자기 옆에 두고 쭉 조연출로 쓰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다 드네?”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한 채 눈썹만 파르르 떨던 가을이 주먹을 꽉 쥐고 정찬 CP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4부작 페스티벌 연출자들 다 내정됐나요?”
“아직은 아니고. 각자 연출할 사람들 추천을 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공채 피디들이 유력하지.”
가을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자신을 끌어 주길 바란 적은 없지만, 이런 식으로 방해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누군가 ‘CP 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정찬 CP가 기다리라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아는 척은 하지 말고. 김 감독이랑 뭐 안 좋은 거 있으면 풀어 보라고 얘기한 거니까. 알지?”
“네.”
서둘러 어딘가로 가는 정찬 CP의 모습을 보던 가을이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주먹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탁.’
가을의 눈앞에 그동안 수없이 이마를 맞고 떨어진 대본이 재생되었다.
[미쳤어? 이따위로 일할 거면 조연출 때려치워! 이런 실력으로 네가 무슨 조연출이야?]
[너 정도 실력 가진 애들은 널리고 널렸어. 대체될 수 있는 실력이란 말이야! 어디서 기고만장이야!]
가을이 조금 전 김 감독에게 얻어맞은 이마를 문질렀다.
맞은 건 이마였는데, 심장이 욱신거렸다.
[가만히 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꽂아 줄까.]
[넌 나만 믿어. 나나 되니까 널 밀어준다고 하는 거야.]
김 감독을 향한 배신감은 어느새 분노로 바뀌었다.
움켜쥔 손이 피가 통하지 않아 저릿한 통증이 일었다.
점점 거칠어진 숨소리를 내던 가을이 어딘가로 빠르게 걸어갔다.
[생각보다 난 가진 게 아주 많아요. 그 말은, 정가을 씨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많다는 뜻이죠.]
가슴에 뭔가가 끓어오른 가을이 뛰듯이 걸어가며 휴대폰에서 태준의 번호를 찾았다.
통화를 누르고 신호가 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태준이 전화를 받았다.
-강태준입니다.
가을이 결연한 표정으로 맹렬하게 눈을 빛냈다.
“할게요.”
폭발하듯 앞뒤 없이 내뱉은 가을의 말에 태준이 대답했다.
-지금, 어딥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