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90)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가을은 앞에 서 있는 사람이 태준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 순간, 태준의 등이 세상 무엇보다 든든해 보였다.

“거기 서서 얘기해.”

“뭐야, 너도 스태프야?”

“반말하지 말고.”

남자보다 한참이나 큰 태준이 서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자 남자가 움찔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 이게 평범한 시민을 위협하고 말이야.”

남자의 말에 태준이 피식 웃었다.

“위협이 뭔지 모르나 보네.”

남자의 옆으로 기다란 그림자 하나가 더해지자 어딘가 오싹한 기분이 든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달을 등지고 선 명석이 안경을 올리며 씨익 웃어 보였다.

웃고 있는 입과 다르게 달빛에 반사된 안경 너머 명석의 눈빛은, 마치 미치광이 살인마 같은 느낌이었다.

“뭐, 뭐야…….”

겁을 먹은 남자가 다시 슬쩍 앞을 보았다.

입꼬리를 길게 늘여 웃고 있는 태준 역시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앞뒤로 막아선 두 사람의 모습에 눈을 깜빡이던 남자가 꽃게처럼 슬슬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이내 도망치듯 빠르게 뛰어가더니 우뚝 멈춰 뒤를 돌아보고 소리쳤다.

“내가 민원 넣을 거야! 두고 봐.”

혹시라도 태준과 명석이 따라올까 봐 뒷걸음질 치던 남자가 곧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갔다.

가을을 보호하듯 등지고 서 있던 태준이 그제야 가을을 향해 몸을 돌렸다.

“괜찮아요?”

“…….”

“정가을 씨.”

“……네?”

가을이 정신이 돌아온 듯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많이 놀랐어요?”

“아뇨, 고맙습니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태준을 향해 가을이 꾸벅 인사를 건넸다.

“위험하게 왜 혼자 돌아다녀요?”

“사정이 좀 있어서요. ……대표님은 여기 어쩐 일이세요?”

가을이 태준과 명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우연히 지나가던 길에 촬영 버스가 보여서, 궁금해서 한번 와 봤어요.”

가을이 고개를 끄덕였다.

“쉬는 시간이에요?”

“아뇨. 촬영이 딜레이돼서 잠깐 쉬러 가던 중이었어요.”

가을의 얼굴이 강력하게 휴식을 외치고 있어 태준은 말하지 않아도 가을이 얼마나 고단한 상태인지 느낄 수 있었다.

“쉬러 어디로 가요?”

“차요.”

“바래다줄게요.”

태준의 말에 잠시 망설이던 가을이 발걸음을 옮겼다.

태준은 가을의 옆에서, 명석은 마치 호위무사처럼 멀찍이 뒤에서 따라왔다.

예상하지 못한 도움을 받아서 그런지 태준의 제안에 아직 답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가을은 마치 친구를 만난 듯 그에게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불쾌지수를 올리던 습하고 더운 공기가 어쩐지 상쾌해졌다.

가볍게 운동을 할 수 있는 기구들이 있는 작은 공터를 지나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촬영 차를 세워 둔 곳이 나왔다.

‘찰싹!’

적막감이 흐르던 공간에 요란한 소리가 퍼졌다.

“자꾸 모기가 물어서…….”

얼결에 모기를 죽인 가을이 머쓱한 표정으로 팔에 달라붙어 죽어 있는 모기를 손으로 툭 쳐 냈다.

얼핏 봐도 가을의 팔 여기저기에 모기에 물린 흔적이 많아 보였다.

태준이 여기저기서 달려드는 모기를 향해 손을 휘휘 저어 댔다.

“조명 때문에 촬영장엔 모기가 더 많겠어요.”

“모기한테 강제 헌혈 당해 봤어요?”

“강제 헌혈이요?”

“오디오 때문에 물려도 그대로 있어야 하거든요.”

“그렇겠네요.”

모기에 물려 빨갛게 부어오른 자국이 안쓰러우면서도 뺨에 물린 곳은 귀여워 보여 태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안 더우세요?”

청바지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는 가을과 달리 태준은 반듯하게 차려입은 스리피스 슈트 차림이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가을에 비해 태준은 전혀 더워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더위를 잘 안 타서요.”

“와- 부럽다.”

“부러워요?”

“엄청요. 전 더위도 추위도 잘 타거든요.”

가을이 목을 타고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스윽 훔쳐 냈다.

“손수건 줄까요.”

“네? 아뇨.”

가을이 손으로 빨아서 곱게 개어 놓은 태준의 손수건을 떠올렸다.

거울을 닦는 용도로 쓸 생각이었지만 비싼 제품인 걸 알고 나니 그럴 수가 없었다.

돌려줘야 하나.

가을이 손수건을 생각하며 하나로 높게 묶은 머리를 습관처럼 손으로 훑어 내렸다.

그때 연한 바람을 타고 가을의 베이비로션 향기가 태준에게 날아들었다.

숱한 고급 향수보다 은은하게 흘러드는 베이비로션 향기가 태준의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어느덧 두 사람이 촬영 버스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럼 들어가 볼게요.”

가을의 말에 깊게 내려앉은 태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가을 씨.”

“네.”

“생각, 해 봤어요?”

이틀 내내 가을의 연락만 기다렸던 태준이 참지 못하고 용건을 꺼내 들었다.

“그게…….”

“어? 가을 누나!”

혁진의 목소리에 가을과 태준이 고개를 돌렸다.

태준의 모습을 빠르게 훑은 혁진이 고개 인사를 건넸다.

“나 찾으러 온 거야?”

“예. 최고은 지금 왔어요.”

“전화를 하지.”

“좀 전에 술 취한 남자가 난동 부리고 가서요. 감독님이 누나랑 같이 오라고요.”

아마도 조금 전 그 남자일 거라고 생각한 가을이 고개를 끄덕이고 태준을 돌아보았다.

“저, 지금 촬영하러 가야 해서요.”

“기다릴게요.”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데.”

“괜찮으니까 끝나면 그때 통화한 번호로 전화해요.”

“네, 그럼.”

태준에게 인사를 건넨 가을이 혁진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며 슬쩍 태준을 돌아본 혁진이 조용한 목소리를 냈다.

“누구예요?”

“누구 같아?”

“신인배우나 모델?”

“땡.”

“아이돌 지망생?”

“아니. ‘STN’ 대표님.”

“미쳤네. 진짜요??”

“그래, 그 마음 나도 알지.”

“뭐야? 소문엔 철벽남이라던데. 그런 분위기가 아니던데? 어어? 설마 둘이,”

“아니고.”

“와- 근데 살벌하게 잘생겼다는 소문만 들었지 얼굴은 처음 보는데 소문이 사실이었네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저승사자라고 하는 게 믿길 정도로 태준의 외모가 이 세상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던 가을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이 여기엔 왜 오신 거예요? 원래 아는 사이예요?? 어떻게 아셨어요??”

가을과 영혼의 랩 단짝인 혁진이 짧은 다리를 종종거리며 마치 랩처럼 쉴 새 없이 질문했다.

“지나가다가 촬영차 보고 들르셨고, 원래 아는 사이 아니고, 드라마 문제로 알게 됐고. 됐지?”

가을 역시 속사포 랩 같은 빠른 대답을 했다.

눈을 빛내던 혁진이 이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 참 불공평하지 않아요? 어떻게 저렇게 다 가질 수가 있지. 잘생겼지. 돈 많지, 키도 크지.”

“그러게.”

“성격 나쁘단 소문도 사실인지 궁금해지네요.”

“그런 소문도 있어?”

“약속 시간에 1분이라도 늦으면, 이거래요.”

혁진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시간 허투루 쓰는 걸 엄청 싫어한다던데요.”

그런 사람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촬영을 기다린다고?

그만큼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가을은 어쩐지 태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원미디어 권수연 대표님 아시죠? 그분이 그러시더라고요. 그렇게 차가운 사람은 처음 봤다고. 얼어붙다가 동사할 뻔했다고요.”

가을이 조금 전 행패를 부리는 남자를 막아섰던 태준을 떠올렸다.

갑자기 안아 달라거나, 자신을 좋아하겠다고 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차갑다고 느낀 적은…… 있었구나.

산 정상에서 태준을 만났을 때, 반갑게 인사하는 자신과 달리 태준은 무척 차가웠다.

그랬다가 안아 달라고 하고, 손수건도 준다고 하고…… 기다린다고 하고. 좋아하겠다고 하고.

“역시 이상한 사람이야.”

“그렇게 이상해요??”

가을의 혼잣말에 대답한 혁진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자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가을은 환하게 조명을 밝히고 있는 현장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이미 도식에게 호되게 혼이 났는지 고은의 입이 한참이나 나와 있었다.

김 감독이었으면 먹힐 애교가 도식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한 번에 가자, 한 번에.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다 돈이야.”

시간이 늦은 만큼 남자 배우와 빠르게 동선을 맞춘 고은이 몇 번의 리허설을 끝내고 촬영에 들어갔다.

이렇게 비가 오는 신을 원테이크로 찍다가 NG가 났을 경우 비에 젖은 옷과 메이크업까지 다시 챙겨야 했다.

그런 이유로 비를 맞기 전까지 장면을 다 찍어 두고, 비 오는 부분부터 촬영을 이어야 했다.

도식에게 혼이 난 게 효과가 있었는지 고은은 몇 번의 NG만 내고 오케이를 받아 냈다.

살수차에서 뿌리는 비가 세다, 춥다, 힘들다, 등등 숱하게 들었을 게 분명한 투정을 한 번도 듣지 않아 한결 수월한 촬영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촬영이 끝나고 여기저기서 스태프들이 인사를 건넸다.

빠르게 현장을 마무리하고 스태프들이 차에 올랐다.

다행히 특별히 챙겨야 할 뒷일이 없어 가을이 막 버스에 오르려는 도식에게 다가갔다.

“감독님!”

“어, 조감독. 오늘 고생했어.”

“감독님도 고생하셨습니다~!”

“혁진이랑 술 한잔하기로 했는데, 갈 거지?”

“사양할게요.”

“왜? 조감독 좋아하는 삼선 호프 갈 건데.”

“맛있게 드세요.”

도식이 특유의 아빠 미소를 지었다.

“그래 뭐, 조감독이랑은 다음에 먹고. 얼른 타.”

“전 볼일이 있어서 따로 갈게요.”

“무슨 볼일?”

“그냥…… 개인적인 일이요.”

“그럼 사무실로 가지 말고 집에서 푹 쉬다 나와.”

“넵!”

가을이 꾸벅 인사를 하고 커다란 백팩을 메고 몸을 돌렸다.

도식이 차에 오르자 이내 모든 촬영차가 공원을 빠져나갔다.

가을이 휴대폰에서 태준의 번호를 찾았다.

기다린다는 태준이 신경 쓰여 가을은 특별한 사고나, NG 없이 빠르게 촬영이 끝나길 바랐다.

순조롭게 진행됐음에도 거의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몇 번의 신호가 가고 태준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정가을입니다.”

-끝났어요?

“네. 어디 계세요?”

잠시 뒤.

가을과 태준이 공원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차 안에서 얘기를 할까, 카페에 들어가서 얘기를 할까 묻는 태준에게 시야가 트인 공간에 있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가을이 공원 의자에서 얘기하자고 제안을 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통제가 풀린 공원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여기서 촬영했다며?”

“나 최고은 봤잖아. 진짜 예쁘던데?”

“키 완전 쪼그맣다며?”

“작긴 하더라.”

수다를 떨며 지나가던 여자들이 태준을 발견하자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며 연신 그를 힐끔거렸다.

그사이 밤늦게 운동을 하러 나온 사람들이 더 늘어났다.

태준과 가을이 지나가는 사람들만 말없이 쳐다보았다.

8월의 밤공기를 깊게 들이마신 가을이 무거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생각해 봤는데요.”

“예.”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요.”

풀 내음이 섞인 바람이 태준의 머리카락을 헝클였지만 태준은 매만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이유는요.”

“제가 아니어도 되는 일 같아서요.”

“아뇨. 정가을 씨여야만 합니다.”

“어째서요?”

태준이 가을이 앉은 방향으로 몸을 돌리자 그의 얼굴에 공원 조명 때문에 생긴 음영이 드리웠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번씩 쳐다볼 정도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잘생김에 그윽함이 더해졌다.

“당신이 아니면.”

태준의 깊은 눈동자가 가을에게 닿았다.

“안 돼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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