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90)

‘세양 홈쇼핑’ 대표실 안.

비서에게 태준이 와 있다는 얘길 전해 들은 찬영이 거칠게 대표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대표실 책상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태준이 빙글 의자를 돌렸다.

“출근이 늦네?”

“뭐야 너. 네가 왜 거기 앉아 있어?”

“소파보다 여기가 더 편해서.”

‘타닥, 타닥.’

태준이 긴 손가락으로 책상을 치는 소리가 마치 공포영화 효과음처럼 대표실 안을 가득히 울렸다.

태준과 명석을 떨어트리려고 벌인 일이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내심 초조해 하고 있던 찬영이었다.

둘을 떨어트려 놔야 한다고, ‘세양 그룹’ 이미지까지 안 좋아질 수 있다고 문규에게 열심히 피력했는데, 왜 잠잠한지 알 수 없었다.

찬영이 긴장감을 누르고 먼저 선수를 치듯 비아냥거렸다.

“걱정이 돼서 말이야.”

“…….”

“사람들한테 소문이 나기 전에 할아버지가 아셔야 대책을 마련하실 거 아니야. 그러다 ‘STN’ 주가라도 떨어져 봐. 그 피해가 그대로 그룹에 오지 않겠어? 그런 일은 막아야지. 네가 여자를 그렇게 싫어한 이유가 명석이 때문인지 누가 알았겠어? 난 그동안 생각도 못 했다, 야.”

태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말 많네. 강찬영.”

웃고 있지만 섬뜩한 태준의 목소리에 찬영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웃음기를 지운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찬영의 옆으로 다가가자 찬영이 말을 멈춘 채 움찔 뒤로 몸을 빼냈다.

저절로 몸이 움직인 자신의 모습에 짜증이 난 찬영이 인상을 잔뜩 구겼다.

어릴 적부터 이랬다.

자신이 어떤 나쁜 짓을 해도 태준은 문규나 정열에게 이르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쳐다보기만 할 뿐인데도 태준은 늘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왜. 뭐?”

찬영이 괜히 큰 소리를 냈다.

“여름 휴가는 즐거웠나?”

“……뭐?”

“2박 3일로 다녀왔다던데.”

“갑, 갑자기 뭔 휴가 얘기야.”

태준의 입꼬리가 느슨히 휘었다.

“휴가 비용치고 꽤 많이 쓴 거 아닌가? 대체 뭘 하면 그렇게 썼을까, 궁금해서.”

찬영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넘겼다.

휴가 핑계로 도박을 한 찬영은 잃은 돈만 몇 억에 달했다.

이 사실을 문규나 정열이 안다면 혼나는 것 정도로 그치지 않을 일이었다.

“……해외에 나가면 다 그렇지, 예상치 못한 돈도 드는 거고, 또,”

“마카오 물가가 그 정도로 비쌌던가?”

“……!”

찬영이 또다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네가 그걸 어떻게…….”

“글쎄. 내가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지.”

태준이 눈빛이 일순 서늘해졌다.

“내가 뭘 더 알고 있을까.”

“……!!”

상대방의 목줄을 잡고 조이는 것.

이게 태준의 방식이었다.

문규와 정열이 이 사실을 안다면 찬영을 가만히 두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만으로 찬영을 완벽하게 쳐낼 수는 없었다.

그룹을 물려받기 전 여자에 대한 이상 증상을 들킨다면, 찬영이 그룹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찬영의 약점을 쥐고 있다가 설치지 못하게 협박을 하는 쪽이 나았다.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을 때, 얌전히 있어. 강찬영.”

태준이 음산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널, 묻어 버리기 전에.”

찬영의 눈동자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단숨에 찬영의 목을 물어뜯을 듯 사나운 맹수의 기운을 뿜던 태준이 한쪽 입꼬리를 느슨히 올렸다.

“명석이가 어떤 놈인지 알지?”

태준이 피식 웃곤 대표실을 나가자 찬영이 몸에 힘이 빠져 테이블에 손을 짚었다.

왜 늘 패배자의 기분을 맛봐야 하는지, 왜 늘 생각대로 되지 않는지.

“강태준…….”

찬영이 으르렁거리듯 낮게 태준의 이름을 읊조렸다.

‘찰싹, 찰싹.’

스태프라고 커다랗게 쓰인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가을이 촬영장 근처에 있는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연신 자신의 뺨을 때렸다.

이틀 전 태준의 대표실에 다녀오고 제대로 된 고민을 할 시간도 없이 촬영장은 바쁘게 돌아갔다.

“조감독님! 이거 드세요.”

지영이 화장실로 들어와 가을에게 피로 회복제를 건넸다.

“고마워.”

“오늘 살수차 완전 기대 중이에요. 아주 끊임없이 맞았으면 좋겠네.”

오늘 촬영할 장면엔 고은이 비를 맞는 장면이 있었다. 우산을 썼다가 던지는 장면 때문에 고은은 한참이나 작가에게 신을 수정해 달라며 갖은 투정을 부렸다.

심지어 매니저까지 작가에게 전화해 수정을 요구했다.

그러다 한 번만 더 이런 문제로 전화하면 뒤에는 어떤 신이 기다릴지 모른다는 작가의 말을 전달받은 후에야 고은은 얌전해졌다.

“왠지 NG 안 내려고 인생 연기를 펼칠 것 같지 않아요?”

“그랬으면 좋겠다. 빨리 끝내고 쉬게.”

“그게 낫겠네요.”

가을이 피로 회복제를 쭉 들이켰다.

“주세요, 제가 저쪽 재활용 쓰레기통에 버릴게요.”

지영이 가을이 마신 피로 회복제를 들고 나가자 가을도 뺨을 한 번 더 치고 밖으로 향했다.

“조감독!”

현장으로 향하자마자 가을을 찾는 도식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야외 촬영의 책임자는 도식이었다.

“살수차는 언제 온대?”

“조금 전에 통화했는데 근처에 다 오셨답니다.”

공원 측에 양해를 구하고 일반인이 공원으로 들어오는 걸 통제해 찍는 촬영이었다.

공원에서 찍는 촬영의 경우 보통 새벽에 찍는 경우가 많지만, 살수차와 일정이 맞지 않아 부득이하게 저녁쯤 두 시간을 허락받은 상태였다.

이런 경우 시간이 지체되면 시민들의 불만이 이어지기 때문에 빠르게 촬영을 해야 했다.

촬영 준비를 마치고 곧이어 살수차가 도착했다.

남자 배우는 한 시간 전에 와서 대기 중이었고, 고은만 도착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10여 분이 지나도 고은이 오지 않자 더위에 지친 스태프들이 여기저기에 앉아 손 선풍기를 돌렸다.

“최고은이 왜 안 와?”

도식의 목소리에 고은의 매니저와 통화를 하던 가을이 빠르게 다가왔다.

“지금 양화대교에서 사고가 나서 차가 꽉 막혔대요.”

“최고은한테 전화 걸어서 나한테 줘.”

“매니저 말고요?”

“최고은.”

“네.”

가을이 고은에게 전화를 건 후에 도식에게 전화를 건넸다.

김 감독이었으면 가을에게 온갖 폭언을 했겠지만, 도식은 화를 내야 할 대상을 정확히 알았다.

“나 박도식인데. 지금 이 시간에 양화대교인 게 말이 돼?”

수화기 너머 고은이 뭐라 뭐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뭘 하다 늦어? CF? 야 최고은!! 오늘 살수차 시간 조율 어려우니까 절대 늦지 말라고 몇 번이나 전달했어, 안 했어! 이 더위에 너 하나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뭐 다 호구야?”

늘 사람 좋게 농담을 하고 다니는 도식은 한번 화가 나면 맹수였다.

“애교는 네 남자 친구한테 가서나 부려!!”

장신의 도식이 허리에 손을 짚은 채 통화를 하며 인상을 구겼다.

“사고가 문제가 아니라 네가 찍기 싫은 신은 매번 이런 식으로 문제 일으키는 거 아냐!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뛰어오든 날아오든, 30분 안에 와.”

도식이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가을에게 건넸다.

“30분 안에 못 올 텐데요.”

가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도식이 거칠게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일단, 공원 측에 한 시간 정도 지연될 것 같다고 사정 잘 얘기하고, 안내표지판도 9시부터 11시까지로 바꿔 놔.”

“네.”

도식의 말에 가을과 혁진을 비롯한 몇 명의 스태프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혁진이 공원 관계자에게 통화를 하러 간 사이, 가을이 8시부터 10시까지 공원을 통제한다는 안내판의 숫자를 9시부터 11시로 고쳤다.

무더위 속에서 스태프들이 고은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현장엔 손 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찰싹’ 모기를 잡는 소리만 들렸다.

혁진이 가을에게 속삭였다.

“전화 한 번 더 해 볼까요?”

“오고 있다는 얘기밖에 안 할걸.”

이미 한 차례 고은의 매니저에게 전화를 한 가을이었다.

“으휴, 최고은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에요.”

배우가 늦어서 촬영을 대기하거나, 현장에 문제가 생겨 대기하거나, 몇 시간이 될지 모르는 대기는 촬영 현장에선 빈번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 제약이 있는 곳에서 촬영이 지연되면 스태프들의 피는 바짝 말라 갔다.

“비 맞기 싫어서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니에요?”

“바보도 아니고.”

어차피 찍어야 할 신을 미룬다고 없어질 신도 아니었다.

가을이 바닥에서 일어나 간이 의자에 앉아 있는 도식에게 향했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던 도식이 전화를 끊었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내 나이만큼 마셨다.”

가을이 도식의 기분을 풀어 주려는 듯 밝은 목소리를 냈다.

“어쩐지 커피가 부족하다 했어요.”

도식이 스태프라고 쓰인 가을의 검은색 티를 가리켰다.

“넌 평소에 그렇게 좀 입고 다녀.”

“스태프라고 쓰인 옷을 입고 다니라고요?”

“이렇게 정상적인 색을 입으니까 얼굴도 살고 얼마나 좋아?”

“평소엔 죽어 있었나요, 뭐.”

“살아 있었다곤 못하지.”

도식의 말에 가을이 피식 웃었다.

다들 예민해진 상태였지만 그나마 도식이 현장감독이라 피로도가 심하지 않았다.

도식이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면 전화할 테니까 차에 가서 조금이라도 눈 좀 붙이고 있어. 급한 건 혁진이도 있고.”

“괜찮아요.”

도식이 빨갛게 충혈된 눈에 턱까지 내려온 가을의 다크서클을 가리켰다.

“야밤에 너랑 있으니까 무서워서 그래. 얼른.”

도식의 재촉에 가을이 혁진에게 잠깐 차에 가 있겠다는 말을 하고 촬영 버스를 주차한 곳으로 향했다.

통제 표시를 해 둔 공원엔 조명이 켜진 현장 말고는 사람이 드물었다.

가을은 피곤함에 목과 어깨를 꾹꾹 주무르며 걸음을 서둘렀다.

“어라? 스태프네?”

누군가의 목소리에 가을이 고개를 돌리자 술에 잔뜩 취한 남자가 스태프라고 쓰인 가을의 옷을 보고 다가왔다.

“왜 공원을 멋대로 통제하고 난리야~!”

“죄송합니다. 금방 끝날 거예요.”

가을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지나치려 하자 남자가 위협적인 표정을 지으며 가을의 앞을 막아섰다.

현장과 거리가 제법 있어 가을이 손에 든 휴대폰을 꽉 쥐었다.

여차하면 혁진이나, 남자 스태프를 부를 생각이었다.

“방송이 뭐 얼마나 대단한 거라고 일반인이 들어가지도 못하게 막아? 니들이 전세 냈어?”

“죄송합니다.”

한 번 더 사과를 하고 남자를 피해 돌아가려는 가을의 앞을 남자가 또 막았다.

“사과만 하면 다냐고!!”

남자가 위협적인 모습으로 가을의 앞으로 다가오려 하자 가을이 뒷걸음질 쳤다.

그 순간, 누군가 가을의 앞을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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