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90)

-대표님, 정가을 씨 오셨습니다.

명석의 목소리가 긴장감이 흐르는 대표실 안에 흘러들었다.

정가을.

정가을…….

뭔가 떠오른 태준이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문규를 응시했다.

“저는, 결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말에 문규의 미간이 한껏 좁아졌다.

“대체 왜!!”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을 눌렀다.

“들어오시라고 해.”

잠시 후, ‘탈칵’ 문이 열리고 가을이 안으로 들어왔다.

“저, 여기에…….”

대표실 안으로 들어오던 가을이 소파에 앉아 있는 문규를 보고 말을 멈추었다.

“엇, 죄송합니다. 다음에,”

“괜찮아요, 가을 씨.”

……가을 씨??

갑자기 이름만 부르는 너무도 부드러운 태준의 목소리에 가을이 눈을 깜빡거렸다.

태준이 가을에게 다가가 에스코트하듯 문규 앞으로 데려갔다.

“제가 결혼할 수 없는 이유.”

잠시 뜸을 들인 태준이 말을 이었다.

“이 여자 때문입니다.”

네?

가을이 놀란 표정으로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가을의 눈빛을 읽은 태준이 도와달라는 듯 가을만 알아볼 수 있는 눈짓을 했다.

“그러니까.”

문규가 눈을 빛냈다.

“지금 그 아가씨가 태준이 너랑 사귀는 사이라는,”

“아뇨!”

가을이 강하게 부정하자 태준도 이어 관계를 부정했다.

“사귀는 사이는 아닙니다.”

문규가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럼 대체 왜 이 아가씨 때문에 결혼을 못 한다는 게야!”

“그건…….”

태준이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가을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저 혼자, 이 여자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네? 저를요?

가을이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태준이 네가 혼자 누굴 좋아한다고?”

문규가 의심하는 눈빛으로 가을을 올려다보았다.

가을이 많은 것을 묻는 눈빛으로 태준을 쳐다봤지만 태준은 한없이 따스한 눈빛으로 가을을 응시했다.

문규가 사람을 뚫어보는 눈빛으로 가을을 훑어보았다.

“태준이 혼자 아가씨를 좋아한다는 게 사실인 게야?”

“그게…….”

가을이 막 뭐라고 하려 할 때 태준이 가을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단막극.”

“사실입니다.”

가을이 태연한 표정으로 연기를 펼쳤다.

“싫다고 계속 말씀을 드렸는데도 대표님이 제가 너무 좋다고 하시니, 좀 난처하네요.”

“허어…….”

문규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태준과 가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태준이 너, 얼마 전까지 여자에게 한눈팔 시간이 없다고 했는데.”

“만난 지 얼마 안 됐어요. 좋아하게 된 것도 근래 깨달았습니다. 저 혼자 애태우는 중이었는데, 저는…… 꼭 이 여자와 결혼을 하고 싶어요, 할아버지.”

거짓말임을 아는데도 태준의 말에 가을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문규가 가을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티셔츠와 청바지. 대충 묶은 머리.

꽤 예쁜 얼굴이었지만 모습은 평범해 보였다.

“이름이?”

“정가을입니다.”

“하는 일은?”

“드라마 조연출입니다.”

“조연출……. 부모님은 뭘 하시고?”

“할아버지. 저 혼자 좋아하는 거예요. 그런 거 물어보실 단계가 아닙니다.”

가을을 보호하는 태준의 행동을 살펴보던 문규가 다시 가을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가을 양. 우리 태준이가 어디가 마음에 안 들지?”

문규가 가을의 말을 기다리자 태준 역시 은근히 숨죽여 기다렸다.

가을이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대답했다.

“다요.”

“다?”

“네, 전부 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전부 다. 마음에 안 듭니다.”

살면서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말에 태준이 진심으로 상처받은 표정을 하며 가을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았다.

확실하게 거부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 가을은 태준의 시선을 외면한 채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문규가 가늠하듯 태준의 얼굴을 살폈다.

“태준이 넌, 그래도 가을 양이 좋은 거야?”

“예.”

“쯧쯧- 못난 놈.”

문규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낮게 혀를 찼다.

“전.”

태준이 가을을 애타는 눈빛으로 응시했다.

“이 여자가 아니면 안 돼요.”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가을이 아니면 태준은 어떤 여자와도 만날 수 없었으니까.

연기자도 울고 갈 연기력에 가을의 심장이 당황스러울 만큼 멋대로 두근거렸다.

태준이 가을을 향해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잠깐만 밖에서 기다릴래요?”

대충 어떤 상황인지 파악한 가을이 고개를 끄덕인 후 문규를 향해 꾸벅 인사를 건넸다.

가을이 나간 걸 확인한 태준이 그 자리에 선 채로 고개를 돌려 문규를 내려다보았다.

“제가 여자 좋아하는 거, 이제 믿으실 수 있으시죠?”

“…….”

“그러니까 1년 안에 결혼하란 얘기는 없던 걸로 해 주세요.”

“그럼, 저 여자와 결혼을 해.”

“저 혼자 좋아하는데 어떻게 결혼을 해요.”

태준과 문규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분명 저 여자가 들어오기 전까지 태준은 눈에 띄게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들어온 여자가 짝사랑하는 여자라니.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분에 뭔가를 생각하던 문규가 입을 열었다.

“결혼 얘기는.”

태준이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네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확신이 들면. 그때 없던 일로 하마.”

보수적인 성향이 짙은 문규로서는 태준이 남자가 아닌 여자를 좋아한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태준과 문규의 시선이 뜨겁게 부딪쳤다.

“좋습니다. 대신.”

태준이 결연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확실한 믿음을 드리면, 당분간 결혼 생각이 없다는 제 뜻을 받아주셔야 합니다.”

문규가 진심을 가늠하듯 태준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STN’을 확실한 성공궤도에 올리고 후계를 이어받은 후에, 안정적으로 결혼을 하고 싶습니다.”

태준이 한 치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은 눈빛으로 문규를 바라보았다.

“그 뜻은 지켜 주세요.”

“결혼은, 저 여자와 할 셈이냐.”

“가을 씨만 좋다면. 그럴 생각입니다.”

“끝까지 널 거절하면 어쩔 셈이냐.”

“그땐, 지금처럼 다시 선 자리에 나가겠습니다.”

가을과 이뤄지지 않더라도 지속적으로 선을 본다면, 언젠가 결혼을 해 대를 이을 거라는 믿음을 문규에게 줄 수 있었다.

“으음.”

문규가 고민하는 듯 눈을 빛내며 천천히 턱을 쓸었다.

그 순간이 마치 영겁의 시간 같아 태준이 마른 침을 삼켰다.

“오냐. 확실한 믿음만 준다면, 네 뜻을 존중하마.”

문규의 말에 태준이 티가 나지 않게 숨을 내쉬었다.

의심이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태준을 살피던 문규가 앞에 놓인 차를 들었다.

“여자한텐 관심도 없던 녀석이 저 여자는 어디가 그렇게 좋은 게야?”

“먹는 모습이 예뻐서요.”

“뭐?”

“몇천 원짜리 김밥을 먹으면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게, 예뻤습니다.”

“그래서, 네가 싫다는데도 저 여자가 아니면 안 될 만큼 좋다는 게야?”

“예. ……이 여자면 나도 웃을 수 있겠구나. 그런 마음이 들어요.”

처음 보는 태준의 모습을 유심히 보던 문규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래. 지켜보마.”

문규가 대표실 문을 열고 나갔다.

“후······.”

태준이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뱉어 냈다.

늘 얕은수를 쓰는 찬영이었지만 혹시 몰라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설마 찬영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몰고 갈 줄은 몰랐다.

“강찬영.”

낮게 찬영의 이름을 읊조린 태준이 주먹을 그러쥐었다.

간신히 상황을 모면하긴 했지만 짝사랑이라니.

살면서 그런 감정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태준이었다.

관자놀이를 깊게 누르던 태준이 대표실 문을 열고 비서실 앞에 어색하게 서 있는 가을을 쳐다보았다.

“들어와요.”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명석이 몇 걸음 움직였다.

“차 들여갈까요?”

“난 됐고.”

태준이 가을을 보았다.

“저도 괜찮아요.”

가을이 명석을 향해 가벼운 미소를 보이고 대표실 안으로 들어오자 태준이 빠르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요.”

“뭐, 좀 놀라긴 했는데 잘 마무리되신 거면 좋겠네요.”

태준이 한없이 낮아진 눈빛으로 가을을 응시했다.

“정가을 씨.”

“네.”

“혹시 애인 있습니까?”

“상황보다 질문이 늦은 감이 있지만, 없습니다.”

태준이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내 상황이 어떤지 알죠?”

“정략결혼??”

“비슷해요. 결혼을 하라고 말씀하시는데 난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가을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입니다.”

책상에 기대고 선 태준이 팔짱을 낀 채 입술을 쓸었다.

“나랑, 계약 하나 하죠.”

“계약이요??”

“허락해 준다면 단막극 폐지는 없던 일로 할 생각입니다.”

“……!”

단막극이라는 말에 이성을 잃고 태준을 돕긴 했지만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던 가을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어떤 계약인데요?”

“계약, 짝사랑.”

“계약 짝사랑이요??”

“난, 앞으로 정가을 씨를 계속 좋아하고 싶어요.”

“…….”

“아무런 피해도 없을 겁니다. 정가을 씨는 내가 하는 걸 지켜보면서 가만히 있으면 되니까.”

가만히 있기만 하면 단막극 폐지를 철회하겠다니.

“그런데 왜 짝사랑이죠? 결혼을 피하고 싶은 거라면 계약 연애가 더 확실하지 않나……?”

“계약 연애는 안 돼요.”

가을과 연애를 한다고 하면 문규는 무슨 수를 쓰든 결혼까지 추진할 게 뻔했다.

그룹을 물려받기 위해 상관도 없는 가을의 인생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원치 않았다.

거기다 새어머니인 미연이 있는 한 ‘세양 가’로 시집을 오는 것은 가을을 불행으로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짝사랑은 한쪽이 포기하면 끝나지만, 연애를 하다 끝내면 정가을 씨한테는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거예요.”

“…….”

“무엇보다 연애를 한다고 하면 할아버지가 결혼까지 밀어붙일 겁니다.”

가을이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원하는 걸 얻고 가장 깔끔하게 끝낼 수 있는 게, ‘계약 짝사랑’이에요.”

“……그걸 하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데요?”

가을이 관심을 보이자 태준이 한껏 더 진중한 목소리를 냈다.

“난 정가을 씨를 좋아한다고 소문을 낼 생각입니다. 그럼 정가을 씨는 날 싫어한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 주면 돼요. 나 혼자 하는 짝사랑이니까.”

“음…… 언제까지요?”

“1년.”

“1년이요??”

‘STN’을 성공궤도에 올려야 하는 기한은 2년이었다.

1년간 성과를 보였으니 남은 1년 동안 여자를 좋아한다는 모습을 확실히 보여 주면서 ‘STN’을 성공궤도에 올려놓으면 충분히 ‘세양 그룹’을 물려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을이 계약을 허락한다면 문규를 찾아가 조금 전에 한 약속을 문서화 해둘 생각이었다.

또다시 결혼 얘길 꺼내며 약속을 번복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예방책이었다.

그렇게 그룹을 물려받은 후 가을과의 계약이 끝나면, 적당히 선을 보면서 결혼을 미루면 되는 일이었다.

그룹을 손에 넣은 뒤라면 문규나 정열이 결혼을 하라고 독촉해도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었다.

“1년 뒤면 내가 ‘세양 그룹’을 물려받을 거예요. 그때까지만 정가을 씨가 짝사랑 상대를 해 주면 됩니다.”

가을을 좋아하면 문규에게 의심을 받을 일도 없고, 여자에 대한 이상 증상이 밝혀질 일도 없었다. 더불어 선 자리도 거절할 수 있었다.

“혹시 계약 때문에 정가을 씨에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막아 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가을이 진지한 얼굴로 뭔가를 생각하며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당장 대답하기 힘듭니까?”

“……네.”

“그럼, 고민해 보고 연락 줘요.”

태준의 말에 가을이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텐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니까, 긍정적인 대답을 해 줬으면 좋겠어요.”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대표실 안에.

왜 자꾸 날 흔들어~ 네가 뭔데 흔들어. 왜 자꾸 날 흔들어~♬

김 감독 전용 벨 소리가 울렸다.

“네! 감독님, 지금 스튜디오로 넘어갑니다~!”

가을이 목청껏 전화를 받고 태준을 향해 꾸벅 인사를 건넸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아.”

그제야 대표실에 온 이유를 상기한 가을이 바닥을 기웃거렸다.

“어, 여기 있다.”

바닥에 떨어진 건강 귀걸이를 냉큼 챙겨 든 가을이 태준을 향해 다시 꾸벅 인사하고 대표실을 나갔다.

“후우…….”

혹시라도 가을이 바로 거절을 하면 어쩌나 싶어 마음을 졸이던 태준이 그제야 깊은숨을 뱉어 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가을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탈칵.’

대표실 문이 열리고 명석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원래대로라면 손님이 와 계시다고 가을을 돌려보내야 했지만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일부러 가을이 와 있다고 인터폰을 한 명석이었다.

태준이 찬영이 꾸민 일부터 문규가 결혼을 하라고 한 얘기, 그래서 가을에게 계약 짝사랑을 제안한 얘기까지 꺼냈다.

명석이 넥타이를 느슨히 잡아 내렸다.

“강찬영, 손 좀 보죠.”

“봐야지.”

태준이 사납게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내 방식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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