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앞뒤 설명 없이 빠르게 본론만 얘기하는 태준답게 이번에도 역시 직구였다.
손을 잡는 간편한 방법도 있었지만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선 그때처럼 몸이 닿는 포옹이 필요했다.
“지난번처럼 살짝 안아도 됩니다.”
진지한 태준의 표정에 가을이 뭔가 싶어 입술을 달싹이다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아이나 개면 모를까……. 또 안아 드리는 건 좀…….”
매번 태준에게 달려드는 여자만 보다가 거부하는 가을의 모습에 명석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나, 개라고 생각해요.”
자신을 빤히 보는 태준의 눈빛이 어쩐지 부담스러워 가을이 슬며시 목을 매만졌다.
대체 왜 자꾸 안아 달라는 걸까.
그때처럼 진지한 태준과 그 곁에 있는 명석까지 진지한 모습을 보이자 가을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혹시 거절하면, 저한테 어떤 불이익이 있나요?”
“아뇨.”
“그럼 거절할게요.”
“이유를 물어도 됩니까?”
“지난번에는 제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부탁을 들어드린 거고 지금은 아니니까요.”
가을의 단호한 거절에 태준과 명석의 눈빛이 빠르게 오갔다.
“그때.”
그사이 생각을 정리한 태준이 말을 이었다.
“길에서 쓰러졌을 때.”
“…….”
“바로 응급실로 가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한 건 알죠?”
“……네.”
“우리가 그냥 갔으면 그 뜨거운 바닥에서 정가을 씨는 어떻게 됐을까요?”
“…….”
“그날 체감 온도가 어떻게 됐지?”
“40도가 넘었습니다.”
“그렇다는군요.”
“……그래서 그때 산에서 만났을 때 제가 감사의 의미로 차를 사겠다고 했는데 괜찮다고…….”
“그건 정가을 씨가 정한 품목이죠.”
“……제가 행운의 나무젓가락도 드렸는데…….”
“그것 역시 정가을 씨가 마음대로 준 거고요.”
“…….”
“전, 다른 걸로 갚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태준의 말에 가을이 손으로 입술을 쓸었다.
“잠시만요.”
가을이 소파 테이블로 다가가 내려놓은 물을 마시는 사이 명석이 슬쩍 태준에게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치사했어요.”
“알아.”
가을이 물을 마시고 돌아서자, 아무런 말도 안 한 듯 두 사람이 연한 웃음을 지었다.
태준에게 가까이 다가온 가을이 낮게 심호흡을 하고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태준을 안아 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태준을 안는 꿈을 몇 번이나 꿨던 가을은 잠까지 설쳐야 했다.
그렇게 한 번이라도 나와 달라고 사정하던 선호는 나오지 않았는데, 태준은 툭하면 꿈에 나와 피로감이 쌓여 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또 안아 달라니.
장난이거나, 나쁜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건 확실했지만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이유라도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됩니다.”
“…….”
“저한테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간절해 보이는 태준의 표정에 가을의 마음이 흔들렸다.
잠시 망설이던 가을이 이내 결정을 내렸다.
“좋아요. 할게요.”
가을의 말에 태준과 명석이 동시에 긴장했다.
가을이 태준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지금 하면 돼요?”
태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가을이 조심스럽게 태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번에도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요란했다.
가을의 얼굴이 태준의 슈트 재킷에 닿을락 말락 하자 바짝 긴장한 듯 태준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후우…….”
태준이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역시 가을과는 아무런 증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천천히 팔을 올린 태준이 이번엔 가을의 어깨가 아닌 등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얇은 티셔츠 위로 조심스럽게 닿는 태준의 손길이 느껴지자 가을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 사람의 심장 소리가 더 요란해졌다.
태준이 가을을 조금 더 당겨 안자 진한 베이비로션 냄새가 태준의 후각을 자극했다.
이상 증상을 확인하려던 것뿐인데 더 세게 안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큼-.”
명석이 확인이 끝났는데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태준을 향해 눈치를 주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태준이 가을을 놓아주자, 가을도 서둘러 태준의 품에서 떨어졌다.
“……됐죠?”
“고마워요.”
“그럼 응급실 일은 갚은 거예요.”
그 순간, 명석이 발언권을 얻으려는 듯 손을 반쯤 올렸다.
“방금 건, 저하곤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가을이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듯 명석을 향해 장난 섞인 목소리를 냈다.
“안아 드릴까요?”
그 말에 태준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임 비서는, 그럴 필요 없어요.”
어딘가 서늘한 태준의 말투를 무시한 명석이 가을을 향해 미소 지었다.
“저는 나중에 커피 한잔 사 주세요.”
“네. 연락 주세요.”
명석을 보며 미소 짓는 가을의 모습에 태준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졌다.
“그만 가 보셔도 됩니다.”
“넵. 파이팅!”
가을이 뭔지 몰라도 힘내라는 듯 태준과 명석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곤 대표실을 나갔다.
가을을 따라 ‘파이팅’을 하며 주먹을 쥐어 보인 명석을 향해 태준이 고개를 돌렸다.
“친해?”
“친할 리가요.”
괜히 트집을 잡던 태준이 책상에 몸을 기댔다.
“어떻게 생각해?”
“재밌는 분?”
“농담하지 말고.”
은근히 태준을 놀리던 명석이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태준은 정말로 ‘정가을’이라는 여자에게만 아무런 증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저분하고는 괜찮으시네요.”
“그러니까.”
태준이 느슨히 팔짱을 꼈다.
“왜 그럴까.”
두 사람이 말없이 서로 마주 볼 때 명석의 휴대폰이 울렸다.
Rrrr-
명석이 발신자를 확인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알아보셨어요? ……누구라고요? ……알겠습니다. 다시 전화드릴게요.”
며칠 전, 찬영 쪽에 심어 놓은 운전기사가 누군가와 만나는 그의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느낌이 좋지 않아 사진 속 인물이 누군지 명석에게 알아보라고 시켜 둔 참이었다.
“누구래.”
“심부름센터 대표랍니다.”
지금은 고깃집을 하지만 어둠의 세계를 평정했던 집단답게 조사력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심부름센터 대표?”
“예. 주로 불륜 사진을 찍는 데 주력하는 심부름센터랍니다.”
“하…….”
두 사람이 뭔가 느낌이 좋지 않다고 생각할 때 인터폰이 울렸다.
‘삐-’
-대표님, 회장님 오셨습니다.
문규의 등장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태준이 미간을 찡그렸다.
잠시 뒤.
문규와 태준이 대표실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툭.’
문규가 품에서 사진 몇 장을 꺼내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찬영이가 보여 준 사진이다.”
태준이 사진을 집어 들었다.
출장지에서 찍힌, 누가 봐도 의심이 갈 만한 태준과 명석의 모습이었다.
찬영이 벌인 짓이 뭔지 알게 된 태준이 얕게 인상을 썼다.
“너랑 명석이 소문이 영 이상해서 찬영이가 사람을 시켰다더구나.”
“일부러 이렇게 보이도록 찍은 사진이에요.”
“명석이가 네 방에서 함께 있었다는데. 그건 어떻게 된 게냐.”
“명석이랑 제 방에서 술 한잔, …….”
태준이 답답함에 머리를 쓸어 올리고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 명석이랑 저 17년을 함께했어요. 왜 계속 그런 의심을 하세요. 진짜였으면, 이런 사진 찍히게 하지도 않습니다.”
“내 눈으로 보지만 않았어도,”
“절 그렇게 못 믿으세요?”
문규와 태준의 눈빛이 맹렬하게 부딪혔다.
얼마 전 태준과 명석의 모습을 눈으로 보게 된 후 문규는 태준이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런데 찬영이 가져온 사진을 보자 학업을 해야 한다, 일을 해야 한다, 하며 여자를 한 번도 사귀지 않는 태준의 행동들이 남자를 좋아해서 그런 게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묵직한 정적을 깨고 문규가 먼저 입을 열었다.
“1년 안에, 결혼하거라.”
“할아버지!”
“사실이든 아니든. 한 번 의심한 일은 쉽게 가시는 게 아니야. 나나 찬영이를 떠나서 이런 소문이 방송국에 돌기 시작하면 퍼지는 건 금방이다. 그럼 주가에도 영향을 미칠 게야.”
“…….”
“그 전에 결혼부터 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에 등 떠밀려 결혼하기 싫습니다.”
“그래서 1년인 게야. 할애비는 너한테 강제로 정략결혼을 시킬 생각은 없다.”
원하지 않은 결혼을 한 정열이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모습에 문규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애란이 아픈 이유가 자신 때문인 것 같다며 자책하는 정열의 모습도 가슴 아팠다.
문규에게 태준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정열이 애란과 결혼하게 두었더라면. 태준 역시 어린 나이에 어미를 잃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 늘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그리고, 10년 전 그 일.
태준이 기억을 하지 못하는 그 사건.
그 일 때문에라도 태준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길 바랐다.
태준이 ‘STN’을 성공적으로 이끌면 약속한 2년이 되었을 때 모든 주식을 태준에게 넘겨 ‘회장’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태준이 남자를 좋아해 대를 이을 생각이 없다면. 아무리 마음이 아려도 후계 자리는 태준에게 넘겨줄 수가 없었다.
“네가 결혼까지 해야 그룹을 물려주는 걸로 유언장을 수정할 생각이다.”
“할아버지!!”
“내가 의심할 일도 없고, 안정적인 후계를 이어 갈 수 있는데 대체 왜 결혼을 미루는 게야!”
태준이 대답 없이 맞잡은 주먹만 움켜쥐었다.
“1년이면 짧은 시간이 아니야. 그 안에 결혼하기 충분한 시간이다.”
“…….”
“네가 이렇게 강경하니 의심을 하는 게야! 아니면 뭐라도 내가 믿을 수 있는 게 있어야 할 게 아니냐!”
“…….”
“1년 안에, 결혼하거라.”
문규와 태준의 시선이 물러섬 없이 맞닿았다.
그 순간.
‘삐-’
인터폰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