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90)

스튜디오 옆에 위치한 사무실 안.

주로 조연출이 이용하는 작은 사무실 안에 얕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리다가 이내 쌕쌕거리는 숨소리로 바뀌었다.

새벽까지 이어진 촬영을 끝낸 가을이 사무실 안에 있는 간이침대에 누워 몸을 잔뜩 웅크리고 단잠에 빠져 있었다.

“……왜 이제…….”

꿈을 꾸는지 가을이 잠꼬대를 했다.

“기다렸는데…… 왜 이제…… 와…….”

낮게 몸을 떨던 가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도 모르게 울었는지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을이 눈물을 닦아 내며 간이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꿈속에서 분명 가슴이 너무 아프고 그리운 마음이 들어 선호라고 생각했는데. 물안개에 둘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가을이 손에 쥔 휴대폰을 켜 액정화면으로 해 둔 선호의 사진을 보았다.

“진짜 너무한다, 박선호.”

선호는 한 번도 가을의 꿈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꿈에서조차 나오지 않는다고 원망을 하곤 했다.

나오려면 얼굴이라도 제대로 보여 주지…….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일까.

꿈에서 다가온 남자는 어쩐지 선호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가으을~ 누나아~.”

가을이 휴대폰을 들고 책상으로 향할 때 가을보다 작은 키에 다부진 체격의 혁진이 아이스 커피 두 잔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혁진은 예전에 가을과 함께 일한 스태프였다.

말없이 그만둔 FD 때문에 손이 부족하던 참에 다른 드라마를 끝낸 혁진이 FD로 들어와 가을의 일이 한결 편해졌다.

“커피 드세요~.”

“땡큐.”

빨대가 꽂혀 있는 아이스 커피를 건네받은 가을이 쭈욱 들이켰다.

한 모금 마신 것뿐인데 벌써 커피가 반이나 사라졌다.

“어째 얼음이 반이야.”

“그러니까 천오백 원이죠.”

가을이 뚜껑을 열어 얼음을 입에 넣고 으드득 깨물었다.

“집에 가셔서 조금이라도 주무시고 나오시라니까요.”

“왔다 갔다 더 피곤해.”

“사람들은 알까요?”

“뭘?”

“드라마라는 게 스태프들 뼈를 갈아서 만든다는 사실이요.”

“뼈 얘기하니까, 오늘 저녁은 사골국이 당기네.”

“에이, 촬영 감독님하고 놀지 마세요. 어째 점점 닮아 가요.”

노상 먹을 타령을 하는 도식의 얘기였다.

“어? 조감독님 귀걸이 하셨네요? 액세서리 한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혁진이 귀를 가리키자 가을이 자신의 귀에 걸려 있는 작은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얼마 전 가영이 건강 좀 챙기라며 사다 준 건강 귀걸이였다.

팔찌나 목걸이, 반지 같은 건 거추장스러워 안 하는 가을이었지만 귀걸이는 왠지 괜찮을 것 같아 오늘 처음으로 하고 나온 참이었다.

“오늘 ‘STN’ 제가 갈 테니까 좀 더 쉬세요.”

“아냐. 지영이 만나서 같이 가기로 했어.”

디리리링~ 디리리링~

요란한 벨 소리에 혁진이 냉큼 전화를 받았다.

“어~ 잘 도착했어?”

여자 친구의 전화에 목소리가 180도 바뀐 혁진이 통화를 하며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가을이 기지개를 한번 크게 켠 후 휴대폰과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나갔다.

가을이 ‘STN’ 안으로 들어서자 그 곁으로 한국병원 응급실에 왔던 스태프, 스크립터 지영이 종종거리며 따라왔다.

긴 다리를 자랑하는 가을이 성큼 걸을 때마다 150cm 정도 되는 지영은 몇 걸음 빠르게 걸어야 했다.

지영을 위해 보폭을 맞췄다가 무의식에 걸음을 빨리했던 가을이 다시 보폭을 맞췄다.

“조감독님은 천생 연출할 사람인가 봐요.”

“내가? 왜?”

“평소엔 마냥 웃고 다니면서, 카메라만 잡으면 카리스마가. 그때 최고은 바짝 쪼는 거 볼만 했어요.”

“내가 한 카리스마 했지?”

가을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아유, 말도 마세요. 조감독님 멋있었다고 스태프들 단체 메시지 창에 난리도 아니었어요.”

지영이 열심히 종종 걸으며 말을 이었다.

“본업이나 잘하고 사람을 괴롭히든가. 최고은 어제 팬들한테 웃어 주는 거 봤어요?”

“화사하더라.”

“그러니까요. 남자들한테 천사인 척하는데 와우. 소름.”

지영의 말에 가을이 피식 웃었다.

“특히 최고은은 잘생긴 남자들한테, 아 맞다. 조감독님 여기 방송국 대표님 본 적 있으세요?”

“아, 응. 봤지.”

“진짜 잘생겼죠?”

응급실에서 자신이 저승사자라고 했던 사람이 태준임을 모르는 지영이 감탄 섞인 표정을 지었다.

“스태프들이 한참 난리 났었잖아요. 재벌 아들에, 그 외모에, 그 키에, 아주 신이 몰빵한 거죠.”

지영이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말을 이었다.

“근데요.”

지영이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을 하자 가을이 슬쩍 고개를 내렸다.

“소문에 의하면요.”

지영이 좀 더 작은 목소리를 냈다.

“여자를 어~~~엄청 싫어한대요.”

“그래??”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자 가을과 지영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편집실이 있는 3층을 눌렀다.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 안이라 마음이 편한 듯 지영이 한껏 커진 목소리를 냈다.

“대표실 비서도 전부 남자잖아요.”

“비서가 남자라고 그렇게 단정 지을 순 없지.”

“여자한테 그렇게 매몰찰 수가 없대요. 그래서 별명이 철벽남이거든요.”

“철벽남?”

“아이돌 그룹 중에 미남 킬러라고 불리는 애 있거든요? 걔부터, 아나운서랑 몇몇 배우들까지, 아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는데 쳐다도 안 봤대요.”

“아주 방송국 정보통이야, 이지영.”

“훗- 그런 맛이라도 있어야죠.”

그동안 이 일을 하면서 누가 어떻더라 하는 소문 같은 것엔 영 관심 없는 가을과 달리 지영은 온갖 소문에 관심이 많은 과였다.

그리고 그 소문을 발 빠르게 실어 날랐다.

“아무튼 들이댄 여자들이 한둘이 아닌가 봐요. 그 얼굴인데. 가만히 두는 게 이상하지.”

가을이 태준의 얼굴을 떠올렸다.

잘생겼다고 소문난 연예인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잘생긴 얼굴이 분명했다.

거기다 재벌 아들이니, 여자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여자한테 너무 매몰차니까, 어떤 사람은 대표님이 남자를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니까요?”

“에이, 말도 안 돼.”

“근데 전 차라리 대표님이 남자를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다른 여자도 갖지 못하게.”

미남을 좋아하는 지영다운 생각이었다.

가을이 산에서 태준의 팔을 잡으려 했을 때 자신을 경계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여자를 싫어해서 그랬나?

그때 지나치게 자신을 경계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르망 호텔에서 만났을 때는 그런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보고 한 번만 안아 달라고 하던 태준이었다.

안아 달라고 하던 태준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가을은 빠르게 고개를 털어 냈다.

[띵- 3층입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두 사람이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근데 뭐 여자를 좋아하든, 남자를 좋아하든. 사는 세상이 달라서 만날 수도 없는 게 슬프네요.”

“······.”

그래. 사는 세상이 다른 사람이었지.

찾아가면 비서실 앞에서 막히고, 특별한 일 없으면 만날 수조차 없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

Rrrr-

휴대폰에서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왔다.

“먼저 들어가 있어.”

모르는 번호는 주로 촬영과 관련된 전화가 대부분이라 지영을 먼저 편집실에 들여보낸 가을이 목소리를 한번 가다듬고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정가을입니다~!”

-안녕하세요.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나른하면서 섹시한 저음이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순간 가을의 머리에 태준이 떠올랐다.

에이, 설마.

태준이 자신에게 전화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가을이 밝은 다시 목소리를 냈다.

“네! 말씀하세요.”

-강태준입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한 이름이 들리자 가을이 잘못 들었나 싶어 휴대폰을 귀에 바짝 가져다 대었다.

“누구시라고요?”

-‘STN’ 대표, 강태준입니다.

방금까지 사는 세상이 다르다고 생각했던 태준의 전화에 가을이 긴장감으로 살짝 몸을 떨었다.

거기다 일반전화가 아닌 개인 휴대폰 번호로 온 전화였다.

개인 휴대폰으로 전화를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할 때.

-통화 괜찮습니까?

태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 네, 괜찮아요.”

-…….

태준이 아무런 말이 없자 입술을 달싹이던 가을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제 메모지 안 버리셨나 봐요?”

-제작사에 전화해서 물어봤습니다.

“아…….”

하긴, 그 메모지를 지금껏 가지고 있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일로 제작사에 연락처를 물어 전화까지 했을까 싶어 가을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곧이어 태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오늘 시간 됩니까?

“오늘이요??”

-시간 되면, 좀 봤으면 싶은데.

“……무슨 일이신데요?”

-정가을 씨를, 꼭 만나야 할 일입니다.

“저를……왜요?”

-그건 만나서 얘기하죠.

가을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제가 ‘STN’에 있긴 한데…….”

“잘됐네요. 기다릴 테니까, 대표실에 잠깐 들러요.”

얼마 뒤.

가을이 대표실 비서실로 들어가 이름을 밝히자 박 비서가 인터폰을 눌렀다.

“대표님, 정가을 씨 오셨습니다.”

곧이어 태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시라고 해.

불과 얼마 전까지 비서들에게 막혀 대표실에 들어가지 못했던 가을이 박 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대표실에 들어섰다.

책상 앞에 서서 뭔가를 얘기하고 있던 태준과 명석이 가을의 등장에 몸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태준이 인사를 건네자 박 비서가 가을의 곁으로 다가왔다.

“차 드릴까요?”

“그냥 물 한 잔만 주세요.”

어색하게 서 있는 사이 박 비서가 물 한 잔을 건네주고 나가자 가을이 그 자리에 선 채로 몇 모금 마신 후 소파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긴장감에 심호흡을 내뱉은 가을이 책상 앞에 서 있는 태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은 태준의 옆에 있는 명석에게 옮겨 갔다.

태준에 비해 다소 마른 체격에 언뜻 비슷한 키. 길고 가느다란 눈이 날카로워 보이는. 어쩐지 한복을 입으면 굉장히 잘 어울릴 것 같은 인상이었다.

가을의 시선을 느낀 명석이 가을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비서, 임명석 입니다.”

날카롭던 명석의 눈매가 긴 호선을 그리며 매력적인 눈웃음으로 변했다.

명석의 인사에 가을 역시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정가을입니다.”

“대표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제 얘기를요? 할 얘기가 많지 않았을 텐데.”

습관처럼 꺼낸 명석의 말 때문에 대표실 안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태준의 상태를 지켜보려고 함께 있던 명석이 어색함을 풀려는 듯 특유의 예의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에 길에서 쓰러지셨을 때, 제가 대표님과 함께 응급실로 모시고 갔습니다.”

“정말요? 아…… 안경 쓰신 분!”

의사의 말을 떠올린 가을이 다시 90도로 인사를 했다.

“절 구해 주신 분이 한 분 더 계신 줄 몰랐네요. 그땐 감사했습니다!”

“할 일을 했을 뿐이죠.”

“어쩐지 굉장히 정의롭게 생기신 인상이다 했어요.”

“하하하. 정 감독님도 의롭게 생기셨습니다.”

“아유, 저 아직 감독 아니에요.”

“조연출이시면, 곧 감독님이 되시는 거니까요.”

“하핫…….”

가을이 쑥스러운 듯 목덜미를 문질렀다.

훈훈한 두 사람의 모습에 태준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3일간 출장을 떠났던 태준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상태로 여자 임원에게 악수도 청해 보고, 여자들이 많이 탄 엘리베이터도 타 보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여지없이 증상이 나타날 기미를 보여 마지막으로 가을에게 확인을 하려고 명석과 함께 공항에서 바로 ‘STN’으로 향했다.

자신의 상태도 함께 확인할 겸, 혼자보단 명석과 같이 있는 게 경계심을 풀어 줄 것 같아 대표실로 명석을 불렀는데.

어딘가 금세 사이가 좋아진 두 사람을 보자 태준은 속이 좋지 않았다.

“정가을 씨.”

태준의 낮은 목소리가 훈훈한 두 사람의 분위기를 갈랐다.

“오늘 만나자고 한 건 부탁이 있어섭니다.”

“부탁이요?”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쉬울 수 있는 부탁입니다.”

가을이 긴장된 듯 침을 꿀꺽 삼키며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돈 빌려달라는 부탁은 아니겠지.

재산이 얼만지 가늠도 안 되는 사람이 그럴 일은 없었다.

돈 빌려달라는 부탁만 아니면, 가능한 한 들어줄 수 있었지만 태준의 표정 때문에 어쩐지 긴장감이 몰려왔다.

“말씀하세요.”

“한 번만 더…….”

태준이 지그시 가을을 내려다보았다.

“안아 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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