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90)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려 그 모습을 본 사람은 문규였다.

“이,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태준과 명석이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백발이 성성한 문규가 두 사람을 향해 손에 든 지팡이를 휘둘렀다.

“네 이놈들!”

접촉 사고에 당황할 새도 없이 태준은 문규의 지팡이를 이리저리 피하며 입을 열었다.

“진정하세요. 그게 아니라 명석이 눈에,”

“뺨에, 그 뺨에…… 네 이노오옴.”

큰 충격을 받은 문규가 지팡이를 더욱 매섭게 휘둘렀다.

“일단 진정하시고 들어오세요.”

태준이 지팡이를 낚아채자 힘 좋은 명석이 문규를 뒤에서 안듯이 들고 현관문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은 문규 앞으로 마치 대역 죄인처럼 명석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옷을 챙겨입고 주방으로 향하던 태준이 그 모습에 인상을 썼다.

“뭐 하는 거야? 소파 두고.”

주방에서 찬물 한 잔을 들고 온 태준이 명석에게 다가갔다.

“일어나.”

그대로 앉아 있는 명석을 향해 태준이 좀 더 언성을 높였다.

“얼른.”

명석이 일어나자 그제야 태준이 손에 든 물컵을 문규에게 건네고 소파에 앉았다.

문규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물잔을 테이블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여든을 넘긴 나이였지만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여전히 사람들을 압도했다.

문규의 이런 면모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게 태준이었다.

명석이 태준의 옆에 다가와 앉자 문규가 두 사람을 형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너희들이 그러니까 그, 그…….”

“아닙니다.”

태준이 문규의 말이 끝나기 전에 빠르게 대답했다.

“아닌데, 내가 본 건 대체 뭐냐!”

“보신 건 단순히 사고로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게 된 경위는…….”

태준이 문규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명석이 눈에 뭔가 들어갔다고 해서 불어 주다가 엘리베이터 소리에 놀라서 벌어진 일이에요.”

“네놈 차림새는!”

“샤워를 하고 나왔을 뿐입니다.”

사실일수록 간결하게 얘기하는 게 좋다는 걸 알고 있는 태준이 팩트만 짧게 말했다.

태준의 말에 문규가 명석을 바라보았다.

“사실이냐.”

“예.”

명석이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왜 무릎을 꿇어! 잘못한 게 있으니까 그런 게 아니냐.”

“노하신 거 같아서 일단 풀어 드리려고 그랬습니다.”

쉽게 사람을 믿지 않는 문규가 진득한 눈빛으로 태준과 명석을 훑어보다 입을 열었다.

“서 회장 딸이 한 시간도 안 돼서 들어왔다길래 네 얼굴 좀 볼까 싶어서 왔더니. 그래, 대체 서 회장 딸은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 게야?”

“제가 아니라 서희라 씨가 절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겁니다.”

“쯧쯧쯧- 믿을 소리를 해야지. 어찌 그렇게 여자한테 관심이 없을꼬.”

어릴 적부터 공부밖에 모르는 태준이 여자 문제로 속 썩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문규였다.

그런데 이젠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모습이 영 걱정되었다.

“그러니 방송국에 철…… 철 뭐더라.”

“철벽남입니다.”

명석이 빠르게 대답했다.

“그래, 그거.”

“뜻도 말씀드릴까요.”

명석의 직업의식이 발휘되었다.

“권 집사한테 들었다.”

방송국에 돌고 있는 소문을 권 집사를 통해 전해 들은 문규였다.

“여자한테 얼마나 곁을 안 주면 그런 얘기가 돌아.”

“여자한테 한눈팔 시간이 어딨어요, 제가.”

태준의 검은 눈동자가 더 짙어졌다.

“‘STN’ 주가 이제 겨우 회복했어요. 할아버지와 약속한 기간은 1년 남았습니다.”

현재 ‘세양 그룹’의 회장은 문규, 사장은 정열이었다.

무너져 가던 ‘STN’을 2년 안에 안정적인 궤도로 올려놓으면 ‘세양 그룹’ 회장의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문규의 말에 태준은 정신없이 일에만 매달렸다.

태준이 회장 자리에 앉는 것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확실한 성과를 보이라는 게 문규의 지시였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문규와, 태준, 명석뿐이었다.

“전 지금 ‘STN’을 안정적으로 이끌 생각밖에 없습니다.”

“내가 네 나이 때는 연애도 하면서 기업을,”

“할아버지, 지금은 일만 생각하고 싶어요.”

태준이 백번쯤 들은 문규의 말을 빠르게 끊어 내며 결연한 눈빛을 지어 보였다.

“여자에게 영 관심이 없는 건 아닌 게지?”

“그럼요. 저 여자 좋아합니다.”

사람을 살피는 오래된 습관으로 문규가 태준의 눈빛을 살폈다.

“그룹을 제대로 이끌어 가려면 대를 이을 든든한 아들이 있어야 하는 게야. 시간을 내서라도 좋은 선 자리는 나가 봐라.”

어차피 같은 얘기가 반복될 게 뻔해 태준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예.”

문규가 태준의 옆에 앉아 있는 명석을 돌아보았다.

태준의 볼에 입술을 맞추고 있던 건 명석이었다.

사람에게 곁을 주지 않는 태준과 오랜 시간 함께해 줘서 고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던 거라면.

“태준이는 그렇다 치고. 혹시 명석이 너는 여자를,”

“아닙니다!!!”

옆에서 내내 듣기만 하던 명석이 문규가 무슨 말을 할지 눈치를 채고 언성을 높였다.

“저 여자 좋아합니다!!! 회장님.”

“…….”

“정말 아주 많이! 여자를 좋아합니다!!”

그 말에 문규와 태준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얘기를 너무도 강조해서, 큰 소리로 얘기한 명석이 어딘가 수상해지는 순간이었다.

맹렬한 눈빛을 하는 명석을 보던 태준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태준아.”

“예.”

“찬영이 그놈이 아무리 능력이 떨어져도 차손이다.”

“······.”

“언제든 네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말이야.”

“······.”

“선 자리 다시 알아보고 연락하마.”

결혼을 해야 후계가 안전하다는 말을 돌려 얘기한 문규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현관으로 향했다.

지하 주차장에 세워 둔 고급 세단 뒷자리에 문규가 올랐다.

‘탁-’

서둘러 차 문을 닫은 운전사가 태준을 향해 인사를 하고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문규의 차를 보며 태준과 명석이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큰 소리로 얘기할 건 없었어.”

“……압니다.”

그사이 10년은 늙어 보이는 명석을 보며 태준이 낮은 목소리를 냈다.

“강찬영 쪽은 어때.”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누굴 만나고 다니는지 좀 더 주시해.”

“형.”

명석의 목소리에 태준이 고개를 돌렸다.

“강찬영, 손 좀 볼까요?”

명석이 낀 금테 안경이 마치 섬광처럼 번쩍였다.

“네가 얘기하면 농담 같지 않은 거 알지?”

“진심이니까요.”

한때 어둠의 세력을 장악한 큰형님이자, 지금은 어엿한 요식업체의 사장이 된 김판석의 막내아들인 명석은 마음만 먹으면 손을 보지 못할 사람이 없었다.

지금도 명석의 전화 한 통이면 저세상 외모를 자랑하는 덩치 큰 남자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맛과 질로 정평이 나 있는 회사였지만 프랜차이즈 사장들과 직원들은 당시 깡패들로 구성이 된 곳이 많았다.

과거를 참회하며 해마다 불우이웃도 돕고 좋은 일을 하는 판석이었지만 악덕 손님 앞에서는 본성을 숨길 수 없었다.

명석은 죄 없는 사람을 괴롭히는 걸 극도로 싫어했지만, 태생이 어둠의 아들인지라 그가 말하는 ‘손 좀 봐줄까’의 뜻은 늘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아쉽지만, 그 기회는 나중으로 미루자.”

태준이 명석의 어깨를 툭 치고 안으로 향하자 명석이 뒤를 따랐다.

* * *

‘시간을 지나서’ 스튜디오 촬영 현장에서 가을은 김 감독을 대신해 인터컴을 끼고 촬영을 진행 중이었다.

스튜디오 촬영은 연출자를 대신해 조감독이 촬영을 진행하는 일이 많았지만 열정맨인 김 감독은 모든 촬영을 대부분 자신이 맡아서 하곤 했다.

오늘은 B팀 촬영 쪽에 문제가 생겨 김 감독이 그쪽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가을이 촬영을 맡았다.

카메라를 잡을 때의 가을은 재능과 노력이 겸비된 실력으로 언제나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컷!”

가을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10분만 쉬었다가 다시 찍죠.”

“벌써 몇 번째 다시 찍는 거예요?”

며칠 전 케이크 일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던 고은이 계속된 재촬영에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가을의 옆으로 다가왔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나?”

“그걸 결정하는 건 나예요.”

“조연출이 뭘 안다고.”

고은이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혼잣말 같지 않은 혼잣말을 뱉어 냈다.

작은 키에 비율이 약점인 고은은 자기보다 월등히 큰 키에 비율이 좋은 가을을 시샘했다.

돈 주고 절대 사 입지 않을 것 같은 해괴망측한 옷을 입어도 비율이 좋은 가을은 제법 멋스럽게 소화해 냈다.

거기다 똑소리 나게 일도 잘하고 친화력이 좋아 현장 사람들과 사이가 좋은 것도 친구가 없는 고은에게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고은은 유독 가을에게 더 못되게 굴었다.

고은의 말에 스튜디오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그녀가 특유의 가식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머, 혼잣말이었는데.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요.”

고은의 사과에 가을이 피식 웃었다.

어딘가 상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넘쳐나는 모습에 모두가 숨죽여 가을을 쳐다보았다.

7년을 현장에 있으면서 갑질과 모욕적인 말, 무시, 등등을 숱하게 겪어 온 가을에게 이 정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을이 깨달은 건 어떤 무시와 갑질을 하는 사람이더라도 결국 실력 앞에서는 아무 말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분노를 눌러 내고 자신이 할 일을 하며 실력을 쌓는 것에 충실한 건, 가을과 태준이 닮아 있었다.

“조연출인 내 눈에도 연기가 별로면, 김 감독님 눈에도 별로일 텐데.”

“대체 내 연기가 어때서?”

“같이 모니터링 좀 하죠.”

가을의 말에 고은이 씩씩대며 카메라 앞으로 다가왔다.

매몰차게 변한 성혁을 애타는 눈빛으로 바라봐야 하는데 연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꽤 많은 NG를 낸 상태였다.

가을이 모니터 화면 버튼을 조금 앞으로 돌린 후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고은이 연기를 펼치는 부분이었다.

“42신, 성혁이를 애타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본인이 보기에 어때요.”

“……괜찮은데?”

“정말 만족해요? 이 연기를?”

가을이 빤히 고은을 내려다보았다.

드라마 몇 편으로 톱스타 반열에 오른 고은은 연기력보다 외모가 더 높게 평가되는 배우였다.

그 때문에 김 감독이 탐탁지 않아 했지만 제작사에서 고은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나중에 고은이 어떤 식으로 괴롭힐지 몰라도 연출을 맡은 상황에선 고은과의 기 싸움에서 밀릴 수 없었다.

“다시 찍죠.”

“아이씨, 더워 죽겠는데 뭘 자꾸 다시 찍으라는 거야. 오늘 촬영 접어! 나 안 해.”

고은이 몸을 돌릴 때였다.

“최고은.”

보통의 여자 목소리보다 저음인 가을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살벌한지 고은이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가을을 돌아보았다.

촬영 현장은 연출가와 배우의 기 싸움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이었다.

그 때문에 연출자에겐 실력뿐만 아니라 상대를 제압하는 카리스마가 필요했다.

카메라를 잡을 때의 가을은 그런 분위기를 타고났다.

“다시 찍고 가.”

고은과 동갑이면서도 한 번도 말을 놓지 않던 가을이 반말로 명령하자 기세에 눌린 고은이 다시 제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찍어. 찍으면 될 거 아니야!”

두 사람의 싸움은 가을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 모습에 스태프들이 저마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가을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 시각.

찬영은 모 그룹 딸과 선 자리를 갖고 있었다.

“그럼~ 강태준 대표님은 미국에서 여자 친구도 없었어요?”

“뭐, 그렇죠. 워낙 독한 놈이라 공부밖에,”

“어머~ 그 얼굴에 여자 친구도 안 사귀어 봤다니. 천연기념물이네~.”

아까부터 여자는 찬영이 아니라 태준에게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그룹의 딸인 데다 얼굴도 꽤 예뻐 호감을 가졌던 찬영이 점점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럼 강태준 대표님은…….”

“저기, 박서희 씨.”

“네?”

“그럴 거면 태준이랑 선을 보지 그러셨어요.”

“어머, 죄송해요. 제 주변에서 여자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남자다 보니까…….”

그 말에 찬영이 낮게 실소를 흘렸다.

어릴 적 찬영은 정열이 자신과 미연을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나타난 태준이라는 존재.

정열과 미연이 결혼을 하기 전에 생긴 아이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고작 몇 달 차이로 태준이 형이 된 것도 싫은데, 뭐든 자기보다 뛰어난 그가 너무 미웠다.

그러다 우연히 누군가와 통화하는 미연의 얘기를 듣고 정열과 애란이 헤어지게 된 이유가 미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습게도 찬영은 그래서 더 태준을 괴롭혔다.

정열의 사랑을 애란과 태준이 차지했다고 생각하자 더 끔찍하게 태준이 싫었다.

태준을 향한 미움과 질투.

그리고 그런 감정을 부추기는 미연 때문에 찬영은 늘 가슴에 불을 얹고 살았다.

10년간 미국에서 뛰어난 성적을 내고 한국에 오자마자 ‘STN’을 키워 내는 태준이 대단해 보이면서도 한없이 미웠다.

“태준이가 그렇게 인기가 많아요?”

“어머 그럼요~ 강태준 씨와 선보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태준이, 여자한테 관심 없는데.”

“그러니까요. 왠지 그게 더 멋있달까.”

찬영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여자는 찬영을 보지도 않고 앞에 놓인 음식만 먹으며 말을 이었다.

“들어 보니까 그분 옆에 안경 낀 비서분도 그렇게 멋지다던데. 가질 수 없다면 두 사람이 연결되면 좋겠다고 그러더라니까요? 호호호.”

여자를 따라 어이없는 웃음소리를 내던 찬영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태준의 곁에서 명석을 떼어 놓을 수 있는 방법.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태준과, 늘 옆에 있는 명석. 남자들로 이뤄진 비서진.

생각해 보면 충분히 태준을 몰아갈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태준과 명석이 딱 붙어 다니는 게 늘 못마땅한 찬영이었다.

자신의 곁에는 아부하는 친구나, 가진 걸 자랑하는 친구밖에 없는데.

태준과 명석의 모습은 누가 봐도 형제 그 이상의 모습이었다.

태준의 말에는 시키는 대로 다 따르면서 자신을 벌레 보듯 하는 명석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다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는 태준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명석을 끼고도는 모습도 늘 짜증이 났다.

과거, 어떻게 괴롭혀도 반응하지 않던 태준이 처음으로 화를 냈던 건 그가 아끼던 애란의 물건을 버렸을 때였다.

태준에게 가장 소중한 걸 없애는 방법.

그건 분명 태준의 곁에서 명석을 떼어 내는 일이었다.

괴로워할 태준의 표정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찬영의 얼굴에 야비한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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