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곳이요?”
가을이 무슨 말인가 싶어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가방 찾으러 가야죠.”
르망 호텔에서 가방을 카운터에 맡기라던 가을의 통화 내용을 기억하고 있던 태준이었다.
“어?? 아니에요! 버스 타고 가면 돼요.”
“시간 되니까 태워 줄게요.”
계획한 오후 스케줄이 망가졌는데도 태준은 기분이 좋았다.
이상 증상이 없어졌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리가 없었다.
“타요.”
태준이 이번에도 보조석 문을 열었다.
식당에 들러 가방을 찾은 가을이 집 근처까지 태워다 준다는 태준을 극구 말리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버스정류장에서 오르막 꼭대기에 있는 집까지 걸어오는 동안 땀이 흘러내렸다.
최대한 월세가 저렴한 곳을 고르다 보니 꼭대기에 있는 집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눈이라도 한번 오면 눈썰매장을 방불케 하는 곳이었지만 조금만 올라가면 산이 나온다는 점이 만족스러운 집이었다.
“아유 더워.”
오자마자 가방을 바닥에 던지듯 놓고 옷을 모두 벗어 던진 가을이 화장실로 향했다.
양손을 뻗으면 벽에 닿는 조그만 화장실이었다.
얼마 전 고장이 나 교체한 오천 원짜리 샤워기를 목에 가져다 댄 후 찬물을 틀었다.
‘쏴아아-’
찬물이 목을 타고 쏟아져 내리자 하루의 피곤함이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아으으…… 살겠다.”
한참을 냉수 마찰하듯 찬물을 맞던 가을이 이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요. 참지 말고.]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차가워 보였다가 자상했다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현장에서 몸을 극도로 아끼는 여자 배우와 작업을 했을 때, 남자 배우와 스킨십 동선을 맞추는 건 가을의 몫이었다.
김 감독의 넘치는 열정으로 가을은 이 방향, 저 방향 끌려다니듯 동선을 맞춘 후 여자 배우에게 설명을 하곤 했다.
아무리 현장이었다고 해도 남자 배우에게 떨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태준을 얼떨결에 안은 순간부터 계속된 긴장감에 털이 곤두설 지경이었다.
특히 태준이 안아 보라고 했을 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넬 뻔했다.
태준에게 안겼던 순간이 떠오르자 가을은 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으앗!!”
목에 대고 있던 샤워기를 무심히 들었다가 얼굴을 강타당한 가을이 고개를 털었다.
체한 게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속이 답답한 느낌이었다.
“진짜 엄청 체했었나 보네.”
가을이 서둘러 머리를 감으며 샤워를 마무리했다.
얼마 뒤.
시원하게 샤워를 끝내고 문을 연 가을이 작은 미니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 단번에 마셨다.
찬물이 그대로 쭉 내려가자 속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탈탈 털며 선풍기 앞에 앉은 가을이 전원 버튼을 눌렀다.
가을은 이렇게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선풍기 앞에 앉아 머리를 말리는 소소한 일과를 좋아했다.
머리카락을 살살 털어 내며 가을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어린 시절에 자주 불렀던 일일극 OST였다.
전곡을 알지는 못했지만, 드라마가 끝나고 예고를 하며 나왔던 부분만큼은 기가 막히게 외워서 부르곤 했다.
‘우리 가을이 노래 잘하네~ 가수 해야겠다.’
선호네 집 거실에 앉아 선풍기를 틀고 그 앞에 앉아 노래를 부르면 선호는 언제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해 주었다.
어릴 때부터 음치, 박치였던 가을이었지만 늘 칭찬을 해 주던 선호 때문에 어른이 돼서야 자신이 노래를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을이 도돌이표처럼 아는 부분만 조그맣게 속삭이듯 부를 때.
디링-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가을이 가방에 넣어둔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바닥에 떨어트려 깨진 것 같은 접시 사진과 함께 의찬의 메시지가 보였다.
[문제: 가영이가 깬 이번 접시는 얼마짜리일까.]
피식 웃은 가을이 다시 선풍기 쪽으로 몸을 돌려 앉으며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신호가 간 후 의찬이 전화를 받았다.
수화음을 타고 들리는 의찬의 목소리는 실제로 듣는 목소리보다 더 부드러운 음색을 띠었다.
-가을아.
“응?”
-네 동생 좀 데려갈래?
“자른다며?”
-사진 봤지? 노동청에 신고할까 봐 증거 모으는 중이야.
가을이 머리카락을 털며 쿡쿡 웃었다.
모친과 함께 산 가영은 반항아로 컸다. 가을처럼 참는 일도 없었고, 어른들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와는 거리가 먼 포지션이었다.
부모님은 불량한데 왜 자신이 반듯하게 커야 하냐며 밖으로 나돌았다.
두 살 때 가을과 헤어져 지방에서 살았던 가영은 중학생이 되면서 한 번씩 가을을 만나러 혼자 올라오곤 했다.
워낙 붙임성이 좋은 가영은 처음부터 가을을 잘 따랐다.
문제는, 가을의 말만 잘 듣는다는 데 있었다.
-내가 제명에 죽으려면 쟤를 잘라야지.
늘 말로만 자른다 자른다 하면서 의찬은 자기 동생처럼 가영을 챙겼다.
-이젠 잘못했다는 얘기도 안 해.
“이번 접시는 얼마야?”
-15만 원.
“미친놈.”
-아, 내가 잘못한 거구나.
“그니까 왜 그렇게 비싼 접시를 써. 싹 바꾸라니까.”
-접시는 내 자존심이야.
“싼 자존심으로 바꿔.”
-동생 편든다 이거지?
“편이 아니라 아끼라는 소리…….”
수화기 너머 ‘악, 정가영!’ 하는 소리와 함께 뚝 전화가 끊겼다.
안 봐도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아 가을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머리카락을 말렸다.
“정말, 증상이 없었다고요?”
평소처럼 반듯하게 넘긴 머리와 슈트 차림 대신 편한 트레이닝복에 이마를 덮은 머리가 그제야 제 나이로 보이는 명석이 놀란 얼굴로 태준을 바라보았다.
“응, 없었어.”
태준이 대답하며 명석의 집 소파에 앉았다.
자신의 집으로 향하기 전, 명석에게 가을과 있던 얘기를 알려 주고 싶어 근처에 사는 명석의 집으로 먼저 온 태준이었다.
산에서 가을을 만난 순간부터 르망 호텔에서 다시 만나 태준을 끌어안은 얘기까지, 그간의 얘기를 명석에게 말한 상태였다.
“확실해요?”
“응.”
“함께 차를 탔는데도 괜찮았고요.”
“응.”
명석이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매몰차게 굴어도 끊임없이 접근해 오는 여자들 때문에 매사 경계하고 힘들어하던 태준을 옆에서 지켜보던 명석이었다.
거기다 태준의 약점을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찬영과 그의 어머니 미연 때문에 태준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한지도 명석은 알고 있었다.
모친인 애란과 평범한 삶을 살던 태준은 10살이 되던 해 ‘세양 가’에 들어왔다.
태준의 부친인 정열이 애란과 교제를 하던 당시 문규의 거센 반대에 애란이 힘들어하자 정열은 결국 애란과 헤어졌다.
정열을 좋아하던 정치인의 딸 미연이 문규와 그의 처에게 끊임없이 애란을 모함한 결과이기도 했다.
힘들어하는 정열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술을 마시게 한 미연은 자신을 애란과 혼동하는 정열과 잠자리를 가졌다.
그 후 정열은 어쩔 수 없이 미연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당시 애란은 태준을 임신한 상태였지만 정열에게 말하지 못한 채 도망치듯 떠난 곳에서 태준을 낳았다.
혼자서 태준을 키우던 애란은 어느 날 시한부 판정을 받았고 병마와 싸우다 결국 태준의 존재를 정열에게 알렸다.
사실을 알게 된 정열은 ‘결혼 전 사랑했던 여자와 자신 사이에 아이가 있다는 걸 알게 돼 호적에 올렸다.’라는 발표를 했다.
숨기지 않고 이제라도 책임지는 모습이 다른 재벌과 다르다며 호의를 보이는 사람들과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악의적인 얘기를 하는 사람 등, 한동안 세간의 관심이 쏟아졌다.
그렇게 태준은 온갖 관심 속에 ‘세양 가’에 들어왔지만 혼외자 태생이라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은 태준을 곱게 보지 않았다.
특히 미연의 질투는 도를 넘어섰다.
겉으로는 착한 며느리와 아내의 모습을 보였지만 미연은 아무도 모르게 애란과 태준을 괴롭혔다.
급격히 상태가 나빠져 산소마스크를 쓴 애란에게 매일같이 찾아와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뱉어 냈다.
애란의 곁을 지키는 태준을 향해 서도 온갖 악다구니를 서슴지 않고 퍼부었다.
어린 태준을 혼자 두고 가야 하는 것 때문에 애란의 마음속 병도 깊어졌다.
얼마 뒤, 애란이 사망하자 순수한 시골아이였던 태준은 변했다.
고작 10살이었던 태준은 죽은 애란이 슬퍼할까 봐 영정사진을 품에 안기만 할 뿐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 후 태준은 자신을 괴롭히고 모함하는 찬영을 묵묵히 견디며 그보다 잘하기 위해 뭐든 노력했다.
찬영이 태준을 괴롭히는 데 시간을 투자할 동안, 태준은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했다.
그렇게 어떤 것에도 흔들림 없이 반듯하게 성장하며 문규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것은 물론, 그를 향한 주변 사람들의 시선마저 호의로 돌려놓았다.
태준의 목표는 하나였다.
‘세양 그룹’을 차지하는 것.
미연과 찬영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세양 그룹’을 차지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목표 하나로 누구보다 노력해 온 태준에게 여자에 대한 이상 증상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잘됐어요, 형.”
“좀 더 확실하게 확인해야지.”
명석과 태준이 눈빛을 주고받을 때.
딩동-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명석이 현관으로 나가자 명석의 누나가 커다란 김치통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몇 정거장 떨어진 곳에 사는 명석의 누나는 끔찍이도 명석을 챙겼다.
“열무 좀 담갔는데 적당히 익어서 맛있어.”
“김치 많다니까.”
“나 빨리 가 봐야 돼. 여기다 두고, 어??”
명석의 누나가 현관으로 걸어오는 태준을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태준은 어릴 적 명석을 따라 성북동에 왔던 그의 누나와도 잘 알고 있던 사이었다.
“와~ 강태준! 10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그대로야?”
“잘 지내셨죠?”
태준이 다가옴과 동시에 명석의 누나가 반가움에 태준을 와락 끌어안았다.
어차피 확인이 필요했던 태준이 명석의 누나를 가볍게 안았다.
그 순간, 태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이내, 빠르게 호흡이 가빠지면서 거칠게 손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쏴아아-’
커다란 샤워부스에서 태준이 쏟아지는 찬물을 그대로 맞았다.
증상은 그대로였다.
태준이 자신의 손을 펼쳐 보았다.
조금 전 태준은 숨을 조여 오는 공포에 명석의 누나를 거칠게 밀어냈다.
당혹감이 어린 그 표정. 다시는 상대방의 그런 표정을 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후우…….”
태준이 복잡한 마음을 누르듯 쏟아지는 찬물로 거칠게 얼굴을 문질렀다.
‘탈칵-’
샤워를 마친 태준이 샤워가운만 걸치고 거실로 향했다.
블랙과 화이트로 꾸며진 깔끔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혼자 살기엔 지나치게 넓은 평수의 집이었다.
태준이 걱정돼 집까지 따라온 명석이 심란한 표정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다가오는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괜찮으세요?”
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앉았다.
증상이 없어진 게 아닐까 기대한 만큼 허탈감이 커 보이는 태준을 걱정스럽게 살펴보던 명석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분, 정가을 씨 말입니다.”
“응.”
“그분하고만 괜찮은 걸까요?”
“글쎄.”
확인이 필요한 일이었다.
“후…….”
태준이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고민한다고 당장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디링-
명석이 자신의 집 앞에 피자를 두고 간다는 문자를 확인하곤 휴대폰을 다시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태준과 통화를 하기 전 간단히 저녁으로 먹으려고 주문해 두었던 피자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신기한 인연이긴 하네요. 응급실도 그렇고. 지금 ‘STN’에서 하는 드라마 조연출인 것도 그렇고.”
태준이 가을을 떠올렸다.
속마음을 잘 숨기다가도 한 번씩 솔직하게 드러내는 가을이 어쩐지 재밌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늘 화려한 치장을 하던 여자만 보아 오던 태준은 예쁜 얼굴을 전혀 꾸미지 않는, 심지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색상의 조합으로 옷을 입는 가을이 흥미롭기까지 했다.
저도 모르게 연하게 미소 짓는 태준을 명석이 흘끔 쳐다보았다.
“지금, 정가을 씨 생각하면서 웃으신 거예요?”
평소 잘 웃지 않는 태준이, 그것도 여자를 생각하며 웃는 건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내가 웃었어?”
“예. 뭐랄까. 좀 애틋한 웃음이었달까요?”
“안경 맞추라고 할 때 맞춰. 보너스 줄 테니까.”
태준이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집에서 뭘 해 먹지 않음이 분명한, 깔끔하다 못해 요리에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는 주방이었다.
태준이 커다란 냉장고 문을 열자 진열된 듯 깔끔하게 채워진 음식들이 보였다.
매일 오는 가사 도우미가 채우고 간 음식들이었다.
대충 안을 훑은 태준이 샐러드가 담긴 투명한 음식 통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일단 뭐라도 좀 먹자. 르망 호텔에서 빵…… 아, 차에 두고 왔네.”
“제가 가져올게요.”
집에 들러 피자도 가져올 겸 명석이 휴대폰을 챙겨 소파에서 일어났다.
‘디딕.’
현관문을 열고 명석이 복도로 나왔다.
“명석아.”
태준의 목소리에 명석이 뒤를 돌아보았다.
“나간 김에 캔맥주 몇 개 사 와.”
“안주는 어떤, ……아야.”
명석이 갑자기 한쪽 눈을 찡그렸다.
“왜?”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봐요. 아…….”
명석이 인상을 찡그리며 안경을 벗자 태준이 샤워가운을 입은 채로 나와 앞에 다가섰다.
“가만있어 봐.”
가까이 다가선 태준이 명석의 눈을 살펴보았다. 그사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명석이 눈물까지 흘렸다.
태준이 명석의 눈을 살짝 벌리고 길게 바람을 불었다.
“후우우우우…… 어때?”
“……아직 아픈데요.”
태준이 좀 더 가까이 입술을 가져갔다.
벽에 기대듯 서 있는 명석과, 샤워가운만 입은 채 그 앞에 바짝 서서 입술을 가져가는 태준.
누가 보기에 위험한 그림이었다.
태준이 ‘후-’ 불려고 하자 명석이 몸을 움찔거렸다.
“살살이요…….”
“한 번에 세게 하는 게 나아.”
쓸데없이 감미로운 목소리를 낸 태준이 숨을 훅 들이켜고 명석의 얼굴 가까이 입술을 가져갔다.
띵-
태준이 무의식적으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옴과 동시에, 엘리베이터 소리에 몸을 움찔하며 움직인 명석이 그대로 태준의 볼에 입술을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