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90)

그 바람에 피할 새도 없이 가을에게 몸을 내준 태준이 빵이 든 쇼핑백을 놓쳤다.

오랜 시간 김 감독 밑에서 단련된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과, 발 빠른 행동력이 빚은 참사였다.

“오아아아아~~”

아이스크림을 든 아이는 직진본능밖에 없는지 그대로 앞을 향해 뛰어갔다.

너무 놀라서 가을을 밀쳐 낼 정신도 없는 듯 태준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동공이 확장되고 손은 그대로 허공에 멈췄다. 그 상태로 태준의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제 곧 숨이 가빠오면서 끔찍한 공황장애 증상이 찾아올 게 뻔했다.

서둘러 가을을 떼어 내려던 태준이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지금쯤 끔찍한 두려움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져야 하는데.

평온했다.

……왜?

태준이 혼란스러움에 빠져 있을 때, 가을 역시 어딘가 정신이 나가 있었다.

태준을 놓아주어야 하는데 현기증으로 머리가 빙빙 돌아 도저히 손을 놓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거기다 태준에게서 나는 체취와 요란하게 뛰는 주인 모를 심장 소리 때문에 가을은 머리가 더 어지러웠다.

왜 케이크를 몽땅 입으로 밀어 넣었을까.

고기 먹고 체한 상태에서 미련스럽게 케이크를 먹는 게 아니었다. 태준에게 줄 수도 있었고, 고깃집 사장님한테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바쁜 현장 상황 때문에 빠르게 음식을 먹는 게 습관이 된 가을은 체하는 일이 많았다.

급체한 순간 쓰러질 듯 현기증이 나다가 조금씩 가라앉던 걸 생각하면 조금 후엔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쿵- 쿠쿵- 쿵.

혈관에 피가 흐르지 않은 듯 온몸이 저리고, 심장은 혈액 공급이 되지 않는 듯 불규칙하게 뛰어 대 속이 점점 울렁거렸다.

“후우…….”

아무리 몸이 좋지 않아도 더 이상 태준의 몸을 지지대 삼을 수는 없어 깊게 숨을 내뱉은 가을이 태준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쥐었다가 풀었다.

비싸 보이는 옷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지만 태준의 입장에선 황당하고 어이없을 게 분명했다.

가을이 고개도 들지 못하고 태준을 안았던 팔을 슬며시 놓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태준이 말이 없자 가을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태준은 가을에게 안겼던 자세 그대로 언 듯이 서 있었다.

“저…… 대표님.”

“…….”

“많이 놀라셨죠…….”

태준이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가을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더욱더 짙어진 태준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가을은 어쩐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게 그러니까…… 비싼 옷 같아서요.”

가을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김 감독에게 혼나기 직전에 느끼던 불안감과 다른 종류의 불안감이었다.

김 감독은 예측이 가능했지만, 태준은 예측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대표님 옷이 비싸 보이는데 아이스크림이 묻을까 봐…… 그래서 잡은 건데요. 제가 현기증이 나서 바로 손을 놓지 못했어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가을의 말에도 태준은 어딘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저 뚫어지라 가을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탓에 가을이 어쩔 줄 몰라 입술만 깨물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정가을 씨.”

평소 태준의 목소리보다 더 낮은 동굴 같은 저음이 가을의 귀에 꽂혔다.

“……네.”

“한 번만 더…….”

태준이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가을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안아 볼래요?”

“……네?? 뭐, 뭘요??”

태준이 뭘 안아야 하는지 알려 주듯 슬쩍 팔을 벌리자 가을의 눈이 한층 더 커졌다.

“대표님을요?”

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엔 순간적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태준을 안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게 아까는 순간적으로 한 거라서요.”

태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가을을 내려다보았다.

“확인이 필요해서 그러니까, 부탁 좀 할게요.”

어째야 하나 싶어 가을이 잘못도 없는 제 손톱만 물어뜯었다.

“어려우면.”

“…….”

“안길래요?”

말과 동시에 태준이 팔을 벌리고 다가서자, 그보다 빠르게 가을이 그대로 태준을 안았다.

여자에 대한 공포증이 있는 태준은 그저 시늉만 한 것이지만 가을은 단련된 행동력이 발휘된 것이었다.

안기는 것보다, 안는 게 한결 낫지.

둘 다 하지 않는 방향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한 가을이 자신에게 좀 더 편한 방법을 골랐다.

두근, 두근, 두근.

두 사람이 만들어 낸 두근거림이 맞닿은 가슴에 울렸다.

태준이 어색한 모습으로 자신을 안은 가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가을에게 안겨 있는데도, 두려움도, 발작 증상도 생기지 않았다.

이번엔 반대로 자신이 가을을 만져도 괜찮은지 확인이 필요했다.

“잠깐, 어깨 좀 잡아도 될까요?”

의도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태준의 목소리가 너무 진지해 가을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먹을 꽉 쥔 채 어색하게 손을 내리고 있던 태준이 조심스럽게 어깨를 잡자 ‘움찔-’ 가을의 몸이 여리게 떨렸다.

후우…….

그저 몸에 손을 댄 것뿐이었는데 그사이 긴장을 했는지 태준의 손에 땀이 배어났다.

여자의 몸에 먼저 손을 댄 건 무려 10년 만이었다.

잠시는 참아 볼 수 있지만 몇 초 이상이 지속되면 여지없이 극심한 공포심과 함께 공황장애 증상이 찾아왔다.

여자에 대한 두려움은 결혼이나 연애 같은 문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하는 데 큰 불편함이 있었다.

태준이 가을의 어깨에 닿아 있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아무런 증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1년.

태준은 미국에 있을 때보다 여자를 더 경계했다. 어쩌면 그사이 증상이 사라진 걸 깨닫지 못했을 확률이 높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할까요?”

꽉 안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자신을 안고 있는 가을의 모습에 태준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이제 그만해도 돼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몸을 떼어 내려고 했던 가을이 꼼짝도 못 하고 태준의 품에 머물렀다.

“저, 어깨를 좀 놔주셔야…….”

태준이 꽉 움켜쥐고 있던 어깨를 놓아주자 그제야 가을이 냉큼 뒤로 물러섰다.

두 사람 사이에 흘렀던 어색한 기류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덕분에 고마워요.”

태준은 진심으로 가을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가을이 얼떨결에 자신을 안지 않았다면. 어쩌면 평생 몰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완전히 증상이 없어진 건지 확인이 필요했지만 그럴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뭔지 몰라도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긴 한데.”

가을이 바닥에 떨어진 쇼핑백을 집어 태준에게 건넸다.

“빵이 망가져서 어떻게 해요.”

“괜찮아요.”

여자가 건네는 물건은 손이 닿지 않게 조심스럽게 받았던 태준이 가을이 건네는 쇼핑백을 편안하게 건네받았다.

남들에겐 당연한 일이 그동안 태준에겐 두려워해야 할 일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미리 차를 대기 시켜놨던 호텔 직원이 그제야 태준에게 다가와 차 키를 건넸다.

꾸벅 인사한 직원이 사라지자 가을이 태준의 차를 슬쩍 훑어보았다.

차종은 모르지만 자신이 가진 전 재산보다 비싸 보이는 건 확실했다.

차에서 시선을 돌린 가을이 휴대폰 화면을 켰다. 20여 분을 걸어가기엔 여전히 속이 좋지 않아 평소 아끼느라 잘 타지 않던 택시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

핸드폰 화면에 배터리가 2% 남았다는 표시가 빨간색으로 깜빡거렸다.

배터리가 2%만 남았다고??

방금 약국을 검색할 때만 해도 20%가 넘게 남았던 배터리였다.

5년을 넘게 쓰면서 별다른 이상이 없던 휴대폰이 하필 이 순간에 배터리 문제를 보였다.

BYE- BYE-

배터리가 2% 남았다고 끊임없이 알리던 휴대폰이 매정하게 툭 꺼졌다.

망했다.

지갑도 없이 달랑 휴대폰만 들고나와 모든 걸 휴대폰으로 결제했던 가을이었다.

짧은 순간 가을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뭔가를 결심한 듯 가을이 슬며시 태준에게 다가갔다.

“좀 전에요.”

가을의 목소리에 휴대폰을 보고 있던 태준이 고개를 돌렸다.

“제가 대표님 부탁을 들어 드렸잖아요?”

“예.”

“또 제가 대표님 옷을 구하기도 했고요.”

“그랬죠.”

어려운 얘기라도 꺼내려는 듯 가을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바닥에 내린 채 입술을 달싹였다.

“편히 얘기해요.”

“……그럼 저도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태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가 아니라 몇 개라도 들어줄 수 있었다.

망설이는 모습에 말하기 힘든 큰 부탁인가 싶어 태준이 진득이 가을의 말을 기다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선 뭐든,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럼…….”

가을이 결연한 표정으로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만 원만…… 빌려주세요.”

기본 택시비에 약값, 버스비를 계산한 금액이었다.

“…….”

“안 될……까요?”

“그러니까, 만 원?”

“안, 안되면 오천 원이라도……. 제가 택시를 타고 가려고 하는데 배터리가 다 돼서요.”

애처로운 가을의 표정에 태준이 피식 웃었다. 뭐든 들어줄 생각이었는데, 만 원이라니.

정말이지 자신이 알고 있는 여자들과는 전혀 다른 재밌는 여자였다.

“태워 줄게요.”

“어? 아까 안 되신다고…….”

“괜찮아요. 타요.”

“그럼 버스정류장까지만 부탁드립니다.”

그 순간 두 사람이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태준은 보조석 문손잡이를 잡고, 가을은 뒷문 손잡이를 잡았다.

“모시고 가야 합니까?”

뒷자리는 주로 상사가 앉는 자리라는 걸 상기한 가을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니죠.”

가을이 냉큼 보조석 쪽으로 몸을 돌려 차에 오르자 문을 닫아 준 태준이 뒷좌석에 빵이 든 봉투를 내려놓고 운전석으로 향했다.

가을을 보조석에 태운 건 일종의 확인이었다.

“후우…….”

처음으로 여자를 차에 태운 태준이 크게 심호흡을 하고 운전석 손잡이를 잡았다.

태준이 운전석에 앉자 가을이 어색함에 몇 번 기침을 뱉어 냈다.

그냥 돈을 빌릴 걸 그랬네.

태준의 체취로 가득한 차에 타자 긴장감 때문에 속이 더 울렁거려 가을은 뒤늦은 후회를 했다.

긴장되는 건 태준도 마찬가지였다.

10년이나 품고 살았던 두려움이 한 번 괜찮았다고 사라질 리 없었다.

태준을 따라 안전벨트를 맨 가을이 차 안에 넘치던 어색한 긴장감을 깼다.

“저, 휴대폰 좀 충전할 수 있을까요?”

“여기다 둬요.”

태준이 차량용 거치대를 가리키자 가을이 휴대폰을 거치대에 올려놓았다.

버스정류장까지 얼마 걸리지 않겠지만 짧게라도 충전을 하고 버스만 탈 생각이었다.

태준의 차가 금세 르망 호텔을 벗어났다.

방금까지만 해도 여자와 단둘이 차를 탄다는 건 상상도 못 했던 태준이었다.

이번에도 아무런 이상 증상이 나타나지 않자 기분이 들뜬 태준이 평소 가끔씩 듣던 음악을 틀었다.

심신 안정에 좋다며 명석이 USB에 담아 준 클래식 모음이었다.

음악을 재생시키던 태준이 문득 가을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어디 아파요?”

“네?”

“아파 보이는데.”

누군가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린 건 선호 이후에 처음이었다.

친구인 의찬 역시 가을이 아프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가을은 아픈 걸 숨기는 데 능숙했다.

티가 나지 않게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꾹 누르던 가을이 빨간 자국이 난 손바닥을 힐끔 쳐다보았다.

몸이 아프거나, 화가 나는 일을 참을 때. 주먹을 꽉 쥐며 손톱으로 손바닥을 누르는 게 가을의 버릇이었다.

“아프면 얘기해요.”

“괜찮아요.”

가을이 습관처럼 하는 말을 뱉어 내자 태준이 가을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괜찮지 않아 보여요.”

태준이 좌회전 신호를 받으며 말을 이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요. 참지 말고.”

‘가을아, 아프면 아프다고 해. 참지 말고. 알았지?’

선호가 해 주던 말이 태준의 입에서 나오자 어딘가 울컥한 가을이 눈가가 빨개진 채 재빨리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4,500원입니다.”

태준이 약사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제가 낸다니까요.”

“내가 오자고 한 거니까, 내가 내는 거예요.”

괜찮다는 가을을 극구 응급실까지 데려와 진료를 보게 하고, 병원비부터 약값까지 태준이 계산을 했다.

“가죠.”

카드를 돌려받은 태준이 약이 든 봉투를 들고 성큼 걸어 약국 문을 열고 가을을 기다렸다.

그 모습에 가을이 괜히 제 목덜미를 한번 쓸고 약국을 빠져나왔다.

태준이 손에 들고 있던 약이 든 봉투를 가을에게 건넸다.

“좀 어때요?”

“이젠 진짜 괜찮아요.”

병원에서 주사를 맞아 몸 상태가 한결 좋아진 가을이 미소 짓자, 태준도 그제야 가벼운 미소를 보냈다.

“오늘 여러모로 죄송하고 감사했습니다.”

태준을 향해 꾸벅 인사한 가을이 예의상으로 하는 인사를 건넸다.

“언제 시간 되시면 제가 차라도,”

“지금 됩니다.”

“네?”

“시간이요.”

전처럼 단호하게 됐다고 할 줄 알았던 가을이 당황했다.

“아아…… 지금 되시는구나.”

가을이 어색하게 웃었다. 얼른 고깃집에 가서 가방을 찾고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쉬고 싶다. 격렬하게 쉬고 싶어.

가을이 제 마음을 담은 강렬한 눈빛을 보냈지만 그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준은 그저 지그시 가을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럼…… 여기에 카페가…….”

가을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고 충전을 끝낸 휴대폰으로 카페를 검색했다.

무슨 생각으로 카페를 검색하고 있는지 훤히 보여 태준이 웃음을 참듯 슬쩍 눈썹을 쓸었다.

“카페는 나중에 가고.”

태준의 말에 휴대폰으로 검색하던 가을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다른 곳부터 가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