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준?”
가을이 눈을 깜빡거리며 이름을 되뇌었다.
“강태준…….”
분명 어디서 들은 이름인데…….
현장에서 많은 사람과 일하다 보니 가을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이름이 너무도 많았다.
분명 반가우면서, 뭔가 기분이 좋지 않은 이름이란 건 확실했다.
가을이 기억을 더듬거릴 때 이름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STN’ 대표, 강태준입니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이름에 가을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에이, 설마…….”
자기와 나이 차이가 커 보이지 않는 남자가 ‘STN’ 대표일 리가 없었다.
거기다 눈앞의 남자가 ‘STN’ 대표라면 본인 욕을 지척에서 듣고 모른 척할 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때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 좀 나빠 보였나?
정상에서 욕을 하고 뒤돌았을 때, 어쩐지 노려보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던 가을이었다.
골똘히 생각했다가 놀랐다가 설마 싶은 표정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가을의 표정을 물끄러미 보던 태준이 웃음을 참듯 입술을 달싹였다.
뭘 생각하는지 표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태준의 얼굴을 외면한 채 가을이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분명 수치를 확인하는 일을 한다고 했는데.
“혹시 하시는 일이…….”
“아침마다 시청률을 확인하죠.”
“시청률이라면 ‘STN’…… 직원?”
태준이 낮게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럼…….”
가을이 대표가 맞냐는 듯 눈을 깜빡이자, 태준이 맞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순간 사고회로가 정지한 듯 가을이 그대로 굳자 태준이 쐐기를 박았다.
“‘STN’ 대표, 강태준입니다.”
“딸꾹.”
놀란 가을이 딸꾹질을 했다.
“목소리가 잘생겼죠. 젊고.”
얼어붙은 채 딸꾹질만 하는 가을을 보며 태준이 입술을 쓸었다.
“덕분에 CCTV 없는 골목 조심하고 있어요.”
가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90도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땐 너무 욱해서 딸꾹…… 정말 죄송…… 딸꾹.”
당황해서 목소리가 커지자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가을에게 향했다.
“괜찮으니까 앉아요.”
얼굴이 하얘진 가을이 다시 의자에 앉자 태준이 음료수 하나를 사서 뚜껑을 열고 가을에게 건넸다.
“마셔요.”
“……감사합, 딸꾹.”
건네받은 음료수를 목으로 밀어 넣듯 단번에 마신 가을이 빈 음료수병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던 태준이 의자에 앉아 팔짱을 꼈다.
“옛말에 그런 말이 있죠.”
“…….”
“죄짓고는 못 산다.”
“콜록 콜록…….”
딸꾹질에 이어 사레가 들린 가을이 숨을 한번 몰아쉬고 태준을 바라보았다.
“……이런 말도 있어요.”
가을이 어떤 말을 할까 싶어 태준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정신 차리고 보면 저승이죠. 현실에선.”
태준이 청아하게 미소 지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으니까 먹어요.”
가을이 슬며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바로 코앞에서 뒤통수를 조심하라는 얘길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다니. 얼마나 황당하고 웃겼을까 싶어 저절로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의찬이 말을 들을걸.
두 번째 후회였다.
가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에 보여 태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후회하지 말아요. 달라질 것도 없는데.”
호랑이인 줄 알았더니 귀신이었네.
“혹시 저한테 어떤 직접적인……안 좋은 영향을…… 주실 생각인가요?”
태준이 피식 웃었다.
“설마요.”
그 말에 가을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김 감독의 욕을 하다 들킨 상황이라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가을이 포크로 생크림만 살짝 찍어 입에 넣으며 태준을 바라보았다.
“기분 나쁘셨겠어요.”
“별로?”
태준의 목소리가 깊어졌다.
“누가 하는 욕 일일이 신경 쓰고 살기엔 바빠서요.”
끝까지 모르는 게 나았을 텐데.
가을은 어쩐지 태준에게 부채감이 생겼다. 자신을 구해 준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격이었다.
이 망할, 케이크.
얄밉게 웃고 있는 고은의 얼굴이 케이크에 겹쳐 보여 가을이 포크로 케이크를 거칠게 찍었다.
그 모습을 보던 태준이 점원을 불렀다.
“여기요.”
깔끔한 유니폼을 입은 점원이 태준에게 다가왔다.
“접시랑 포크 하나만 가져다줘요.”
점원이 작은 접시와 포크를 가지고 오자 태준이 케이크 한 조각을 접시에 담았다.
“드시게요?”
“약속은 지켜야죠.”
마치 몹쓸 음식이라도 먹듯 조심스럽게 케이크를 떠서 입에 넣은 태준이 달콤한 생크림 맛에 인상을 썼다.
단 음식은 딱 질색이었다.
“케이크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누가, 내가요?”
“종종 사 간다고…….”
“다른 사람이 좋아해요.”
“아아, 애인이 좋아하나 보다.”
태준이 피식 웃었다.
“갑자기 애인이 생겼네.”
외모로 보나, 지위로 보나, 당연히 애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가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애인 없으세요??”
“있어야 합니까?”
“아뇨.”
빠르고 맹렬하게 고개를 젓던 가을이 태준의 눈치를 살폈다.
길에 쓰러진 자신을 구해 주고, 그 많은 산 중, 주악산에서. 그것도 그 시간에 만난 데다가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또 만난 건 신이 주신 기회일지도 몰랐다.
“혹시…….”
태준이 계속 얘기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입술을 말아 물던 가을이 작은 목소리를 냈다.
“단막극은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건가요?”
“없죠.”
깔끔하고 단호한 대답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실 계획은,”
“없습니다.”
가을이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더 말한다고 태준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어 보였다.
“돈도 많으시다면서, 무척 이윤만 생각하시는 건 아닐까요……?”
“방송국이 이윤을 추구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렇죠. 당연한 거죠.”
더 얘기했다가는 타당한 이유가 아닌 감정의 호소가 될 것 같아 가을이 말을 멈췄다.
타당한 이유, 수많은 이해관계, 금전적인 이윤 등을 고려해 내린 결정을 감정에 호소한다고 번복될 리도 없었다.
신이 주신 기회가 아니라, 빨리 꿈을 깨고 현실에 매진하라는 뜻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가을은 하나 남은 조각을 접시에 담았다.
제일 작은 1호 사이즈였지만 케이크를 세 조각이나 먹었더니 점점 속이 느물거렸다.
조금 전 고기를 먹고 체해 약국에서 소화제까지 먹었지만, 가을은 칼칼한 김치찌개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머리에서 김치찌개를 먹는 상상을 하던 가을의 귀에 나지막한 태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투자, 기회 말고. 다른 이유.”
“……?”
“들어 보죠.”
태준이 케이크를 새 모이만큼 떼어 입에 넣었다.
“30초 남았어요.”
“네?”
“그때 남았던 시간.”
가을이 ‘2분’을 주겠다던 태준의 말을 떠올렸다.
잠시 생각하던 가을이 입을 열었다.
“누가……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거든요.”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진 가을의 모습에 태준은 ‘선호’라는 사람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표정은, 그때 목소리만큼이나 슬퍼 보였다.
“다른 방송사 단막극을 하는 건 어때요.”
그 말에 가을이 피식 웃어 보였다.
다른 곳 역시 단막극은 공채 신입 PD에게 돌아갈 기회였다.
“제가 외주 직원이에요.”
잠시 말을 멈췄던 가을이 케이크를 살짝 떠서 입에 넣고 말을 이었다.
“연출은 도제 시스템인 거 아세요?”
태준이 끄덕였다.
“일하면서 경력을 쌓고 그러다 B 팀 연출을 맡고, 또 경력이 쌓여 연출자가 되는 거, 그게 이 계통 수순이죠. 근데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아요.”
설핏 미소 지은 가을이 포크로 케이크를 톡톡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더군다나 대부분 남자 연출가고. 시청률 때문에 스타 피디 모시기만 바쁘죠.”
“…….”
“그래서 저한텐 황금 같은 기회였어요.”
새롭게 시작하자고 다짐했으면서 괜히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댄 것 같아 가을이 머쓱한 표정으로 태준을 바라보았다.
“그날 산에서 마음 다잡고 왔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안 씁니다.”
리액션 하기 힘든 태준의 반응에 가을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빵을 사러 왔던 여자들이 태준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기고 소곤대는 소리가 두 사람에게 들려왔다.
자주 있는 일인 듯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준이 가을을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기회는 늘 예상치 못하게 찾아와요.”
“…….”
“갑자기 미니시리즈 연출을 맡게 될 수도 있고.”
현실 불가능한 얘기에 가을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기회가 오면 미니시리즈보다 일일극이면 좋겠네요.”
“일일극?”
일일극은 주로 공중파 방송국에서 자체 제작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다 이윤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점점 사라지는 추세였다.
“‘STN’도 일일극을 기획하는 건 어때요?”
가을의 말에 어느새 사업가로 돌아온 태준이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일일극 시청률은 주로 중년층 이상입니다. 접근하기 어려운 채널에서 하는 방송을 굳이 찾아보지 않아요.”
“요즘엔 어르신들도 ‘STN’ 채널 많이 보세요.”
“많이라는 건, 정확한 수치가 아니죠.”
태준이 팔짱을 낀 채 긴 다리를 비스듬히 꼬았다.
“5년 전에 자체 제작한 ‘바람난 아내’의 경우 총 100부작에 완판됐던 광고가 중반 이후 3편으로 줄었습니다. 제작비 45억에 평균 시청률 2%, PPL도 저조해 고스란히 손해를 봤죠.”
장난기가 묻어나던 태준의 모습은 사라지고 본래의 모습대로 날카로운 분위기를 뿜어내자 그제야 가을은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STN’ 대표가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일극은 방송할 때 외엔 스트리밍을 제공하지 않죠. 해외 판권은 물론이고 광고 역시 붙기 힘듭니다. 수익적으로 투자할 콘텐츠가 아니에요.”
상대를 제압하는 분위기를 타고난 태준의 말을 저도 모르게 경청하던 가을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런데, 왜 일일극이죠? 보통 미니시리즈를 맡고 싶어 하던데.”
가을의 주변에서도 미니시리즈를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전 일일극도 미니시리즈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태준이 계속 얘기하라는 듯 가을을 응시했다.
상대방의 얘기를 잘 들어야 그에 따른 의견을 낼 수 있어 몸에 밴 습관이었다.
“병원에 입원해 본 적 있으세요?”
“예.”
“제가 열여섯 살 때 팔을 다쳐서 입원한 적이 있었거든요. 복도를 걸어가는데 병실에서도, 휴게실에서도 다 똑같은 드라마를 보는 거예요.”
“…….”
“병실에 오랫동안 간병을 하던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드라마를 볼 때 생기 돌던 얼굴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기억을 떠올린 듯 가을이 미소 짓곤 말을 이었다.
“남자한테 복수하는 그런 드라마였는데 종일 병실에 있던 사람들은 그거 보고 욕하면서 스트레스를 풀더라고요.”
“…….”
“그때 생각했죠. 사람들이 무시하는 막장 드라마도 필요한 곳이 있다는 거. 거기선 기발하고 참신한 미니시리즈보다 힘든 하루에 욕하고 볼 수 있는 드라마가 필요하거든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접근에 태준이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위이잉-
왜 자꾸 날 흔들어~ 네가 뭔데 흔들어. 왜 자꾸 날 흔들어 ~♬
주로 진동으로 해 놓다가 회식 자리에서는 벨 소리로 바꿔 두는 습관 때문에 가을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진동과 함께 베이커리 안을 가득 울렸다.
김 감독 전용 벨 소리였다.
노래라도 좋아하는 걸 해야 전화가 반가울 것 같아 선택한 음악이었다.
괜히 머쓱해서 손으로 코를 한번 스윽 훑은 가을이 전화를 받았다.
“네, 감독님.”
-조감독님. 지금 어디세요?
김 감독이 아니라 스태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감독님 많이 취하셨어?”
술에 취하면 자기 휴대폰을 스태프에게 주면서 자리에 없는 사람을 불러내는 게 김 감독의 주사였다.
-조감독님 보고 케이크 공장 갔냐고 하시는 거 보면, 좀 덜 취하신 것 같아요.
“지금 어디야? 삼선 호프? 명랑 치킨?”
-삼선 호프요.
수화기 너머 도식이 ‘조감독 빨리 튀어 와.’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거하게 술을 마시고 있는 게 확실했다.
-언제 오실 거예요?
“김 감독님 곧 필름 끊기실 거야. 물어보면 계속 가고 있다고 해.”
전화를 끊은 가을이 조금 남아 있던 케이크를 몽땅 입에 넣었다.
고깃집에 들러 가방을 찾은 후 회식 자리가 아닌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동안의 경험상 필름이 끊긴 김 감독은 자신의 존재 유무를 기억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가을이 케이크를 몽땅 먹어 치우자 태준이 반 이상 남은 케이크를 두고 일어섰다.
“가죠.”
호텔 입구로 향하는 동안 가을의 몸 상태가 점점 나빠졌다.
이미 체한 상태에서 케이크를 거의 다 먹고, 음료수까지 한 번에 마셨던 게 무리가 된 듯 극심한 두통이 몰려왔다.
점점 현기증까지 나는 게 도저히 걸어갈 몸 상태가 아니었다.
“저…….”
가을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태준을 바라보았다.
“혹시 차 가지고 오셨으면 버스정류장까지만 좀 태워 주시면 안 될까요?”
“버스정류장?”
“네…….”
태준이 가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지난번 가을을 차에 태울 수 있었던 건 명석이 함께 있는 상태에서 가을은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태준은 이상 증상이 생긴 이후 단 한 번도 여자와 단둘이 차를 탄 적이 없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생각만 해도 숨이 가빠지던 태준이었다.
다른 여자와 달리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낀 상대였지만, 이 여자라고 다를 리가 없었다.
“미안한데, 그건 좀 어렵겠네요.”
“아…… 네. 그럼 살펴 가세요.”
태준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한 가을이 눈앞이 핑 돌 정도로 가슴이 답답해 휴대폰으로 근처 약국을 검색했다.
족히 20분은 걸어가야 하는 거리에 약국이 위치했다.
“오아아아~!”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에 가을이 고개를 들었다.
아이스크림을 든 어린아이가 태준의 뒤로 돌진하듯 뛰어오는 모습에 가을이 놀라서 소리쳤다.
“어! 뒤에!”
태준이 뒤를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돌발상황에 빠르게 반응하는 가을이 달려들어 그를 안고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