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감독이 가을이 내뿜은 사이다를 망부석 같은 자세로 얻어맞았다.
“으앗! 죄송해요. 감독님!”
가을이 재빠르게 티슈를 뽑아 김 감독의 얼굴을 벅벅 닦았다.
당황해서 힘있게 닦은 것뿐이지만 그 탓에 김 감독의 얼굴이 맥없이 뒤로 툭툭 밀려났다.
“됐어. 내가 할게.”
누군가 건넨 물티슈를 김 감독에게 건네며 가을이 잔뜩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냈다.
“죄송합니다…….”
“뭘, 그럴 수도 있지.”
물이 아닌 사이다라 찝찝함이 두 배가 됐는데도 김 감독은 술 때문에 너그러워졌다.
별다른 말 없이 김 감독이 물티슈로 얼굴을 닦아 내자 긴장했던 주변 사람들이 한시름 놓는 소리가 들렸다.
김 감독이 물티슈로 연신 얼굴을 닦다가 가을을 돌아보았다.
“참, 단막극 폐지된다는 얘기는 들었나?”
“네.”
갑작스러운 단막극 얘기에 가을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내자 고은이 재빠르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단막극이 폐지됐어요? 아우~ 나도 단막극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과도하게 콧소리를 낸 고은이 재밌다는 듯 옆에 앉은 남자 배우를 툭툭 쳤다.
아무 곳에나 물티슈를 던져 놓은 김 감독이 소주잔을 들었다.
“내가 어련히 자리 마련해 줄까 봐. 뭐 하러 애를 써.”
벌써 수십 번은 들은 공수표였다.
쟁쟁한 공채 출신 후배들이 입봉을 기다리고 있는데, 학연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김 감독이 자신을 먼저 챙겨 줄 리 없었다.
‘꾸르르륵.’
꾸역꾸역 고기를 먹은 게 체했는지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가을의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체하면 두통이 몰려오는 가을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약국 좀 가려고요.”
“어? 그럼 저 뭐 하나만 사다 줄래요?”
고은의 말에 가을이 걸음을 멈췄다.
“고은아 뭔데? 내가 사 올게.”
“오빤 아직 밥 남았잖아.”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매니저를 고은이 만류했다.
“여기서 위로 조금만 올라가면 케이크 숍 있거든요? 거기서 딸기 케이크 하나만 사다 줄래요?”
“딸기 케이크요?”
“부탁해요.”
고은이 과한 눈웃음을 지었다. 돈도 주지 않고 심부름만 시키는 건 고은의 특기였다.
여러 가지로 가을의 속을 썩이는 김 감독과 고은이었다.
그 시각, 태준은 르망 호텔 1층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한국에 온 지 1년. 그동안 태준은 조부인 문규의 성화로 매번 선 자리에 나와야 했다.
일에 전념한다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자신은 연애하고 결혼하면서도 기업을 잘만 성장시켰다는 얘길 하며 결혼을 독촉했다.
어쩔 수 없이 문규의 지시대로 선 자리에 나와 적당히 상대의 장단을 맞춰 주다, 그럴싸한 핑계로 마무리하던 태준이었다.
선을 볼 때면 태준은 언제나 르망 호텔 1층으로 약속장소를 잡았다.
사방이 막힌 좁은 공간에 여자와 있는 게 견디기 힘들어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오늘 선을 볼 여자는 선박회사 회장의 딸로 유명 로펌에서 일하고 있는 능력 있는 여성이었다.
태준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정확히 5분이 지나 있었다. 적어도 10분까지는 기다려야 한다는 명석의 얘기에 태준이 일어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강태준 씨?”
9분이 되었을 때 긴 머리에 깔끔한 정장을 입은 희라가 태준의 앞에 섰다.
태준이 고개를 들자 희라가 맞은편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서희라입니다.”
“강태준입니다.”
태준의 외모에 놀란 희라가 떨림이 묻은 미소를 지었다.
“듣던 것보다 훨씬 잘생기셨네요.”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장난기 하나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하는 태준의 모습에 당황한 희라가 이내 ‘호호’ 웃음소리를 냈다.
“재밌으시네요. 아, 이런 얘기도 많이 들으시나요?”
태준이 대답 대신 미소 짓자 그 모습에 반한 듯 희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깨끗하고 청아한 이미지에 섹시함이 공존하는 태준의 얼굴은 언제나 여자들의 마음을 무장해제시켰다.
“변호사라고 들었는데.”
“네, 오앤김 로펌에서,”
“시간 개념은 없으신가 봅니다.”
9분이나 늦어 놓고 사과 한마디 없이 자신의 얼굴 얘기나 하는 희라에게 태준의 마음이 더 싸늘해졌다.
태준의 미소에 좋은 분위기라고 생각했던 희라가 차가운 목소리에 당황했다.
“죄송해요, 생각보다 차가 많이 막혀서요.”
“그 얘기가 사실일 확률이 몇 퍼센트라고 생각하죠?”
“네?”
“회사에서 바로 오신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닙니까?”
“……저, 그게,”
“오앤김은 여기서 5분 거리에 있습니다.”
회사에서 출발한다는 얘기를 비서에게 전했다는 사실을 깜빡한 희라가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5분 거리를, 굳이 차를 타고 온 건 아닐 테고.”
눈썹을 쓸던 태준이 서늘하게 말을 이었다.
“전 시간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아주 싫어합니다.”
태준의 말에 희라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던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 벗어 둔 슈트 재킷을 집어 들었다.
“재수 없다고 생각했으면, 그만 일어나도 될까요?”
언제나 그랬듯 공손하지만 까칠한 말투였다.
“아뇨. 일어나지 마세요.”
희라의 말에 태준이 고개를 돌렸다.
“사실 선보기 싫어서 버티다가 나왔어요.”
“…….”
“그런데 나와 보니까 잘 나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계속 얘기해 보라는 듯 태준이 팔짱을 낀 채 빤히 희라를 쳐다보았다.
“강태준 씨가 마음에 든다는 얘길 하고 있는 거예요.”
태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만난 지 5분 만에 마음에 드는 게 성격일 리는 없을 테고. 외모?”
“외모 때문이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죠.”
희라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괜한 소문 때문에 평생 후회할 일을 할 뻔했네요.”
“소문이라…….”
자신에 대한 소문 몇 가지 정도는 알고 있는 태준이 앞에 놓인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에 일 중독자, 철벽남이라는 소문이었는데, 알고 계셨어요?”
태준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 모습마저도 매력이 넘쳐 희라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소문이 아주 제대로네.”
“어머, 그런가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희라가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서희라 씨.”
태준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희라를 응시했다.
“내가 마음에 든다고 했죠.”
희라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네.”
“믿기 힘들겠지만 난 외모밖에 볼 게 없는 사람입니다.”
“네??”
“그러니까 내가 마음에 안 들었으면 좋겠다는 얘기예요.”
희라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태준은 더 설명할 마음이 없었다.
“그럼, 그렇게 알고 그만 일어나죠.”
태준이 슈트 재킷을 들고 망설임 없이 일어나 성큼 걸어갔다.
“잠시만요!”
서둘러 일어난 희라가 태준에게 다가오려 하자 태준이 거리를 두며 손으로 희라를 제지했다.
“여기까지 합시다.”
조금 전과 달리 태준의 눈빛은 다가서기 무서울 만큼 차가웠다.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는 희라를 두고 태준은 그대로 카페를 나왔다.
가을이 르망 호텔 1층에 있는 베이커리에서 하나 남은 케이크를 샀다.
케이크 가게가 문을 닫았다고 하자 고은은 근처에 있는 르망 호텔에서 파는 딸기 케이크를 사다 달라고 했다.
“근처는 무슨.”
버스를 갈아타고 여섯 정거장을 와야 하는 거리였다.
거기다 버스 정거장에서 15분을 걸어 올라와야 했다.
가을이 베이커리에서 나와 막 로비 입구로 향할 때였다.
“어……?”
무심결에 나온 목청 좋은 가을의 목소리에 태준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이 서로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희라는 다가오지도 못하게 했던 태준이 가을을 향해 망설임 없이 다가섰다.
“또 보네요.”
“그러게요.”
‘은인’에서 ‘돈지랄하는 또라이’가 된 태준을 가을이 저도 모르게 훑었다.
메이커는 관심이 없는 가을이었지만 대충 보기에도 걸치고 있는 옷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Rrrr-
가을이 휴대폰 소리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조감독님, 어디세요?
“여기 르망 호텔인데. 왜?”
-최고은 약속 있다고 갔어요.
“뭐???”
-김 감독님이 지금 자리 이동하신다는데 어떻게 해요?
“하…… 지금 고깃집으로 갈 테니까 내 가방은 카운터에 맡겨 줄래?”
전화를 끊은 가을이 휴대폰을 꽉 그러쥐었다.
르망 호텔 케이크가 너무 맛있어서 사람들과 같이 먹고 싶으니 꼭 좀 사다 달라고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내던 고은이 떠올랐다.
이럴 생각으로 그랬다는 걸 깨닫자 가을이 깊은 분노를 느꼈다.
“와, 진짜……. 얜 이런 것만 연구하나?”
이 무더위에 고은에게 놀아난 걸 생각하니 실소가 터졌다.
가을이 손에 들고 있는 케이크 상자를 쳐다보았다.
이 작은 케이크가 무려 5만 원짜리였다.
“환불이 되려나.”
“그 케이크 얘기라면 환불 안 됩니다.”
“왜요? 방금 샀는데?!”
가을이 따지듯 목청껏 언성을 높였다.
“글쎄. 내가 사장은 아니라서요.”
“헉. 죄송합니다.”
태준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케이크를 들고 얕은 한숨을 쉰 가을이 고민에 빠졌다.
이 더위에 놀아남의 증표인 케이크를 들고 다니고 싶진 않았다.
잠시 고민하다 결정을 내린 가을이 태준에게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볼일 보고 가세요.”
그대로 몸을 돌린 가을이 다시 베이커리로 향했다.
안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케이크를 다 먹어 버리고 갈 생각이었다.
가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준이 명석이 좋아하는 빵이 생각나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만오천 원입니다.”
몇 개의 빵을 결제한 태준이 케이크를 잘라 접시에 덜고 있는 가을을 보다가 곁으로 다가갔다.
“생일이에요?”
“아뇨.”
그런데 왜 혼자서 케이크를 먹고 있는지. 태준이 가을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설마 다 먹으려고요?”
그 말에 뭔가 생각난 듯 가을이 동그란 눈으로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좀 드실래요?”
“아뇨.”
금세 기운이 빠진 얼굴로 포크를 집는 가을의 모습을 보던 태준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가을이 빨간 딸기가 탐스럽게 올라가 있는 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입에 넣었다.
입에서 녹는다는 표현이 절로 떠오를 만큼 사르르 녹는 케이크에 깜짝 놀란 가을이 진실의 미간을 만들었다.
하긴, 5만 원이나 하는 케이크가 맛이 없으면 그게 더 놀랄 일이었다.
왜 환불이 안 되냐며 언성을 높이던 모습과 달리 금세 행복한 표정을 짓는 가을의 모습에 태준의 입술이 슬며시 올라갔다.
“맛있죠?”
“그렇네요.”
“여기 케이크, 종종 사 가거든요.”
종종? 이 비싼 걸…….
그래, 20만 원짜리 손수건을 버리라고 하는 사람이었지.
어린 시절 가을은 케이크 대신 초콜릿 빵을 놓고 초를 꽂았다.
바쁜 아빠와 무관심한 할머니 대신 가을의 생일은 늘 선호가 챙겨 주었다.
제대로 된 케이크 역시 선호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사 준 만 원짜리 초콜릿 케이크가 처음이었다.
“돈이 많으신가 봐요?”
저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나간 말에 가을이 서둘러 말을 첨가했다.
“아니 그러니까 이 비싼 케이크를 자주,”
“많습니다.”
깔끔한 대답에 가을이 불쑥 대꾸했다.
“좋으시겠네요.”
부러움과 재수 없음이 공존하는 표정과 말투에 태준이 폭소했다.
“하하하.”
태준을 아는 사람들이 본다면 기절할 만큼 환한 웃음이었다.
태준이 환하게 웃자 날카로움이 묻어난 얼굴에서 소년 같은 청량함이 가득한 얼굴로 바뀌었다.
보는 사람을 설레게 만드는 미소였다.
그걸 증명하듯 베이커리 안에 있는 여자들이 모두 태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가을 역시 그 웃음에 제멋대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이게 웃긴 얘기였나?
생각은 곧 말로 이어졌다.
“제 말이 웃겼나요??”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그게 아니라 왜 웃으신 건지 궁금해서요.”
태준이 느슨히 입술을 올렸다.
“그쪽이 신선해서요.”
“아아…… 신선.”
내가 무슨 신선육도 아니고.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가을이 형태가 무너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조각 케이크를 접시에 담았다.
케이크를 덜다가 손가락에 묻은 생크림을 입으로 가져가 쪽쪽 빨아 대는 가을의 모습을 태준이 빤히 응시했다.
차를 타고 집으로 가야 할 시간에 이름도 모르는 여자와 함께 있는데도 태준은 습관처럼 보던 시계를 보지 않았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처음으로 갖는 무의미한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재밌네요.”
“뭐가요??”
“그냥, 여러 가지?”
“재밌는 포인트가 남다르신가 봐요.”
가을의 말에 태준이 또다시 피식 웃음을 흘렸다.
금세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던 태준이 팔짱을 낀 채 의자에 기대자 가을이 슬쩍 눈치를 살폈다.
“저 혹시…….”
한 차례 권하긴 했지만 다 먹는 건 무리 같아 가을이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태준을 바라보았다.
“드셔 보실 마음은 여전히 없으신가요?”
“신원 확인이 안 된 사람과는 함께 뭘 먹지 않아서요.”
태준은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고 깨어난 순간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에 늘 사람을 경계했다.
그런 태준이 유독 가을 앞에선 자꾸 그 경계가 옅어져 스스로 놀라는 중이었다.
태준의 말에 가을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성격, 좋네요.”
“칭찬으로 들을게요.”
“당연히 칭찬입니다.”
가을이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그럼 제 신원을 말하면, 좀 드실래요?”
태준이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크는 좋아하지 않지만 한 조각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드라마 좋아하신다고 했죠?”
“예.”
“혹시 ‘시간을 지나서’라는 드라마 보셨어요?”
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어요?”
태준이 안다고 하자 갑자기 가을이 요지와는 상관없는 질문을 했다.
“스토리나 연출이나 각각으로 볼 때는 훌륭한데, 7화 이후 합이 맞지 않는 느낌이 강해요. 뛰어난 재료 두 개가 섞이지 못하고 각자 주장이 너무 세달까.”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드라마에 혹평을 하는데도 가을은 정확한 태준의 분석에 놀랐다.
“드라마 덕후이신가 봐요?”
“덕후가 뭐죠?”
“그게, 설명하긴 좀 그런데……. 드라마를 굉장히 좋아하냐는 질문이에요.”
“좋아한다기보다, 관심이죠.”
단순히 관심이라고 하기엔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냈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잠시 궁금해하던 가을이 케이크를 커다랗게 잘라 입에 넣었다.
“그래서 신원은?”
태준이 이야기를 본론으로 돌렸다.
“제가 그 산으로 가고 있는 드라마 팀에서 일해요.”
그 말에 태준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타닥, 타닥’ 두드렸다.
뭔가를 깊게 생각할 때 하는 버릇이었다.
“업무는요.”
“조연출이요. 그러니까 연출가 밑에서 보조 업무를 하면서 촬영이 잘 돌아가게 이것저것 체크하고 돕는 일이죠.”
“조연출이라.”
태준이 뭔가 생각하듯 눈썹을 길게 쓸었다.
“제대로 얘기하면, ‘시간을 지나서’라는 드라마를 만들고 있는 정가을이라고 합니다.”
정가을이라는 이름에 태준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낯이 익은 이름에 태준이 팔짱을 낀 채 작게 이름을 되뇌었다.
“정가을…….”
이내 이름을 기억해 낸 태준의 눈이 슬며시 휘어졌다.
얼마 전 제작사에 다녀온 날 박 비서에게 전달받은 메모지.
단막극 문제로 통화했던 조연출.
“제 신원도 밝혔으니까, 그쪽 신원도 밝히시는 게,”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공평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괜찮겠어요?”
가을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난,”
태준이 씨익 웃었다.
“강태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