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90)

팔을 치기도 전에 몸을 돌린 태준 때문에 애매하게 하이파이브 동작이 된 가을이 들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그사이 가을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진 태준이 이어폰을 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자신을 경계하는 태준의 모습에 살짝 고개를 갸웃하던 가을이 태준을 향해 손수건을 내밀었다.

“빨아서 돌려 드려야 하는데…… 감사히 잘 썼습니다.”

“됐어요.”

“네?”

“돌려받으려고 준 거 아닙니다.”

“그럼…….”

“버려요.”

태준이 몸을 돌려 그대로 산 아래로 내려갔다.

얼마나 빠르게 내려가는지 축지법을 쓰듯 사라졌다.

“……내가 뭐 실수했나……?”

조금 전 정자에서 있었던 일을 되짚어 봤지만 실수한 부분은 생각나지 않았다.

잠시 생각해 보던 가을이 정자로 몸을 돌렸다.

태준의 말대로, 어차피 다시 볼 사이가 아니었다.

신호 대기에 태준의 차가 차도에 멈춰 섰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 개운하게 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오늘 올랐던 주악산은 태준이 평소 다니던 산이 아니었다.

익숙함을 벗어나 새로운 느낌을 갖기 위해 선택했던 산이었다.

야간 산행을 마치고 나면 아침 9시부터 10시까지 운동을 하고 12시까지 계획서를 검토할 예정이었다.

철저히 시간 계산을 하는 태준은 주말에도 정해 둔 스케줄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비에 황금 같은 시간을 낭비했지만 산에서 바라보는 장대비가 제법 운치 있어 습관처럼 확인하던 손목시계도 보지 않았던 태준이었다.

거기다 모르는 여자와 단둘이. 그것도 그렇게 지척에 함께 있는 건 1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손수건을 버리라던 자신의 말에 동그래지던 가을의 눈이 생각나 태준이 눈썹을 지그시 눌렀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가을 때문에 놀라서 손수건을 돌려받을 정신이 없었다.

태준에겐 그렇게 오래 여자와 같이 있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태준이 신호대기를 받는 차 안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강아지와 눈이 마주쳤다.

흰털에 까맣고 동그란 눈, 핑크빛 혀를 내밀고 있는 귀여운 강아지였다.

“닮았네.”

큰 키에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 뽀얀 피부에 큰 눈망울, 오뚝한 콧대와 작은 입술이 꽤 예쁘다고 생각했다.

지난번 응급실에서도, 산에서도.

낯선 여자의 얼굴을 이렇게 오래 본 것은 처음이었다.

태준에게 여자는 기피해야 할 대상이지 관심을 둘 대상이 아니었다.

학창 시절 큰 키에 수려한 외모, 공부까지 잘했던 태준은 주변에서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인기를 누렸다.

거기다 여자에게 무심한 태준의 성격이 오히려 여자들을 안달 나게 만들었다.

타고난 머리에 노력까지 더해져 태준은 한국대 경영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 흔한 사춘기도 겪지 않고 촉망받으며 ‘세양 그룹’ 회장인 문규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스무 살에 입대했던 태준은 복학을 준비하며 공부를 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사고로 한 달간 의식이 없는 상태로 입원해 있었다.

당시 사고를 당한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충격이 크면 그럴 수 있다는 의사의 설명에 태준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 후 미국에 건너가 경영학을 전공했다.

미국에 건너간 순간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 증상이 시작되었다.

태준을 좋아하던 여자가 갑자기 태준을 끌어안았을 때, 온몸이 떨리며 숨이 막혀 와 그대로 쓰러졌다.

그 후로도 몇 번 그런 일이 일어나자 태준은 여자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자와 몸이 닿으면 극도의 공포와 함께 공황장애 증상이 발생했다.

그 이유로 여자를 가까이하기는커녕, 눈길도 주지 않았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내내 여자들 근처에는 가지 않고, 누가 손이라도 댈라치면 매섭게 내치는 모습 때문에 남자를 좋아하는 거 아니냐는 소문이 돌자 태준은 남자들과도 거리를 두었다.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문보다는 곁을 주지 않는 냉혈한에, 지독한 결벽증이 있다는 소문이 더 나았다.

다른 것도 아닌 여자에 관련된 증상으로 섣불리 병원 기록을 남길 수가 없어 태준은 여자들을 경계하며 스스로 자신의 증상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세양 그룹’의 회장인 문규는 대를 잇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다.

여자를 만질 수도, 좁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도 견디기 힘든 태준은 결혼 자체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행여 여자에 대한 이상 증상이 알려진다면 ‘세양 그룹’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위험해질 게 뻔했다.

그런 이유로 태준은 자신의 증상을 숨기기 위해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여자를 극도로 멀리했다.

그랬던 자신이 가을과 단둘이, 그것도 무려 40분이나 같이 있었다.

보통의 태준이었다면 비를 맞고 내려가는 쪽을 선택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태준은 그때 가을을 따라 정자로 향했다.

빠앙-

신호가 바뀌어도 출발하지 않자 뒤에서 사납게 경적이 울렸다.

그대로 액셀을 밟은 태준이 한참이나 차를 몰아 고급 빌라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막 시동을 껐을 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Rrrr-

발신자 [임명석].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명석은 태준의 이상 증상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만큼 태준이 가장 믿는 사람이자, 뛰어난 능력을 자랑하는 비서였다.

“여보세요.”

-어디세요?

“너무 늦게 전화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알람을 맞췄는데 이제 일어났어요.

“목소리에 미안함이 없는데?”

-대표님은 늘 미안함이 없으시잖아요.

“내가 언제?”

-근래로는 지난번 응급실 일이 있었죠.

가을이 태준의 차 앞에서 쓰러진 날.

태준은 평소답지 않게 차 문을 열고 나가 가을의 상태를 확인했다.

뒤이어 나온 명석이 119에 연락하려 하자 태준은 가을을 차에 태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명석이 가을을 안아 들고 뒷자리에 태울 동안 여자에게 손을 댈 수 없는 태준은 그저 묵묵히 차 문을 열어 주고 보조석에 탔을 뿐이었다.

-그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구급차 올 때까지 기다렸으면 거기서 잘못됐어. 바닥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알지?”

-원래 대표님이셨다면 바닥이 타들어 갔어도 신고만 하고 가셨을 거예요.

“날 뭘로 보고.”

-제대로 보고 있죠.

명석의 말대로 태준은 귀찮고 번거로운 일은 딱 질색이었다.

거기다 여자를 차에 태우다니.

평소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119에 신고했어도 5분 정도면 왔을 텐데. ‘뒷자리에 태워.’ 하고 대표님은 손 하나 까딱 안 하셨잖습니까.

“차 문 열었어.”

-큰일 하셨네요.

태준이 여자를 만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명석은 일부러 원망하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그날 체감 온도가 무려 40도가,

“알았어, 미안해. 됐지?”

명석이 목적을 이룬 듯 빠르게 대답했다.

-그럼 오늘 일은 비긴 걸로 하죠.

“그러기엔 시간에 따른 손해 폭이 내가 더 커.”

명석은 태준과 함께 야간 산행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전화도 받지 않고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자 태준이 혼자 산에 오른 참이었다.

“누굴 기다리느라 30분이나 손해 봤거든.”

-전 대표님 때문에 세 시간을 손해 봤습니다.

“세 시간이나 마셨어?”

어제 회사로 오라고 한 문규가 술 한잔하자고 하자 바쁘다는 핑계로 빠져나온 태준이었다.

문규와 술을 마시면 결혼하라는 얘기를 끊임없이 들을 게 뻔했다.

태준 대신 붙잡힌 명석이 몇 시간이나 이어지는 ‘세양 그룹’ 성공 신화 레퍼토리를 들었다.

-예. 덕분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아서 못 간 거니까 좀 봐주세요.

“머리가 깨질 동안 손은 뭐 했는데.”

-쉬고 있었죠. 제가 잠들어 있었으니까요.

“결론은 전날 과음으로 못 일어나서 날 바람맞혔단 거네.”

-맥테란을 두 병이나 마셨어요.

맥테란 30년산은 문규가 가장 좋아하는 술 종류 중 하나였다.

“적당히 마시지 그랬어.”

-한 병에 300만 원이나 하는 걸 언제 또 마셔 보겠어요. 아무튼 전 조금 쉴게요.

“임명석. 많이 컸다?”

-전부터 컸어요. 끊습니다.

“하-.”

끊긴 휴대폰을 보던 태준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 살 차이에도 늘 깍듯하게 대하는 명석은 한 번씩 반항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이곤 했다.

어깨를 주무르며 보조석에 둔 배낭을 챙겨 든 태준이 가방 옆 주머니에 꽂힌 나무젓가락을 쳐다보았다.

행운권이라니.

잠시 나무젓가락을 보던 태준이 피식 웃곤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산에서 내려와 개운하게 샤워를 끝낸 가을이 선풍기를 틀어 머리를 말렸다.

여름엔 드라이기보다 이렇게 선풍기로 머리를 말리는 게 더 개운했다.

두피까지 바싹 머리를 말린 가을이 하나로 질끈 묶은 후 작은 상을 펼치고 앉아 편의점에서 사 온 ‘맵닭 볶음면’ 뚜껑을 뜯었다.

김밥 한 줄로는 어쩐지 아쉬워 칼칼하게 매운 음식을 선택했다.

간편한 조리과정을 거친 후 가을이 한 젓가락 크게 떠 입 안에 넣었다.

“으, 매워.”

진저리를 치면서도 가을은 빨간 면발을 열심히 입에 넣었다.

5평 남짓한 작은 방.

침대에 누워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원룸이었다.

출퇴근 없는 일에 박봉이라 7년간 원룸만 전전하며 살다가 이제야 15평 빌라로 집을 얻어 조만간 이사를 앞두고 있었다.

간단한 살림살이에 옷이라고 해 봤자 몇 벌로 돌려 입는 수준이라 짐이라곤 커다란 상자 몇 개에 들어갈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촬영이 시작되면 스튜디오 근처에 사무실을 얻어 FD와 함께 먹고 자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집에 와서 쉬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피곤한 듯 멍한 표정으로 라면을 먹던 가을이 샤워를 하기 전 등산복 주머니에서 빼놓은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얼마짜리길래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라고 할까.

오천 원 주고 산 티셔츠도 족히 몇 년은 입고 버리는 가을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디링-

메시지 소리에 가을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달랑 죽 사진만 보낸 의찬의 메시지였다.

가을이 메시지를 보냈다.

[무리해서 달리더라. 속 많이 안 좋아?]

조금 후 의찬에게 메시지가 왔다.

[관 뚜껑 열고 나온 기분이야. 날 버리고 간 산행은 어땠어.]

가을이 상 위에 놓은 ‘맵닭 볶음면’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보냈다.

[산에 갔다 와서 먹는 중.]

[손수건은 뭐야? 선물 받았어?]

의찬의 메시지에 가을이 자신이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김밥 옆에 놓아둔 손수건이 반쯤 찍혀 있었다.

[어쩌다 보니 생겼네.]

[그거 ‘THE MJ’ 거잖아. 협찬이야?]

[‘THE MJ’? 비싼 거야?]

[비싸지. 한 20만 원 할걸?]

순간 가을이 튀어나올 듯한 눈으로 손수건을 쳐다보았다.

“20만 원?? 저게?”

[버려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태준의 모습이 떠올라 가을의 얼굴에 어이없는 웃음이 걸렸다.

며칠 식비를 아무렇지 않게 버리라고 하다니.

“완전 또라이잖아?”

가을이 제일 싫어하는 지랄이 바로 ‘돈지랄’이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늘 보이는 폐지를 줍고 다니는 할머니가 하루 버는 돈은 5천 원이었다.

친분이 있는 다큐 PD를 따라갔던 휴먼다큐 특집에서 만난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고생해서 버는 돈은 단 몇천 원이었다.

개인마다 돈의 가치가 다른 건 알지만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돈을 낭비하는 사람을 가을은 제일 싫어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어쩐지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결벽증이 있는 사람인가…….”

자신이 썼다는 이유로 손수건도 버리라고 하고, 살짝 팔을 치려고 했을 뿐인데 놀라서 피하는 모습이 어쩌면 결벽증이 심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면을 쓸어 입에 넣은 가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쉬는 날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하고 냉장고 안에서 뭐가 썩어 가고 있는지 모를 음식들을 꺼내 버린 후 늘어지게 잠을 잘 예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휴대폰을 끄고 자고 싶었지만 지금 한창 촬영 중인 B팀에서 연락이 올지도 몰라 그럴 수가 없었다.

미뤄놓은 원룸 청소를 열심히 할 때.

똑똑-

초인종도 없는 원룸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혹시 가영인가 싶어 가을이 문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아무런 대답이 없자 고개를 갸웃거린 가을이 다시 작은 건조대에 빨래를 널었다.

디링-

가을이 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거 가지고 되겠냐. 너 좋아하는 치킨 시켰다.]

의찬의 문자에 가을이 냉큼 현관문을 열자 배달원이 두고 간 치킨 봉투가 보였다.

“얘는 이 시간에 치킨을. 기특하게.”

냉큼 상에다 올려놓고 자리에 앉은 가을이 의찬에게 답장을 보냈다.

[후기 쓴다고 했지?]

얻어먹는 가을이 야무지게 후기 이벤트를 챙겼다.

[당연하지. 띠~드볼 확인해 봐라.]

가을이 쉬는 날이면 이런 식으로 배달 어플로 음식을 주문해 주곤 하던 의찬이었다.

[후기 쓰게 사진 먼저 찍어서 보내.]

의찬의 메시지에 가을이 치킨 상자를 열어 먹음직스럽게 세팅한 후 사진을 찍었다.

그때였다.

Rrrr-

B팀 FD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어쩐지 불안한 마음에 가을이 잠시 휴대폰을 보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조감독님, 큰일 났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