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90)

가을이 망설일 틈도 없이 소리쳤다.

“감독님! 중요한 전화 좀 받고 오겠습니다!!”

김 감독이 어떤 표정을 할지 눈에 훤했지만 늘 먹는 욕, 한 번 더 먹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가을이 촬영 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뛰듯 걸어가며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정가을 씨, 휴대폰입니까?

귀에 쏙 박히는 매력적인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이런 목소리의 상담원이라면 뭘 가입하라고 해도 할 것 같은, 신뢰감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맞습니다!”

-‘STN’ 대표, 강태준입니다.

가을의 예상대로 대표의 전화였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마치 태준이 앞에 있는 듯 가을이 꾸벅 인사를 했다.

-늦은 시간에 미안합니다. 제가 이제야 메모를 확인했거든요.

“전혀 늦지 않았습니다! 전화 주셔서 감사해요!”

대표이사가 바뀌고 나서 여러 가지 소문이 들려왔지만 가을은 그런 걸 귀담아들을 여유가 없었다.

기억나는 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였다.

역시 소문이라는 건 다 과장된 거야.

스태프의 메모에 전화를 해 주는 대표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일 리가 없었다.

“어머~ 저기 촬영하나 봐.”

공원에 산책을 나왔다가 촬영 현장을 본 여자들이 주연 남자 배우를 발견한 듯 탄성을 질렀다.

조용히 통화하고 싶어 가을이 여자들을 피해 몸을 돌렸다.

협찬을 비롯해 상대에게 뭔가를 부탁할 때는 무조건 칭찬부터 하고 보는 가을이 칭찬할 거리를 찾았다.

“대표님 목소리가,”

“진짜 잘생겼다.”

“진짜 잘생기셨습니다!”

-…….

가을이 고개를 털며 빠르게 말을 정정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목소리가 굉장히 젊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가을의 칭찬에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세양 그룹’ 손자가 대표이사로 취임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을 뿐, 나이가 몇인지는 모르고 있던 가을이었다.

누가 대표로 오든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칭찬에 대한 언급 없이 태준이 바로 본론을 물었다.

-중요한 일이라던데, 무슨 일이죠?

태준이 아무런 반응이 없이 본론을 묻자 긴장감이 몰려온 가을이 심호흡을 했다.

“그게, 흠흠.”

가을이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말을 이었다.

“단막극을 폐지하신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그래서요.

“그래서 말씀인데,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아니면 내년까지만이라도…… 사실 제가 내년에 할 단막극 연출을 맡았습니다. 저한텐 정말 황금 같은 기회예요.”

-그래서요.

같은 말이었지만 조금 전과는 다른 피곤함이 잔뜩 배어든 차가운 태준의 목소리에 가을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당장이야 손해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요, 단막극은 투자의,”

-투자, 기회 말고. 다른 이유를 듣죠.

“다른 이유요?”

-2분 드리겠습니다.

태준과 통화가 됐을 경우를 대비해 가을은 단막극의 투자 가치에 대한 설명 및 감정적 호소를 하려고 계획했었다.

그러나 생각지 못한 시간제한이 생기자 가을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머리는 차분하게 가슴은 뜨겁게, 가을이 감정의 호소에 들어갔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아온 여러 사람의 운명이 걸린 일입니다. 저 말고도 단막극을 준비하던 지망생들이나, 연출을 하기로 한 피디들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그 사람들이 바친 세월과 꿈과, 희망을 한순간에 없앤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1분 30초 남았습니다.

마치 밥이 다 되어 간다는 기계음처럼 건조한 목소리였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다니.

가을이 깊게 심호흡을 했다.

단막극 폐지론이 거론될 때마다 PD 협회에서 주장하는 단막극의 필요성을 얘기할 차례였다.

가을은 노래방에서 스태프들의 비웃음을 사면서도 꿋꿋하게 랩을 하던 실력을 발휘했다.

“물론 방송사도 이윤을 얻어야 하는 곳이니 당장 손해가 나는 단막극이 마음에 안 드실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미니시리즈에서는 다룰 수 없는 심도 있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사회에 경종을 울릴 수도 있고, 참신하고 특이한 소재를 발굴할 수도 있고요. 최근엔 2차 수익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걸로 압니다. 새로운 수익을 창출할 기회가 넓어진 거죠. 거기다 숏폼 콘텐츠가 최근 트렌드이고요. 이런 면들을 생각했을 때,”

-정가을 씨.

숨이 차도록 빠르게 말을 뱉어 낸 가을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네.”

-판단은, 내가 합니다.

“…….”

-여긴 동네 장사하는 곳이 아닙니다. 개인 사정을 들어줄 곳이 필요하면, 다른 일을 하세요.

“대표님, 다시 한번 생각을,”

-결정은 이미 났습니다. 앞으론 이 문제로 통화하는 일, 없도록 하죠.

툭- 전화가 끊겼다.

가을이 끊어진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애초에 위에서 이미 결정 난 사안을 되돌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가 없었다.

눈앞으로 다가왔던 자신의 꿈이 사라진 것 같아서…… 선호에게 소원을 빌 기회가 끝난 것 같아서…….

가을은 대표에게 무릎을 꿇고 사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잔뜩 기운이 빠져 촬영장으로 걸음을 옮기던 가을이 우뚝 멈춰 섰다.

정말 이대로 끝이라고…….

앞으로 몇 년을 더 버텨야 이런 기회를 갖게 될지 몰랐다.

1년? 2년? 어쩌면 평생 조연출만 하다 끝날 수도 있었다.

“정가을!”

“…….”

“정가을!!!”

“왜!!!!!”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가을이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는 김 감독과, 일제히 자신을 보고 있는 스태프들이었다.

머리가 하얘진 가을이 눈을 깜빡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점점 표정이 일그러지는 김 감독을 보며 가을이 천천히 팔을 움직였다.

“왜 자꾸 날 흔들어~ 네가 뭔데 흔들어. 왜 자꾸 날 흔들어……. 이제 와 흔들어. ……아~ 예에…….”

가을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가장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율동에 가까운 춤을 췄다.

김 감독이 손가락 하나를 펴 오라는 손동작을 하자, 더위를 먹었다는 주장이라도 하려는 듯 가을이 끝까지 율동을 하며 김 감독 앞으로 향했다.

“의찬아아아.”

집으로 향하려던 가을이 의찬의 가게에 들어섰다.

번화가에서 떨어져 있어 단골들 위주로 운영되는 작은 BAR 안에 감미로운 재즈가 흘러나왔다.

곳곳에 의찬의 취향이 묻어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감각적인 BAR였다.

가을이 축 늘어진 채 의찬의 이름을 부르며 안으로 들어오자 바 테이블 안에서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던 의찬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우야. 난 귀신인 줄?”

자주 있던 반응인지 가을이 아무런 표정 없이 바 테이블에 앉았다.

“어떻게 나날이 상태가 이러냐. 거울은 보는 거지?”

“흉해?”

가을이 자꾸만 감기는 눈에 힘을 주며 의찬을 올려다보았다.

“야, 눈에 힘 빼. 더 무서워.”

그 말에 가을이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털었다.

“사람들이 안 피하디?”

의찬이 모기에게 숱하게 물려 울긋불긋한 가을의 몸 상태를 가리켰다. 거기다 물파스를 얼마나 발랐는지 화한 냄새가 코를 찌를 정도였다.

“내가 너 때문에 그 드라마를 보면 눈물이 나.”

“나도 가끔 울어.”

가을이 물린 곳을 긁지 않기 위해 찰싹찰싹 때렸다. 한번 긁기 시작하면 지옥의 시작이었다.

“나 술 좀 주라.”

“마셔도 돼? 촬영은.”

“내일 쉬는 날.”

가을이 가게 안을 돌아보았다.

“가영이는?”

가영은 항공운항과를 졸업해 취업을 준비하며 의찬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다섯 살 어린 가을의 동생이었다.

엄마와 살던 가영은 스무 살이 되자마자 가을의 집 근처로 독립했다.

“오늘 약속 있으시단다.”

“또?”

“가끔은 걔가 사장 같아.”

의찬이 주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소맥을 좋아하는 가을을 위해 주방 냉장고엔 늘 소주와 캔맥주가 준비되어 있었다.

“뭐 마실래?”

“오늘은 소주.”

주방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온 의찬이 작은 잔에 따라 가을의 앞에 놓았다.

“안주시켜놨으니까 나오면…….”

의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을이 소주가 든 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심상치 않아 보이는 가을의 분위기에 의찬이 일부러 목소리를 올렸다.

“누가 우리 정가을이를 이렇게 괴롭게 했어. 김 감독이야?”

의찬은 가을이 19살이 되던 해 전학을 간 학교에서 만난 친구였다.

늘 웃기만 할 뿐 아이들과 어울리지는 않는 가을에게 다가가기 위해 의찬은 부단히도 노력했다.

친구를 만들 생각이 없다는 가을을 끊임없이 귀찮게 하면서 의찬은 결국 가을과 친구가 되었다.

“내가 가서 때려 줘?”

“응.”

“합의금 내 줄 거지?”

“너희 집 부자잖아.”

“나 내놓은 자식인 거 알면서~.”

말과는 어울리지 않게 의찬이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이 웃음에 설레지 않는 여자가 없었지만, 가을은 그저 상큼한 과일 정도로만 취급했다.

“내년이면 연출가로 입봉하시는 분께서 무슨 일이 그렇게 힘드실까.”

의찬의 말에 낯빛이 어두워진 가을이 빈 잔에 술을 채우라는 신호를 보냈다.

“잠깐만.”

주방에 일러둔 안주 중, 샐러드가 나오자 의찬이 가을의 앞에 놓고 빈 잔에 소주를 채웠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늘 웃고 밝은 모습만 보이던 가을이었지만, 의찬의 앞에서는 자신의 속내를 보이곤 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얘기나 부모님에 관한 부분은 자세하게 얘기한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인데.”

가을의 상태를 알아챈 의찬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최고은이 또 촬영 못 하겠대?”

“……아니.”

“광고 줄었어?”

“아니.”

순간, 의찬의 눈이 커졌다.

“집주인이 보증금 안 준대??”

“의찬아.”

“응.”

“나…….”

의찬이 가을의 다음 말을 진득이 기다렸다.

의찬이 따라 준 소주를 한 번에 마시고 내려놓은 가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단막극 말이야.”

가을이 입술을 잘근 깨물다 의찬을 올려다보았다.

“……못 하게 됐어.”

“……!!”

가을이 얼마나 그 순간을 기다렸는지 알고 있는 의찬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왜?”

“폐지한대.”

“하…….”

의찬이 비어 있는 가을의 소주잔에 소주를 붓고 단번에 입으로 털어 넣었다.

“술을 왜 마셔. 너 장사해야지.”

“지금 장사가 문제야? 왜 폐지하는데? 왜 해도 지금 하는데!”

본인 일엔 크게 흥분하지 않는 의찬은 언제나 가을의 일에는 제 일보다 더 흥분했다.

그런 의찬의 모습에 가을이 피식 웃었다.

“그러게, 왜 해도 지금 할까.”

“아예 결정 난 거야?”

“그렇대.”

“너 추천한 사람이 높은 사람이라며. 얘기해 봤어?”

“더 높은 사람하고 얘기해 봤지.”

“누구?”

“대표.”

“STN 대표?”

“응.”

“뭐래?”

“이미 결정 난 거라고.”

의찬이 이마를 덮고 있는 풍성한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하여간, 의자에 앉아서 계산기나 두드리는 놈들은 다 똑같아. 한 치 앞을 못 봐, 한 치 앞을. 그러니까 이렇게 대성할 연출가를 못 알아보지.”

“내 말이.”

“네 입봉작을 ‘STN’에서 해 주겠다는데.”

“내 말이!”

“정가을, 너 나중에 연출가 돼도 ‘STN’하곤 일하지 마.”

“당연하지!”

“대표가 와서 무릎 꿇고 사정해도 절대 하지 마, 알았어?”

가을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할 수 있는 게 고작 말도 안 되는 다짐뿐이었지만 자신의 일처럼 화내는 친구가 있어 가을은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오늘 마시고 죽자.”

“가게는?”

“영태야.”

의찬이 홀을 보고 있는 직원을 불렀다.

“예, 사장님.”

“시급 두 배로 줄 테니까, 오늘 네가 여기도 좀 봐라.”

잠시 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의찬이 가을과 함께 한쪽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의찬이 양주를 가져와 잔에 따르자 가을이 깜짝 놀랐다.

“이거 비싼 거 아냐?”

“내가 이 정도도 못 해 줄까.”

“오~ 김의찬.”

가을의 반응에 의찬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반하지 마라. 피곤해.”

술에 취하면 더 서글퍼질 것 같아 가을은 의찬이 따라 준 양주 한 잔을 마시고 무알코올 칵테일로 종목을 변경했다.

‘STN’ 욕에서 시작해 최근 방송하고 있는 드라마 얘기로 번지며 두 사람은 오랜만의 수다를 이어 갔다.

* * *

가을이 새벽 산에 올랐다.

더 마시자는 의찬에게 대리기사를 불러 주고 가을은 같은 방향으로 가는 직원의 차를 타고 집 근처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야간 산행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한 후 그대로 산으로 직행했다.

산 정상에 올라 모든 걸 털어 내고 새롭게 시작할 생각이었다.

가을은 산이 좋았다.

산에서 느끼는 편안함이 선호가 주던 편안함과 닮아 있었다.

우연히 시작한 야간 산행의 매력에 빠져 가을은 쉬는 날이면 가끔씩 산에 올랐다.

눈앞에 보이는 것 없이 머리에 두른 전등 하나에 의존해 걷는 길. 헉헉대는 숨소리를 듣다 보면 어느새 정상에 서게 되는 것이 좋았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산의 향기도 매력적이었다. 여름엔 습한 공기에 짙은 풀 내음이 묻어났다.

생각을 정리하며 천천히 올랐는데도 가을은 해가 뜨기 전에 산 정상에 도착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단막극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벗어 버리고 새롭게 각오를 다질 생각이었다.

정상에 선 가을이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손을 모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에스티에에에에엔~~~~~!!!!”

목청 좋은 가을이 단전에서부터 밀어 올려 소리를 지르자 온 산이 울릴 듯 메아리가 퍼졌다.

“잘 먹고 잘 살지 마~!!!! 얼마나 잘되는지 두고 볼 거야~!!”

숨을 한번 고른 가을이 더 크게 소리쳤다.

“내가 저주할 거야, 에스티에엔~~~!!!!”

가을이 이대로는 아쉬운지 마지막 목소리를 냈다.

“에스티엔 대표~~~!!!! 들리니~~~~!! CCTV 없는 골목에서 뒤통수 조심해라~~~!!!!”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 목청껏 소리를 지른 가을이 이제야 속이 시원한 듯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산뜻해진 마음으로 산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는 가을의 뒤로, 처음부터 모든 걸 듣고 있던 사람.

뒤통수를 조심해야 할 ‘STN’ 대표. 태준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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