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준의 말에 고위 간부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단막극 폐지요?”
“제작비 평균 2억에, 시청률 1%가 정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제작부 부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시청률보다 인재를 키운다는 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인재라…….”
의자 등받이로 몸을 기댄 태준이 낮게 말을 이었다.
“그 인재를 왜 우리가 키워야 하죠?”
“지금 당장이야 효과를 보진 못하겠지만 단막극 공모전을 통해서 신인 작가를 발굴하고 신입 PD가 성장할 기회를 주면 그게 추후에 시청률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번엔 연출부 CP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다른 방송사들도 투자의 개념으로 단막극 공모전을 열고 제작을 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태준이 한쪽에 놓인 서류를 넘겼다.
“작년 한 해 총 21억 투자한 단막극의 적자가 9억입니다. 12편 방송하는 내내 시청률은 1%. 제일 높은 단막극이 2.2%. 이 수치들이 뭘 의미할까요?”
서류를 넘기던 태준이 고위 간부들을 쳐다보았다.
“비싼 재료로 장을 담가서, 밑 빠진 독에 열심히 붓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단막극을 내보내는 동안, 동 시간대 다른 방송국 시청률. 확인하셨습니까?”
“…….”
“콘텐츠 경쟁력이 없는 곳에 투자할 이유가 없습니다.”
단호한 태준의 목소리에 고위 간부들이 저마다 생각에 빠진 듯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제작부 CP가 태준을 응시했다.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는 임영옥 작가도 저희 단막극 공모전 출신입니다. 그 단막극을 찍은 PD 역시 최근 시청률을 보증하는 PD고요. 단막극이 인재를 만들어 내는 발판은 확실합니다.”
“음.”
제작부 CP의 말에 태준이 테이블에 양쪽 팔을 올려 깍지를 꼈다.
“임영옥 작가가 당선됐을 당시, 그 작품을 포함해 편성된 단막은 총 10편이었죠. 총 13억 투자해서 손해액은 5억. 평균 시청률 1.2% 최고 시청률 3.6% 그 최고 시청률이 임영옥 작가였습니다.”
태준이 서류를 보지도 않고 5년 전 단막극과 관련된 사항을 줄줄 읊자 자주 겪는 일임에도 고위 간부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때 당선된 작가 중 빛을 보고 있는 건 임영옥 작가뿐입니다. 연출가로 활약하고 있는 사람도, 당시 연출자 중 한 명인 김민수 PD뿐이죠. 투자 대비, 손해가 크다고 생각 안 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번에 자체 제작한 미니시리즈 역시 투자 대비 손해가 큽니다. 손해로만 접근하면 차이가 없습니다.”
순간, 가뜩이나 낮은 태준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깔렸다.
“그러니까요. 왜 그럴까요?”
청아한 얼굴과 대비되게 살벌함 마저 깃든 태준의 눈빛에 고위 간부들이 침묵했다.
얼마 전 유명한 미국 드라마 판권을 사 리메이크했던 드라마가 최악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왜 드라마는, 동 시간대 시청률 꼴찌를 우리 방송사가 맡는 걸까요. 그것도 매년.”
태준이 다시 타닥- 타닥- 책상을 치며 고위 간부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췄다.
‘STN’ 방송국은 ‘세양 그룹’의 자회사였다.
전문 CEO를 내세워 탄탄한 입지를 다져 가던 ‘STN’은 몇 년째 시청률을 경쟁 방송국에 빼앗기고 있었다.
‘STN’에서 하는 드라마나 예능을 누가 보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거기다 CEO가 사회적 물의까지 일으켜 ‘STN’은 더 휘청거렸다.
경쟁 방송사에 인수된다는 소문이 무성하던 1년 전.
‘STN’ 대표이사 사장으로 태준이 취임했다.
그 후로 과감한 인사 개편과 함께 시청률이 낮은 프로그램을 가차 없이 폐지하는 등, 방송국 내 거친 피바람이 불었다.
능력을 보이지 못하면 그게 누구든 여지없이 자리에서 내려보냈다.
모든 건 철저히 능력 위주로 돌아갔다.
능력 있는 연출가와 작가들을 스카우트하고, 누구라도 참신한 아이디어를 낼 수 있게 방송국 내 공모전도 주최하면서 열심히만 하면 성과를 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직원뿐만이 아니라 계약직, 파견직 가리지 않고 그 기회는 똑같이 제공되었다.
그때 나온 몇 개의 예능프로가 첫 방송부터 대박을 치면서 현재 예능 부분에선 높은 시청률을 자랑했다.
하지만 드라마.
드라마는 여전히 참담했다.
편성을 거절한 드라마가 다른 방송사에서 대박을 치고, 다른 방송사에서 대박을 쳤던 작가와 연출가가 만든 드라마는 ‘STN’에 와서 거하게 망했다.
빠르게 시청률을 잡은 예능국과 비교되면서 가뜩이나 눈치를 보던 드라마국 고위 간부들이 책임을 묻는 듯한 태준의 눈빛을 회피했다.
드라마가 잘되고 있다면 목소리라도 내어 볼 만했지만, 그간 방송하는 것마다 파죽지세로 망해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스타 작가와 스타 피디가 만나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시간을 지나서’가 제법 시청률을 올리고 있었지만 동 시간대 다른 방송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를 내보내 시청률 면에서 밀리고 있었다.
“올해부터 단막극 공모전 대신, 좀 더 참신한 시리즈 형태의 공모전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갔으면 하는데, 본부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던 드라마국 본부장이 태준의 의견에 동조했다.
“저도 단막극보다 시리즈에 힘을 실어야 한다고 봅니다.”
“자 그럼, 다른 의견 있으신 분.”
말을 멈춘 태준이 슬쩍 손을 들어 보였다.
“10분 드리죠.”
“10분이요?”
“시간은 금인 거, 다들 아시죠?”
“…….”
“전 지금 여러분께 금을 내드린 겁니다.”
고위 간부들이 서로 눈치만 보는 사이, 태준이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한껏 낮아진 목소리를 내었다.
“9분 남았습니다.”
다급해진 고위 간부들이 몇 차례 단막극의 필요성을 주장했지만 결국 태준의 현실적인 반론에 반박하지 못하고 폐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 후 앞으로 드라마 사업을 어떤 방향으로 진행할지에 대한 논의가 한참 이루어지고 나서야 회의가 끝났다.
* * *
오늘도 역시 질끈 묶은 머리에 정체성을 잃은 혼란한 체크 남방을 입은 가을이 스튜디오 녹화를 끝내고 ‘STN’ 편집실에서 1차 편집을 도왔다.
늦은 점심을 먹고 복도에 있는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은 가을이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누가 봐도 가을의 상태는 며칠 밤을 지새운 사람의 모습이었다.
맑고 뽀얀 피부에 어느덧 자리 잡은 퀭한 다크서클이 이젠 한 몸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가을이 호로록 커피를 들이켰다.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였지만, 든든하게 밥을 먹고 마시는 커피는 꿀맛 그 자체였다.
“조감독.”
가을이 촬영 감독인 도식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네!”
190cm가 넘는 키에 비쩍 말라 흐느적거리는 풍선 인형 같은 도식이 자신도 방송국에 볼일이 있다며 가을과 함께 ‘STN’으로 넘어왔다.
도식이 자판기로 다가가 동전을 넣으며 가을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진짜 꾹 참다가 물어보는 건데…….”
“내일 점심 밥차입니다!”
“그거 말고.”
가을만 보면 음식 메뉴를 묻던 도식이 가을의 옷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런 옷은 매번 어디서 구해 입는 거야?”
“진짜 예쁘죠?”
확신에 차 맑게 웃는 가을을 보며 도식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진심이니?”
“남성용도 파는데, 알려 드릴까요?”
도식이 괜찮다는 듯 손사래 치며 커피를 들고 자리를 벗어났다.
위이잉-
휴대폰 진동 소리에 가을이 확인도 하지 않고 인상을 썼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쉬는 걸 보지 못하는 김 감독이 분명하다고 생각해 손에 든 휴대폰을 확인하던 가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뜨뜨.”
그 바람에 커피가 살짝 가을의 손등을 덮쳤다.
가을이 커피를 의자에 내려놓고 커피가 묻은 손을 탈탈 털며 전화를 받았다.
“예, CP님!”
가을에게 단막극 연출의 기회를 주었던 CP의 전화였다.
-지금 어디야?
“저 지금 드라마국 앞인데요.”
-드라마국? 나도 지금 거기 지나가는데. 어, 저기 보이네.
가을이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CP가 가을에게 다가왔다.
“가을 씨.”
“안녕하세요!!”
가을이 한껏 들뜬 표정으로 해맑게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에 CP가 크게 한숨을 쉬며 다가왔다.
“그게 말이야.”
“네!”
난감한 듯 몇 번 목을 쓸어내리던 CP가 본론을 꺼냈다.
“단막극, 폐지하기로 결정 났어.”
“……네??”
충격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가을이 이내 정신을 차렸다.
“단막극이…… 갑자기 왜요?”
“여기 대표이사 바뀐 거 알지?”
“네…….”
“이익 안 되는 건 가차 없어.”
“단막극 이익 안 되는 거야 늘 그랬잖아요.”
“그래서 드라마국 PD들이 반대하는 분위기긴 한데, 번복시키긴 힘들 거 같아.”
“그럼 공모전은…….”
“당연히 끝이지 뭐.”
이제야 한 걸음 내디뎠다고 생각했던 가을은 ‘단막극 폐지’라는 말에 그대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또 좋은 기회 있을 테니까 너무 실망하지 말고.”
CP가 기운 내라는 듯 가을의 어깨를 툭 치고 갔다.
시간이 흘러 경력이 차고 능력을 인정받으면 연출가가 될 수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학력도 안 되고 전공자도 아닌 가을에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드라마가 삶의 낙이라는 할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 드라마를 보는 게 가을의 일과 중 하나였다.
그럴 때마다 가을은 할머니가 드라마만큼 자신도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 막연히 드라마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던 가을은 우연히 보게 된 드라마 촬영장에서 현장을 지휘하는 연출가의 모습을 보고 확실한 꿈을 갖게 되었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 대신 돈을 벌면서 경험을 쌓는 쪽을 택했고 그렇게 7년을 고생한 끝에 얻은 기회였다.
꿈에 한 걸음 다가갔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
숨을 크게 내쉬던 가을이 어딘가를 향해 뛰어갔다.
불가능하다는 건 알지만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가을이 반쯤 넋이 나가 찾은 곳은 대표이사 태준의 비서실이었다.
그러나 당찼던 걸음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두 명의 남자 비서 앞에서 막혔다.
“무슨 일이시죠?”
“드라마 ‘시간을 건너서’ 조연출 정가을입니다. 대표님 좀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약속하고 오셨습니까?”
“아뇨…… 그건 아닌데…….”
“죄송하지만 약속을 잡으신 후에 다시 와 주십시오.”
“아주 잠깐이라도 좀 뵐 수 없을까요?”
“대표님 자리에 안 계십니다. 나중에 약속 잡고, 다시 오세요.”
박 비서가 친절하지만 매뉴얼 같은 말을 뱉었다.
무턱대고 대표를 만나러 왔던 가을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대책이 없었다. 약속도 없이 찾아온 일개 조연출을 대표이사가 만나 줄 리가 없었다.
미소 지으며 얼른 나가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박 비서를 향해 가을이 공손한 목소리를 냈다.
“잠깐 메모지랑 펜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메모지와 펜을 빌린 가을이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 비서에게 건넸다.
“이건 그냥 연락처를 적은 메모지가 아니라, 제 인생이 달린 메모지예요. 그러니까…….”
가을이 간절함을 담아 말을 이었다.
“대표님 오시면 꼭 좀, 전화 한 번만 부탁드린다고. 정말 꼭 좀…… 부탁드립니다.”
가을이 90도로 꾸벅 인사를 한 후 비서실을 나왔다.
비서가 전달해 줄 확률도, 대표가 전화해 줄 확률도 높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이렇게 꿈에서 멀어질 순 없었다.
늦은 시간, 공원에서 야외 촬영이 이어졌다.
더위로도 모자라 조명으로 몰려든 모기 탓에 현장은 지옥이었다.
“감독님, 커피 드세요!”
커피차에서 아이스 커피 한 잔을 가져와 김 감독에게 건넨 가을이 자신도 시원한 커피를 쭉 들이켜며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얼추 다 마신 커피를 조명 박스에 올려놓고 가을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조감독님~.”
전직 피아니스트에서 두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역할을 맡은 주연 배우 고은이 특유의 콧소리를 내며 가을에게 다가왔다.
“어디 연락 올 곳 있어요?”
“네?”
“아니이~ 아까부터 계속 휴대폰만 보던데.”
그 말에 가을이 슬그머니 김 감독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김 감독은 남자 배우와 얘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후우……. 내가 너 때문에 동전 노래방 VIP가 됐다.
촬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스태프들과 풀거나, 24시간 동전 노래방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부르며 풀어내던 가을이었다.
평소보다 휴대폰을 더 본 건 맞지만 일에 방해가 될 정도로 보지는 않았건만, 고은은 이런 식으로 김 감독에게 혼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평소 같으면 허허 웃고 넘길 일이었지만 단막극의 꿈이 사라져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가을은 눈에 보이는 고은의 속셈에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어어어 모기!”
가을이 ‘철썩!’ 고은의 팔을 쳤다.
“아야!!!”
“모기예요, 모기. 어어? 또 있다.”
가을이 손을 들어 이번엔 고은의 등을 치자 방금 가을에게 맞은 팔을 매만지던 고은이 움찔거리며 자리를 이동했다.
“아우 모기가~ 너~어무 많네.”
목청을 한번 올려 준 가을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휴대폰을 확인했다.
촬영장에서는 늘 무음으로 해 두는 탓에 혹시라도 전화를 받지 못할까 싶어 가을은 틈이 나는 대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대표에게 전화가 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휴대폰으로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찰싹-
문득 얼굴이 간지러워 가을이 사정없이 이마를 때렸다.
가을의 손에 뭘 죽였는지 알 수 있는 선혈이 낭자했다.
“으이그.”
지나가던 도식이 들고 있던 커피의 종이 띠지를 벗겨 가을의 이마에 눌려 죽어 있는 모기를 툭툭 털어 냈다.
“촬영 반, 모기 새끼 죽이는 게 반이야.”
모기에게 물린 가을의 이마가 붉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우 간지러워.”
가을이 손으로 이마를 긁자 물린 곳이 점점 더 커졌다.
도식 역시 여기저기 물린 곳을 손으로 벅벅 긁다가 달려드는 모기를 향해 휘휘 손을 내저었다.
“끝나고 한잔하기로 했는데. 갈 거지?”
“전 얌전히 퇴근하겠습니다.”
도식에게 붙들리면 새벽까지 마셔야 할 게 뻔했다.
“얌전히 퇴근시켜 줄게. 술 다 마시고 나서.”
“사양할게요.”
가을이 밝은 미소로 거절하며 슬그머니 자리를 벗어났다. 오랜만에 쉬는 황금 같은 휴식을 술에 찌들어 있고 싶지 않았다.
오후 8시 반.
몇 신만 찍으면 오늘 촬영은 끝이었다.
웬일로 기분이 좋은지 배우들과 웃으며 얘기를 하는 김 감독을 보던 가을이 내려 둔 커피를 버리러 커피차로 향했다.
재활용품을 모아 놓는 곳에 커피 컵을 정리하며 가을이 연신 이마를 긁었다.
“전화 오는 거 아니에요?”
지나가던 스태프 말에 가을이 재빨리 휴대폰을 확인했다.
모르는 일반전화였다.
이 시간에 모르는 전화라니. 떠오르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가을이 서둘러 전화를 받으려는 순간.
“정가을!”
김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