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스트라 팀 언제 오는 거야?”
관객석 자리에 있던 가을이 깊은 심호흡을 한 후 무대 위로 올라갔다.
공연 일정이 바뀌는 바람에 오케스트라 팀이 바로 출국을 해야 한다는 얘기를 김 감독에게 전달할 차례였다.
더위로 흘러내리는 땀인지, 앞일이 걱정된 식은땀인지 가을의 티셔츠가 점점 젖어 들었다.
가을이 입술을 한번 꽉 깨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오케스트라 팀이 지금 바로 출국해야 한답니다.”
“뭐??”
김 감독의 목소리에 빠르게 움직이던 스태프들이 동시에 멈춰 섰다.
“미국 공연 일정이 앞당겨지는 바람에,”
“미쳤어?”
더위 때문에 예민해져 있던 김 감독이 들고 있던 대본을 가을에게 집어 던졌다.
툭-
가을의 얼굴을 때리고 대본이 바닥에 떨어지자 스태프들이 저마다 눈치를 보며 얼어붙었다.
“그런 건 미리미리 확인을 했어야지!!!”
오케스트라 팀 일정이 바뀔 걸 어떻게 알고 확인을 한단 말인가.
억지스러운 김 감독의 말에 습관처럼 손을 꽉 움켜쥔 가을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단 말 할 거면 시작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잘못은 일방적으로 출연을 취소한 오케스트라 팀에게 있었는데도, 언제나 그랬듯 김 감독은 애먼 가을을 잡았다.
“내가 이렇게 대충 일하라고 널 다시 조연출에 앉힌 줄 알아? 이제 어쩔 거야? 네가 연주하고 지휘하고 다 할 거야?!!”
가을은 김 감독의 말을 묵묵히 들으며 한쪽으로는 열심히 대안을 생각했다.
오늘 내로 촬영을 끝내지 못하면 김 감독뿐만이 아니라 작가, 제작팀의 질책까지 자신이 받아야 할 게 뻔했다.
“오늘까지 공연장 신 끝내야 하는 거 알아, 몰라.”
“압니다.”
“촬영 딜레이되면, 대관 비용은 네가 낼 거야?”
싸늘한 표정으로 가을을 보던 김 감독이 말을 이었다.
“아니면 제작비 남은 거 대관비 내고, 여기 스태프들 죄다 굶을까? 아니면 임금에서 다 까야 속이 시원하겠어?”
특별출연을 결정하며 대본을 수정한 장면이라 가을은 다른 오케스트라 팀 리스트를 뽑을 경황이 없었다.
숨을 한번 고른 가을이 김 감독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오늘 일정이 되는 다른 오케스트라 팀이 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네가 일을 이따위로 하니까 저쪽에서 만만하게 보고 이러는 거 아냐! 미국 공연? 뭐, 연주 하루 안 들으면 죽기라도 한대?”
가뜩이나 더위 때문에 짜증과 예민함이 겹치자 김 감독의 억지스러운 화는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다.
모든 걸 책임지는 연출가로서 예상치 못한 변수에 화가 날 순 있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언제나 잘못 없는 가을을 잡았다.
많은 조연출들이 김 감독 밑에서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는 이유는 조연출을 감정의 쓰레기통쯤으로 생각하는 이 인성 때문이었다.
열악한 환경과 과도한 업무를 비롯해 김 감독의 갑질과 폭언, 거기다 몇몇 배우들의 갑질까지 끊이질 않았지만 가을은 꿈이 있기에 견뎌 냈다.
“그러니까 왜 어제 확인을 안 해서 이 사달을 만들어!”
“어제 연락했을 때는,”
“예측을 하란 말이야, 예측을!”
함께 일할수록 초능력까지 요구하는 김 감독이었다.
가뜩이나 진한 미간 주름을 더 깊게 찡그리며 김 감독이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촬영 접을까? 이렇게 촬영 접고 니 인생, 내 인생 싹 다 접을까?”
“감독님.”
가을이 뭔가가 떠오른 듯 숨을 한번 고르고 김 감독을 쳐다보았다.
“일단 시간이 되는 다른 오케스트라 팀이 있는지 알아보고 혹시 안 되면 SNS에서 바로 연주할 수 있는 연주자들을 찾아 인원수만 맞추고 오디오를 입히면 어떨까요.”
김 감독이 여전히 가을을 노려보기만 하자 살벌한 분위기에 스태프들은 흘러내리는 땀도 닦지 못하고 눈치만 보았다.
“그때까지 뭐 할까. 술래잡기라도 할까?”
“빨리 알아보겠습니다.”
잡아먹을 듯 가을을 쏘아보던 김 감독이 몸을 돌렸다.
“해결 못 하면, 알아서 해.”
쌩하니 김 감독이 가 버리자 가을이 서둘러 스태프들을 돌아보았다.
“SNS 활발하게 하는 사람?”
몇 명의 스태프들이 가을의 곁으로 다가왔다.
“나랑 권영 씨, 선영 씨, 은숙 씨는 지금 시간 되는 오케스트라 알아보고,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 계정에 바로 악기 연주가 가능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글 좀 올려 줘요. 악기도 있어야 한다는 글도 써 주고.”
가을의 지시에 따라 각자 분주히 휴대폰을 들었다.
가을 역시 휴대폰을 들어 대기실에 있는 의상 팀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조감독님.
“박 팀장님, 얼마 전에 끝난 ‘호텔 바이올린’ 의상 맡았었죠?”
-네.
“그때 오케스트라 역할 했던 배우들이 입던 의상, 그거 제작한 거 맞죠?”
-네. 왜요?
“그 옷들 지금 가져올 수 있어요?”
-지금이요??
“일이 그렇게 됐어요. 바로 좀 알아봐 줘요.”
가을이 전화를 끊고 이번엔 다른 곳으로 빠르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악기를 든 사람들이 의상 팀에서 준비한 옷을 입고 무대에 섰다.
오케스트라 섭외는 실패했지만 다행히 SNS에 글을 올리자마자 연주를 할 수 있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각 파트에 맞는 연주자를 채울 수 있었다.
지휘자는 제일 그럴싸하게 생겼다는 스태프들의 의견을 수렴해 조명감독이 맡았다.
“리허설 들어갈게요!”
가을의 말에 지휘봉을 든 조명감독의 손이 살짝 떨렸다.
“화이팅!”
가을이 조명감독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슬레이트를 쳤다.
한 번도 합을 맞춰 보지 않았음에도 본래 연주를 하던 사람들이 모여서인지 꽤 그럴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다 곧 튀는 악기가 생겼고 듣기만 해도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은 묘한 합주가 계속되었다.
새벽 3시.
무사히 촬영이 끝나고 마지막까지 남아 현장을 점검한 가을이 스태프가 타고 있는 촬영 버스에 올랐다.
맨 앞자리 왼쪽은 김 감독의 자리였지만 일이 있다며 다른 스태프의 차를 타고 이동한 상태였다.
“조감독님 수고하셨어요~!”
“오늘 고생 많았어, 가을 씨.”
여기저기서 들리는 인사에 가을이 피곤함이 짙게 밴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가을이 자신의 지정석인 맨 앞자리 중 한 곳에 앉자 곧 시동이 걸렸다.
연주가 틀렸어도 표정만 그럴듯하게 하라는 가을의 주문에 오케스트라의 촬영은 몇 번의 NG 끝에 무사히 넘어갔다.
하지만 그 뒤, 주연 배우의 독주 부분에서 끝없는 NG가 이어졌다.
금방 온다던 에어컨 AS 기사가 오후가 되어서야 오는 바람에 더위에 지친 배우가 계속해서 NG를 냈다.
스태프들도 점점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 갔다.
가을 때문에 오케스트라 일정이 바뀐 것도, 냉방시설이 고장 난 것도 아닌데 신경이 곤두선 김 감독의 모든 화는 가을에게 이어졌다.
연출가의 말도 안 되는 짜증을 견디는 것도 조연출의 능력이라는 게 김 감독의 생각이었다.
모든 촬영을 무사히 마치자 피로함이 몰려온 가을이 저절로 감기는 눈을 힘겹게 깜빡거렸다.
가을의 옆에 앉은 스태프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휴대폰을 보며 소리 없는 웃음을 내다가 가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감독님도 가실래요?”
스태프의 목소리에 가을이 저절로 감기던 눈을 떴다.
“응? 어딜?”
가을이 스태프 손에 들린 휴대폰을 흘깃 보았다.
단체 메시지를 주고받는 모양인지 빠르게 글들이 올라왔다.
휴대폰을 보며 빛과 같은 속도로 메시지를 보내던 스태프가 눈을 빛내며 가을을 쳐다보았다.
“노래방이요.”
“노래방? 이 시간에?”
다른 차량에 탄 스태프들이 가을을 꼬시라는 지령이라도 내렸는지 스태프가 가을을 향해 반쯤 몸을 돌렸다.
“오늘 스트레스 너무 심했잖아요. 내일 오후 촬영이니까 한 시간만 영혼을 불사르고 가세요.”
“내 영혼은 저~멀리 요단강 건넌지 오래라 불사를 게 없다.”
“그니까 떠났던 영혼 잡아 와야죠.”
스태프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조감독님이 그렇게 랩을 잘하신다면서요?”
스태프의 말에 가을이 ‘커걱-’ 하는 희한한 소리를 냈다.
지금 하는 드라마에 모인 스태프들은 대부분 예전에 작품을 함께한 사람들이었다.
서로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어 촬영이 끝나면 종종 술자리를 갖거나 노래방에 가곤 했다.
특히 노래방은 극도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필수 코스였다.
음치와 박치를 전담하고 있는 가을은 누가 뭐라고 하든 꿋꿋하게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했다.
특히 가을은 랩을 사랑했다.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곡은 없었지만 빠르게 말하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큰 키로 율동에 가까운 춤을 추면서 랩을 하는 가을의 모습은 언제나 스태프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다.
“누가 그래?”
스태프가 휴대폰 화면을 가을에게 보여 주었다.
단체 메시지 창에 ‘랩 하면 조감독’, ‘배틀 오디션 우승각’, ‘랩아일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마성의 랩 실력.’ 등등 가을의 랩에 관한 얘기가 한창이었다.
“이 사람들이 진짜.”
장난 섞인 스태프들의 메시지에 가는 눈을 했던 가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주 정확해.”
“저도 들어 보고 싶어요~.”
“뭐, 고막이 허락해 준다면야.”
“아싸!”
스태프가 단체 메시지 창에 가을이 간다는 글을 남기자 여러 개의 메시지와 환영하는 이모티콘이 보이기 시작했다.
“참, 근데 아까 대본에 맞은 데는 괜찮으세요?”
신들린 듯 휴대폰을 보지도 않고 메시지를 보내던 스태프가 가을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괜찮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대본을 던져요?”
“손 선풍기 안 던진 게 다행이지, 뭐.”
피식 웃은 가을이 무심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신호를 받아 멈춰 선 차창 밖으로 여전히 불을 밝히고 있는 번화가의 거리가 보였다.
두런두런 들려오던 스태프들의 소리가 잦아들다가 이내 버스 안이 고요해졌다.
계속된 강행군에 어느새 잠에 빠진 듯 낮게 코를 고는 소리도 들려왔다.
창밖을 보다가 가을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워낙 힘들고 고된 일이라 남자도 버티기 힘든 게 조연출의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조연출을 남자로 뽑는 일이 많았다.
운 좋게 김 감독의 조연출을 맡았던 날.
설레고 긴장되던 마음은 쏟아지는 김 감독의 업무 지시와 욕설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온갖 종류의 막말과 비상식적인 언행은 물론이고, 개인적인 잔심부름까지 모두 해내야 했다.
예민한 성격 탓에 대본으로 얻어맞은 건 셀 수도 없었다.
그때 당한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망치듯 스태프들이 수없이 바뀌었을 때도 가을은 꿋꿋하게 버텨 냈다.
험난했던 여정은 꿈을 이루고 나면 경험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렇게 버텨 낸 끝에 가을은 내년에 제작되는 단막극 연출자로 내정된 상태였다.
‘STN’에서 주최하는 단막극 공모전에서 수상하는 작품 중 한 작품이 될 예정이었다.
단막극은 방송사 공채 PD들이 연출을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외주 제작사에서 일하는 조연출은 잡기 힘든 기회를, 전부터 가을을 눈여겨봤던 제작팀 CP가 내주었다.
내년이면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드라마 연출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을은 아무리 힘들어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언젠가 네가 꿈을 이루면, 내가 소원을 들어줄게.’
‘무슨 소원이든?’
‘응. 무슨 소원이든.’
연출가의 꿈을 이루면, 선호에게 소원을 빌 생각이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선호가 소원을 들어주러 나타나길.
가을은 기적이 일어나길 바랐다.
그걸 생각하면 이보다 더 한 일도 견딜 수 있는 가을이었다.
* * *
‘STN’ 방송국 회의실 안.
완벽한 라인을 뽐내는 깔끔한 슈트에 단정하게 머리를 넘긴 태준을 필두로 드라마국 고위 간부들이 자리에 모였다.
회의실 통창으로 보이는 쨍한 하늘과 달리 회의실 안 고위 간부들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태준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보고서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여기저기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이잉-
누군가의 휴대폰이 눈치 없이 진동 소리를 내자 미간을 찌푸린 채 슬쩍 고개를 들었던 태준이 다시 보고서로 시선을 돌렸다.
진동의 주인인 제작부 CP가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꺼내 무음으로 돌렸다.
태준이 보고서를 훑어볼 때면 공기가 빠져나간 듯 언제나 숨 막히는 긴장감이 몰려들었다.
회의실에 모인 고위 간부들보다 한참이나 어린 태준이었지만 그에겐 상대를 압도하는, 감히 넘볼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참이나 보고서를 넘겨 보던 태준이 뭔가를 생각하듯 눈썹을 쓸다가 보고서를 덮었다.
타닥- 타닥-
조용한 공간에 태준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치는 소리만 들렸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고위 간부들이 바짝 긴장했다.
판단이 끝난 듯 움직임을 멈춘 태준이 느긋이 팔짱을 끼자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이 태준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단막극.”
나지막한 태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폐지하세요.”